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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입국 탈북민 작년보다 3배 증가…“중국 이동 제한 완화 영향” 본문
한국 통일부가 올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작년보다 세 배 정도 급증한 주요 이유로 중국의 이동 조치 제한 완화를 꼽았습니다. 앞서 한국 통일부 장관은 대안문화 영향을 언급해 관심을 끌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통일부 관계자는 8일 김영호 장관이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올해 국내 입국 탈북민이 180명까지 증가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한 VOA의 질의에 중국 내 코로나 방역 완화 조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탈북민 180명의 입국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2021~2022년 대비 증가 이유는 전반적인 코로나 완화에 따라 특히 중국 내 이동 제한이 완화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김 장관이 탈북민 증가 이유 중 하나로 ‘대안문화’의 영향을 언급한 것에 대해선 “공식적인 (북한의) 주체 문화와 대비되는 한류 문화를 지칭한 것”으로 김 장관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대안 문화가 구체적으로 탈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선 답하지 않았습니다.
김 장관은 6일 간담회에서 국내 입국 탈북민이 지난해 67명에서 올해 180명까지 증가했다며 “숫자는 코로나 외에 대안문화의 영향도 분명히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입국한 탈북민들은 저장매체, 라디오, 해안 쓰레기 등 여러 경로로 우리의 문화와 접촉했고, 북한의 현실과 대조되는 발전상과 자유로운 사회상을 보며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고 진술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지난 5월 서해를 통해 어선을 타고 귀순한 일가족 9명 중 일부는 최근 ‘BBC’,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노래와 영화를 친구들과 공유한 혐의로 22살 청년이 공개 처형되는 등 한국 문화 접근에 대한 단속이 훨씬 심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면서 특히 자녀들이 받는 “터무니없는 세뇌 교육”에 반발해 탈북을 결심했다며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대안문화 영향은 북한이 주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3대 악법’으로 불리는 북한 당국의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한 이유와 국제사회의 높은 우려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유엔총회 제3위원회는 지난달 19년 연속 채택한 북한인권결의안에서 북한 당국의 사상 통제 강화에 대해 ‘절대적 독점(absolute monopoly)’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넣으며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등에 대한 재고를 북한 정부에 촉구했습니다.
올해 탈북민들의 입국 증가는 중국이 고강도 코로나 방역 조치를 완화하면서 예견됐었습니다.
한국 갈렙선교회의 김성은 목사는 7일 VOA에 방역 조치 완화 후 중국 남성과 결혼한 탈북 여성들이 임시 거주증을 활용해 한국행을 시도한 사례가 올 상반기에 급증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성은 목사] “아이가 있거나 가정을 이룬 중국에 사는 탈북 여성들에게는 당국이 임시거주증 이런 것을 많이 해줬어요. 그래서 임시거주증을 갖고 이동하는 데 문제가 없었어요.”
김 목사는 그러면서 “탈북민 구출을 위한 브로커 비용이 코로나 팬데믹 이전보다 10배 이상 올랐기 때문에 180명은 1천 800명이 들어온 것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목사 등 탈북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VOA에 코로나 팬데믹 이전 1인당 2천 달러 안팎이던 구출 비용이 한때 2만 달러 이상 됐다가 최근에는 1만 2천 달러~1만 5천 달러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탈북 브로커 J 씨는 VOA에 “중국의 반간첩법 시행과 안면 인식 기술 강화 등으로 구출이 훨씬 더 위험해졌기 때문에 중개비가 예전 수준으로 내려갈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김 목사는 대부분의 구출 단체가 코로나 기간 탈북민을 구출하지 못해 저축한 돈으로 비싼 중개 비용을 감당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아둔 돈이 떨어지면 많은 지원단체가 높은 비용을 계속 감당하긴 힘들 것”이라며 “큰 후원이 없는 한 장기적 전망은 여전히 암울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성은 목사] “그래도 갖고 있던 돈으로 지난번도 대여섯 명 구출하고 이번에도 3명 구출했는데, 앞으로는 솔직히 지금 상태로 가면 자체적으로는 이제 못 구해요.”
통일부에 따르면 한국에 입국하는 탈북민은 2001년 이후 2019년까지 적어도 매년 1천 명 이상이었지만 2020년 229명, 2021년 63명, 지난해 67명으로 대폭 줄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탈북민이 목선을 타고 '지옥 같은 땅'을 탈출한 이유
올해 초 북한 주민 김씨는 불가능해 보이는 탈출에 성공했다. 임신한 아내, 어머니, 동생의 가족을 모두 이끌고 아버지의 유골함까지 챙긴 채 목선을 타고 북한에서 한국으로 도망친 것이다.
김씨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국경을 봉쇄하며 상황이 극도로 나빠졌다고 말했다.
식량 부족 사태, 가혹한 단속 조치 등에 대한 진술이 있었다. 그러나 한때 꽤 자주 일어나기도 했던 탈북 마저 당국의 철저한 단속 아래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김씨와 그의 가족은 올해 군사분계선 이북에서 직접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주민들이다.
그는 진 맥켄지 BBC 서울 특파원에게 북한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어떻게 탈북을 생각했는지 등에 대해 들려줬다.
BBC는 그와 가족의 신원 보호를 위해 목소리를 바꿔 녹음했다.
아울러 그의 모든 진술을 독립적으로 검증할 순 없었으나, 진술의 일부 세부 내용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부합했다.
북한: 탈북민이 목선을 타고 '지옥 같은 땅'을 탈출한 이유 - BBC News 코리아
목선 탈북: 폭풍우 헤치고 가족과 목선 타고 탈북에 성공한 탈북민 이야기
올해 초 북한 주민 김씨는 불가능해 보이는 탈출에 성공했다. 임신한 아내, 어머니, 동생의 가족을 모두 이끌고 아버지의 유골함까지 챙긴 채 바다를 통해 북한에서 한국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들 김씨 가족은 올해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자 북한 당국은 패닉 상태에 빠지며 세계에서 고립되길 선택했다. 이에 국경을 봉쇄하고, 무역을 차단했다.
이에 한때 꽤 자주 일어나기도 했던 탈북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탈북민으로서 김씨는 인터뷰를 통해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을 해냈는지 설명했다. 아울러 아사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 당국의 엄격해진 단속 등 북한 내 사정에 대한 새로운 내용도 자세히 들려줬다.
이러한 김씨의 설명을 BBC가 전부 독립적으로 검증할 순 없었으나, 대부분의 세부 사항이 기존에 우리가 다른 소식통에서 들은 내용과 일치했다.
탈북 당일은 격동의 밤이었다. 남쪽에선 거센 바람이 불어와 폭풍우를 몰고 왔다. 이 또한 김씨의 탈출 계획의 일부였다. 바다가 사나우면 감시 선박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바랬다.
이날은 김씨가 지난 몇 달간 꼼꼼히 계획하며 꿈꿔왔던 밤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김씨의 조카들은 그가 먹인 수면제로 인해 잠들어 있었다. 김씨 형제는 캄캄한 어둠 속 지뢰밭을 통과해 미리 준비해둔 배가 있는 곳으로 아이들을 옮겼다.
김씨 가족은 경비원들의 탐조등 불빛을 피하고자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렇게 탈출 선박에 무사히 도착한 이들은 아이들을 오래된 곡물 자루에 숨겨 마치 연장 가방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렇게 가족은 한국을 향해 출항했다.
남자들은 칼을 들고 있었고, 남자들이 모두 죽을 때를 대비해 여자들은 독약을 들고 배에 올랐다. 또 이들은 달걀 하나씩을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경비병들과의 대치하게 되면 속을 비운 뒤 고춧가루와 검은 모래로 채운 이 달걀을 얼굴에 던질 계획이었다.
배 엔진의 우르릉거리는 소리에도 김씨의 귀에는 미칠 듯이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도 가족 전원의 처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BBC는 지난달 서울 외곽 지역에서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사복 경찰과 동행했는데, 이는 최근 탈북한 이들을 위해 마련되는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날은 김씨와 가족들이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사무소에서 나온 지 불과 몇 주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씨는 "고통이 이루 말도 못했다"면서 지난 4년간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여전히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 및 함께 탈북한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김씨에 따르면 코로나19 초기, 북한 주민들은 "극도로 겁에 질렸다"고 한다. 국영 방송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어가는 세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일부 주민들은 코로나19 방역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수용소에 보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의심스러운 사례가 보고되면, 경비들이 나타나 군 전체를 봉쇄했다는 김씨는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일대가 봉쇄돼 안에 있는 주민들은 거의 먹을 게 없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한동안 사람들을 굶기고 난 뒤 정부는 트럭에 식량을 싣고 왔다"고 했다.
"식량을 싸게 파는 것이라고 생색내며 사람들이 고마워하게 했습니다. 마치 아기를 굶긴 다음에 작은 것이라고 쥐여주면 감사해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김씨에 따르면 주민들은 코로나19를 기회로 삼으려는 국가의 전략은 아닌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생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국가가 위험을 과장한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우리를 탄압하기 위한 핑계였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김씨는 국경 봉쇄로 인해 가장 타격이 컸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식량 공급 사정은 오랫동안 불안정했지만, 북한으로 유입되는 양 자체가 줄어들면서 식량 가격이 치솟아 모든 주민들의 삶이 "훨씬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2022년 봄, 김씨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7~8년간은 아사자 관련 이야기가 많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굶주림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점점 더 많이 들려왔다"는 김씨는 "어느 날 일어나보니 '저 골목 누가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또 다음 날 아침에 비슷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2월의 어느 날, 이웃 지역에 사는 한 손님이 늦게 나타났다. 그 손님은 김씨에게 자신이 사는 마을에 경찰이 나타나 주민 전체를 한 데 소집했다고 설명했다. 그 마을에 한 노부부가 살해당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검 결과 노부부는 굶어 죽은 것으로 판명 났다. 그리고 이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쥐들이 파먹은 게 분명하다는 결과였다.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었기에 수사관들이 살인 현장은 아닌지 의심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던 4월, 김씨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농부 2명도 굶어 죽었다. 김씨는 이들이 정말 힘들어했다고 설명했다. 만약 수확이 좋지 않으면 국가의 강요로 인해 개인에게 돌아갈 식량을 떼서 이를 만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BBC는 이 농부 2명의 죽음이 사실인지 별도로 확인할 순 없었다.
그러나 '2023 식량 위기에 관한 글로벌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국경을 봉쇄한 이후 "불안정한 식량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지만,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는 징후"는 있다고 한다.
아울러 올해 3월, 북한은 '유엔세계식량계획(WFP)'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의 북한 전문가인 최재훈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탈북민들을 통해 아사 사례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코로나19 기간 식량 사정이 더욱 나빠졌으며, 일부 지역에선 농부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도 그러나 현 상황이 지난 1990년대 대기근만큼 재앙에 가까운 정도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주민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존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씨 또한 생존을 넘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북한 주민 대부분이 그랬듯이 김씨도 장마당을 통해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김씨가 선택한 상품은 중국에서 밀수입한 오토바이와 텔레비전이었다.
그러나 국경이 닫히며 사실상 모든 무역이 단절되자, 김씨는 채소를 사고팔기 시작했다. 식량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자신이 집이나 골목길에서 몰래 물건을 파는 '메뚜기 장사꾼'으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만약 누군가 신고한다면 팔던 식량을 집어 들고 마치 메뚜기처럼 도망"치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김씨는 "사람들은 내게 제발 물건을 팔아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원하는 가격을 붙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김씨는 이전보다 더 돈을 많이 벌게 됐다.
김씨와 그의 아내는 원하는 고기를 골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북한에선 잘 먹는 편"이라고 한다.
김씨의 입으로 들은 김씨의 삶은 유난히 계산이 빠르고, 때로는 냉혹한 상인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현재 30대인 김씨는 북한 체제의 규칙을 따돌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며 10여 년간 열심히 돈을 모았다.
이렇게 열심히 돈을 모은 이유 중엔 어린 나이부터 느낀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꼽을 수 있다. 김씨는 어릴 적부터 몰래 아버지와 함께 한국의 TV 영상물을 시청하곤 했다고 털어놨다. 한국과 가까운 국경 지역에 살았기에 한국 채널을 시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김씨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한국의 모습에 매료됐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며 북한에서 목격한 부정부패와 부당함이 김씨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루는 보안요원들이 김씨의 집을 급습해 "당신이 가진 모든 건 국가의 소유"라고 따져 물었다. 한 요원은 "이 산소도 당신 것이라 생각하나보지"며 "아니야, 이 자식아"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2021년, 김씨는 강력한 단속반이 구성돼 소위 "반 사회적 행동" 통제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이들 단속반은 무작위로 행인들을 붙잡고 위협했다.
"사람들은 단속반을 모기라고 불렀습니다. 흡혈귀처럼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다고요."
가장 심각한 범죄는 외부 정보, 특히 한국의 문화 콘텐츠의 소비 및 공유였다. 한국 문화 소비에 대한 단속이 "훨씬 더 심해졌다"는 김씨는 "만약 붙잡히면 총살되거나, 처형되거나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김씨는 자신과 알고 지내던 22세 남성이 공개 처형당하는 모습을 강제로 봐야만 했다고 털어놨다. "그 청년은 한국의 노래 70여 곡과 영화 3편 정도를 듣고 보고 친구들과 공유한 죄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당국은 김씨 등 주민들에게 이 남성을 단단히 처벌해 올바른 선례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냥 용서를 안 해요. 무자비해요.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BBC는 이 처형에 대해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없었으나, 2020년 12월, 북한 당국은 한국 콘텐츠를 공유하면 처형될 수 있다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한국 소재 비정부기구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요안나 호사냑 부국장은 이러한 김씨의 설명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호사냑 부국장은 지난 20여 년간 탈북민 수백 명을 인터뷰한 인물로, "북한 당국은 언제나 공개 처형을 주민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했다.
"새로운 법을 시행할 때마다 여러 차례 처형이 이뤄지죠."
김씨는 이러한 기억을 꺼내놓으며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다. 김씨는 지난해 친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크게 상심했다고 털어놨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 이혼하고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자 애썼던 이 친구는 당국으로부터 이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수용소로 가 지내고 오는 방법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다른 방법을 찾으려다 빚더미에 앉게 됐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김씨는 친구의 죽음 이후 그의 집 침실을 방문했는데, 마치 대학살의 현장 같았다. 친구가 얼마나 천천히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손톱이 다 빠질 때까지 벽을 긁어댔다.
한편 김씨는 몇백 번이나 탈북을 꿈꿨으나, 가족을 두고 떠날 순 없었다. 그렇게 2022년이 되자 더욱더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김씨는 마침내 가족들에게 함께 떠나자고 설득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우선 김씨는 동생을 설득하고자 했다. 동생과 제수는 불법 해산물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당국이 비공식 상인들을 단속하고 있었다. 이에 배를 가지고 있음에도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 없었다. 상황이 빠듯했기에 동생은 쉽게 설득됐다.
그렇게 7개월 간 형제는 비밀리에 꼼꼼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북한 북부의 중국과의 국경을 따라 이미 조성된 탈북 경로는 코로나19를 거치며 대부분 차단됐다. 게다가 이들 형제가 사는 작은 어촌 마을은 북한 남서쪽에 자리해 오히려 한국과 더 가까웠다.
이에 이들 형제는 해로를 통한 탈북이라는, 매우 위험한 대안을 선택하게 됐다.
우선 이들은 바다로 나가기 위한 허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근처 군 기지에서 주민들을 바다로 보내 물고기를 잡아 군사 장비를 마련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형이 여기에 지원했다.
그러는 동안 김씨는 잡히지 않고 밤에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 지역을 담당하는 해경 및 경비원들과 친분을 쌓으며, 이들의 동선과 프로토콜, 교대 패턴 등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캐냈다.
그러고 나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 있었다. 나이 드신 어머니와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어머니와 아내 모두 탈북에 반대했다.
결국 김씨 형제는 제발 자신들을 따르라고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만약 어머니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죽는 날까지 자신들이 비참하게 사는 건 다 어머니 탓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김씨는 "어머니가 울더라고요. 그냥 울면서 할 수 없이 따라나서게 된 거예요"라고 전했다.
하지만 김씨의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 부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김씨는 아내에게 이제 당신은 혼자만의 몸이 아니야. 이제 당신은 부모다. 부모인데 자식이 이런 지옥 같은 데서 살아가길 바라는거냐"고 따져 물었다.
몇 시간가량 인터뷰에 응한 김씨와 나는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김씨는 탈북 계획의 마지막 부분을 들려줬다.
자신들이 떠난 뒤 당국이 아버지의 무덤을 훼손하진 않을까 두려웠던 김씨 형제는 아버지의 시신을 파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덤을 다시 만들어두고, 근처 황무지에서 아버지 시신을 화장했다.
이들 형제는 탈출 당일 어둠 속에서 건너가야 할 지뢰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약초를 채집하는 척하며 탈출 경로를 살폈다.
주민들의 탈출을 막고자 해안선엔 지뢰가 매설돼 있으나, 그곳에 근무 중인 경비대 규모가 줄면서 가장 안전한 탈출구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적합한 날씨와 조수 흐름을 기다릴 차례였다.
5월 6일 밤 10시, 이들은 우선 허용 범위 안에서 최대한 멀리 배를 몰고 간 다음 그 너머로 계속 나아갔다. 썰물에 암초와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이들은 레이더상에 표류하는 쓰레기더미로 보이길 바라며 천천히 배를 몰았다.
그러는 동안 김씨의 심장은 연신 쿵쾅거렸으며, 흘러내리는 땀으로 옷은 흠뻑 젖어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전하다고 느껴질 무렵 최대한으로 속도를 높였다. 김씨는 뒤를 돌아 추격하는 배가 있는지 살폈으나, 이들을 잡을 순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이들은 해상 경계선을 넘을 수 있었다.
김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그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연평도가 가까워지자 조명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바다로 나간 지 거의 2시간 만에 한국 해군에 의해 구조됐다.
모든 게 계획한 그대로 성공한 것이다. 김씨는 "하늘이 우릴 도운 것만 같았다"고 했다.
한편 탈북민의 한국 정착을 돕는 '리버티 인 노스 코리아'(Liberty in North Korea)의 박석길 지부장은 "김씨의 사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예외적"이라고 설명했다. 해상 탈북 자체가 원래 드물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이후 탈북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박 지부장은 "해상 탈북이 성공하기 위해선 치밀한 계획, 엄청난 용기뿐만 아니라 모든 과정이 기적처럼 잘 진행돼야 한다"면서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북한 주민들도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JM 선교사' 소속으로 중국을 통한 탈북을 돕는 스티븐 김 목사는 "지금 탈북할 수 있는 이들은 부유하고 인맥이 있는 사람들 뿐"이라고 설명했다. 매년 약 1000명이 중국 국경을 통해 북한에서 탈출했으나, 지난 4년간 이 숫자는 20명으로 줄었으며, 한국에 도착한 이들은 이중 단 4명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올해 10월, 김 목사와 비영리 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는 중국 당국이 일부 탈북민을 북한으로 되돌려보냈다며 비난한 바 있다
현재 북한은 서방과의 외교에는 등을 돌린 채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제 사회가 이러한 인권 침해 보고에 대해 나서기 점점 더 어려워진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표방했으나, 문승현 통일부 차관은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는 UN 등을 통해 지속해서 북한 인권 실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해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자 애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문 차관은 "북한은 유럽 국가들의 말은 듣는 경향이 있다"면서 영국과 독일을 그 예로 들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역할은 한국으로 오는 탈북민들을 돕고, 이들에게 상담, 주거, 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도로 줄어든 상태다.
한편 김씨와 그 가족들은 우선 국정원에서 간첩이 아님을 판단하기위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엔 정착 지원 사무소로 옮겨 한국의 생활에 대해 교육받았다.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깝지만 김씨 가족의 옛집과 새집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탈북민들은 종종 이러한 변화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지난 10월, 김씨의 아내는 아기를 낳았으며, 가족들은 정착 지원 사무소를 나와 아파트로 이사했다.
김씨는 아내는 건강하지만, 적응하기 힘들어한다면서, 특히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한다고 설명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평생 지하철을 타본 적 없으며, 어머니는 늘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실수할 때마다 어머니의 자신감은 무너진다.
김씨는 "어머니는 여기에 온 걸 지금 약간 후회하고 있다"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 문화에 너무나 익숙했던 김씨는 비교적 쉽게 적응하고 있다.
"상상했던 세상과 내가 현재 살아가는 세상이 아주 비슷합니다."
김씨는 인터뷰 도중 호기심에 테이블 한쪽에 있던 에어팟 케이스를 집어 들고는 손에서 뒤집었다. 내가 케이스를 열고 무선 이어폰을 보여줬지만 김씨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결국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나서야 이해했다는 눈빛을 보이며 웃었다.
김씨의 앞날엔 더 많은 놀라운 일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점에 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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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북 인권특사 “북한은 국경을 넘어 초국가적인 인권 유린과 침해 저지르고 있다“ (0) | 2023.10.26 |
동해 귀순 탈북민, ‘바닷길’ 탈출 경로 선택 이유는? (0) | 2023.10.26 |
헌재, '접경지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 위헌 결정 (0) | 2023.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