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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솔리니 최후의 4일"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영화 "무솔리니 최후의 4일"

CIA bear 허관(許灌) 2022. 4. 27. 00:49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하자 무솔리니는 왕실근위대에 체포되어 포차 섬에 이어 사르데냐 해역의 외딴 도서로 그리고 종국에는 아브루치 산맥 그란사소디탈리아의 한 호텔로 유폐되었지만 산기슭에 글라이더를 띄워보낸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무솔리니는 독일에게 이탈리아 전지역의 점령·통치를 용인하는 대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치아노를 비롯한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로에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은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의 배후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에 불과했고 각료 한 사람이 회고했듯이 총리는 다가올 종말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환상을 꿈꾸며 역사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1945년 4월27일 지지기반을 다 잃은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꾀했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망신스러운 대패를 거듭했던 그는 궁극적으로 연합군의 이태리 침공을 초래하였다. 정신이 든 국민들은 국가 위기를 자초한 그를 버렸다.
일단 히틀러의 도움으로 재집권은 했지만 (이태리 북부지역) 밀려오는 연합군의 진격에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동고' 마을 인근에서 그의 트럭 부대는 파르티잔의 기습 공격을 당했다.
애첩 클라라 페타치, 그리고 파시스트 당의 심복들과 함께 함께 독일군 상사로 위장하고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독일군을 따라 스위스로 도주하다가 '코모 호반'에서 이태리-공산당 빨치산(파르티잔)들에게 체포되었다.
총리겸 대원수인 무솔리니는  외투와 철모를 쓰고 독일군병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은 고급 가죽 부츠로 인해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튿 날, 파르티잔은 한 농가로 그를 끌고 갔다.
나중에 정부인 클라레타 페타치가 합류했다.
클라레타는 무솔리니와 재회를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그 둘에게 차에서 내려라고 명령하고선 기관총을 부착했다. 그 둘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 기관총이 고장이 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총으로 공산주의자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에게 총을 겨누었다.
무솔리는 외투를 벗어젖히며 말했다. " 가슴을 쏘시오."
그러자 클라라가 총신을 잡자 아우디시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는 가슴에 총을 맞았다.
그리고 나서 머신 피스톨로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를 아홉 차례 쏘아 죽였다.


클라라가 처형 당했을 때 여자 관계가 문란했었던 무솔리니 보다 29세나 젊은 33살이었다.

 

두 시신은 밀라노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무솔리니의 얼굴에 오줌을 누었다.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가 살해당한 아침, 파르티잔은 그들의 시체를 밀라노의 퍼즐 라우레아테 차고 앞에 내버렸다. 군중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험한 말들을 외쳐댔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 서서 조소했다.
한 여자는 자신의 살해당한 다섯 자녀를 위해 죽어있는 무솔리니의 시신에 피스톨을 다섯 차례나 당겼다.  

마침내, 두 구의 훼손된 시체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거꾸로 매달렸다.
군중은 수시간에 걸쳐 비웃음을 던지고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그 다음 날 그는 프레다포에 있는 가족 묘에 매장됐다.

 

19454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는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427일 공산주의 계열의 파르티잔인 제52 가리발디 여단 정치부 소속 우르바노 라차노는 코모 호 인근의 마을 동고에서 무솔리니와 페타치를 체포하였다. 체포 당시 무솔리니는 독일군으로 위장한 병사들과 함께 독일 장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메체그라로 연행되어 데 마리아 가족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튿날 파르티잔은 무솔리니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그와 페타치를 총살하였다. 처형 기록에는 무솔리니의 총살을 지휘한 사람이 "발레리오 대령"이라 되어있다. 발레리오 대령의 실명은 왈테르 아우디시오이었으며 무솔리니를 처형한 후 이 사실을 전국 민주 평의회에 통지하였다. 처형 당일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가 구금되어 있는 집으로 가서 "나는 당신을 구하러 왔다.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나?"라고 말하며 무솔리니를 안심시킨 뒤 차에 태워 마을 교외로 데리고 나갔다. 아우디시오는 으슥한 곳에서 무솔리니에게 "내려"라고 명령했다.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서로를 끌어안고 공터에 서있었다. 아우디시오는 먼저 페타치를 쏘았다. 페타치가 쓰러지자 무솔리니는 재킷을 열고 "가슴에 쏴라"라고 말했으며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의 가슴을 관통시켰다. 무솔리니는 쓰러졌으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아우디시오는 다가가 가슴에 다시 한 발을 쏘았다. 무솔리니는 몹시 고통스러워하였다. 아우디시오는 그의 운전병에게 "저 작자 좀 봐, 이제야 얼굴에 감정이란게 나타나는군"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와 함께 있었던 병사들은 그날 밤 총살되었다

 

1945429일 무솔리니와 페타치, 그리고 함께 처형된 파시스트들의 시체는 트럭에 실려 밀라노로 보내졌다. 새벽 3시 그들의 시체가 일라노의 피아자 로레토에 내려졌다. 그곳은 일전에 파시스트당에 의해 15명의 반파쇼 운동가가 처형된 곳이었다. 수많은 군중에 의해 차이고 짓밟힌 그들의 시체는 주유소 지붕에 거꾸로 매달렸다.

 

같은 날 한때 "무솔리니가 신이다."라는 발언을 한 파시스트 왕당파 아실레 스타라체 역시 붙잡혀 처형된 뒤 무솔리니가 매달린 피아자 로레토로 실려왔다.[69] 파르티잔들은 곳곳에 숨거나 저항하던 파시스트들을 붙잡아 처형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를 여기에 거꾸로 매달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