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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영지 "한국, 중미 사이 균형 전략이 국익에 유리" 본문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영 매체가 한국을 향해 국익을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전문가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보도했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27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일본에 파견한 한일 정책협의대표단이 전날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만나 윤 당선인의 친서를 전달한 사실을 전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동북아연구소의 다즈강 소장은 글로벌타임스에 기시다 총리가 면담에서 '한미일 3국의 전략적 제휴'를 강조한 점에 주목하며 "기시다의 발언은 한국을 쿼드(Quad)에 끌어들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그러면서 윤 당선인이 최근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쿼드 참여 여부에 대해 "기회가 주어진다면 긍정적으로 참여를 검토할 것"이라고 한 발언도 소개했다.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는 쿼드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맞물려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한 협의체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타임스는 "윤 당선인 취임 후 중한 관계에 일부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서도 "미국과 동맹 강화를 모색하는 동시에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균형 있는 전략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글로벌타임스는 지난 12일에도 '한국은 쿼드의 장기 말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중국은 어렵게 얻은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 기회를 중시한다"며 "한국이 반중 안보 협정으로 널리 인식되는 쿼드의 정식 일원이 되는 것을 삼가고, (중국과) 호의적인 관계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국 이해 키워드 30] 중한 수교 30년, 우리는 어떤 동반자인가?
"한중(韓中) 양국은 '漢字姓氏,兄弟國'입니다."
중-한 수교, 올해로 30년이 됐다. 이립(而立)의 나이다. 중국중앙방송총국(CMG) 아시아아프리카지역방송센터와 한국 중앙일보 산하 차이나랩은 함께 '한중 30주년, 중국 이해의 키워드 30'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양국 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보고, 발전방향을 모색하자는 차원이다.
오늘 첫 키워드는 '전략적협력동반자관계'이다.
30년의 여정
1992년 8월 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 17호각. 이상옥 당시 한국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에 정식 서명했다.
시작은 우발적이었다.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가 춘천 공군 비행장에 비상 착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은 33명의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해 사건 처리 문제를 협상했다. 이후 양국 최초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국호를 사용한 각서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으로 양국 간 비공식 교섭 채널이 개설됐고 한국 국민은 중국에 대해 호의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한국에서 개최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을 보냈고 한국과 조선의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했다. 한국은 1991년 중국과 대만의 아·태 경제협력체 가입 때 중국만 중화인민공화국 명의로 가입하고 대만은 비국가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에 찬성했다.
1991년 1월 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홍콩·싱가포르 등을 통한 간접무역에서 직접무역으로 전환했다.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절차만 남았지만 문제는 북한과 대만이었다. 중국은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첸치천 외교부장을 북한에 보내 양해를 구했다. 한국은 서울 명동의 대만 대사관 등 한국 내 대만 자산을 중국에 귀속시키기로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대만 측이 등기소에 등기 신청을 변경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주말을 낀 3일 전에야 대만에 수교 사실을 통보했다.
전대미문의 발전
지난 30년 동안 중국은 한국 제1의 수출·수입 상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양국이 맺고 있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는 중국이 수교국과 설정하는 위상 중 최상위 등급이다.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에 돌입하려는 국제 정세, 그리고 한국이 미국의 군사 동맹국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약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입장이다.
양국은 수교 후 1997년까지 선린우호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비정치적 교류 협력에 주력하는 단계였다. 이 시기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인 중국은 철강, 석탄, 식량 등 원자재를 한국에 수출했고 신흥공업국인 한국은 섬유와 석유화학 제품 등 완제품이나 반제품을 중국에 수출했다. 한국의 중국 직접투자가 총 해외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2년 9.8%에서 1997년 66.3%로 급증했다.
1998년 4월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국가부주석이 취임 후 최초 해외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다. 그해 11월엔 김대중 한국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해 양국 관계를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키로 했다. 경제 교류를 넘어서 정치·외교 분야에서의 협력을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김대중 한국정부는 대북 햇볕 정책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중국은 대만·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의 지지를 원했다. 2003년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으로 올라섰다. 1998~2003년 한국에 대한 중국의 수출은 29.4%, 수입은 51% 증가했다.
2000년 2월 H.O.T.가 베이징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중국의 한 신문이 “한류가 중국을 강타했다”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해 말 중국 내 한국 유학생이 16만을 넘어섰고 다수의 중국 연구기관과 대학에 한국학 연구센터가 개설됐다. 2002년 중국 국가여유국은 중국 국민의 제주도 관광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다.
'전략적협력동반자'가 되기까지...
2003년 노무현 한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은 양국 관계를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정치·외교 영역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군사 안보 부문에서까지 긴밀한 협력을 지향하는 관계다. 2003년부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된 6자회담은 의장국인 중국의 적극적 협조로 성사될 수 있었다. 2004년 한·중 무역 규모는 1992년 대비 18배(중국 측 통계) 증가해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됐다. 2004~2005년 동안 350편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중국에서 상영됐다. 이에 비례해 중국인 관광객의 한국 여행도 급증했다.
2008년 이명박 한국 대통령의 방중과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의 방한으로 양국 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가 구축됐다. 양자 차원을 넘어 지역과 세계 단위에서 협력을 지향하는 관계를 뜻한다. 이후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됐고 그해 박근혜 대통령은 서방 자유주의 계열 국가 정상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했다.
2016년 주한미군이 종말 고고도 지역방어 체계(THAAD)를 도입하면서 중국 내 반한 움직임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 사이 중국은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국내총생산(GDP) 2위에 자리하며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게 됐다.
현재 국제 정세는 미·중 경쟁이 구조화되는 국면에 접어드는 분위기다. 미국과 군사 동맹국이자 중국과 최대 교역국인 한국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와 달리 미·중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상호 의존적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1992년 수교 이후 급속하게 성장해 온 교류와 협력은 양국 모두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를 말해 준다. 30년의 수교 역사를 뒤로하고 미래의 과제는 얼마나 상호 신뢰를 성숙시키느냐일 것이다.
이충형 차이나랩 특임기자
[중국 이해 키워드 30] 중한 수교 30년, 우리는 어떤 동반자인가?-CRI
외만주(外滿洲)
외만주(外滿洲)는 만주 동쪽의 러시아 영토로, 아이훈 조약(1858년)과 베이징 조약(1860년)으로 중국이 러시아에 넘겨준 지역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외동북(外東北)이라고도 한다. 외만주에 해당되는 곳은 현재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南部) 및 아무르주이다.
원래는 퉁구스계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연해주는 고대에 고구려와 발해, 말갈의 영역이었다.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는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국경으로 정했으나,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이북 지역이,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이 각각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는 외만주의 일부인 볼쇼이우수리스키섬과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을 자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아이훈 조약
아이훈 조약(愛琿條約)은 1858년 헤이룽장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가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1.배경
러시아는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 중인 것을 기회로 청나라의 전권대사 이산을 협박해서 이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 조약은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은 것으로, 러시아 제국은 이 조약을 구실로 청나라로부터 스타노보이 산맥(외싱안링 산맥: 外興安嶺)과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 사이의 넓은 지역을 빼앗음으로써 시베리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60만km2(한반도 면적의 약 3배)의 땅을 확보하고[1][2] 태평양으로 향하는 부동항(블라디보스토크)을 확보할 발판을 만들었다.
2.내용
(1)헤이룽 강(黑龍江, 아무르 강)의 좌안은 러시아 령으로 한다. 헤이룽 강 우안 중 우수리 강 서쪽은 청나라 영토로 하고, 우수리 강 동쪽(연해주)은 두 나라가 공동 관리한다.
(2)헤이룽 강 좌안의 만주인 촌락(강동육십사둔)은 청나라가 관할한다.
(3)헤이룽 강·쑹화 강·우수리 강의 항행은 두 나라의 배로 제한한다.
(4)위 세 강 연안의 주민 간에는 무역을 허용한다.
3.결과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강동육십사둔을 제외한 아무르 강 이북 지역을 전부 러시아에 내주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 조약을 승인했다가 얼마 뒤 부인하였으나, 2년 뒤인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아이훈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마저 러시아 영토로 내주었다
베이징 조약
베이징 조약(북경조약, 중국어: 北京條約 Běijīng Tiáoyūe[*])은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10월 18일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청국은 영국에 주룽(현재의 홍콩 중심부)을 내주었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가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영국은 청나라의 각종 이권을 빼았아 갔으며, 프랑스는 청국 영토 내에서 프랑스인의 우월함을 인정 받고 청국 영토내에서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 받았다.
1.배경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와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건축물와 주변을 약탈하고,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러시아 대표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Игна́тьев) 영국 대표인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 프랑스 대표인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 (Jean-Baptiste Louis Gros)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끼어들었다.
영국군, 프랑스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는데(애로호 사건 참조), 조약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살랐다.
이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에 자금성의 남쪽 건물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약은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의 형식으로 각각 맺어졌다.
2.조약내용
청나라가 비준을 거부한 1858년의 톈진조약 내용을 비준한다.
톈진을 개항한다.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를 허용한다.
배상금 800만냥을 지불한다.
프랑스에 대해 몰수한 가톨릭 재산 반환을 인정한다.
청나라에 의한 자국민의 해외 이주 금지 정책의 철폐와 이민 승인
3.결과
영국과 러시아는 위의 조건 외에 개별적으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었다.
난징 조약(南京條約, 1842년)으로 영국에 홍콩섬을 내준 청나라는 이 조약의 체결로 홍콩 섬 맞은 편의 주룽을 1860년 10월 24일부터 영국에 할양하였다.
청나라는 아이훈 조약(1858년)으로 러시아 제국에 헤이룽 강(黑龍江) 이북지역을 넘겨준데 이어 이 조약으로 우수리스키 지방(연해주와 남부 하바롭스크 지방)을 할양하였다.
볼쇼이우수리스키섬
볼쇼이우수리스키섬(러시아어: о́стров 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또는 헤이샤쯔섬(흑할자도,黑瞎子島)은 2008년부터 러시아와 중국이 분할하여 차지하고 있는 섬이다. 중국의 최동단으로, 우수리강과 아무르강(헤이룽강, 黑龍江)의 합수 지점에 있다.
인룽섬(은룡도, 銀龍島) 등 90여 개의 인근 섬들을 포함한 이 지역의 총 면적은 347 km²로, 인룽섬을 포함한 이 섬의 서부 174 km²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무쓰시(佳木斯市) 푸위안시(撫遠市)에 속하며, 동부는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에 속한다.
볼쇼이우수리스키섬(헤이샤쯔섬)은 2004년까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분쟁 지역이었다. 1929년부터 소련이 이 섬 전체를 차지하였지만, 중국은 이 섬을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2004년 10월 14일에 러시아와 중국은 섬의 서부는 중국 영토로, 동부는 러시아 영토로 정하는 국경조약을 체결하였고, 4년의 준비를 거쳐 2008년 10월 14일에 섬을 동·서로 양분해 영토 분쟁을 종결지었다
전바오섬
전바오섬(진보도, 珍寶島)은 우수리강에 있는 면적 0.74km2, 길이 1,700m, 폭 500m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 측 연안(沿岸)에서 200m, 러시아 측 연안에서 300m 떨어져 있다. 2011년에는 람사르 협약에 따른 습지로 등록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北京條約)으로 우수리강이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의 국경이 되면서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방)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전바오섬과 같은 우수리강의 하중도(河中島)에 대한 영유권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1960년대 중소 분쟁(中蘇紛爭)의 와중에 1969년 3월 중국 인민해방군과 소련군이 충돌한 전바오섬 사건(러시아명: 다만스키섬 사건)이 발생해 중소 국경 분쟁이 있었다.
이후에도 양국 모두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다가, 1991년 5월 16일에 중국과 소련은 국경 협정을 체결해 이 섬이 중국의 영토라는 데에 합의하고 영토 문제를 해결하였다. 현재 이 섬은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시시 후린시(虎林市)에 속한다.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은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좌안(左岸)으로, 중국의 헤이허(黑河) 시와 러시아의 블라고베시첸스크 시 사이에 있는 옛 중국인 거주 지역이다. 현재 이곳은 러시아의 아무르주에 속해 있다. 총 면적은 3,600km2이다.
1858년, 청나라와 러시아제국이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 좌안(북쪽)은 러시아에 할양되었으나, 강동육십사둔은 만주인 촌락으로서 청나라가 계속 관할하였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청나라가 혼란해지자 러시아는 무력을 동원해 강동육십사둔을 점령하였다. 당시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모두 중국으로 추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약 3,000명의 중국인이 러시아군에 학살되었다.
1969년 3월 2일, 우수리 강의 전바오 섬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 사이에 영토분쟁으로 결국 군사 충돌이 발생했으며 9월 11일까지 계속됐다.
1991년 5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체결한 국경 조약에서 이곳의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대만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소 국경 분쟁
중소 국경 분쟁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국경인 아무르강과 지류인 우수리강 유역의 영유권을 놓고 1969년에 벌인 국경 전쟁을 말한다.
1969년 3월 2일,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군사 충돌은 9월 11일까지 계속됐다. 이는 영토 문제 뿐만 아니라 스탈린 사후 심화되었던 중·소의 대립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1.발단
1956년 헝가리 반소봉기가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맹주국이라는 소련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게다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비난하고 중국 내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일어나자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 이후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을 외치던 소련을 본 마오쩌둥은 소련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런 노선주의 논쟁으로인해 1960년대 이후로 소련과 중국간의 군사/과학/교육적 교류는 완전히 단절되고 특히 1960년 8월에는 중국 내에서 체류 중이던 소련 군사고문, 과학기술자들이 전면 철수하게 되고 마오쩌둥 역시 소련 내의 중국 유학생들을 귀국시키면서 표면화되었다. 중국과 소련은 양측을 준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국경지대에는 군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진먼 섬 포격전과 관련한 소련의 소극적 대응과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양국간의 입장차이로 인해 사이는 더욱 경색되었고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중국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어 마오쩌둥과 그의 측근들 입장에선 우려될 만한 사안이였다.
2.전개
우수리 강에서 발생한 홍수 때문에 전바오섬의 국경지대는 불명확해졌고, 중·소 양국 국경 수비대원들 간의 말다툼이 1969년 3월 2일 16시 12분에 양측 간의 몸싸움으로 번졌다. 중국 국경수비대원들이 소련군의 복싱에 밀리자 중국군은 특수부대원들을 동원해 봉술로 소련군을 제압했고, 소련군은 봉을 무기로 판단해 중국군을 총격으로 사살해 양측간의 난투극은 총격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3월 12일에 중국군 3개 소대 병력이 2개 소대 규모의 소련 국경 수비대를 기습하였으나 60여 명의 병력과 6대의 BTR 장갑차를 동원해 반격한 소련군에 크게 패하여 소련군이 14명 사망하고 중국군이 30명 넘게 사망하였다. 3월 15일에는 10대의 T-62 전차와 14대의 장갑차에 100여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소련군 제병합동부대의 기습에 85mm 대전차포와 59식 화전통으로 대응하던 중국군 보병부대가 소련군의 BM-21 로켓포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2일부터 2주 동안 벌어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공식 사망자는 59명이었고, 중국군의 사망자는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로 인해 중·소 국경지대에는 소련군 병력 65만 명과 중국군 병력 81만 명이 집결해 대치하였고,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은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포함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지시하였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핵방공호 건설을 지시하고 수도를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할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중국은 4월에 9차 당대회를 소집해 소련에 대한 후속 대응을 논의한 후 5월에 소련에 협상을 요청했지만, 7월 8일에 헤이룽 강 지역에서도 양국간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8월 13일에는 수백 명의 소련군이 헬기와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3.협상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자 1969년 9월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은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1987년 2월부터 국경 협상을 시작하였다. 양국은 4년여의 협상 끝에 소련 붕괴 7개월 전인 1991년 5월 16일에 강동육십사둔을 소련의 영토로 인정하고 전바오섬 등 우수리강의 하중도 대부분을 중국 영토로 확정하는 동부국경협정(東部國境協定)을 체결하였다. 이어 1994년에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관한 국경 협정 서부국경협정(西部國境協定)이 체결되었다.
2000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남은 유일한 국경 문제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수지점에 위치한 헤이샤쯔 삼각주(러시아 명: 볼쇼이우수리스키섬)였다. 양국은 2004년 10월 14일 이 곳을 양국이 동·서로 2등분하는 국경협정을 체결했고 2005년 6월 2일, 이 협정의 비준서(批准書)가 교환되는 자리에서 두 나라의 외무장관인 라브로프와 리자오싱은 두 나라 사이의 국경 분쟁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발표하였다. 2008년 10월 14일 경계비를 세우는 작업을 완료함으로써 국경 분쟁을 종결하였다.
4.영향
중소 국경 분쟁의 여파로 중국은 미국과의 국교(國交) 회복에 나서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1979년 1월 1일에 미국과 수교했다. 이는 소련군의 취약함도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잡한 품질로 악명이 높았던 중공군을 소련군이 서류상 전력처럼 이기지 못하고 일시적으론 패퇴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오오무라 다이지로는 이 분쟁에 대해선 중국을 소련보다 높이 평가하며 일본도 무력으로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소련은 중국을 핵으로 위협하여 다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데 간신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인해 소련 군부는 결국 중국과의 전면전 계획을 철회한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파키스탄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인도는 중화인민공화국 견제를 위해 소련과 군사적 협력에 나서게 된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사이가 악화되는 것을 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때부터 주체사상을 강조하면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어느 한 쪽에 편승하지 않는 대신에 독자적인 노선을 밟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친미혐소 정책, 소련은 친미반중 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1)미중접촉과 중소의 계속된 대립
중국은 이 분쟁의 결과로 전바오 섬과 그 주변을 점령했으나 굉장히 충격[10]을 받았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969년의 위기는 소련이 중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중국 역시 소련의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점령해서 당시에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조약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제국주의 미국'과 '수정주의 소련'의 두 적대적인 초강대국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마오쩌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고립을 인정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내밀던 유화의 손길을 잡게 되었다. 중국의 생각에 의하면 소련군이 미군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1971년, 미국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인 1979년에는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일본 + 인도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소련은 소련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단 소련의 전술, 전략적 우위가 확보되었고 고질적이었던 중소국경의 불안정한 상태는 해소되었으나 브레즈네프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서유럽을 향한 유화정책이 강화되었고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선으로 1969년 9월 서독 총리로 당선된 빌리 브란트와 회담, 1970년 8월 12일, 서독-소련 불가침 협정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서독이 폴란드의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하게 하였다. 1971년 9월, 서방도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SALT 협정, ABM 조약이 체결되는 등 한동안 순풍이 불었으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틀어졌고 브레즈네프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빌리 브란트가 귄터 기욤 사건과 성추문으로 사임함에 따라 난황에 부닥쳤다. 결국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소 관계는 끝내 틀어지고 데탕트는 종식되었다.
(2) 린뱌오의 몰락
한편 이 사건으로 가장 피해자가 된 것은 국방장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 공인받는 과정에서 군의 영향력을 과시함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이 중국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외교에 관한 문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소 위기가 중국에 엄청난 피해와 민중의 불만을 야기하자 마오쩌둥은 모든 원인이 린뱌오가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린뱌오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1970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에서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한 린뱌오와 천보다는 장칭과 장춘차오에게 난타당했으며 마오쩌둥이 군부 지도자와 당내 이론가의 연합이라는 보나파르티즘의 징조를 보고 크게 경계하여 장칭과 장춘차오를 지지하고 천보다를 숙청해버림으로써 린뱌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971년 미중접촉이 시작되자 린뱌오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고립주의자, 대국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 대열에서 사실상 탈락했고 마오쩌둥은 계속 천보다 비판대회를 여는 한편 린뱌오의 측근들이 분파주의자라고 질타하고 린뱌오의 권력기반인 베이징 군구를 개편하여 린뱌오의 권력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군내에서도 당내에서도 입지가 심각하게 축소된 린뱌오가 비군사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가뜩이나 삐돌이 심약한 기질이 있던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자아비판 요구를 묵살하고 북대하의 요양소에 칩거하여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준비하게 되고 결국 끔살당하게 된다.[친소주의자 린뱌오의 몰락이다]
(3)북한 경제 몰락의 시작
한편 이 중소국경분쟁의 여파가 엉뚱한 결과를 낳았으니, 바로 북한 경제가 몰락하는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들어서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개발 계획이 잘 풀렸다. 이미 1960년 북한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 액수)는 137달러로 남한의 94달러에 비해 1.5배였다. 다른 추계방식으론 북한의 GNP는 325달러로 남한의 3.5배였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는 기치 아래 벌인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 등 농촌 4화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북한은 당시 경작지가 남한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에서는 남한을 훨씬 앞서 있었다. 이토록 경제 상황이 좋자,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머지않아 모든 인민들이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 이유로 1960년대 초반 박정희는 북한의 이런 경제 성장을 경계하면서, 북한 경제를 따라잡을 것을 국가 목표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저런 북한 경제에 1960년대 중반부터 큰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1964년부터 중국과 소련이 서로 사회주의 노선 변경 문제로 인해 시비를 벌이면서 국경 분쟁에 돌입했는데, 북한은 기술은 소련에서 식량은 중국에서 얻어오는등 이런식으로 중립 외교를 했다. 그리고 혹시 둘 중 하나가 북한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일까봐 두려워하여 군사비를 크게 늘렸다. 여기에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편들 수 없다는 약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북한의 국방비가 19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북한은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당초보다 3개년 연장하는 수정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팝,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영원히 날아간 것이다.
5.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면?
외내몽골은 소련의 자치주로 승격 되고 중국의 내몽골, 동투르키스탄, 만주까지 소련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소련과의 갈등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홍위병들의 공격에 크게 위축되었던 상황이며 많은 장교진들이 숙청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59식 전차도 충분한 수량이 배치되어있지 않아 기계화가 덜 되었다. 반면, 소련군은 전부대가 기계화 부대였으며 장비의 질도 중국을 앞서고 있었다. 이전 분쟁에서 이미 선보였듯이 중국군을 압도하는 화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덤. 즉, 전면전이 발생했다면 중국은 내몽골 자치구와 만주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으로 소련군 기계화 부대의 공세 앞에 크게 밀릴 가능성이 큰데다가 중국은 문화혁명이 절정에 이르던때라 홍위병들의 분탕으로 군사, 경제, 과학적으로도 국력이 거의 파산직전에 놓여있었다. 반면, 소련은 역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만 봐도 미군의 95%의 군사력을 지녔을 정도다. 당시로만 보면 기술적으로도 소련이 미국에게 밀릴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육군은 소련이 1위고 해군은 2위 공군은 미국과 소련이 1,2위를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핵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중국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소련에게 경고한 바 있다. 전면전 발생 즉시 미국은 핵무기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의 소련 주요 대도시들과 산업시설을 타격했을 것이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미국에게 핵보복을 가했을텐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만 해도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에 비해 크게 밀렸던 상황이었지만 1969년 기준에선 충분한 수량의 SS-11과 SS-9 ICBM이 배치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미국도 이에 못지 않은 큰 피해를 입고 상호확증파괴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제3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것이다.
중국을 구한다고 핵전쟁까지 불사할 의지가 없었더라도 중국에게 미국이 수많은 지원을 감행하며 소련을 전쟁의 수렁에 빠트리려 했을 것이고 소련군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든 차단하려고 대만을 후원하여 움직이는 등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며 동북아 일대가 전란으로 휩쓸려 일본, 베트남, 북한, 그리고 한국까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극동 연방관구는 러시아를 구성하는 8개 연방관구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의 극동 구역을 관할하며, 본부는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8,371,257명(2010년 기준)이다.
2018년 11월을 기해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속해 있던 부랴트 공화국, 자바이칼 지방이 극동 연방관구로 편입되었다. 2018년 12월에는 본부를 하바롭스크 지방의 하바롭스크에서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했다.
1.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
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의 주이다. 아무르 강과 제야 강에 면해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 공화국, 동쪽으로는 하바롭스크 지방, 서쪽으로는 치타 주와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북동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스타노보이 산맥이 아무르 주와 사하 공화국에 걸쳐 있다. 면적은 36만3,700 km², 인구는 90만2,844명(2002년).
2.부랴트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수도는 울란우데이다. 국기에도 몽골 국기처럼 소욤보 문장이 들어있다.
3.유대인 자치주 (猶太人自治州)
유대인 자치주 (猶太人自治州)는 러시아의 극동에 위치한 자치주이다. 이 지역은 "예브레이(Yiddish)“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칭된다. 유대인을 위해 설치한 자치주이나, 현재는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인이며 그 다음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다. 주청(州廳) 소재지는 비로비잔이다. 면적은 36,266km²이며, 인구는 17만 6558명이다.(2010년)
4.자바이칼 변경주
자바이칼 변경주는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극동 연방관구에 위치해 있다. 중심지는 치타 주의 주도였던 치타이다.
아무르주와 이르쿠츠크주, 부랴트 공화국과 사하 공화국, 남쪽은 몽골에 , 남동쪽으로는 중국의 내몽골자치구에 접해 있다. 2008년 3월 1일에 치타 주와 아긴스크부랴트 자치구가 통합해서 생겨났다.
5.캄차카 변경주
캄차카 변경주은 캄차카 주와 코랴크 자치구가 통합되면서 신설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2005년 10월 23일에 주민투표로 통합이 결정되었고, 2007년 7월 1일에 통합되었다. 주도는 캄차카 주의 주도였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이다.
6.마가단주(Магада́нская о́бласть)
마가단주(Магада́н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의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 주이다. 주도는 마가단이다.
면적은 461,400 km²이고, 인구는 18만2,726명이다.
7.프리모르스키 변경주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², 인구는 207만 1,210명(2005년 기준)이다.
8.사하 공화국
사하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극동 연방관구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러시아 극동이 아닌 시베리아에 속한다. 러시아의 여러 행정 구역 중 가장 넓고,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행정 구역 중에서도 면적이 가장 넓은 행정 구역이기도 하다. 중심 도시는 야쿠츠크다.
9.사할린주
사할린주는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관할하는 러시아의 주로, 면적은 87,100km2이며 인구는 546,695명(2002년 인구 조사 기준)이다. 주도는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10.하바롭스크 변경주
하바롭스크 변경주는 러시아의 변경주로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다. 중심지는 하바롭스크이다. 면적은 788,600km²이다.
11.축치 자치구
축치 자치구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자치구이다. 북동부의 최동단에 위치해 있으며, 베링 해가 위치해 있다. 면적은 737,700 km² 이고 53,00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행정 중심지는 아나디리이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르스키 변경주(沿海州)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², 인구는 207만 1,210명(2005년 기준)이다.
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로 꼽힌다. 이 만의 후미인 졸로토이로크('황금뿔'이라는 뜻) 만 연안의 반도에는 이 지구의 행정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권 러시아의 주요항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이다.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몹시 춥고, 4계절 내내 북풍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는 비가 많고 따뜻하다. 남쪽의 우수리 강과 한카 호(중국에도 걸쳐 있음) 주변의 비옥한 저지대에서는 콩·수수·벼 재배가 이루어지고, 채소재배와 낙농도 활발하다.
탄광산업이 여러 도시의 다양한 제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레티호프카와 노보샤흐틴스크에는 노천석탄 광상이 있다. 주석·납·아연·형석도 채굴된다. 북부의 보스토크에 있는 텅스텐 광산은 1970년대에 개발되었다. 해안에는 어업기지와 포경기지가 있고, 시호테알린 산맥에서는 목재가 생산되며, 작은 모피동물이 서식한다.
2015년 기준 인구는 193만 3,308명으로 프리모르스키 지구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85.6%)이었으며, 우크라이나인(2.5%)과 고려인·타타르인·우즈벡인·벨로루스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주요 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토크(60.5만 명) 이외에 우수리스크, 나호트카, 아르티옴및 파르티잔스크등이 있다. 주민의 62.5%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2015).
1.지리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서북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한반도, 동쪽과 남쪽으로 동해와 접한다.
국경의 길이 - 3,000 km 이상, 해상국경 1350 km 포함.
최고점 - 아닉 산 (1,933 m - ).
큰도시 - 블라디보스토크 (613,400명), 나홋카 (174,600명), 우수리스크 (156,000명), 아르툠 (111,500명).
호수 - 한카 호(о́зеро Ха́нка, 興凱湖)가 중국과 러시아 양국에 걸쳐 있다.
2.역사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 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나이, 우데게,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중세봉건국가로, 농업, 목축 등의 산업과 함께 고유의 전통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주족(금나라 여진족의 후신)이 17세기 초 중국 대륙을 정벌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 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였다.(청-러시아 국경 분쟁)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하고, 연해주는 계속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1858년 하바롭스크를 건설하였다.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일, 녹용, 목재, 게,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백군을 전멸시켰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부터 이 지역의 발전은 러시아를 새로 차지하게 된 볼셰비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철도와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3.주민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한국인(주로 고려인,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출신), 일본인, 중국인, 우데게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폴란드인, 타타르족, 독일인, 유대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거주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도시이다. 러시아 극동의 중심지이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행정중심지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인 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제 심포지움과 학술 회의가 자주 열리고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 함대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고래·게 등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선박수리, 목재 가공, 식료품 공업도 있다. 남동쪽의 나홋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개방된 상업항, 어항으로 러시아의 극동을 향하는 제2의 문호이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부가 있는 군항(軍港) 도시이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폐쇄도시였다
1.명칭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60년까지는 외만주가 중국의 영토였고, 해삼위(海參崴)로 불렸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 중국어 발음인 '하이선와이'(Hǎishēnwǎi)라고 부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음차한 푸라디워스퉈커(중국어: 符拉迪沃斯托克, Fúlādíwòsītuōkè)라는 이름도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우라지오스토쿠'(일본어: ウラジオストク)라고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줄여 우라지오(浦鹽)또는포항(浦港) 라고 쓰기도 했다.
2.역사
1858년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와 강제로 아이훈 조약을 체결한 후 항구와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872년에 군항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다. 1918년 봄부터 1922년까지 이 지방은 외국의 간섭군대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원조물자를 이곳에 양륙하였다.
만주를 가로질러 치타에 중동철도(中東鐵道:중국 동부 철도, 1903 완공)가 건설되어 러시아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철도로 직접 연결되자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에서 보낸 군수품과 철도장비를 들여오는 태평양의 주요항구였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여러 혁명집단의 활동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나 1918년에 외국(주로 일본)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20년에 이 도시를 떠났으나 일본은 1922년 10월 25일에 마지막 부대가 철수했다. 외국 군대가 떠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반혁명세력은 바로 무너졌고,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일 뿐만 아니라 무역항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무역항의 기능이 시의 동쪽 약 90km 지점에 신설된 나홋카항으로 옮겨졌다.
2012년 9월 8일부터 이틀간 제 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루스키 섬에서 개최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 회의를 위해 길이 3.1km의 4차선 다리인 루스키 교를 건설했다. 시내와 루스키 섬을 잇는 세계 최장 사장교(斜張橋)이다.
러시아 정부는 2020년까지 2조 루블을 투입해 첨단산업 기지와 경제특구를 조성, 100만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3.지리
연해주 남부에 위치한 표트르대제 만을 아무르스키 만과 우수리스키 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인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길이 30km, 너비 12km)의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위치한 군항 도시이다. 반도 선단의 금각만 연안에 시가지가 있다.
4.기후
블라디보스토크의 기후 구분은 현행 쾨펜의 기후 구분 상에서는 Dwb에 속한다.
한 해 평균 기온 : 4.3 °C
1월 평균 기온 : -13.7 °C
8월 평균 기온 : 20.2 °C
한 해 평균 강우량 : 722 밀리미터
5.계절
(1)봄
봄 동안에는 기온의 변화가 매우 심하다. 하루 기온 변화로 10 ~ 15 °C로 왔다갔다 변한다.
(2)여름
가장 긴 여름은 1967년에 174일, 가장 짧은 여름은 1969년에 116일이었다. 여름에는 봄과 마찬가지로 일기(日氣)의 변화가 심하다.
(3)가을
가을 기온은 건조하고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4)겨울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며 매우 날씨가 춥다. 센 바람 때문에 실제 온도보다 체감 온도가 더 낮은 편이다.
6.주민
이 도시의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민족이다.
1958년에서 1991년까지는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폐쇄된 도시가 되기 이전에 이 도시에는 고려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부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위치해 있다.
7.행정구역
레닌스키 구 (Ленинский)
페르보마이스키 구 (Первомайский)
페르보레첸스키 구 (Первореченский)
소베츠키 구 (Советский)
프룬젠스키 구 (Фрунзенский)
8.교통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은 도시 한복판에서 북쪽으로 50km쯤에 있는 아르툠에 위치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하는 2012년 개통한 아에로 익스프레스라는 철도 노선으로 연결된다.
시내 가운데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점이다.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평양역까지 가는 국제열차가 멈추기도 한다. 또한 동청철도(東淸鐵道)였던 지금의 만주횡단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그리고 포그라니치니를 거쳐 중국의 쑤이펀허를 지나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을 묶는다.
역 바로 앞에는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항이 별도로 위치하게 된다. 흔히 부동항으로 알려진 이 항구는 겨울에 얼기 때문에 쇄빙선(碎氷船)의 도움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잠수함이 전시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여객터미널을 통해 페리로 한국의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 과 연결되어있다.
2012년에 완공된 졸로토이 교가 시내로 길게 뻗은 졸로토이로크만을 가로지른다.
9.관광
우스리스크만(영어판)에는 소련 시절 폐유리병 공장에서 흘러와 쌓인 잔해물들이 침식 작용으로 인해 둥글게 다듬어져 만들어진 유리자갈로 이루어진 유리해변이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현지에서는 부흐따 스떼끌라냐야(Бухта Стеклянная)라 불리는데 직역하자면 유리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유리자갈을 공짜 기념품 삼아 싹쓸이해가는 행태가 지속되었고, 추세대로라면 2040년에는 유리해변이 사라질 지경이다.
10.교육
블라디보스토크는 4개의 대학교를 포함하여 많은 교육 시설이 있다.
극동연방대학교 (북한에서는 "원동 국립 대학교"라고 일컬음) - (줄여서 데베페우,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едераль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ДВФУ)
네벨스코이 명칭 국립 해양 대학교 (Морско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адмирала Г.И. Невельского, МГУ им. адмирала Г.Н. Невельского)
국립 블라디보스토크 경제 서비스 대학교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экономики и сервиса, ВГУЭС)
국립 태평양 의과 대학교 (Тихоокеан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едицин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ГЭУ)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daum.net)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김일성이 지휘했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 6사에서 활동하지 않은 동북항일연군의 요인들 중에서도 최용건 등 같이 만주파에 포함된 인물들이 있다(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세력. 주요 인물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김일 등이 있다)
이 만주파는 해방이후 갑산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을 정권투쟁에서 몰아내고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를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 되었으며 북한의 현대사는 김일성과 만주파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 김일성은 북한과 조선로동당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고 만주파의 영수에 불과했다.
인도, 러시아제 S-400 내달 중순 중국 접경에 배치 완료
인도군은 러시아에서 도입한 S-400 트리움프 방공미사일을 내달 중순까지 국경 분쟁을 빚는 중국과 접경 지역에 배치 완료한다고 동망(東網) 등이 3일 보도했다.
매체는 인도군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러시아제 최신예 방공미사일 S-400 시스템을 중국 국경에 가까운 펀자브주 공군기지에 설치하는데 앞으로 6주 정도면 충분하다고 전했다.
당국자는 S-400 방공미사일 1차 배치를 진행 중이라며 중요 부품과 방공미사일 시스템의 주변 장치를 운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S-400 배치가 끝나면 방공미사일 작전 범위가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으로 확대한다고 설명했다.
인도는 2018년 10월 러시아와 5억 달러(약 5970억원) 규모 S-400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앞서 인도 외무부는 지난달 초 러시아 측이 인도에 5개 포대의 S-400 시스템을 공급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인도의 S-400 도입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제재를 경고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17년 입안한 '적대세력 대응 제재법(CAATSA'에 근거해 인도에 제재를 가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같은 S-400을 들여온 터키에는 제재 조치를 취했다.
S-400 시스템은 러시아 알마즈 안테이가 설계 생산했으며 최대 400km 거리, 고도 30km 이내 목표물을 요격 파괴하는 성능을 갖추고 있다.
항공기, 순항 미사일, 탄도 미사일은 물론 스텔스 전투기도 포착, 격추 가능하다는 평가다.
좌파와 우파 그리고 진보와 보수
좌파는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사회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라면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입니다
진보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입장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민주주의(생존권과 국영자본체제, 보호무역 존중) 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보수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입장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민주주의(자유권과 민영자본체제, 자유무역 존중) 세력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국가(자유사회)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정부입니다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 노선 좌파는 입헌군주제를 부정하고 공화국이론(사회주의 공화국)이라면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노선 우파는 입헌군주제를 인정하는 민주국가이론(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좌파 세력 사회주의 국가이론이 몰락하고 우파세력 민주국가이론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 공존(연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한사회에서 좌파세력이라면 민혁당 등 친북세력이나 사회주의자동맹(사로맹) 추종세력 등입니다
조봉암선생이 창당한 진보당도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고 북한 노동당 일당독재를 거부한 우파세력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입니다
1.우파(민주국가론과 민영자본체제)와 좌파(사회주의 국가론과 국영자본체제)
(1) 우파 민주국가론(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1987년 필리핀공화국 헌법
필리핀은 민주 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정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ㄱ.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입니다
ㄴ.우파는 경제적 자유와 자유무역 등을 옹호하고 민영자본체제(민간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민주국가(자유사회)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정부입니다
ㄷ.우파는 입헌군주제를 인정하는 민주국가이론입니다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일본헌법]
ㄹ.우파는 군정통합주의(병정통합주의) 군사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병정통합주의(兵政統合主義)란 군정통합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을 모두 행정부에 소속시켜 군령 또는 군정과 같이 국가행정의 일부로서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서 수행하도록 하는 주의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군정통합주의는 통수권의 독립이 허용되지 않으며 문관에 대한 무관의 지배가 불가능함으로 군국주의(군부통치)의 대두를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 군정통합주의는 미국이나 영국, 한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국가원수가 군 통수권자이다. 문관(의회와 내각)에 대한 무관(인민군과 국방위원회)의 지배가 불가능함으로 군국주의나 침략주의 군대가 될 수 없다
(2)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오늘날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수정주의 노선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농조합(지역 지방 의회) 도입 그리고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프롤레타리아독재체제)와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의 임기제한 등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이 노농조합(지역 의회)에 의한 운영과 함께 개인의 사유재산, 이윤추구, 시장경쟁원리의 자본주의 3원칙을 인정하고 상업적 공농(工農) 생산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세금과 경영 비용,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임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노농조합(지역의회)애 의한 책임자 선출과 임기제한 그리고 사업 의결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당이나 노농조합(지역의회) 독재나 우위는 인정하지만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농장 책임자나 국영기업 책임자 개인의 독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노농조합이나 지역의회 그리고 연방의회(중앙의회)에서 선출된 국영기업(농장) 책임자나 국가주석(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이 돼야 세습화나 부패를 척결할 수 있다
ㄱ.좌파는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사회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입니다.
ㄴ.인민의회 정부론(인민 회의제 정부론)
PDR(인민 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순수내각책임제 형태 정부이론으로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ㄱ)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ㄴ).집행부(내각, 행정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권력이 의회에 집중 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국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공산당이나 노동당, 사회당의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인민의회 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대통령)이다.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의례적 상징적 인물이고 실질적 권한은 수상이 해오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석이 국가수반(국가대표)이고 군사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며 총리(수상)는 행정부 수반이다. 등소평 헌법은 국가주석은 공산당 대표(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대표자(국가대표자)로서 국가주석 임기는 5년 중임제이고 총리는 의원 임기와 동일하다 군사위원장 임기는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인민 민주주의 독재형태를 의회독재로 이해하고 있다
등소평 헌법은 형식상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 밑에 국가권력이 유지하는 형태로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했다
습근평 헌법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정부로 수평적으로 국가주석이나 군사위원장, 수상의 임기제한을 하지 않았다
실용주의 중국 등소평헌법은 공산당 국가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정부이다
인민해방군은 공산당 당군으로 공산당 총서기가 군사위원장이 돼야 한다는 이론이 습근평 이론이며 인민해방군은 중국 전체 인민의 군대로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다른 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등소평 이론이다 그리고 1982년 등소평 헌법은 권력이 집중한 마오(모택동)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했다 그래야 민주주의 원칙과 인민 전체 경제환경이 나아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등소평 헌법은 실용주의 노선 수정주의자라면 습근평 헌법은 공산주의 교조주의자이다
ㄷ.좌파는 경제적 사회와 보호무역 등을 옹호하고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합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 국영농장)를 의미합니다
ㄹ.좌파는 입헌군주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론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이론은 불평등을 해소하고 노농동맹(무상계급)에 의하여 운영 되어지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체제입니다
그러므로 좌파 사회주의 국가이론은 사회주의 공화국 이론으로 왕이 없다는 공화국만을 인정함으로 군주제를 부정합니다
-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ㅁ.좌파는 군정분리주의(병정분리주의) 군사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과 군령을 분리된 국가제도이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의 역할을 내각과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군사평의회)로 분리함으로써 군정은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에 두지만 군령은 정부나 의회보다 우월한 군령권을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군사평의회)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군 통수권에 정치적 판단(의회통제)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최고 지도자에게만 모든 군 인사권이 주어지고 있다
군정분리주의는 문관(의회와 내각)에 대한 무관(인민군과 국방위원회)의 지배가 가능함으로 군국주의가 대두 되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체들이 군을 장악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용병작전(用兵作戰)에서 정치적 이익(의회)관계가 개입될 우려가 없고 오로지 지도자에 대한 충실한 충성 군대만 있었므로 강군(强軍)을 유지할 수 있는 침략주의 국가사회주의 군대 모델이다
군정분리주의 군사정책은 군 실권자가 최고 권력자로 언제든지 군사쿠데타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으며 내전 위기때 군벌끼리 권력투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병정분리주의(군정분리주의) 국가는 중국이나 북한, 이란, 리비아 카다피, 시리아등 좌익군사정부 국가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이다
병정분리주의(군정분리주의) 군사정책은 당군이론으로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와 인민군(인민해방군)이 노동당(공산당)과 내각, 의회를 사실상 장악하여 현역군인 중심으로 북한이나 중국정부의 권력을 장악해오고 있다. 중국은 등소평 헌법에서 국가주석과 부주석 임기제한 그리고 군사정책도 군정통합주의로 개혁을 추진해오고 있다. 군은 당군이 아닌 국민의 군대, 국군이 돼야 한다
ㅂ.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년 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ㄱ)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 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ㄴ)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a.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b.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c.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d.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ㄷ)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a.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b.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敵)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이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과 ‘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이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는 '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ㄱ)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ㄴ)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ㄷ)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ㄹ)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은 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2.보수와 진보
오늘날 중도 진보냐 중도 보수냐는 정책개발에 달려 있습니다
평민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진보이며 중산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보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는 우파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 자유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보수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생존권, 보호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진보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중국 모택동 노선 마스-레닌주의(교조주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사회주의 국가만을 인정하는 좌파세력이라면 등소평 실용주의 노선은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자본주의 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모택동을 좌파라면 등소평은 우파입니다, 중국 실용주의 우파정부(사회주의 국가 실용주의 우파정부) 내부에서 등소평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진보파가 아닌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보수파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합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경제는 '성장'과 '분배'의 양면이 필요합니다. '성장'을 위한 '대담한 위기 관리 투자 · 성장 투자 '와 함께 '분배'에 의해 소득을 늘리고, '소비 심리'를 개선합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성장과 분배의 호순환(好循環)'입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정부입니다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민주국가는 대부분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미합중국 헌법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민주국가의 경제토대는 민영자본체제(민간 자본주의)이며 정치토대는 병정통합주의 노선 의회민주주의입니다
독재국가의 경제토대는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이며 정치토대는 병정분리주의 노선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정부입니다.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노선 1인 장기집권 독재정권과 투쟁하는 민주화 세력에게 제한전쟁 모델로 군사적 원조를 하는 것은 민주세력에게 큰 힘이 되어 왔습니다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개혁개방정책 민영자본체제 민주국가 입장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은 인민의(民有),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정부 민주정부 입장인 인민전쟁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인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독재정권과 투쟁하는 민주화 세력 무장단체에게 군사작전(제한전쟁 모델)을 승인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자유권과 사회권(생존권)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합하기 어렵지만 가정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데에서는 서로 조화가 필요합니다
국가를 운영하는데서 극단적 자유권은 무정부주의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극단적 사회권(생존권)은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극단적 자유권을 추구할때는 마약복용이나 동성애 등 자유방임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개인 극단적 사회권(생존권)을 추구할 때는 국영자본체제나 공동생산 공동분배 집단농장(국영농장이나 국영기업), 계급투쟁 등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유권
국가로부터 간섭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말한다. 즉 헌법 또는 국회의 의결을 거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국가권력에 의하여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하는 권리이다. 자유권이 국가에 앞서고 국가를 초월하는 자연법상의 권리이냐, 또는 실정법에 의해 승인된 실정법상의 권리이냐에 관해서는 학설이 대립되고 있다. 또 자유권이 권리로서 성립한다면 그것은 포괄적인 권리인가 헌법이 규정하는 개개의 자유권만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에 관해 헌법은 국민의 자유나 권리는 헌법에 열거하지 않은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헌37①)고 밝히고 있으므로 자유권은 포괄적인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그 위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헌37②). 자유권은 근대적 인권으로서 가장 먼저 발달되었던, 가장 근원적인 기본권으로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권리가 자유권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권은 대국가적 방어권으로 지칭된다.
이러한 자유권의 의미는 특히 국민과 국가의 이해관계가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군주국가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의 민주국가에서도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서 발전된 법의 지배(Rule of law) 그리고 그 영향 하에 미국에서 발전된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의 성격과 내용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절차적인 보장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영미의 인권보장은 영장제도, 법원조직의 정비, 배심제도 등을 통해 특징지어지며,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국민이 자신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종교의 자유,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각종 자유권의 보장은 국가에 의한 부당한 침해로부터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발생되었을 경우에 그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구제 수단의 마련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서 발전되었다.
사회권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 국가로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 생활권이라고도 한다. 교육을 받을 권리(헌31), 근로의 권리(헌32), 근로자의 단결권(헌33), 혼인과 가족생활, 보건에 관하여 보호를 받을 권리(헌36),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헌34)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권리는 모두 국가의 사회 국가적인 책임을 규정하였을 뿐 반드시 국민 개인에게 구체적인 청구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사회권은 종래 정치적 민주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20세기의 헌법(바이마르헌법이 시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사회권의 보장은 자유국가의 중대과제가 되었다.
인권의 개념은 좁게는 개인이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이며, 넓은 의미의 인권은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하기위한 제도와 여건을 조성해서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시켜 주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적 연대를 지속하기 위해 사회구성원이 사회에 대해 가지는 권리를 사회권적 인권, 복지권으로서의 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권은 국민의 생존 유지와 생활향상과 관련되는 권리로써 생존권이라고 불린다. 오늘날 사회권은 종종 복지권(welfare right)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국가의 의무의 이행이 재판에 의해서 강제될 수 없을지라도 국가가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할 의무는 헌법에 의거한 법적 의무라고 보고 있다. 국가인권위 설립 초기부터 3년 정도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진정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사회권적 기본권에 대한 진정이 늘어나는 추세다
자유권(인민)과 사회권(생존권, 국민)
a.인민(人民)-국민 개개인 의미(기본권 향유자)-개개인의 국민-기본권 향유자로서의 국민
권리장전 사람을 지칭할때는 인민으로 사용해야 정확하다(루소 사상:회의제 정부론)
기본권 중 자유권 등의 표현(세계 각국 인민의 권리, 자유권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똑 같이 적용됨)
-신체의 자유권:실체적 보장(법률주의)과 절차적 보장(신체자유의 절차법적 보장)- 강제노역의 금지, 연좌법의 금지(친족의 행위로 인한 불이익 처우금지), 고문을 받지 아니할 권리등
-사회,경제적 자유권: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등
-정신적 자유권: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국교부정과 정교분리 원칙),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의 자유(대학 자율성 보장)등
-행복추구권과 생명권, 기본권의 초국가성과 포괄성 규정 보장(인격권, 수면권, 휴식권, 일조권, 애정자유권, 스포츠권, 건강권등 보장):축첩(일부다처)제도나 특수신분제도 귀족이나 노예제도등 부정
-인간의 존엄성 보장:집단추방, 대량학살, 고문, 노예제도, 인신매매, 인간생체실험(뇌파로 뇌 세뇌로 각종 정치공작행위이나 테러행위, 무기확보를 위한 인간생체실험 등), 마약, 강제노동등 금지.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 화학적 물리적 생체실험사용 금지, 인간을 최저한 생존까지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빠뜨리는 행위 금지, 태아의 생명권과 낙태행위금지(사회적 합의에 의한 낙태동의)
b.국민(國民)-인민의 전체(나라 인민 전체 의미,선거권 향유자나 국가기관 대표자)-주권자로서의 국민--이념적 통일체로서 국민.
대한민국이나 중화민국, 미합중국 사람을 지칭할때는 국민로서 사용해야 한다(로크 사상: 국민 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출)
기본권 중 사회권(생존권)이나 선거권 등의 표현(자국민, 사회권은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에 따라 차등 사회보장 정책 추진)
-인간다움 생활을 할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의무교육과 평생교육)
-근로의 권리(실업자 해소)
-근로자의 근로 삼권
-쾌적한 주거생활의 보호
-최저 임금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환경권 및 주거생활에 관한 권리
-혼인과 가족생활에서의 양성평등과 보건, 모성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결혼, 여성보호, 아동보호)
-상이군경 및 전몰군경 및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에 대한 우선 취업권 부여
-노인복지와 국가보호
-장애인 보호
-생활무능력자의 권리를 보장(생활보호법이나 의료보호법)
-군 복무 예비역 군인에 대한 복지(경력이나 국가보호)
-기본소득이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을 의미한다.
국가나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어떠한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현금 소득을 말한다. 재산이나 건강, 취업 여부 혹은 장차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등, 일절 자격 심사를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일정한 돈을 주기적으로 평생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복지 프로그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기초적인 생활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나온 개념이다
자동화 등 노동시장 환경 변화로 인해 인류가 보다 창의적이고 안정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복지제도로 세계 각국에서 논의하고 있다.
c.권리(權利)--인민 법률상 투쟁의 힘[국가나 힘(세력)이 있는 제3자에 대한 투쟁의 힘--자유권이나 생존권 등]
d.의무(義務)--인민 법률상 구속의 힘[국가에 구속--노동.국방과 납세의 의무 등]
교조주의 노선은 전쟁세력으로 경제발전과 국민들의 삶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고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극우정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Fro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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