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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최초의 2단계 혁명론 NLPDR노선 김일성주의 정당 통일혁명당 사건 본문
남한 최초의 2단계 혁명론 NLPDR노선 김일성주의 정당 통일혁명당 사건
CIA Bear 허관(許灌) 2026. 5. 8. 17:21
"남한 최초의 2단계 혁명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김일성주의 정당 통일혁명당은 마스-레닌주의 박헌영의 과거 조선공산당(남로당)과 다르게 스탈린주의와 모택동주의를 수용, 발전한 1단계 반미와 반군부 박정희정부 투쟁의 민주주의 혁명(민주세력 연합구축과 민주정부 수립), 2단계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입니다
김일성은 마스 레닌주의자 보다는 스랄린과 모택동주의를 수용한 철저한 공산주의자 스탈린주의자입니다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총사령관은 스탈린이며 아시아의 총사령관은 모택동이었습니다
북한 노동당 김일성주의는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반일 반미 투쟁과 지주(대기업)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입니다
1단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는 반미, 반군부 박정희 세력과 연합 구축으로 민주정부 수립에 목적을 두었고, 2단계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하고 남북연합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지역의 많은 민족주의 진영과 민주세력들이 스탈린과 모택동주의(김일성주의) 2단계 혁명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김일성주의에 가담했습니다 남한지역 김일성주의 정당은 상층부 지도부는 북한 간첩이나 친북인사로 분류할 수 있지만 중간이나 하부조직은 민족주의자나 민주인사(민주화) 세력이 대부분입니다
좌파는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사회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라면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입니다
진보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입장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민주주의(생존권과 국영자본체제, 보호무역 존중) 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보수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입장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민주주의(자유권과 민영자본체제, 자유무역 존중) 세력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국가(자유사회)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정부입니다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 노선 좌파는 입헌군주제를 부정하고 공화국이론(사회주의 공화국)이라면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노선 우파는 입헌군주제를 인정하는 민주국가이론(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좌파 세력 사회주의 국가이론이 몰락하고 우파세력 민주국가이론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 공존(연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 개요
1968년 8월 24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 조직 사건.
남민전 사건(1979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1999년),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2013년) 등과 함께 명확한 실체(지도부)가 있는 대표적인 공안 사건이다.
2. 시대적 배경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파도가 지나간 뒤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나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동하기 시작했다. 세계 전쟁이나 미국의 공격에 대한 위기감이 쌓인 북한 정부는 우선 자체적인 힘을 기르는 데 주력하기로 결정했는데 가장 중요한 건 국방이었다. 1962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회의 전원회의에서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를 주 내용으로 한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은 남한에서의 혁명을 기대했지만 그건 북한이 일방적으로 지원해서 되는 게 아니며 남측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국제적인 반미 혁명세력과 단결하여 범세계적인 반제/반미 전선을 결성하고자 했다. 1964년에 열린 전원회의에서도 이와 같은 방안을 '3대 혁명역량 강화방침'으로 정리했다. 이 방침은 북한의 혁명기지 강화, 남한의 혁명역량 강화, 국제 혁명역량과의 강화를 내세웠으며 이는 북쪽의 '민주기지'를 강화한 뒤 주로 무력에 의지해서 남북통일을 달성하고자 한 한국전쟁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남쪽은 그 자체의 힘에 따라 '남조선혁명'을 이룩해야 함이 강조된 것이다.
3. 경과 및 주요 활동
북한 정부는 남한에서 4.19 혁명이 실패한 주 이유가 바로 공산혁명을 이끄는 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북한이 만든 '남조선혁명론'이 남쪽에 퍼지면서 지하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964년 3월 15일에 남한에서 비밀리에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주요 참가자들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이었다. 이들은 지하신문 <혁명전선>과 대중잡지 <청맥>(주간 : 김질락) 등을 발간했으며, 대학가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됐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해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했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 통일혁명당 기관지 <혁명전선> 중에서”
1964년 3월 15일 비밀리 약속 장소에 모인 <통혁당> 무리들이 <혁명전선>의 창간을 공식 선언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참석자로는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1983년 김정일이 '주체사상에 대하여' 문건을 내기 전까지 김일성주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도 않았고 위의 뉴데일리 보도는 1980년대 후반 NL 계열 출판사 대동에서 발행한 선전용 도서인 <통혁당>에서 인용한 것이므로 위의 통혁당 기관지 창간 관련 기술은 신빙성이 있는 묘사라고 보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대동 출판사에서 나온 <통혁당>은 북에서 만든 선전용 도서를 무단 전제해 출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80년대까지 한국의 문학적 장르로 존재하던 반공 소설과 비슷하게 북의 선전선동일꾼들이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선전선동용 도서에 불과하다. 당연히 과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정확한 인용을 위해서는 대검이 펴낸 <공안사건실록>의 통혁당 부분이나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을 참조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학생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력의 행사 및 참여, 기층민중운동에로의 접근, 또 다른 혁명적 조직과의 결합시도, 무장투쟁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1967년의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 선거에 대한 반대투쟁, 그리고 미국 부통령 험프리 방한 반대투쟁, 사토 일본수상 방한 반대투쟁 등에 통혁당 산하의 학생운동 조직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통혁당 서울시위원회는 자신의 임무 중 "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과 "각지에 무기고의 설정과 무기획득 및 그 비축을 위한 방법 연구" 등을 설정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혁당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해서 조희연은 통혁당의 성원들간에 "무장투쟁이라는 것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볼 때 혁명투쟁의 궁극적 최고의 형태이며, 구체적인 수준에서 볼 때 제3세계 혁명투쟁의 일반적 형태라고 하는 데 공감"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통혁당이 무장투쟁을 실제로 전개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장기적 혹은 단기적 전망으로 사고했을 뿐이라고 파악했다.
통일혁명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19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 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통일혁명당은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노동계급의 전위당임을 자처했다.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 있다. 당강령은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로 규정하였다.
구체적 목표로는 "첫째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철폐와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 둘째 파쇼독재체제의 일소와 사회민주주의의 실현, 세째 민주적 토지개혁과 농.어촌 빈곤 일소, 네째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실현, 다섯째 민주적 노동법령의 실시와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처지 개선, 여섯째 여성의 권익보장과 사회적 지위 향상, 일곱째 민주적 민족문화 창달과 지식인의 생활보장, 여덟째 교육쇄신과 무료교육제 및 장학금제 실지, 아홉째 선진적인 의료보험제 실시와 무상치료제실시, 열번째 자위적 민족군대 창설, 열한번째 자주외교 구현과 반제평화애호국과의 교류, 열두번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성취" 등의 사항을 들고 있다.
<청맥>은 대중잡지로, 그 역할은 민족주체의식과 반미 의식의 선전선동의 무기,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청년, 지식인 결집의 장, 당내 지도핵심 발굴의 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청맥의 논조는 반정부, 반미 노선으로 향했고 반공적인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보안상의 이유로 사회주의를 논평하는 기사도 게재되지 않았다.
통혁당은 "선 진보적 인텔리, 후 기층인자"라는 조직화 방식 아래 조직의 확장을 추진했다. 조직방법은 처음에 포섭 대상자를 모색하되 ①가족, 친지, 동창, 친우, 직장 등 생활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찾아내고 ②출신성분과 가족관계, 학력, 직업, 성품 등을 미리 조사, 가급적이면 특수기관이나 경찰관 등의 가족이 아닌 자를 선정 ③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을 고르고 일단 포섭대상자가 결정된 후엔 부단한 열의로 접촉, 구두교양을 위주로 필요에 따라 문건을 사용하여 조직화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알려졌다.
한편 당시 서울시위원회의 임무는 ①혁명의 대중적 기반 축성 ②당의 조직 강화 ③각종 학술연구 써클의 조직과 당 지도 간부의 양성 ④기초 써클 강화에 의한 당세포 조직의 재편 ... ⑦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 등이었다. 이러한 임무의 달성을 위한 조직화와 관련해 주요 대상은 학생들이었다.
민족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대를 비롯 고대, 연대, 중대, 숙대 등 주요 대학에 조직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민족주의 단계의 교양이 끝난 포섭대상자들이 선정되어 있었다. 그 외 민중부문에 대한 조직화와 관련해 서울대 구농회, 농진회 등 멤버들과 접촉하거나 영등포 지구 하층 청소년의 교양, 덕소의 농민학교 운영, 화남농장, 백운산농장 등에 실무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1)주요 관계자


먼저 통혁당 서울시 위원장이던 김종태는 1946년 대구 10.1 사건 관련 혐의로 상당 기간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둘째형인 김상도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의원비서직에 전념했지만 1956년에는 서울대 문리대에 '청맥전선'이라는 비밀 써클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4월 항쟁 이후 경북노동연합회 지도고문,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고문, 교원노조 등에 개입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태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무렵 전쟁 기간 다양한 형태로 잔존하던 활동가들이 전위 조직을 형성하려는 흐름이 나타났다. 물론 이런 인식 변화는 1961년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회에서 남한의 독자적인 당 건설 노선을 채택한 배경도 있었다.
이후 김종태는 남파된 김수영과 동반 월북했던 김송무와 만나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로 가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으로부터 청년학생과 노동조합 간부를 포섭하고 <청맥>지를 창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통혁당 서울시위원회의 시발점이 되었다.
김종태는 최영도 등을 데리고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갖고 있었다. 다만 김종태의 방북기는 코미디 그 자체였는데 북한에서 금강산 관광을 시켜 주었을 때는 술에 취해서 1935년에 나온 목포의 눈물을 부르다가 반동 노래 부른다고 호텔 직원들에게 신고를 당하기도 했고 북한에서 군수공업단지를 보여주었을 때는 또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하질 않나 남로당 숙청에 대해서도 마구 따지기도 했으며 '김일성은 가짜 아닌가?'라는 얘기를 해서 대남총국과 조직지도부 접대원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남한에서 하던 대로 허리띠를 풀고 곱사등이나 뱀장수 흉내를 내면서 질펀하게 놀았는데 북한에서는 무슨 놈의 혁명가가 저렇게 천박하냐고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민족해방전선을 담당했던 김질락은 김종태의 친조카였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경남매일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지내다가 김종태의 제안으로 청맥을 만들면서부터 통혁당 활동을 개시했다. 김질락은 이문규에 비해 대학 시절 써클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이문규는 대구 지역 부호 집안 출신으로, 대학 시절 서울대 문리대 이념써클인 '신진회'의 핵심인물이며 4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을 비밀리에 지도한 지도부로 알려졌다. 그 역시 <청맥>지 활동을 시작하면서 통혁당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4. 결말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조국해방전선 책임자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됐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판단해 이문규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7~8월 무렵 민족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 등 서울 조직의 지도급들이 체포되었고 호남에선 전라남도위원회위원장 최영도, 정태묵 등이 체포되었다.
암호문건을 토대로 대북(對北) 통신 공작에 착수한 정보당국은 1968년 8월 4일 새벽 북한에서 보내온 A-3 지령문 해독에 성공했다. 북한은 그때까지도 이문규가 체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남한 정보당국은 북한이 이문규에 대해 필사적인 구출 시도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간첩선을 보낸다면 통혁당과 북한과의 연계를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보당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계획(Z작전)에 들어갔다.
1968년 8월 20일, 군·경·정 합동작전을 통해 남한 측은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통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로부터 4일이 지난 1968년 8월 2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한의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한 뒤 합법화하여 반정부 및 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중정은 김종태 등 3명을 포함해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여 73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2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그들 중 절대 다수는 김종태 등의 실체와 북한 연루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 ‘통혁당’이라는 조직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북한에 가서 로동당에 입당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은 15년형,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전향서를 쓴 뒤 1988년에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71년에 체포된 류낙진0] 역시 무기징역이었으나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최영도는 1969년 1월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옥사했다. 북한은 최영도의 죽음에 추도식을 열었으며 부수상 리주연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1969년 7월 10일에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던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북한측은 그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뒤 대규모 추모집회를 열었다. 이후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은 '김종태전기기관차련합기업소'로, 해주사범대학은 '김종태사범대학'으로 바꾸었다. 1969년 11월 6일 이문규가 사형집행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변절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조직이 와해된 뒤에도 통혁당을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줄줄이 발각되었고 1979년에 통혁당 강원도 재건위가 발각된 것을 끝으로 완전 소탕되었다.
한편 북한측의 주장에 따르면 1969년 8월에 당 중앙위원회가 지하에서 조직되었고 1970년 2월에는 당 선언과 강령이 발표되었다. 그해 6월에는 <통일혁명당의 소리>라는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후 통혁당은 1985년에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었고 방송 명칭도 '구국의 소리'로 바꾸었다가 2003년에 방송을 중단했고 2005년에는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어 잔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활동하는 유령단체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통일혁명당 사건이 "미제와 남조선파쑈당국이 애국적 통일혁명당의 일부 성원들을 체포하여 사형을 비롯한 무기징역에 이르기까지의 극형과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또 통혁당 관계자들의 활동을 '김일성혁명역사' 교과서에 '조국통일을 위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이라는 한 개 절로 만들어 통혁당 건설과 최후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교과서는 "통일혁명당은 조선로동당의 붉은 혈통을 이어받아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전위부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1)하위 조직원들에 대한 재심
'박성준'[21]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2022년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2)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재심
2023년 5월 18일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고 17년간 옥고를 치른 박기래가 사후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2025년 5월 29일 같은 사건으로 각각 사형과 징역 10년형을 받았던 진두현과 박석주가 사후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2025년 8월 28일 김태열도 사형 집행 43년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2026년 1월 19일 강을성 또한 사형 집행 50년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5. 여담
핵심 인물들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가 북한에 직접 다녀왔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는 등 북한과의 연계가 분명히 있던 사건이다. 그래서 통일혁명당 사건은 최소한 지도부 3인방에 한해서는 독재정권 시대에 정권이 고문으로 만들어낸 인민혁명당 사건 등의 조작 사건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실체가 있는 사건이다. 21세기의 기준으로도 통일혁명당을 주도한 지도부 3명(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은 엄연한 사법처리의 대상이다. 다만 계속해서 전향 의사를 표시했던 김질락까지 사형을 집행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이 계속 가해졌기 때문에 지도부 3인방을 제외한 나머지 하부조직원들에 대한 수사결과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지하 전위 조직 특성상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3인방 등 핵심 인물들만 북한과의 연계를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냥 반독재민주화 운동으로 알고 참여한 경우가 많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신영복은 출소 이후에 통혁당이나 하부조직으로 발표된 민족해방전선이란 이름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처음 들었으며 북과의 연계는 전혀 몰랐다고 언급했다.
반면 수사결과를 신뢰하는 쪽에서는 엄연한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민주화 운동가로 포장하고 있다고 반발한다.
여기서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그렇게 과거 군부독재 정권을 반통일 정권, 미제의 수족이라고 비난하던 NL 운동가들이 '통혁당은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서 적화통일을 위해서 북이 조직한 지하당'이라는 중앙정보부의 통혁당 사건 수사 발표는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평소 노골적으로 친북, 종북 성향을 보이던 사람들이라서 김일성 수령님의 지도로 만들어진 지하당이라는 독재정권의 발표에 열광하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신영복이나 여타 하부조직원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은 북의 지하당이란 걸 몰랐고 주체사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는데도 이들은 무조건 정보부의 발표만 신뢰하면서 자기들끼리는 통혁당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따른 혁명과업 어쩌구 하면서 찬양 일색이다. 사건의 실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들의 이념의 잣대로만 과거를 재단하는 것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의 일부인 임자도 간첩단이 받은 공작 지령 가운데는 「혁신계통 중간 정당에 침투하라」, 「19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 때는 제1야당 후보를 지원하라」, 「국회의원 선거 때는 극렬적인 야당 인사를 지원하라」, 「출판사를 경영하되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반미-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라」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임자도 간첩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정태묵은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2회에 걸쳐 접촉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에 김대중은 "(정태묵은)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음. 그러나 당시 누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좌익활동을 중단하고 가업인 염전업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은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택돈 신민당 국회의원은 이와 관련 "(김대중이) 정태묵에게 당하려다가 만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발언했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호찌민은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노농평의회(지역평의회)]
1.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a.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b.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2.인민 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소련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명목상 국가원수 소비에트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고 실권자는 소련공산당 지도자 당 서기장과 내각 수장 총리(수상)이다 소련헌법은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를 인정함으로 소련 연방 최고회의(최고 의회)는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고 내각도 소련 공산당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간첩선 검거는 한국 中情의 逆공작이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북한이 1968년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보냈다가 우리 군·경·정(軍警情) 합동작전에 의해 나포됐던 무장공작선은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의 역(逆)공작에 의해 밀파됐었다는 사실이 42년 만에 밝혀졌다.
이날 군·경·정 합동작전에서는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리 군경은 작전 중 2명이 중상을 입었고 2명이 경상을 입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의 전모를 제주도 무장공작선 격침 4일 후인 8월 24일 공식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당시 통혁당 간부들은 ▲민중봉기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揚陸)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越北)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로 침투했다 섬멸된 북한의 무장공작선 탑승 생존 공비들에 대한 기자회견도 같은 날 열렸다. 인민군 소속 이승탁(李承卓)과 김일룡(金一龍)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접선(接線)’이라고만 답했다. 이날 언론에 공개된 이승탁과 김일룡이란 이름은 가명으로 이들의 실명(實名)은 훗날 이관학과 김승환인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 모두 인민군 현역 장교들이었다.
이후 판결문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무장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 공작선으로 김종태 등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Z작전에 대해 현재까지 관련 사료들은 통혁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당국이 간첩선을 섬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무장간첩선은 애초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보낸 A-3 지령(간첩 지령용 방송)을 통혁당 간부들이 보낸 것으로 판단한 북한이 통혁당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밀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의 유인공작(역공작)에 북한이 걸려든 보기 드문 사례다.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도 1960년대에 귀순했던 간첩을 이용한 역공작 사건이었지만 규모면에서 제주도 서귀포 무장간첩선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은 다대포에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려던 간첩선을 격침한 사건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의한 무장공작선 검거작전에 참가했던 군·경·정 관계자들은 대다수 작고(作故)하거나 노환(老患)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극소수의 전직 요원이 작전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밝힌 ‘통혁당 구출시도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작전’(Z작전)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전직 요원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A-3 간첩 지령 이용해 북한軍 유인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통혁당 전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김종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통혁당 내 엘리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문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의 월간지 <청맥사>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 출신이며,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다. 1967년 5월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된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 판단, 이문규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암호문건을 토대로 대북(對北) 통신공작에 착수한 정보당국은 1968년 8월 4일 새벽 북한에서 보내온 A-3 지령문 해독에 성공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체 문건이나 물질적 근거가 될 것을 집에 두지 말 것이며 안전대책을 잘 강구할 것. 만일 우리와 접선이 필요하면 이달 7일이나 11일 오전에 보고할 것. 오는 8월 14일, 15일에 재지시를 받을 것. 건투를 바라겠음.”
북한은 그때까지도 이문규가 체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 정보당국은 지령문과 이문규에 대한 북한의 당적(조국해방전선 책임비서) 비중 등을 종합,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북한이 이문규에 대해 필사적인 구출 시도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이문규에 대한 입북공작 기회를 활용, 공작선을 유인하는 역공작이 가능할 것으로 결론지었다. 만약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간첩선을 보낸다면, 통혁당과 북한과의 연계를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보당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계획(Z작전)에 들어간다.
1968년 8월 7일 오전 10시 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제주시의 한 여관에 있는 ‘조기준’ 앞으로 긴급 비상연락 공중전보를 타전한다. 북한이 비상연락 공중전보를 가로채 보면서 공작원들과의 교신 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정보기관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보내용은 “17일 불광동 110-20 본인 앞 40,800 송금 요망”이란 암호문인데, 해독하면 “피신 중이며 입북하겠으니 긴급시 지시바람, 문규”다.
우리 정보기관의 예상대로 북한 공작기관의 반응이 왔다. 8월 9일 새벽 00시30분, 정보당국은 A-3 통신을 이용한 북한의 답변과 추가 지시 지령문을 입수한다. 이 지령문을 해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고 잘 받았음. 우리의 접선은 19일 밤 12시 제4지점(서귀포)에서 할 것임. 이날 못하면 같은 달 20일이나 21일 같은 시간에 하겠음. 만일 약속일에 못 가면 저녁 7시5분에서 20분 사이에 약속한 노래를 내보내겠음. 접선신호는 동지의 약속대로 하겠음. … 제4지점에서 접선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11일 오전에 보고하기 바람. 친척집 접근을 삼갈 것이며 14, 15일에 추가 지시를 더 내리겠음.”
6·25 이후 最大 對 간첩작전
남한 정보당국이 보낸 암호문에 북한군이 지령으로 반응한 순간이었다. 이를 완전 해독해 작전 성공에 한발 다가선 남한 당국은 다음과 같은 북한의 이문규 접선·탈출 계획을 확보한다.
▲접선일시: 1968년 8월 19일 24시
▲접선장소: 제주도 서귀포 서남방 수어동 해안절벽
▲연기신호: 약속한 노래 방송(조선팔경가, 유격대 행진곡)
▲접선신호: 돌을 ‘딱딱딱’ 세 번 두드린다
8월 12일 서울 모처에서 정부 내 대(對)간첩 관련기관 합동회의가 열렸다. 정보기관, 합참 및 각 국 정보참모부장, 경찰 관계자 등 핵심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공작을 통해 적을 유인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 방안이 논의됐다. 당국은 이어 다음 날인 13일 각 군 작전 실무자회의를 거쳐 공식 작전계획, 일명 ‘Z작전’을 최종 수립했다.
8월 14일 새벽 00시 “접선시간을 익일 오후 10시로 변경한다”는 북한의 긴급 지령문이 재도착했다. 이 지령문을 통해 관계 당국은 재남(在南) 고정간첩 이문규의 입북을 위한 북한의 무장간첩선 남파공작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육·해·공군, 해병대, 경찰 특수부대 등으로 구성된 통합부대 작전요원들은 서귀포 새섬 일대에 선원, 주민, 피서객 등으로 위장 매복했다. 이문규로 위장한 요원이 신호를 보내 그를 데려갈 안내원이 완전 상륙하면 일제히 공격할 계획이었다. 작전 병력 대부분은 당시 우리 군이 도입한 지 얼마 안된 M-16소총으로 무장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전 참전병사들도 요원으로 선발해 작전에 참여시켰다.
Z작전 당일 육군은 57·75·81mm 포로 무장한 최정예 기동타격대를 보냈다. 해군은 구축함 2척과 경비정 10척을 동원했고, 공군은 전투기(F5A) 3개 편대와 C-46 수송기 2대를 동원했다. 해병대 특수전 타격대와 경찰 대테러 특공대까지 총 500여 명의 최고 정예요원이 작전에 투입됐다. 6·25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 간첩작전 계획이었다.
8월 20일 밤 10시30분, 밤은 깊고 고요했다.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은 숨을 죽인 채 제주도 서귀포 해상 700m 부근의 고요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장공작선이 침투할 길목이었다. 어둠 속 저 멀리 검은 물체의 움직임이 보였다. 북한이 밀파한 무장공작선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으로 81mm 곡사포와 기관단총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최고속도 35노트의 공작선(75t·16인승)은 서귀포 앞바다 토끼섬과 범섬 사이를 은밀하지만 대담하게 침투해 오고 있었다.
작전 개시는 서울 종로경찰서 소속 한 경찰요원의 몫이었다. 배포가 큰 그는 이문규로 위장해 절벽 밑 바위에 숨어 있었다. 공작선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지령문을 통해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돌을 세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돌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멀리 날아갔다. 작전에 참가한 요원들의 눈이 일제히 그 소리를 좇았다. 순간 멀리 공작선에서 검은 고무보트 1척이 내려졌다. 그 고무보트로 두 명의 공작원이 승선했다. 어둠 속에서 2명의 무장공비는 은밀히 노를 저어 접선장소인 서귀포 서남방에 있는 속칭 ‘황우리절벽’으로 침투했다. 조금의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두 무장공비는 높이 20m의 절벽을 기어올랐다. 나중에 밝혀진 두 무장공비의 이름은 이동환(당시 26세)과 정창룡(당시 28세). 그들은 이문규 밀입북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14명 중 12명 사살, 2명 생포

“탕!”
무장공작선 발견 15분여가 지난 10시45분, 한 발의 조명탄이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아군이 쏜 조명탄에 어둡던 서귀포 해변이 낮처럼 환해졌다. 무장한 두 공비는 우리 측 요원들을 향해 총을 쏘며 도주했다. 아군은 투항 권유를 한 후 일제히 두 무장공비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도주 중 총격을 당한 이동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정창룡은 인근 토굴로 도주했다.
같은 시각 해변 멀리서 육지 쪽 동정을 살피던 북한의 무장공작선은 조명탄이 터지자마자 35노트 최고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해상에 이미 포진해 있던 우리 군함과 경비정은 곧바로 공작선 추격에 나섰다. 요란한 총성과 포성(砲聲)이 서귀포 앞바다를 갈랐다. 장시간 도주한 공작선은 서귀포 남동쪽 30마일 해상까지 진출했지만, 결국 아군의 공격을 받고 기관실이 격파돼 나포됐다.
고무보트를 이용해 해안가로 상륙한 두 명을 제외하고 무장공작선에 승선 중이던 12명 중 10명은 우리 측과 교전 중 선내(船內)에서 사망했다. 바다로 뛰어든 2명(이관학, 김승환)은 아군 함정에 생포됐다. 이들은 모두 개인별로 기관총 및 권총 각 1정과 수류탄 3발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한편 해안 절벽 중턱의 토굴로 숨어들었던 정창룡은 계속 아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서귀포경찰서 소속 정종배(丁鍾培·당시 26세) 순경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정창룡은 수류탄까지 투척하며 저항했지만, 우리 측 요원들의 집중사격을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창룡 역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때아닌 총소리와 포소리에 놀란 서귀포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경찰은 ‘대간첩 훈련 중’이라며 안심시켰고, 대부분의 주민은 이를 믿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적을 섬멸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한 Z작전은 완벽한 성과를 거뒀다. 이 작전을 통해 당국은 적 공작선 나포 외에도 기관단총 14정, 81mm 곡사포 1문, 12.7mm 고사총 12정, 레이더 1대, 고무보트 1척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對共) 요원으로 작전에 참가했던 L씨는 “42년 전인 1968년에 통혁당 사건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못했다면 국가안위에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면서,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진다는 순수한 혈기로 참가했던 작전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사적인 사건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그때 그 해안가 절벽’을 찾아가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고 한다. “우리는 영원한 그림자”라면서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던 그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부인과 함께 운동을 하고,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등 신체·정신적으로 건강한 조건을 유지하고 있었다. 42년 전 사건에 대한 그의 기억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정확했으며, <월간조선>이 최근 입수한 관련 자료 내용과도 대부분 일치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성공한 工作은 밝혀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 사실이 공개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래 ‘성공한 공작은 밝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귀포 간첩선 유인공작은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공작 진행 상황은 물론 종료 후에도 차후를 위해 보호할 필요가 있어 작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고, 간첩통신 방식도 완전히 바뀌어서 공개해도 작전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무장공작선 침투 전 단계에서 체포한 통혁당 간첩은 정확하게 누구였습니까.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 대부분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이미 무장공작선 침투 전에 체포, 구속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의 압수물품과 개별 수사를 통해 간첩선 유인공작이 가능했는데, 특히 이문규의 집에서 발견된 난수표 등 통신문건이 암호 해독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최초 누구를 통해 통혁당 전체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까.
“통혁당 사건은 1968년 7월에 적발된 임자도 간첩단(통일혁명당 전남위원회)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간첩 정태묵이 핵심 주범으로, 방북 후 공작 교육과 함께 막대한 공작금을 받고 남파됐죠. 그때 정태묵에게 임자도 거소를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를 봐주던 동생 정태상이 공작금 분배 문제로 형과 다투게 됐고, 이 과정에서 화가 난 정태상의 처(妻)가 수사기관에 신고하면서 통혁당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됐습니다.”
2000년에 출간된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음, 김영사 발행)에도 북한 김정일(金正日)이 통혁당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정태묵, 정태상 두 형제의 이름을 거론한 대목이 있다. 다음은 그 부분을 간추린 내용이다.
<1975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북한에서는 대남공작을 담당한 모든 부서의 구성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화회의가 10일 동안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는 해방 후 30여 년간 누적된 대남공작의 모든 문제점과 착오 등이 폭로됐다. 11월 3일 총화회의가 종결되는 날에는 김정일이 참석해 회의의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은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가며 대남공작의 오류들을 지적했다. 그는 대남공작 사상 가장 큰 손실이 1958년에 발생한 ‘진보당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의 두 번째 큰 손실로 1968년의 통혁당 사건을 거론했다. 그는 김종태, 최영도, 정태묵 등이 관련된 ‘통일혁명당사건’이 한 사람을 잘못 처리함으로써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정태묵의 동생 정태상이 입북해 있을 당시 정태상의 부인은 정태묵에게 남편을 찾아내라고 난리를 쳤다. 정태묵은 큰일이 날 것 같다고 북으로 무전으로 보고했고, 북측은 정태상을 내려보냈다. 내려온 정태상은 형과 공작금을 가지고 싸움이 붙었고, 결국 부인의 친척 검사에게 밀고해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해 김정일은 “정태상을 내려보낼 게 아니라 정 다급했으면 그의 부인을 데려왔으면 되지 않았느냐? 왜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내려보내 모든 조직을 망쳐버렸는가”라고 질책했다.>
L씨의 말대로 남으로 내려온 정태상은 공작금 문제로 형인 정태묵과 다투게 됐고, 정태묵에게 화가 나 있던 정태상의 부인이 정태묵을 밀고함으로써 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곁에서 본 김정일>은 저자가 전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과의 대담을 적은 책이다. 출생비밀과 성장과정, 사생활, 지도력 등 김정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신경완은 1980년대 초 제3국으로 망명했다가 한국으로 입국한 후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사망할 때까지 ‘비공개 귀순자’였던 신씨는 1945년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조선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대남사업부서의 부부장을 지냈다고 한다. 제3국 망명 때까지 30년 넘게 노동당 중앙당에서 근무한 북한 현대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L씨와의 대화다.
―통혁당 사건 주요 관련자들은 이후 어떤 조치에 취해졌습니까.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와 체포된 북한군 장교 2명(이관학, 김승환)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습니다. 신영복(申榮福·現 성공회대 석좌교수)은 1969년 1월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나, 1970년 3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년 수감 후 1988년 8월 15일 가석방 출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L씨에 따르면, 통혁당 하부선이었던 이진영과 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다가 남한에서 통혁당 사건이 노출되면서 귀환하지 않았다. 임자도 사건과도 관련된 최영도는 1969년 1월 2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수감 도중 병사(病死)했고, 정태묵과 윤상수는 모두 사형이 집행됐다.
左翼의 통혁당 再建 시도

―사형 선고 후 전향해 <주암산>이란 제목의 옥중수기까지 작성한 김질락이 사형 집행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87년 KAL기 폭파사건처럼 범인을 ‘살아 있는 증거’로 남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시대적 배경이 다릅니다. 1968년 당시는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고, 1년에 수차례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남한 내에서도 통혁당 재건위(委)와 같은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죠. 북한의 적화통일이라는 대남노선에 따라 지하당 구축이 계속 시도되는 등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간첩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8년 통혁당 관련자들이 일망타진된 이후에도 좌익(左翼)단체들의 통혁당 재건공작은 계속 시도됐다. 1969년 9월 남파간첩 임종영(가명) 등 12명이 적발된 ‘경남지구 지하당 사건’, 1969년 10월 8일 북한노동당 소속 간첩망 전북조직책 진락현 등 10명이 체포된 ‘전북지구 지하당 사건’ 등 1979년까지 당국에 적발된 사례만 최소 9건이다. 그만큼 남한 통혁당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컸다는 증거다. 다음은 그 사례 중 일부다.
▲1969년 10월 16일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 북한 무장간첩 한영식 등 19명이 서울대, 고려대 학생간부를 포섭해 개헌반대 학생혁명 토대 마련 및 통혁당 재건 공작.
▲1971년 5월 14일 호남통혁당 재건간첩사건: 남파간첩 류락진 등 11명이 북한의 지령으로 당 호남지부 구성 및 도·시 단위 지하당 조직해 혁신계 정당 침투로 적화통일 혁명이론 유도.
▲1971년 9월 17일 통혁당 사회혼란사건: 북한 간첩 전병모(全炳謀) 등 17명이 7개 조직망을 구성, 북한 대남사업총책 김중린(金仲麟)의 직접 지령 아래 학원, 노동자, 혁신계 사회인사를 통해 합법적 정당 창설을 기도.
▲1971년 10월 12일 통혁당 재건 3개망 간첩단 사건: 유종인(柳種寅) 등 10명이 3개 조직망을 구성해 연세대 내부 지하당을 구축하고 요인암살을 시도하는 등 통혁당 재건 시도.
▲1972년 4월 11일 지하통혁당 조직 거물 간첩사건: 유위하(柳渭厦) 등 32명이 포섭자를 대동해 월북하고 지하조직을 확대하는 등 통혁당 재건 획책.
▲1974년 2월 울릉도 거점 지하당 공작사건: 1982년부터 13년 동안 전용관, 김용득 등이 북한 간첩에 포섭돼 공작금 3400만원을 수령, 지하당 재건을 기도하다가 검거. 사건이 폭로되자 북한은 이들 간첩을 ‘남한 내 통혁당원’이라고 모략함.
▲1975년 11월 22일 학원간첩침투사건: 북한노동당원인 위장 유학생 김옥자(金玉子·부산대) 등 21명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학원침투, 통혁당 지도부를 학원에 구성하고 지하망을 조직해 민주화·자유화란 구실 아래 소요를 일으켜 사회불안을 유발.
▲1979년 8월 삼척고첩단 사건: 6·25전쟁 당시 월북한 간첩 진현식 등 9명이 삼척에서 강원도 통혁당 지도위를 결성하다가 검거.
한명숙·박성준 부부와 통혁당

1968년 통혁당 사건 후 관련 인사들은 북한에서 영웅이 됐다. 1969년 1월 25일 김종태와 이문규의 사형이 확정된 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두 사람을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릴 정도였다. 특히 김종태는 사형 집행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하사’받았다. 1969년 7월 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까지 채택했고, 다음 날인 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추도기간을 가졌다.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은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은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명됐다. 평양 시내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생겼다. 이문규도 사형 후 북한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고 전향한 김질락은 북한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간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영복씨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명숙(韓明淑) 전(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朴聖焌)씨는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돼 당 소조책(小組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처 한명숙과 박경호(朴璟鎬), 김국주(金國柱) 등을 당 소조로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소조란 북한의 지하당에서 가장 최소 조직 ‘세포(당원 3명)’ 3개가 모여 결성된 조직을 뜻한다. 소조책은 소조와 세포를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서클 회원들을 통혁당 당원으로 포섭한 박성준씨를 당 간부인 소조책으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와 남편 박 교수 모두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2006년 3월 부인이 총리에 지명된 후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사건의 일부는 사실이나,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 본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2007년 8월 한 전 총리와 박 교수가 함께 출판한 저서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은 이전의 주장과 달랐음이 <월간조선> 2006년 5월호 취재 결과 밝혀졌다. 당시 인용된 계간(季刊) <새길이야기(3호·2001년 발행)>는 박성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직접 번역해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성준 교수의 엇갈리는 증언
박성준 교수의 당시 혐의에 대해 대공요원 출신 L씨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통혁당의 핵심 인물인 신영복의 법원 선고결과(1심 사형, 2심 무기징역)만 봐도 그가 얼마나 충실한 핵심 인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포섭돼 ‘기독교 경제복지회’를 이끈 박성준이 ‘책 몇 권 빌려 봤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는 조직의 허리 역할인 당 소조책으로 활동하며 말단 조직원들을 이끌었습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법원에서 15년형이란 중형을 선고하지 않았겠죠.”
박 교수는 2006년 3월 자신의 이력에 논란이 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임기 이후에 개인 자격으로 통혁당 사건의 재심(再審)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전 총리가 임기를 마친 지 3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박 교수가 재심을 청구했다는 언론보도는 없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좌파 인사들이 활동했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 과거사위에서도 “주모자들에 대한 혐의가 분명한 사건”이란 이유로 통혁당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엇갈리게 증언했다. 통혁당 사건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중 대한통운 사원으로 재직하다 폭격으로 아내, 장남과 함께 동시 사망한 것으로 진술돼 있다. 박 교수가 부모와 형을 전쟁 중 폭격으로 사별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 교수의 조부(祖父)가 1951년 11월 삼천포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가 호주 상속을 했다. 그리고 박 교수의 사촌동생 중 한 명은 박 교수의 아버지에 대해 “6·25전쟁 당시 인민위원으로 친북좌익 활동을 하다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후 가족과의 사별 경위를 다르게 설명한다. 2003년 한 강연에서 박 교수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당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됐고, 6·25전쟁 중 월북, 이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박 교수 가족의 정확한 생존여부는 뜻밖의 경로를 통해 밝혀졌다. 2006년 5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생사확인 과정에서 북한에 살던 박 교수의 누나가 남한 가족과의 상봉을 신청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한 한명숙 부부의 在北 가족

<월간조선>이 최근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를 통해 입수한 북한 측 생사확인신청서에 따르면, 박 교수 누나의 이름은 박려아다. 2006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 당시 나이는 71세로 자신의 출생지를 경남 사천군 삼천포읍 선구리로 기재했다. 가족과 헤어진 시기는 1950년 8월이며, 아버지 박상묵은 1950년 사망, 어머니 구무선은 1982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가 찾는 대상은 박성준 교수 등 가족과 친척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상봉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공개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 참가자 명단에 박 교수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족은 월북, 자신은 간첩 전력이 있는 박 교수가 자신의 부인이 막 총리로 임명된 상황에서 상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 측은 “북한의 가족이 생사확인 요청을 하더라도 남한의 가족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상봉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만약 박 교수가 상봉 행사에 참석했더라면, 총리 시(媤)가족의 좌익·월북전력 논란이 야기돼 파문이 확산됐을 것이다. 경찰에 몸담았던 전직 대공요원은 2006년 한명숙 총리 임명 직후 북한의 가족이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을 한 것에 대해 “대남공작 전술 차원에서 북한이 박려아에게 상봉신청을 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관계자의 전언이다.
“북한은 통혁당 당원이었던 박성준 교수에 대한 재북(在北)가족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박 교수의 활용 가능성을 알아보고 나아가 그의 부인인 총리를 친북화시켜 정부 차원에서 대북 지원 등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을 것이다. 만약 상봉이 성사돼 가족이 만나는 자리에 한 총리까지 나타난다면, 언론보도 후 남한 보수층이 한 총리의 친북 사상을 비판하는 등 남남갈등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한이 의도하는 사회혼란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북한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없었을 것이다.”
통혁당 사건은 국내 용공(容共)세력의 조직적 간첩 활동을 보여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역사적 증거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10월, 과거사기본법 제정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좌파단체는 통혁당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괴로부터 남파돼 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 공산주의 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야릇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 아직도 북괴를 병적으로 동경하고 있는 전 남로당원들, 그리고 북괴라면 무조건 두려운 존재로만 여기고 유언비어에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사사로운 이욕 때문에 눈이 멀어 대한민국을 함부로 비방,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 보잘것없는 글이 그들로 하여금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나는 붓을 들었다.”
통혁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사형당한 김질락이 전향 후 옥중수기에 쓴 머리말 중 일부다. 40여 년 전 사형수가 쓴 고백록을 지금도 귀담아들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 통혁당 사건이란? 1960년대 최대 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남파간첩에게 포섭된 김종태(金鍾泰)가 네 차례 북한을 왕래하며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아 국내에 잠입, 통혁당을 만들어 학원, 노동, 종교 등 서클 형태의 소(小)조직과 서울시내에 여러 개의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선전·선동 활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적발된 사건으로 1960년대 최대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서울시당 책임자 김종태,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 김질락,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장 최영도, 〈청맥사〉 편집장 이문규(李文奎) 등 총 158명이 검거됐고 73명이 송치돼 50명이 구속됐다. 김종태가 이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자 북한은 군중대회 등 대대적인 추도식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은 1994년에도 간첩을 보내 김종태의 처 등 유족의 소재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북한에서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 1976년 9월 귀순한 김용규(金用珪)씨의 통혁당 관련 증언이다. 그는 북한 노동당의 지시로 통혁당 재건계획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이다.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생질(甥姪)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했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임자도 간첩단 사건으로 1968년 7월에 검거됨)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정(正)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 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상을 내세워 김종태를 포섭하기로 했다. 반(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김종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密入北)한 김종태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김종태는 김질락, 이문규, 이진영, 임진영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한편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등의 단체 등을 조직, 운영하면서 반정부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8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이 적발됨으로써 통혁당을 적화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던 북한의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나는 1973년 7월 남파됐을 때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포섭대상은 과거 김종태와 연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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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잡지(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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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출생: 1925년 1월 16일
황해도 신천군
실종:1979년 10월 7일 ~ 8일 (당시 54세)
프랑스 일드프랑스추정
본관:김해 김씨
호:봉산(鳳山) · 산남(山南)
최종계급:준장
지휘: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중앙정보부 부장
주요 참전:한국 전쟁
학력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
1950년 육군보병학교 수료
1951년 육군공병학교 수료
1951년 육군포병학교 졸업
1953년 육군대학 졸업
1963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1967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명예 박사 학위
1969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1969년 경희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1973년 중국문화대학 명예철학 박사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은 김종필 전국무충리와 육군사관학교 8기생이며, 김해 김씨 친족으로 박정희전대통령 인맥보다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인맥으로 알려져 왔다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의 업적은 구철책선 구축과 남한 내부 김일성주의 무장세력 통일혁명당 제거 등입니다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은 강한 반공과 안보를 주도하며 남방 한계선을 따라 철책을 설치하는 휴전선 봉쇄작전을 주도하여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차단, 육지로 월북자 차단, 남북 경계의 명확화그리고 주한미군 전방 기지 후방이전, 한국군 병력감축에 기여했습니다
통일혁명당 제거는 북한정부의 대남정책 김일성주의는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을 차단하고 제거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공헌했습니다
북한 노동당 김일성주의는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반일 반미 투쟁과 지주(대기업)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입니다
1단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는 반미, 반군부 박정희 세력과 연합 구축으로 민주정부 수립에 목적을 두었고, 2단계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하고 남북연합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지역의 많은 민족주의 진영과 민주세력들이 스탈린과 모택동주의(김일성주의) 2단계 혁명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김일성주의에 가담했습니다 남한지역 김일성주의 정당은 상층부 지도부는 북한 간첩이나 친북인사로 분류할 수 있지만 중간이나 하부조직은 민족주의자나 민주인사(민주화) 세력이 대부분입니다
좌파는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사회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라면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입니다
전두환정부 때 남북 군사분계선(MDL)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설치된 이중 철책. GOP(일반전초) 철책선 구축과 도로망 구축으로 안보와 자유 민주주의 수호 기반으로 개혁개방정책 자유화 민주화 조치를 추진할 수 있었고 올림픽 유치와 주한미군 전방지역에서 철수 등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군 병력 감축과 주한 미군 병력 감축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GOP(일반전초) 철책선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따라 설치된 이중 철책으로, 24시간 감시·감지·통제 시스템인 '과학화 경계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감지 센서가 포함된 광망(net)과 감시 카메라가 이상 움직임을 포착하며, 2026년 이후 AI, 드론 등 첨단 기술을 도입해 병력 감축에 따른 경계 공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진화 중입니다
반제민족민주전선(한민전) 이론 서적 "애국시대(돌아보는 얼굴)"
반제민족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이론 서적이면서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활동가들의 이론 서적 중 한 권이 "애국시대(돌아보는 얼굴)"이다 "애국시대"는 조해문 저자로 대동출판사에서 1989년대 출판한 책자로 북한 최승칠 저자가 출판한 "돌아보는 얼굴" 책자입니다 돌아보는 얼굴(애국시대)은 통일혁명당 사건을 미화하여 소설화하여 남한 지식인이나 학생 그리고 노동자, 농민층들에게 김일성주의 NLPDR 정당 노동당 건설을 추진할 수 있게 이론화 북한 대남공작물 서적입니다



*돌아보는 얼굴. 저자-최승칠, 북한 소설책
통일혁명당 사건을 다룬 소설로 NLPDR의 수령관이 잘 드러나 있으며 남한지역에서 김일성주의자 활동상을 묘사하여 반미인민전쟁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사상을 고취하고 있다
*애국시대(상,하). 저자-조해문(가명), 대동출판사. 북한 소설책 "돌아보는 얼굴" 을 남한 사람을 이름으로 출판하여 "애국시대(상,하)"로 발간한 책자
1.내용---통일혁명당 사건 소설화 한 책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여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김일성주의로 무장한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결성한 단체를 통일혁명당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중앙정보국 차장 살해등 만행도 다루도 있음
(1)주인공--장준호
(2)등장인물--남한 중앙정보국와 북한 남파공작원 그리고 미국 CIA, 고정간첩등
(3)통일혁명당 분포도---경북과 전남 축으로 건설
(4)발견과 포착---불이야
장준호는 비오는 날 죽는다(햇빛이 사라진 뜻), 일성(日成)과 우남(雩南)으로 암시
2.사상----김일성주의(NLPDR)
(1)친북세력 육성과정
남한정부 비판서적 권유--->북한 역사교과서나 항일투쟁책자 학습---->북한 소설책을 남한 소설책으로 둔갑한 책들 권유---->김일성 책자 학습---->북한 노동당 이론서 제공
(2)김일성주의 비판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교육 방법
-서방교육 책자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책자로 교육
-김영삼전대통령이나 김대중전대통령 일생이나 관련 책자 공부
-경제학이나 미국 독일 영국등 헌법이나 법 관련 자료 공부
-공개적으로 김일성 항일투쟁 관련 자료 토론과 비판
- 중국 공산당이나 러시아 정부 자료 해방전후나 한국전쟁 전후 공부와 남북통일 방법상 문제점 고찰
-남한 독재정부 폭압한 고문이나 만행등 공부하면서 북한인권운동 공부
- 중국 사회정부와 러시아 자유민주정부 공부 필요
-남한지역 반인권적인 사회악법 철폐 필요(유엔이나 미국등 서방정부 조언 중시해야 함)
3.민족해방(NL)그룹 기본서
테러와 암살등을 인정한 책자
4.비판
공산주의 반대 자본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월북자나 남한지역 NLPDR 조직원 반제민족민주전선(한민전) 조직원들은 장준호처럼 김일성주의자 두목이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애국시대 소설책 주인공 장준호를 예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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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민족민주전선(한민전) 이론 서적 "애국시대(돌아보는 얼굴)"
반제민족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이론 서적이면서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활동가들의 이론 서적 중 한 권이 "애국시대(돌아보는 얼굴)"이다 "애국시대"는 조해문 저자로 대동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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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윤기, 『봄우뢰』(원저: 총서 『불멸의 역사』, 북한) 주요 자료
1.석윤기, 『봄우뢰』 상,하, 힘, 1989(원저: 총서 『불멸의 역사』, 북한, 1984)
봄우뢰는1930년대 초 반일민족 해방운동의 극적인 형상화하여 공산주의자 북한 김일성 전주석을 미화한 소설책이다 남한 진보단체들이나 학생들이 이 소설을 탐독하여 김일성주의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 봄우뢰는 김일성전주석 1930년대 항일투쟁을 신격화하여 불멸의 역사로 쓴 책이다
남한지역 친북세력 특히 빈민층이나 농민, 노동자층이 많이 탐독하고 있다
| 남한 도서출판 힘이 출판하여 판매가격 5000원으로 판매하고 있다 남한사람이 이 책자를 읽게 되면 친북인사가 될 수 있으므로 김일성 전주석에 비판서적을 읽어야 한다 봄우뢰는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불멸역사 주제로 품성위주로 쓴 책으로 주의가 필요하다 남한지역 친북세력 중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요원들은 대부분 "봄우뢰나 애국시대" 책자를 필수적으로 탐독하여 행동화 하고 있다 |

| *봄우뢰(남한:봄우레)의 뜻
봄철에 치는 우레, 역사적 사건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朝鮮이나 日成으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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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북 소설가 석윤기(1929. 10. 22, 경북 달성~1989. 4. 28)
경북 달성 동촌면의 빈농에서 태어나 북간도 이민을 체험했으며 해방 직전 귀국하여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46년 시 〈출항〉을 지방잡지에 발표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다 학비난으로 중퇴하고 〈예술평론〉지 기자로 재직했다. 1950년 6월 전쟁 중에 의용군으로 월북한 뒤 1956년 첫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으로 등단했다. 1960년 중편 〈전사들〉을 발표했다. 1964~66년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작 장편소설 〈시대의 탄생〉을 써서 문명을 떨쳤다. 1980년 2월 〈노동신문〉에 〈주체형의 인간형〉을 발표했고, 1982년 4월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85년 9월에는 조선작가동맹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항일혁명연극인 〈피바다〉 등을 소설로 정착시킨 집단창작팀인 4·15문학창작단 단장을 지냈다. 1986년 9월 조선작가동맹 위원장,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2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 등을 지냈다. 이러한 공로로 1988년 5월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김일성상 계관인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 단편 〈행복〉을 비롯해 장편 〈고난의 행군〉·〈두만강 지구〉·〈대지는 푸르다〉·〈시대의 탄생〉·〈무성하는 해바라기들〉·〈봄우레〉 등이 있다
남한 반미운동가는 대부분 NLPDR 김일성 책자 탐독

Bird's Eye&Guide Ear
남한 반미운동가 대부분은 친북 김일성주의자들이다
반미사상 교양서는 대부분 중국 공산당보다 북한 노동당 김일성주의 책자들이다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 입장에서 민족해방투쟁이 중국 공산당은 항일운동이고 북한 노동당은 반미운동이다
남한 내부 최초 김일성주의 단체는 1960년대 결성한 통일혁명당이다
통일혁명당이 김일성주의 노선 반미단체이다
북한은 통일혁명당을 198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편했다
통일혁명당 주제 소설책 "애국시대(조해문 지음)"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북한도 1970년대 제2공화국 사회주의 헌법부터 항일투쟁보다는 반미투쟁으로 개편하고 김일성, 김정일노선 반미국가 주체사상(자주노선)을 표방했다
김정일의 주체사상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노선 반미투쟁이다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 민족해방운동 반미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한 사람이 김정일이다
김정일 세력이 국제적 반미세력이다
반미책자를 버려야 친미 친서방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
반미는 국가사회주의자나 군국주의 세력이 될 수 있으며 공산주의 무장세력이 될 수 있다 반미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내부 군국주의 무장세력을 지지하는 국가사회주의 세력(공산반군)이 될 수 있다
"독일정부 통일정책: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으로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공화국(자유사회 선진국)이다
1단계-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반공산주의)
자본주의 3대원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시장경쟁원리등
2단계-민주화 정책(민주주의=반국가사회주의)
민주연합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공동정부 수립(통일정부)"
국제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보고 반미투쟁가 또는 반미 테러지원자(테러원조자)로 지칭해왔다
이말은 김일성, 김정일과 손을 잡은 사람이 반미성향 인사라는 의미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남측 입장에서 추진할때는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입장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북한 김일성, 김정일 입장에서 추진할때는
반미구국전선(김일성주의) 입장이다

김일성주의 눈 세뇌 일제시대 공산주의 운동 김일성 책자 "봄우뢰"
좌파 민족주의 책자 탐독과 모임결성->NLPDR과 김일성 책자 학습(주사파 모임)-->북한정부 대남공작부 의식화 기능기(뇌 세뇌기)로 검증과 간첩교육-->납치,월북-->반미무장단체 결성과 북한정부 대남 간첩활동.
북한정부 대남공작부는 뇌 세뇌기(의식화 기능기)로 남한 사람 납치대상을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로 규정해오고 있다
북한정부 대남공작부가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를 뇌 세뇌기로 검증을 할때 북한 김정은 정부를 찬양하고 김일성을 신격화, 우상화 할 수준이 돼야 납치, 월북 대상자로 선발한다[남한정부 내부 김일성주의 단체-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반미단체)]
-1990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설치(반미청년회 등 반미단체 통합)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김일성주의)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새세대(김정일주의=주체사상)로 지하신문 변경
1986년에는 강철서신 등에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영환등 강철서신(반제동맹)-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새세대(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
-1991년 12월 김정일 노동당 군사부위원장이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김정일 북한 권력 장악)
1984년 5월 18일 김정일 직접 쓴 논설《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발표했다
-김정일 우상화 벽보 사진이 북한 곳곳에 등장
-1992년 11월 미국 민주당 클린턴 후보 대통령 당선과 민주당 정부 등장
-1993년 3월 김영삼정부 출범과 핵무기 보유설, 북폭등장 그리고 남한 한민전 서울대표부 1995년 해방 50주년 남북통일 결정적 시기 공식화 (반미자주정부와 전쟁론)
-1994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분열[김대중-찬성파, 반미단체-반대파]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 사망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반미 전쟁파 민혁당 와해와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선실 사망)
1998년 9월 5일 북한 제3공화국수립-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반제민족민주전선
반제민전은 대남공작부서인 통일전선부 소속으로 한국 내 지하 조직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반국가 단체, 이적단체로 분류돼있다. 반제민전은 한국 내 중대사건이나 남북관계 현안이 발생할 경우 담화와 기자회견, 선언문 등으로 북한 입장을 대변한다.
반제민전 전신은 1964년 결성된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로 알려졌다. 이후 통일혁명당(통혁당),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거쳐 2005년 현재 이름을 달았다.
-남한 내부 친북 김정은세력은 어떤 인물입니까?
재한조선인총련합회[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 재한총련]이란
한국 내부 북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주의)를 지지하는 동포들이 결성한 단체가 반제민전 중앙위원회(재한총련)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 는 지하조직으로 실질적 친북단체이며 명목상(의례적) 친북 합법조직은 범민련(범청학련)이나 친북조직 내부 NLPDR계열 단체들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주의)를 지지하고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기구[ 통일전선부 산하기관인 제225부(구 대외연락부)]이다. 대표적인 단체는 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도 재중총련 조직처럼 범민련 조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재일총련처럼 남한정부 대표부(북한 통일전선부 대화창구) 성격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북한정부 내부 제1공화국 헌법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인민민주주의 인민회의정부론을 옹호하는 세력이나 김일성 가계 세습제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반김정은세력이다.
북한 김정은 세력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보다는 강한 민족주의 좌익 파시즘 세력으로 극우성향이다
북한 김정은 세력은 모택동, 김일성주의 노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자 중 인민민주주의(PD, 민주파)계열보다는 민족해방(NL, 자주파)계열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반제민전은 대남공작부서인 통일전선부 소속으로 한국 내 지하 조직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반국가 단체, 이적단체로 분류돼있다. 반제민전은 한국 내 중대사건이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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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세대 공산주의 스탈린주의자 김일성(김성주)
새세대 공산주의 스탈린주의자 김일성(김성주)
김일성은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새세대 공산주의 스탈린주의자이며 인민민주주의(민주공화국=인민공화국) 세대 레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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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새세대 공산주의 스탈린주의자이며 인민민주주의(민주공화국) 세대 레닌주의자 박헌영, 김두봉과는 다른 인물이다
김일성 전 국가주석은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이다 본래 북한은 소련 위성국으로 아직도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후손들이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새세대 공산주의(사회주의, 스탈린주의자) 세대 동북항일연군 조선족 지휘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경천(김광서,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족주의자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김광서, 김일성)
민족주의자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김광서, 김일성)
김경천(金擎天, 1888년 6월 5일~1942년 1월 2일)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일제강점기에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인 독립 운동가이다. 초명은 김현충(金顯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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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본명 김광서)과 북한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서로 다른 인물이나, 김일성이 김경천 장군의 항일 업적과 이미지를 도용했다는 이른바 '김일성 가짜설'의 핵심 인물들로 얽혀 있습니다.
1. 실존 인물: 김경천 장군 (1888~1942)
경력: 일본 육군사관학교(23기)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 출신으로, 1919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별명: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백마 탄 장군', '조선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전설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최후: 소련 스탈린 정권의 대숙청 기간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2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옥사했습니다.
2. 김일성과의 관계 및 '도용설'
이미지 도용 의혹: 학계 일각에서는 김일성이 평양 등장 당시 내세운 '백마 탄 장군' 이미지와 항일 명성이 실제로는 김경천 장군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가명 사용: 김경천 장군이 연해주에서 활동할 당시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훗날 북한의 김일성이 그 명성을 가로챘다는 설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학계의 시각: 현대 학계에서는 북한 김일성의 항일 활동 자체는 사실로 보지만, 그 과정에서 김경천 장군 등 앞선 세대 독립운동가들의 전설적인 일화들이 김일성 개인의 우상화에 활용되거나 덧씌워진 것으로 분석합니다.
3. 최근 소식
명예 회복: 김경천 장군은 공산당 가입 거부 등으로 오랫동안 잊혔으나,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후손 귀화: 2015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던 김경천 장군의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특별귀화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위패 봉안: 2024년 10월, '진짜 김일성'으로 불린 김경천 장군의 위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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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러시아어: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벨라루스어: Цярэнцій Фаміч Штыкаў 차렌치 파미치 슈티카우, 1907년 2월 28일 ~ 1964년 10월 25일)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해방 후 북한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그의 유고 "시티코프 일기"는 해방 직후 남북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1901년 ~ 1992년 5월 10일)는 소련군 장성이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김일성 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제2극동전선군 (2-й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은 서구의 군집단과 같은 규모인 소련 육군의 전선군 중 하나였다. 이 군단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직전에 창설되어 1945년 8월 5일 임무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월 1일 해산되었다.
창설된 직후 제2극동전선군은 일본 제국의 제1방면군과 제5방면군, 제4군을 상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제2극동전선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은 만주, 사할린섬, 그리고 쿠릴 열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전선군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8월 20일 전선군의 제15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으며, 이후 제2적기군이 칼로찬과 륜츠전 지역에 입성했다. 제15군은 이 사이에 산신 군을 점령했고, 제5소총군단은 볼리 지역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8월 20일 이후 소련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한편 8월 11일, 제16군은 남부 사할린에 공세를 가해 8월 18일까지 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제16군은 홀름스크 항구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코르사코프에서 공정작전과 상륙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8월 25일 소련군은 사할린의 행정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9월 초 일본군의 저항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지연되어 일본 본토에 위치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한편 제101소총사단은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10월 1일, 스타프카 VGK의 지시로 전선군은 해산되어 극동군관구로 재조직되었다.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미소 양군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중장 [사진] Ⅰ.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스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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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과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이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과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 미국간첩으로 제거 되었고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은 종파주의자로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 권력층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주도 인물로 소련군 도움므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새세대 공산주의(사회주의, 스탈린주의자) 세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광서(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한국전쟁 추진 세력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김일성(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방어총사령관), 김책(전선총사령관), 김일(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강건(인민군 총참모장) 모습 북한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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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부수상 겸 외상 그리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박헌영 재판
남로당 총비서 박헌영은 "미제국주의와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 으로 총살형(1958년).
박헌영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정부 초대 외상, 군사위원회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등을 역임했다
박헌영의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간첩으로 처형됨으로서 남로당계열 내부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 되었다
남로당 이후 당(黨) 수준 조직으로는 1960년대 박정희 군부의 5.16 쿠데타이후 반일성향 NLPR 김일성주의 노선 통일혁명당이 등장했고 1990년 1월 새세대 주체사상 반미성향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가 등장했다
북한 부수상 겸 외상 그리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박헌영 재판
북한 부수상 겸 외상 그리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박헌영 재판
북한 부수상 겸 외상 그리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박헌영 재판 "미제국주의와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 소련 조사단이 돌아간 직후 '박헌영 사건 조사를 속히 끝내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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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미제국주의와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로 북한 정부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남한정부에서도 폭동과 한국전쟁 책임 세력으로 제거 되었다
김두봉과 박헌영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한 인사로 친대한민국 임시정부 성향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國號)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으로 건국한 대한제국을 계승하여 대한(大韓)으로 하며 국정(國政)은 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民主共和國)를 원칙으로 한다
단군왕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반일 독립투쟁 입장에서 세계정세에 순응하여 중국, 미국이나 소련, 유럽 등 지원을 받았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문- 민주정치의 실천 이념]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일본국 헌법]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국가(자유사회)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북한정부 내부 민주파(제1공화국 헌법)와 자주파(주체사상-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 헌법)의 권력투쟁
북한정부 내부 민주파(제1공화국 헌법)와 자주파(주체사상-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 헌법)의 권력투쟁
북한정부 내부 민주파(제1공화국 헌법)와 자주파(주체사상-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 헌법)의 권력
북한 김정은정부는 극렬 반미성향 북한식(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1인 장기집권 독재정부이며 자주파입니다 북한정부 내부 제1공화국 헌법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인민민주주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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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정부는 극렬 반미성향 북한식(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1인 장기집권 독재정부이며 자주파입니다
북한정부 내부 제1공화국 헌법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인민민주주의 인민회의정부론을 옹호하는 세력을 민주파이며, 제2공화국, 제3공화국 헌법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론을 옹호하는 세력을 자주파라고 부릅니다
북한정부 내부 제1공화국 헌법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인민민주주의 인민회의정부론을 옹호하는 세력이나 김일성 가계 세습제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반김정은세력입니다.
북한 김정은 세력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보다는 강한 민족주의 좌익 파시즘 세력으로 극우성향입니다
북한 김정은 세력은 모택동, 김일성주의 노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자 중 인민민주주의(PD, 민주파)계열보다는 민족해방(NL, 자주파)계열입니다.
북한 내부 민주파 입김이 강할 때는 개혁개방정책과 남북대화로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 내부 자주파는 국제적으로 핵무기 보유국 인정과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호에 주력할 것으로 봅니다
북한 노동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반일 반미 투쟁과 지주(대기업)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입니다
- 북한의 국정(國政)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좌익 파시즘 군사독재정부]이고 북한의 사회구성체은 국영자본체제(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북한정부의 약점은 대북 자유화, 개방화정책과 민주화 정책입니다
북한이 한국 측의 대북 정보유입 활동 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 정부 내부 북한 제1공화국 헌법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인민민주주의 인민회의정부론을 옹호하는 세력 민주파가 등장하여 김일성 가계 세습제를 반대하는 세력 반김정은세력 등장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대북 자유화 민주화 정책--->반김정은 세력 등장----->대량 탈북자 사태나 민중봉기 사태 등장--->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붕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1,500달러라면 중국 조선족 1인당 국민소득은 8,000달러 수준입니다
중국의 1인당 GDP는 13,000달러 수준이고 대만(타이완)의 1인당 GDP는 3만9477달러이며, 홍콩은 대체로 금융업과 번창하는 국제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래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 2025년 기준 1인당 GDP는 약 56,844달러로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주요 생산품 전자, 석유화학, 기계공학과 의약품 제조 기반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94,481 달러(2025년) 수준으로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아시아 최고 부국으로 꼽힌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며 정치적으로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체제인 1인 장기집권 독재정부입니다
북한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입니다
북한의 민생경제(식량난이나 의식주 여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민군 경제(계엄령 경제=군정경제)에서 민간경제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북한 인민군 병력 감축과 함께 민간 소비가 촉진하고 민간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군수산업 중공업,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북한 핵무기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 비용이 대부분 인민군 경제활동에서 충당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국영자본체제 북한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경협이나 외부 경협이 인민군 영향력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대북 투자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을 지지해야 한다 민간경제 대북투자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위험국이다
북한은 인민경제 제1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1972년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후 북한 경제는 민간경제(인민경제)에서 인민군이나 집단농장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경제로 전환돼 왔다
북한 경제는 스탈린헌법보다도 반민간경제(반민생경제) 국가이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이 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즉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표,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북한 빈곤층 생활 모습은 TV 방영 되지 않고 있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인민공화국)으로 점진적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
북한은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민주공화국(인민공화국)이다
세계 11개국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 모습

일본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 모습(사진)
모택동주의는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반일 반미 투쟁과 지주(대기업)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입니다
모택동(마오쩌둥)주의는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중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인민 민주주의 노선)에 기반을 두고 세력을 확장해왔다 모택동(마오쩌둥) 노선이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인민 민주주의 노선)보다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이나 NL(민족해방) 노선이 될 때 인민보다 민족우월이나 해방전쟁으로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노선 지역 패권 전쟁이론이 돼 오고 있다[북한이나 기타 제3 세계 좌파민족주의 이론]
모택동(마오쩌둥)의 주도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은 개발도상국들 특히 동남아시아에 공산주의 혁명을 수출하였는데, 그러한 노선에 입각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국제 공산주의운동, 민족민주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오는 공산정권 수립 후 개발도상국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지에 공산주의노선을 지지하고 무기, 경제, 기술, 식량 지원 등을 하였다. 문화대혁명 때는 《모주석어록》이 대량으로 영어나 스페인어 등으로까지 번역, 유통되어 외국에서 마오식 투쟁노선의 지도서가 되던 때도 있었다
붉은 군대에 가이드(안내)로 모택동(마오쩌둥) 사상은 모택동(마오)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무장활동 수단), 보통 무장 단체를 조직하는 투쟁의 주요 방법으로 도시 주변 농촌 지역에, 행동 지침으로 모택동(마오쩌둥) 사상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랍인 모택동(마오) 무장 단체는 광신적인 믿음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잘 조직하고 신속하게 행동하는 것이 다른 지역 모택동(마오)주의자들과 다르다. 네팔과 인도의 모택동(마오쩌둥) 조직뿐만 아니라 모택동(마오쩌둥) 조직이 무장 이전에는 영적인 연결,하지만 나중에 인해 모택동(마오쩌둥) 거점에, 일부 아시아 국가, 모택동(마오쩌둥) 사상에서 출발하고 NLPDR 독립 투쟁의 길에 착수했다.
콜롬비아의 마오(모택동)주의 무장 혁명군[인민군], 마오(모택동)주의자 이탈리아 붉은 여단[이탈리아의 극좌파 비밀 테러 조직], 네팔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과 무장단체, 아프가니스탄 마오(모택동)주의 청년공산주의 단체, 인도 마오(모택동)주의[마오주의공산주의센터(MCG)와 인민전쟁파(PWG)],필리핀 마오(모택동)주의[공산반군], 칼리만탄섬 공산당 마오(모택동)주의자, 태국 마오(모택동)주의자[태국 공산당], 미얀마 마오(모택동)주의자[북부 미얀마 공산반군], 페루 마오(모택동)주의자 "빛나는 길", 일본 마오(모택동)주의자 적군(赤軍, 붉은군) 등 세계 11개국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 신봉단체.
세계의 모택동(마오쩌둥) 조직은 여전히 세계의 분산 돼, 11개국에 존재 한다. 그것은 일본 적군 마오(모택동) 조직, 조직의 지도자 시게노부가 2001 년 일본에 의해 체포 된 것을 언급 할 가치가 있다. 조직의 운영 목표는 동아시아 국가에 대해 한 번 제국주의 봉쇄를 중단하는 것이다, 충성의 비밀을 하지 않았다.
세계 11개국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 모습
모택동(마오쩌둥)주의는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중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인민 민주주의 노선)에 기반을 두고 세력을 확장해왔다 모택동(마오쩌둥) 노선이 신민주주의 혁명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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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성립
만주국 성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1932년 2월 16일 만주국 성립이 선포되었다. 1931 만주사변(9.18 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헤이룽장(黑龍江),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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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2월 16일 만주국 성립이 선포되었다.
1931 만주사변(9.18 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헤이룽장(黑龍江),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등 중국의 동북 3개성을 점령한 뒤 '동북최고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으로 1945년 일제가 2차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만 13년 6개월 동안 존속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만주족, 몽골족, 조선족(한민족),일족( 야마토 민족) 등 5대 민족이 연합으로 건국한 국가이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태국(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중국 동북지역)에 주둔한 일본관동군이 펑톈의 중국군 주둔지를 습격하고 만주 각지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운 사건을 가리킨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
만주국(Manchukuo, 1932~1945)은 1930년대 초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 지방(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강점한 뒤, 1932년 3월 1일 괴뢰 정권을 수립하여 선포한 명목상의 독립국가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후에 황제)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지이자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생산 기지였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항복해 해체되기까지 약 13년 5개월 정도 존속하였다.
만국(만주국)은 한족,만주족, 몽골족, 조선족(한민족),일족( 야마토 민족) 등 5대 민족이 연합으로 건국한 국가이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김일성의 생년월일은 1912년 4월 15일로 만주국의 건국 당시 나이는 19세이다.공식적으로 김일성 등장은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이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1933년 9월 중국공산당이 만주 지역 내 항일 무장투쟁을 체계화하고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정규 유격대이다. 이 군대는 1930년대 중반 일제에 맞서 항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3월 이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확대되었다.
193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조선인민혁명군(朝鮮人民革命軍)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창건했다고 주장하는 가상의 항일 무장군사조직이다.
소련군 복무 시절 김일성이 스스로 작성한 문건에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5·25 교시를 계기로 창작된 군대로서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출신의 만주파가 북한 권력을 장악하며 시작된 백두혈통 우상화 작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77년부터 2017년까지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삼았던 1932년 4월 25일이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에서 유래하였다. 즉 원래 조선인민군의 공식 창건일은 1977년까지 1948년 2월 8일이었으나, 김일성이 자신이 조직한 항일 빨치산 부대 즉 조선인민혁명군이 실제 뿌리라며 1978년에 1932년 4월 25일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김정은이 공식 군 창건일을 2018년에 1948년 2월 8일로 재변경하였다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창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1933년 9월 중국공산당이 만주 지역 내 항일 무장투쟁을 체계화하고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정규 유격대이다. 이 군대는 1930년대 중반 일제에 맞서 항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3월 이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확대되었다.
주요 내용 및 특징
배경 및 구성: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중공당 계통의 유격대를 정규군 형태로 정비했다.
주요 활동: 1930년대 중반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며 일제와 군사 시설에 타격을 주었다.
조선인의 역할과 민생단 사건: 초기에는 조선인 대원들이 민생단 사건으로 많은 처형을 당했으나, 이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김일성 등 조선인 대원들과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동북항일연군으로의 전환: 1935년 7차 코민테른의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 방침에 따라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어 더 넓은 연합전선을 전개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만주 지역 내 항일 무장 투쟁의 핵심 세력으로, 이후 동북항일연군의 토대가 되어 한·중 합동 항일 활동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東北抗日聯軍은 1931~32년 사이에 일본의 중국 동북지방(만주)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주도로 조직된 항일유격대와 1933~36년 전반기까지 활동한 동북인민혁명군 등을 기반으로 1936년 중반에 성립한 중국 동북지역의 항일연합부대를 말한다. 이 부대에 많은 韓人(조선인)들이 참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중 양 민족의 연합 항일투쟁이 본격화하였다. 종래 중국학계와 정계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이 사실상 중·한 양 민족의 연합부대였고, 김일성·최용건 등 중국 동북지역(만주) 한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중국학계 일각에서 이러한 인식과 다른 새로운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중국 華東사범대학 郝江東은 최근 중국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종래의 견해를 사실과 다른 정치적 해석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중국의 유명한 중국-북한관계 전문가 沈之華는 최근 저서에서 1930년대~40년대 초 만주에서의 한인들의 활동을 ‘朝鮮族’의 활동으로 서술하여, ‘中華민족’ 형성의 前史로 간주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한편 중국 延邊학계에서도 종래 한인들의 ‘이중사명론’을 부정하는 저서가 나왔다. 이 시기 재만한인들이 중국혁명과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헌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는 종래 재만한인들이 ‘중국혁명’과 함께 조선(한국)독립이나 조선혁명을 위한 임무도 지녔다는 주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근 중국학계 일각의 주장은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 만주(중국동북 지방)에서 활동한 동북항일연군과 이 부대에 참가한 한인들은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조선독립’·‘조선혁명’을 위해 분투하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은 분명 한·중 양 민족의 연합부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사와 한국독립운동사, 나아가 한인(한민족) 이주사(한인 Diaspora)의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로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중국학계의 동북항일연군 연구 심화와 대량의 연구업적 산출과는 대조적으로 한국학계의 이 분야 연구 부진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추후 한국학계에서 동북항일연군과 재만한인들 관련 연구·교육을 심화할 필요가 있다.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

동북 3성 요녕성(리오닝성), 길림성(지린성), 흑룡성(헤이룽장성)

길림성(지린성) 조선족 연변자치주

두만강과 압록강 맞은 편에는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이 있다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가 존속하고 있다
1.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

옌볜 조선족 자치주(연변조선족자치주, 延邊朝鮮族自治州)는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지역 지린 성(吉林省)의 자치주이다. 중심지는 연길(延吉)이다. 자치주의 면적은 43,474 km2, 2009년 인구는 217만9천명이다.
이 곳은 80만명의 재중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다. 자치주 전체 인구 가운데 조선족 인구 비율은 36.7%이며,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2%에 불과한 둔화 시를 제외한 연변 지역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46.5%이다
민족분포: 조선족 32%, 한족64%, 만주족2.4% 등
(1)지리
남쪽은 북한 함경북도와 량강도, 동쪽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북쪽은 헤이룽장 성 무단장, 서쪽은 지린 성 바이산에 접해 있다. 백두산은 이 지역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해란강(海蘭江)과 가야하(嘎呀河) 등 주요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두만강에 합류한다. 수계는 쑹화 강(송화강) 수계와 무단 강(목단강) 수계, 두만강 수계가 주이며 라즈돌나야 강(쑤이펀허) 수계도 존재한다.
(2)역사
이 곳은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 지금의 둔화 시에 있던 동모산(東牟山)은 발해 건국의 출발지였다. 이 지역은 발해의 중심지였던 만큼 현재도 발해 관련 유적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묘(둔화 시 육정산(六頂山) 고분군 제1구역 2호분)와 1980년에 정효공주묘가 발견된 허룽 시(和龍市)의 룽터우 산 고분군(龍頭山古墳群) 등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881년, 옌볜(延邊, 연변)지역의 조선인은 약 1만명이었다. 1907년에는 옌지(延吉, 연길)에만 조선인 가구수가 5만호(戶)에 이르렀는데 한족(漢族)은 조선인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고, 3·1 운동 전인 1916년에 연변의 조선인은 이 지역 총인구 26만5천명 중 약 20만명이었다. 1930년에는 옌지 현, 허룽 현, 훈춘 현, 왕칭 현 등 4개 현의 조선인은 39만명으로 해당 지역 총인구의 76.4%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52년에 9월 3일에 조선민족 자치구(自治區)가 설치되었는데, 자치구 성립 직후였던 1954년에 이 지역의 총인구 85만4천명 중 조선인은 53만명으로서 전체의 62%였다. 1955년에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둔화 현이 편입됨과 동시에 자치주(自治州)로 격하되었다.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9월 3일을 기념하여 자치주 차원의 공휴일로 지정하였으며, 매년 9.3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201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을 맞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연길 시 체육관에서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3)경제
연길은 목재 생산지로 광물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경과 가까운 훈춘은 변경 개방 도시로 지정되어 있다.
연길시에 연길 공항이 있다. 이 공항에서는 중국 국내선 및 인천국제공항과의 국제선 정기편이 운영되고 있다. 자치주라는 특성 때문에 정기편 이외에도 김해국제공항이나 제주국제공항과 같은 한국 노선의 부정기편이나 전세편 취항이 잦은 편이다.
(4)민족 구성
조선족 36.7% : 약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연길 시(延吉) - 58%
용정 시(龍井) - 67%
화룡 시(和龍) - 60%
도문 시(圖門) - 58%
훈춘 시(琿春) - 45%
왕청 현(汪淸) - 30%
안투 현(安圖) - 25%
돈화 시(敦化) - 2%
한족(漢族) 60.4%
기타(몽골족 등) 0.1%
연변에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이다
2.길림성 장백 자치현



장백은 백산시에 속한 현으로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현이다
장백자치현은 상류로 올라 오면서 큰 개울 수준이 된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의 양강도 혜산시(惠山市)와 마주보고 있다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 장백 조선족 자치현)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바이산 시에 위치한 자치현으로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현이다. "장백 현"으로 불리기도 한다. 면적은 2,497.6 km², 총인구 8만5천여 명 중 한민족은 1만4천여 명이다.
지린 성 남부 압록강 상류로, 백두산의 서남쪽에 인접해 있다. 현(县)의 남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양강도 혜산시 · 삼지연시 · 보천군 · 삼수군 · 신파군 · 후창군과 접하며, 북쪽은 린장 시 · 푸쑹 현과 접해 있다. 국경선의 길이가 260.5Km로 지린 성에서 국경선의 길이가 제일 긴 현이다.
1677년: 청나라가 이곳을 봉금지로 설정하고, 주민을 퇴거시켰다.
1875년: 청나라 정부가 봉금령을 해제하고, 개발정책을 시행했다.
1908년: 창바이 부치가 설치됨.
1949년: 창바이 현이 퉁화 전서에 편입됨.
1958년 9월 15일: 창바이(長白) 조선족 자치현이 성립, 지린 성 퉁화행서에 속했다.
1964년: 지린 성 퉁화 전구에 편입됨.
1985년 4월: 현이 독립함.
-길림성 조선족을 이용하여 역사적 알려진 전투는 일제 식민지 시대 동북항일연군의 보천보 전투와 한국전쟁 때 북중연합군의 장진호전투이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남과 북이 전쟁통일보다는 평화통일이 돼야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도 한반도 내전에 개입할 수 없으며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국 내 소수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1,500달러라면 중국 조선족 1인당 국민소득은 8,000달러 수준입니다
중국의 1인당 GDP는 13,000달러 수준이고 대만(타이완)의 1인당 GDP는 3만9477달러이며, 홍콩은 대체로 금융업과 번창하는 국제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래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 2025년 기준 1인당 GDP는 약 56,844달러로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주요 생산품 전자, 석유화학, 기계공학과 의약품 제조 기반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94,481 달러(2025년) 수준으로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아시아 최고 부국으로 꼽힌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6천달러(2025년) 수준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메모리), OLED 디스플레이, 조선 산업 , 자동차 등 제조업 기반은 여전히 공고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이상인 고도 소비사회(높은 소비사회 자본주의)에서는 소비는 투자라는 경제원칙이 적용되는 사회입니다
소비가 활성화가 돼야 국가나 개인이 경제적으로 윤택(부유)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민생경제(식량난이나 의식주 여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민군 경제(계엄령 경제=군정경제)에서 민간경제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북한 인민군 병력 감축과 함께 민간 소비가 촉진하고 민간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인민공화국)으로 점진적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
북한은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민주공화국(인민공화국)이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엄 포고령을 무효로 판결했기 때문에 유신헌법도 무효로 해석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엄 포고령을 무효로 판결했기 때문에 유신헌법도 무효로 해석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구축을 위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헌법 기능 정지 등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엄 포고령을 무효로 판결했습니다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우리 국회는 지금이라도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다. 유신은 헌정사에서 제외해야 할 헌법의 진공상태였다
유신체제는 법치를 부인하고, 입법부와 국민주권을 부정했으며, 권력자(박정희)를 법과 제도 아래 두는 공화국 원리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헌정 파괴행위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헌정 중단 사태이자 친위 쿠데타로 꼽힌다.
2018년 대법원에서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에 따라 발령된 계엄포고령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위법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남한 제4공화국 유신헌법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헌법이라면 북한 제2공화국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헌법은 세금 없는 세상을 표방한 국영자본체제 성향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극좌헌법입니다
유신헌법이나 주체헌법은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기본권을 심각히 제한하고 있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대식(군정)헌법입니다
한국 군사정부에서 볼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유신헌법 박정희정부를 교조주의 노선이라면 대통령 단임제와 자유화 개방화 정책 제5공화국 헌법 전두환정부를 실용주의 노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법적 조치였으며, 대법원은 해당 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구축을 위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헌법 기능 정지 등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위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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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國號)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으로 건국한 대한제국을 계승하여 대한(大韓)으로 하며 국정(國政)은 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民主共和國)를 원칙으로 한다
단군왕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반일 독립투쟁 입장에서 세계정세에 순응하여 중국, 미국이나 소련, 유럽 등 지원을 받았다
- 三韓的大韓之也.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문- 민주정치의 실천 이념]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일본국 헌법]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국가(자유사회)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모범국입니다
대한민국은 자국 영토에 있는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 민주주의 파트너 국가와 함께 전 세계 자유와 법치 보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대한민국 헌법 Ⅰ.제1공화국[제헌헌법] 4281년 7월 12일 제정1948년 7월 17일 공포 전문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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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으로 두개 정부를 인정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과 북은 합법정부의 군대 이외 무장군을 인정하지 말아야 하며, 남북 어느 세력(남북 정부나 제3자의 힘 있는 세력)도 합법정부 군대 이외 무장군을 지원(원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엔에서는 남과 북 합법정부 군대 이외 무장군을 테러단체(국제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처벌 대상으로 국제재판소 소관입니다
平和大忍, 信望愛.





"Fro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대한민국의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입니다.
인류의 자유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도 압제 독재정치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민주정부(民主政府) 민주공화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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