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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북아국가들의 대러시아정책 본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북아국가들의 대러시아정책
CIA Bear 허관(許灌) 2022. 4. 24. 11:46러시아 극동 연방관구는 중국 동북3성과 한반도(북한), 일본 열도 등으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북아 국가들의 대러시아정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은 대러시아제재조치에는 동참하지 않으면서 우쿠라이나정부에 대해서는 인도주의 물자를 제공하는 중립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북한은 친러시아정책, 남한과 일본등은 친미, 친서방정책을 지지하고 대러시아 제재조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외만주(外滿洲)
외만주(外滿洲)는 만주 동쪽의 러시아 영토로, 아이훈 조약(1858년)과 베이징 조약(1860년)으로 중국이 러시아에 넘겨준 지역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외동북(外東北)이라고도 한다. 외만주에 해당되는 곳은 현재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南部) 및 아무르주이다.
원래는 퉁구스계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연해주는 고대에 고구려와 발해, 말갈의 영역이었다.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는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국경으로 정했으나,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이북 지역이,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이 각각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는 외만주의 일부인 볼쇼이우수리스키섬과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을 자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아이훈 조약
아이훈 조약(愛琿條約)은 1858년 헤이룽장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가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1.배경
러시아는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 중인 것을 기회로 청나라의 전권대사 이산을 협박해서 이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 조약은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은 것으로, 러시아 제국은 이 조약을 구실로 청나라로부터 스타노보이 산맥(외싱안링 산맥: 外興安嶺)과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 사이의 넓은 지역을 빼앗음으로써 시베리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60만km2(한반도 면적의 약 3배)의 땅을 확보하고[1][2] 태평양으로 향하는 부동항(블라디보스토크)을 확보할 발판을 만들었다.
2.내용
(1)헤이룽 강(黑龍江, 아무르 강)의 좌안은 러시아 령으로 한다. 헤이룽 강 우안 중 우수리 강 서쪽은 청나라 영토로 하고, 우수리 강 동쪽(연해주)은 두 나라가 공동 관리한다.
(2)헤이룽 강 좌안의 만주인 촌락(강동육십사둔)은 청나라가 관할한다.
(3)헤이룽 강·쑹화 강·우수리 강의 항행은 두 나라의 배로 제한한다.
(4)위 세 강 연안의 주민 간에는 무역을 허용한다.
3.결과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강동육십사둔을 제외한 아무르 강 이북 지역을 전부 러시아에 내주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 조약을 승인했다가 얼마 뒤 부인하였으나, 2년 뒤인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아이훈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마저 러시아 영토로 내주었다
베이징 조약
베이징 조약(북경조약, 중국어: 北京條約 Běijīng Tiáoyūe[*])은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10월 18일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청국은 영국에 주룽(현재의 홍콩 중심부)을 내주었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가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영국은 청나라의 각종 이권을 빼았아 갔으며, 프랑스는 청국 영토 내에서 프랑스인의 우월함을 인정 받고 청국 영토내에서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 받았다.
1.배경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와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건축물와 주변을 약탈하고,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러시아 대표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Игна́тьев) 영국 대표인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 프랑스 대표인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 (Jean-Baptiste Louis Gros)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끼어들었다.
영국군, 프랑스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는데(애로호 사건 참조), 조약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살랐다.
이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에 자금성의 남쪽 건물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약은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의 형식으로 각각 맺어졌다.
2.조약내용
청나라가 비준을 거부한 1858년의 톈진조약 내용을 비준한다.
톈진을 개항한다.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를 허용한다.
배상금 800만냥을 지불한다.
프랑스에 대해 몰수한 가톨릭 재산 반환을 인정한다.
청나라에 의한 자국민의 해외 이주 금지 정책의 철폐와 이민 승인
3.결과
영국과 러시아는 위의 조건 외에 개별적으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었다.
난징 조약(南京條約, 1842년)으로 영국에 홍콩섬을 내준 청나라는 이 조약의 체결로 홍콩 섬 맞은 편의 주룽을 1860년 10월 24일부터 영국에 할양하였다.
청나라는 아이훈 조약(1858년)으로 러시아 제국에 헤이룽 강(黑龍江) 이북지역을 넘겨준데 이어 이 조약으로 우수리스키 지방(연해주와 남부 하바롭스크 지방)을 할양하였다.
러일 전쟁
러일 전쟁(Russo-Japanese War)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이었다. 러일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제국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동항으로, 여름에 주로 이용되었으며 여순 항(당시는 포트 아서)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청일 전쟁 이후인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차르 정부와 일본 간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으로 하는 분할 통치안을 역제안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일본은 1904년 협상 결렬 후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전쟁을 선택하였다.
1.배경
러시아는 1890년대에는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을 흡수하면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캄차카반도까지 뻗어 있었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과 존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러시아는 중국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조선과 독자적으로 수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는 영국과 충돌하였으며, 발칸 반도 및 근동에서는 크림 전쟁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양국은 충돌하기에 이른다. 극동 방면에서는 조선과 러시아의 수교를 러시아의 남하로 간주한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였다.
한편,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사상, 기술적인 진보, 풍습 등을 받아들이려 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짧은 시간 내에 고립에서 벗어나 근대화된 산업 국가로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1895년에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에서의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얻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를 견제해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소유하던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되돌려줬고(삼국 간섭), 이리하여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여순항 양도
1897년 12월, 러시아 제국의 함대가 여순항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3개월 후, 청과 러시아 제국 간에 협정 (러청밀약)을 맺어 러시아 제국은 여순항과 대련만을 조차하여 주변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으로서는 부동항 확보가 전략상 중요하였고 1년 후에는 이를 확고히 하려고 동청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대련과 여순역이 소실되자 러시아 제국은 의화단에게서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를 점령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아관파천 이후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은 대한제국으로부터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여 한반도의 교통망을 장악하고, 도쿄의정서를 체결하여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군을 몰아내기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였고,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권한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독점권과 한반도의 북위 39도 이북에 대한 중립지역 설정, 한반도의 군사적 이용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영일 동맹(1902년)을 맺었는데, 이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나라가 있으면, 영국이 일본의 편으로 참전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러시아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영국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그 뒤에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이 1904년 2월 4일부로 협상 중지를 선언했다. 일본은 2월 초에 마산포와 원산 등지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는 등, 전쟁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인 제이컵 시프로부터 전비의 40퍼센트에 이르는 공식지원과 상당한 비공식 금융지원을 받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국채시장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이 승리했을 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당한 수익금을 챙길 수 있었다.
2.진행
일본 제국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하였지만, 선전포고에 앞서 2월 8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극동 함대, 2월 9일에는 제물포항의 전함 두 척을 공격하였다. 일본의 공격 소식에 러시아 제국의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는 아연실색하였으나 일본 제국이 선전포고하지 않고서 전쟁을 걸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장관들도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과 전투한 지 8일 후 전쟁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4년 1월 23일 대외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한성부를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5월에는 일본이 대한시설강령을 내세워서 중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
(1)1904년 전투
만주의 남서부 요동반도에 있는 여순항은 러시아 제국의 주요 해군 기지로 요새화되었다. 아시아 본토에서 전쟁을 벌이려면 바다를 손에 넣어야 했으므로, 일본 제국의 첫 군사 목표는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함대의 축출이었다.
a.여순항, 제물포 해전
1904년 2월 4일, 러시아 제국의 태평양 함대 수십 척이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가 일본에 입수되었다.
2월 6일 아침, 도고 헤이하치로는 사세보에서 제물포의 육군 상륙과 여순항의 공격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켰다.
2월 8일 저녁,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하는 일본 제국 함대가 여순항의 러시아 제국 군함에 어뢰를 이용하여 기습 공격하여 개전하였다.
공격에 전함 두 척이 대파되었고 이 공격은 다음 날 아침 ‘여순항 해전’으로 발전했다. 수차례의 결판나지 않은 해상 전투가 이어졌으나 도고 헤이하치로는 항구의 해안 포대에서 보호받는 러시아 제국의 함대를 충분히 공격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해군은 1904년 4월 13일 제독 스테판 마카로프가 전사하여 어쩔 수 없이 항구를 떠나야 했다.
이 전투는 일본군 약 3천의 제물포 상륙을 은폐해 주었고 일본군은 인천에서 이동하여 한성을, 대한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였다. 당시 제물포 앞바다에는 각국 여러 전함이 정박하고 있었고 일본 제국 해군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위협받고 피신하였으며, 2월 9일 오후까지 14:2로 벌어진 일본 제국 해군과 러시아 제국의 해군 간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정예함인 바략함과 코리에츠함은 자침하거나 자폭하였다.
같은 날 일본 제국은 인천항에 병력 5만을 상륙시켰다.
1904년 2월 12일, 러시아 제국 공사가 철수하자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국교가 단절되었다.
b.압록강 전투
4월 말, 이테이 쿠로키가 지휘하는 일본 제국 육군은 러시아 제국군이 점령한 만주를 향해 압록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기간에 만주를 지배할 발판을 얻으려는 일본의 전략과 달리, 러시아 제국은 당시 이르쿠츠크 부근까지의 미완성인 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수송되는 지원 병력을 기다릴 시간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1904년 5월 1일, 압록강 전투는 러일전쟁의 첫 육상전이 되었고 일본 군대는 저항 없이 강을 건너 러시아 제국의 거점을 공략하였다.
일본 군대는 만주 해안 곳곳에서 상륙하여 일련의 교전으로 러시아 제국군을 여순항으로 축출하였다. 1904년 5월 25일의 남산 전투를 포함한 이런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은 방어에만 전념하여 반격하지 않았다.
c.여순항 봉쇄와 황해 해전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여순항 사용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2월 13일 ~ 14일, 일본군은 시멘트를 채운 증기선 일곱 척을 해협 깊숙이 가라앉혀 여순항을 봉쇄하려 하였으나 배가 너무 깊이 가라앉아 실패하였다.
3월, 부제독 마카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제1 태평양 소함대를 맡아 여순항의 봉쇄를 돌파하려 하였다.
1904년 4월 12일, 러시아 제국의 노급전함 두 척과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와 포베다 호가 여순항 밖으로 빠져나갔으나 일본 제국군의 기뢰가 폭발하여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곧바로 침몰하고 포베다는 수리하고자 항구로 견인되어야 했다. 가장 유능한 러시아의 전략가였던 마카로프 제독은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전사하였다.
러시아 군대는 일본의 방어성 기뢰 설치 전술을 수용하였다. 1904년 5월 14일, 일본의 전함 두 척, 야시마와 후츠다가 여순항 바깥쪽에 러시아군이 설치한 기뢰에 피해를 보았다. 각각은 적어도 기뢰 두 발씩과 충돌하였다. 야시마는 승조원 450명과 함께 수 분 내에 침몰하였고 후츠다는 수 시간 뒤에 견인되었다.
6월 23일, 러시아 제국의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의 지휘 하에 소함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실패하였다. 6월 말, 일본의 포병이 항구를 포격하였고 오랫동안 여순항을 봉쇄하였다.
1904년 8월 10일, 러시아 제국의 함대는 포위를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재시도하였지만, 공해에 닿기 전에 도고 헤이하치로의 전함으로 구성된 소함대와 마주친다. 러시아 제국에는 ‘8월 10일의 전투’, 흔히 ‘황해 해전’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양측은 포격을 주고받는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 제국의 또 다른 전함이 태평양으로 파견될 것임을 알았지만, 이 전투는 일본이 승리할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일본은 두 척의 전함을 러시아 기뢰로 잃어, 한 척만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함들은 함포를 계속 주고받았으며, 러시아의 기함인 전함 체사레비치가 함교에 직격탄을 맞아 함대 사령관인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이 사망하게 된다. 이 때문에 러시아 함대는 다시 여순항으로 향하게 되어, 양측 모두 침몰한 전함이 없었지만, 러시아는 다시 여순항에 머무르게 되었고,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함대에 대항할 전함이 여전히 건재했다.
끝내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 제국의 여러 전함은 포위한 일본 제국 육군이 한 포격으로 말미암아 침몰하였다. 육지로 포위된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도 실패하였다. 8월 말의 요동 전투 후 러시아 제국군은 봉천 (현재의 선양)으로 후퇴하였다. 여순항은 주둔군 지휘관이 상부와 의논 없이 일본 제국에 항구를 양도하여 1905년 1월 2일에 결국 함락되었다.
d.발트 함대의 이동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러시아 제국은 제독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지휘 하에 희망봉을 거쳐 아시아로 향하는 발트함대를 보내어 러시아 함대를 지원하려 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일부 함대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마다가스카르 섬의 노스베항에서 합류하였다.
e.울릉도와 독도
1904년 8월, 일본 정부는 동해에서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 담당으로 지정하였으며, 2월 22일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하였다. 울릉도에는 1904년 9월, 독도에는 1905년 8월에 망루를 세웠다.
(2)1905년의 전투
여순항이 함락되자 일본 제국 제3군은 북진할 수 있었고, 남방의 러시아 제국이 점령한 선양에 지원군을 파견할 수도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닥쳐와 1904년의 ‘사하 전투’ 이후로는 육지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양측은 선양 남쪽 전선 110km를 따라 야영하였다.
a.흑구대와 선양 전투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가 지휘하는 러시아 제2군이 1905년 1월 25일 ~ 29일에 흑구대시 부근에서 일본군의 왼쪽 측면을 공격하여, 거의 돌파하였다. 이는 일본군을 놀라게 하였으나, 다른 러시아 부대의 지원 없이 공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그리펜베르그는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으로부터 중지 명령을 받아 전투는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일본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러시아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만주의 러시아군을 괴멸시켜야 함을 알고 있었다.
봉천 전투는 1905년 2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날에는 일본군이 80km 전선을 따라 선양을 둘러싼 러시아군의 우측과 좌측면을 습격하기 위해 진행하였다. 양측은 참호를 파고 수백 대의 대포에 의해 지원되고 있었다. 며칠간의 격렬한 전투 뒤에, 양 측면에 가해지는 압박은 러시아군의 양쪽 끝의 방어선이 안쪽으로 휘어지게 하였다. 포위될 것을 알아차리고, 러시아군은 퇴각을 시작하여, 수차례의 지연작전을 하였으나, 곧 혼란과 러시아군의 붕괴 속에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3월 10일, 전투 후 3주가 지났을 때, 쿠로파트킨 장군은 선양 북쪽으로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철수하는 러시아 제국의 만주군의 대형은 전투 부대로 분해되었으나 일본군은 이들을 완벽히 괴멸시키지 못했다. 일본군도 희생자가 많아서 추격할 상태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군이 패배한 선양의 전투는 중요한 전투였으나 결정적이지는 않았고 마지막 승리는 해군에 달려 있었다.
b.쓰시마 해전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발트 함대)는 여순항을 구하기 위해 29,000km를 여행하였으나, 뤼순 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마다가스카르에 있었던 함대의 사기를 꺾었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유일한 희망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는 3가지가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한 해협을 통과하는 길은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었으나, 일본에 매우 가까워 위험한 길이었다.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시아 제국군의 진행을 간파했고 여순항이 함락되어 제2·제3 태평양함대는 극동의 유일한 러시아 제국의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리라는 계획을 알았다. 전투 계획이 세워졌고 여러 군함은 러시아 제국의 함대를 격멸하고자 수리되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처음에는 전함 6척으로 구성되었으나 당시에는 4척이 남아 있었으며, 순양함, 구축함, 어뢰정은 그대로였다. 제2 태평양함대는 보로디노급 신형 전함 네 척을 포함하여 8척의 전함,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까지 총 38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5월 말, 제2 태평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여행의 막바지에 있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 제국군의 병원선이 불빛을 노출하여 일본의 무장한 가장순양함 시나노마루에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무선으로 도고 사령부에 알려졌고 일본의 연합함대는 곧 출격을 명령받았다.
여전히 정찰에서 정보를 받으면서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의 함대 위치를 알 수 있었고 러시아 제국 함대의 'T'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일본군은 5월 27일부터 5월 28일에 러시아 제국 군대와 교전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함대는 전멸되었고 전함 8척과 많은 작은 함정, 5,000명 이상 인원을 잃었고 일본군은 어뢰정 3척과 116명을 잃었다. 러시아 제국군은 함정 3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져나갔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의 재정 지출이 너무 커 결국 일본 수뇌부는 미국의 중재하에 러시아에 강화 협정을 요청하였다.
3.전쟁 종료
(1)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말미암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a.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b.러·일 양군은 랴오둥 반도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c.러시아 제국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의 철도,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
d.양국은 만주의 철도들을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한다.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로 한다.
e.일본 제국이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 제국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 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f.동해·오호츠크해·베링해의 러시아 제국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한다.
(2)사상자
전쟁 사상자 수에 동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본 측 사망자는 약 4만 7천 명, 질병 탓인 사망자가 포함되면 약 80,000명 정도이다. 러시아 제국 측 사망자는 4만 ~ 7만 명, 전체적으로는 약 13만 정도로 추산된다
중소 국경 분쟁


중소 국경 분쟁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국경인 아무르강과 지류인 우수리강 유역의 영유권을 놓고 1969년에 벌인 국경 전쟁을 말한다.
1969년 3월 2일,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군사 충돌은 9월 11일까지 계속됐다. 이는 영토 문제 뿐만 아니라 스탈린 사후 심화되었던 중·소의 대립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1.발단
1956년 헝가리 반소봉기가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맹주국이라는 소련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게다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비난하고 중국 내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일어나자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 이후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을 외치던 소련을 본 마오쩌둥은 소련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런 노선주의 논쟁으로인해 1960년대 이후로 소련과 중국간의 군사/과학/교육적 교류는 완전히 단절되고 특히 1960년 8월에는 중국 내에서 체류 중이던 소련 군사고문, 과학기술자들이 전면 철수하게 되고 마오쩌둥 역시 소련 내의 중국 유학생들을 귀국시키면서 표면화되었다. 중국과 소련은 양측을 준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국경지대에는 군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진먼 섬 포격전과 관련한 소련의 소극적 대응과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양국간의 입장차이로 인해 사이는 더욱 경색되었고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중국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어 마오쩌둥과 그의 측근들 입장에선 우려될 만한 사안이였다.
2.전개
우수리 강에서 발생한 홍수 때문에 전바오섬의 국경지대는 불명확해졌고, 중·소 양국 국경 수비대원들 간의 말다툼이 1969년 3월 2일 16시 12분에 양측 간의 몸싸움으로 번졌다. 중국 국경수비대원들이 소련군의 복싱에 밀리자 중국군은 특수부대원들을 동원해 봉술로 소련군을 제압했고, 소련군은 봉을 무기로 판단해 중국군을 총격으로 사살해 양측간의 난투극은 총격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3월 12일에 중국군 3개 소대 병력이 2개 소대 규모의 소련 국경 수비대를 기습하였으나 60여 명의 병력과 6대의 BTR 장갑차를 동원해 반격한 소련군에 크게 패하여 소련군이 14명 사망하고 중국군이 30명 넘게 사망하였다. 3월 15일에는 10대의 T-62 전차와 14대의 장갑차에 100여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소련군 제병합동부대의 기습에 85mm 대전차포와 59식 화전통으로 대응하던 중국군 보병부대가 소련군의 BM-21 로켓포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2일부터 2주 동안 벌어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공식 사망자는 59명이었고, 중국군의 사망자는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로 인해 중·소 국경지대에는 소련군 병력 65만 명과 중국군 병력 81만 명이 집결해 대치하였고,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은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포함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지시하였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핵방공호 건설을 지시하고 수도를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할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중국은 4월에 9차 당대회를 소집해 소련에 대한 후속 대응을 논의한 후 5월에 소련에 협상을 요청했지만, 7월 8일에 헤이룽 강 지역에서도 양국간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8월 13일에는 수백 명의 소련군이 헬기와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3.협상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자 1969년 9월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은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1987년 2월부터 국경 협상을 시작하였다. 양국은 4년여의 협상 끝에 소련 붕괴 7개월 전인 1991년 5월 16일에 강동육십사둔을 소련의 영토로 인정하고 전바오섬 등 우수리강의 하중도 대부분을 중국 영토로 확정하는 동부국경협정(東部國境協定)을 체결하였다. 이어 1994년에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관한 국경 협정 서부국경협정(西部國境協定)이 체결되었다.
2000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남은 유일한 국경 문제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수지점에 위치한 헤이샤쯔 삼각주(러시아 명: 볼쇼이우수리스키섬)였다. 양국은 2004년 10월 14일 이 곳을 양국이 동·서로 2등분하는 국경협정을 체결했고 2005년 6월 2일, 이 협정의 비준서(批准書)가 교환되는 자리에서 두 나라의 외무장관인 라브로프와 리자오싱은 두 나라 사이의 국경 분쟁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발표하였다. 2008년 10월 14일 경계비를 세우는 작업을 완료함으로써 국경 분쟁을 종결하였다.
4.영향
중소 국경 분쟁의 여파로 중국은 미국과의 국교(國交) 회복에 나서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1979년 1월 1일에 미국과 수교했다. 이는 소련군의 취약함도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잡한 품질로 악명이 높았던 중공군을 소련군이 서류상 전력처럼 이기지 못하고 일시적으론 패퇴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오오무라 다이지로는 이 분쟁에 대해선 중국을 소련보다 높이 평가하며 일본도 무력으로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소련은 중국을 핵으로 위협하여 다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데 간신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인해 소련 군부는 결국 중국과의 전면전 계획을 철회한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파키스탄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인도는 중화인민공화국 견제를 위해 소련과 군사적 협력에 나서게 된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사이가 악화되는 것을 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때부터 주체사상을 강조하면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어느 한 쪽에 편승하지 않는 대신에 독자적인 노선을 밟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친미혐소 정책, 소련은 친미반중 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1)미중접촉과 중소의 계속된 대립
중국은 이 분쟁의 결과로 전바오 섬과 그 주변을 점령했으나 굉장히 충격[10]을 받았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969년의 위기는 소련이 중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중국 역시 소련의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점령해서 당시에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조약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제국주의 미국'과 '수정주의 소련'의 두 적대적인 초강대국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마오쩌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고립을 인정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내밀던 유화의 손길을 잡게 되었다. 중국의 생각에 의하면 소련군이 미군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1971년, 미국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인 1979년에는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일본 + 인도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소련은 소련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단 소련의 전술, 전략적 우위가 확보되었고 고질적이었던 중소국경의 불안정한 상태는 해소되었으나 브레즈네프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서유럽을 향한 유화정책이 강화되었고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선으로 1969년 9월 서독 총리로 당선된 빌리 브란트와 회담, 1970년 8월 12일, 서독-소련 불가침 협정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서독이 폴란드의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하게 하였다. 1971년 9월, 서방도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SALT 협정, ABM 조약이 체결되는 등 한동안 순풍이 불었으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틀어졌고 브레즈네프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빌리 브란트가 귄터 기욤 사건과 성추문으로 사임함에 따라 난황에 부닥쳤다. 결국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소 관계는 끝내 틀어지고 데탕트는 종식되었다.
(2) 린뱌오의 몰락
한편 이 사건으로 가장 피해자가 된 것은 국방장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 공인받는 과정에서 군의 영향력을 과시함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이 중국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외교에 관한 문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소 위기가 중국에 엄청난 피해와 민중의 불만을 야기하자 마오쩌둥은 모든 원인이 린뱌오가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린뱌오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1970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에서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한 린뱌오와 천보다는 장칭과 장춘차오에게 난타당했으며 마오쩌둥이 군부 지도자와 당내 이론가의 연합이라는 보나파르티즘의 징조를 보고 크게 경계하여 장칭과 장춘차오를 지지하고 천보다를 숙청해버림으로써 린뱌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971년 미중접촉이 시작되자 린뱌오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고립주의자, 대국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 대열에서 사실상 탈락했고 마오쩌둥은 계속 천보다 비판대회를 여는 한편 린뱌오의 측근들이 분파주의자라고 질타하고 린뱌오의 권력기반인 베이징 군구를 개편하여 린뱌오의 권력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군내에서도 당내에서도 입지가 심각하게 축소된 린뱌오가 비군사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가뜩이나 삐돌이 심약한 기질이 있던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자아비판 요구를 묵살하고 북대하의 요양소에 칩거하여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준비하게 되고 결국 끔살당하게 된다.[친소주의자 린뱌오의 몰락이다]
(3)북한 경제 몰락의 시작
한편 이 중소국경분쟁의 여파가 엉뚱한 결과를 낳았으니, 바로 북한 경제가 몰락하는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들어서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개발 계획이 잘 풀렸다. 이미 1960년 북한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 액수)는 137달러로 남한의 94달러에 비해 1.5배였다. 다른 추계방식으론 북한의 GNP는 325달러로 남한의 3.5배였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는 기치 아래 벌인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 등 농촌 4화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북한은 당시 경작지가 남한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에서는 남한을 훨씬 앞서 있었다. 이토록 경제 상황이 좋자,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머지않아 모든 인민들이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 이유로 1960년대 초반 박정희는 북한의 이런 경제 성장을 경계하면서, 북한 경제를 따라잡을 것을 국가 목표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저런 북한 경제에 1960년대 중반부터 큰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1964년부터 중국과 소련이 서로 사회주의 노선 변경 문제로 인해 시비를 벌이면서 국경 분쟁에 돌입했는데, 북한은 기술은 소련에서 식량은 중국에서 얻어오는등 이런식으로 중립 외교를 했다. 그리고 혹시 둘 중 하나가 북한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일까봐 두려워하여 군사비를 크게 늘렸다. 여기에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편들 수 없다는 약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북한의 국방비가 19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북한은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당초보다 3개년 연장하는 수정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팝,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영원히 날아간 것이다.
5.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면?
외내몽골은 소련의 자치주로 승격 되고 중국의 내몽골, 동투르키스탄, 만주까지 소련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소련과의 갈등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홍위병들의 공격에 크게 위축되었던 상황이며 많은 장교진들이 숙청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59식 전차도 충분한 수량이 배치되어있지 않아 기계화가 덜 되었다. 반면, 소련군은 전부대가 기계화 부대였으며 장비의 질도 중국을 앞서고 있었다. 이전 분쟁에서 이미 선보였듯이 중국군을 압도하는 화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덤. 즉, 전면전이 발생했다면 중국은 내몽골 자치구와 만주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으로 소련군 기계화 부대의 공세 앞에 크게 밀릴 가능성이 큰데다가 중국은 문화혁명이 절정에 이르던때라 홍위병들의 분탕으로 군사, 경제, 과학적으로도 국력이 거의 파산직전에 놓여있었다. 반면, 소련은 역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만 봐도 미군의 95%의 군사력을 지녔을 정도다. 당시로만 보면 기술적으로도 소련이 미국에게 밀릴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육군은 소련이 1위고 해군은 2위 공군은 미국과 소련이 1,2위를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핵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중국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소련에게 경고한 바 있다. 전면전 발생 즉시 미국은 핵무기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의 소련 주요 대도시들과 산업시설을 타격했을 것이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미국에게 핵보복을 가했을텐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만 해도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에 비해 크게 밀렸던 상황이었지만 1969년 기준에선 충분한 수량의 SS-11과 SS-9 ICBM이 배치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미국도 이에 못지 않은 큰 피해를 입고 상호확증파괴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제3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것이다.
중국을 구한다고 핵전쟁까지 불사할 의지가 없었더라도 중국에게 미국이 수많은 지원을 감행하며 소련을 전쟁의 수렁에 빠트리려 했을 것이고 소련군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든 차단하려고 대만을 후원하여 움직이는 등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며 동북아 일대가 전란으로 휩쓸려 일본, 베트남, 북한, 그리고 한국까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극동 연방관구는 러시아를 구성하는 8개 연방관구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의 극동 구역을 관할하며, 본부는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8,371,257명(2010년 기준)이다.
2018년 11월을 기해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속해 있던 부랴트 공화국, 자바이칼 지방이 극동 연방관구로 편입되었다. 2018년 12월에는 본부를 하바롭스크 지방의 하바롭스크에서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했다.

1.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

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의 주이다. 아무르 강과 제야 강에 면해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 공화국, 동쪽으로는 하바롭스크 지방, 서쪽으로는 치타 주와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북동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스타노보이 산맥이 아무르 주와 사하 공화국에 걸쳐 있다. 면적은 36만3,700 km², 인구는 90만2,844명(2002년).
2.부랴트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수도는 울란우데이다. 국기에도 몽골 국기처럼 소욤보 문장이 들어있다.
3.유대인 자치주 (猶太人自治州)

유대인 자치주 (猶太人自治州)는 러시아의 극동에 위치한 자치주이다. 이 지역은 "예브레이(Yiddish)“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칭된다. 유대인을 위해 설치한 자치주이나, 현재는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인이며 그 다음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다. 주청(州廳) 소재지는 비로비잔이다. 면적은 36,266km²이며, 인구는 17만 6558명이다.(2010년)
4.자바이칼 변경주

자바이칼 변경주는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극동 연방관구에 위치해 있다. 중심지는 치타 주의 주도였던 치타이다.
아무르주와 이르쿠츠크주, 부랴트 공화국과 사하 공화국, 남쪽은 몽골에 , 남동쪽으로는 중국의 내몽골자치구에 접해 있다. 2008년 3월 1일에 치타 주와 아긴스크부랴트 자치구가 통합해서 생겨났다.
5.캄차카 변경주

캄차카 변경주은 캄차카 주와 코랴크 자치구가 통합되면서 신설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2005년 10월 23일에 주민투표로 통합이 결정되었고, 2007년 7월 1일에 통합되었다. 주도는 캄차카 주의 주도였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이다.
6.마가단주(Магада́нская о́бласть)

마가단주(Магада́н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의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 주이다. 주도는 마가단이다.
면적은 461,400 km²이고, 인구는 18만2,726명이다.
7.프리모르스키 변경주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², 인구는 207만 1,210명(2005년 기준)이다.
8.사하 공화국

사하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극동 연방관구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러시아 극동이 아닌 시베리아에 속한다. 러시아의 여러 행정 구역 중 가장 넓고,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행정 구역 중에서도 면적이 가장 넓은 행정 구역이기도 하다. 중심 도시는 야쿠츠크다.
9.사할린주

사할린주는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관할하는 러시아의 주로, 면적은 87,100km2이며 인구는 546,695명(2002년 인구 조사 기준)이다. 주도는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10.하바롭스크 변경주

하바롭스크 변경주는 러시아의 변경주로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다. 중심지는 하바롭스크이다. 면적은 788,600km²이다.
11.축치 자치구

축치 자치구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자치구이다. 북동부의 최동단에 위치해 있으며, 베링 해가 위치해 있다. 면적은 737,700 km² 이고 53,00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행정 중심지는 아나디리이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르스키 변경주(沿海州)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², 인구는 207만 1,210명(2005년 기준)이다.
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로 꼽힌다. 이 만의 후미인 졸로토이로크('황금뿔'이라는 뜻) 만 연안의 반도에는 이 지구의 행정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권 러시아의 주요항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이다.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몹시 춥고, 4계절 내내 북풍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는 비가 많고 따뜻하다. 남쪽의 우수리 강과 한카 호(중국에도 걸쳐 있음) 주변의 비옥한 저지대에서는 콩·수수·벼 재배가 이루어지고, 채소재배와 낙농도 활발하다.
탄광산업이 여러 도시의 다양한 제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레티호프카와 노보샤흐틴스크에는 노천석탄 광상이 있다. 주석·납·아연·형석도 채굴된다. 북부의 보스토크에 있는 텅스텐 광산은 1970년대에 개발되었다. 해안에는 어업기지와 포경기지가 있고, 시호테알린 산맥에서는 목재가 생산되며, 작은 모피동물이 서식한다.
2015년 기준 인구는 193만 3,308명으로 프리모르스키 지구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85.6%)이었으며, 우크라이나인(2.5%)과 고려인·타타르인·우즈벡인·벨로루스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주요 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토크(60.5만 명) 이외에 우수리스크, 나호트카, 아르티옴및 파르티잔스크등이 있다. 주민의 62.5%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2015).

1.지리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서북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한반도, 동쪽과 남쪽으로 동해와 접한다.
국경의 길이 - 3,000 km 이상, 해상국경 1350 km 포함.
최고점 - 아닉 산 (1,933 m - ).
큰도시 - 블라디보스토크 (613,400명), 나홋카 (174,600명), 우수리스크 (156,000명), 아르툠 (111,500명).
호수 - 한카 호(о́зеро Ха́нка, 興凱湖)가 중국과 러시아 양국에 걸쳐 있다.
2.역사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 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나이, 우데게,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중세봉건국가로, 농업, 목축 등의 산업과 함께 고유의 전통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주족(금나라 여진족의 후신)이 17세기 초 중국 대륙을 정벌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 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였다.(청-러시아 국경 분쟁)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하고, 연해주는 계속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1858년 하바롭스크를 건설하였다.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일, 녹용, 목재, 게,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백군을 전멸시켰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부터 이 지역의 발전은 러시아를 새로 차지하게 된 볼셰비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철도와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3.주민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한국인(주로 고려인,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출신), 일본인, 중국인, 우데게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폴란드인, 타타르족, 독일인, 유대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거주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도시이다. 러시아 극동의 중심지이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행정중심지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인 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제 심포지움과 학술 회의가 자주 열리고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 함대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고래·게 등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선박수리, 목재 가공, 식료품 공업도 있다. 남동쪽의 나홋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개방된 상업항, 어항으로 러시아의 극동을 향하는 제2의 문호이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부가 있는 군항(軍港) 도시이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폐쇄도시였다


1.명칭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60년까지는 외만주가 중국의 영토였고, 해삼위(海參崴)로 불렸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 중국어 발음인 '하이선와이'(Hǎishēnwǎi)라고 부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음차한 푸라디워스퉈커(중국어: 符拉迪沃斯托克, Fúlādíwòsītuōkè)라는 이름도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우라지오스토쿠'(일본어: ウラジオストク)라고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줄여 우라지오(浦鹽)또는포항(浦港) 라고 쓰기도 했다.
2.역사
1858년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와 강제로 아이훈 조약을 체결한 후 항구와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872년에 군항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다. 1918년 봄부터 1922년까지 이 지방은 외국의 간섭군대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원조물자를 이곳에 양륙하였다.
만주를 가로질러 치타에 중동철도(中東鐵道:중국 동부 철도, 1903 완공)가 건설되어 러시아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철도로 직접 연결되자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에서 보낸 군수품과 철도장비를 들여오는 태평양의 주요항구였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여러 혁명집단의 활동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나 1918년에 외국(주로 일본)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20년에 이 도시를 떠났으나 일본은 1922년 10월 25일에 마지막 부대가 철수했다. 외국 군대가 떠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반혁명세력은 바로 무너졌고,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일 뿐만 아니라 무역항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무역항의 기능이 시의 동쪽 약 90km 지점에 신설된 나홋카항으로 옮겨졌다.
2012년 9월 8일부터 이틀간 제 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루스키 섬에서 개최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 회의를 위해 길이 3.1km의 4차선 다리인 루스키 교를 건설했다. 시내와 루스키 섬을 잇는 세계 최장 사장교(斜張橋)이다.
러시아 정부는 2020년까지 2조 루블을 투입해 첨단산업 기지와 경제특구를 조성, 100만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3.지리
연해주 남부에 위치한 표트르대제 만을 아무르스키 만과 우수리스키 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인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길이 30km, 너비 12km)의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위치한 군항 도시이다. 반도 선단의 금각만 연안에 시가지가 있다.
4.기후
블라디보스토크의 기후 구분은 현행 쾨펜의 기후 구분 상에서는 Dwb에 속한다.
한 해 평균 기온 : 4.3 °C
1월 평균 기온 : -13.7 °C
8월 평균 기온 : 20.2 °C
한 해 평균 강우량 : 722 밀리미터
5.계절
(1)봄
봄 동안에는 기온의 변화가 매우 심하다. 하루 기온 변화로 10 ~ 15 °C로 왔다갔다 변한다.
(2)여름
가장 긴 여름은 1967년에 174일, 가장 짧은 여름은 1969년에 116일이었다. 여름에는 봄과 마찬가지로 일기(日氣)의 변화가 심하다.
(3)가을
가을 기온은 건조하고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4)겨울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며 매우 날씨가 춥다. 센 바람 때문에 실제 온도보다 체감 온도가 더 낮은 편이다.
6.주민
이 도시의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민족이다.
1958년에서 1991년까지는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폐쇄된 도시가 되기 이전에 이 도시에는 고려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부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위치해 있다.
7.행정구역
레닌스키 구 (Ленинский)
페르보마이스키 구 (Первомайский)
페르보레첸스키 구 (Первореченский)
소베츠키 구 (Советский)
프룬젠스키 구 (Фрунзенский)
8.교통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은 도시 한복판에서 북쪽으로 50km쯤에 있는 아르툠에 위치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하는 2012년 개통한 아에로 익스프레스라는 철도 노선으로 연결된다.
시내 가운데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점이다.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평양역까지 가는 국제열차가 멈추기도 한다. 또한 동청철도(東淸鐵道)였던 지금의 만주횡단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그리고 포그라니치니를 거쳐 중국의 쑤이펀허를 지나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을 묶는다.
역 바로 앞에는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항이 별도로 위치하게 된다. 흔히 부동항으로 알려진 이 항구는 겨울에 얼기 때문에 쇄빙선(碎氷船)의 도움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잠수함이 전시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여객터미널을 통해 페리로 한국의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 과 연결되어있다.
2012년에 완공된 졸로토이 교가 시내로 길게 뻗은 졸로토이로크만을 가로지른다.
9.관광
우스리스크만(영어판)에는 소련 시절 폐유리병 공장에서 흘러와 쌓인 잔해물들이 침식 작용으로 인해 둥글게 다듬어져 만들어진 유리자갈로 이루어진 유리해변이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현지에서는 부흐따 스떼끌라냐야(Бухта Стеклянная)라 불리는데 직역하자면 유리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유리자갈을 공짜 기념품 삼아 싹쓸이해가는 행태가 지속되었고, 추세대로라면 2040년에는 유리해변이 사라질 지경이다.
10.교육
블라디보스토크는 4개의 대학교를 포함하여 많은 교육 시설이 있다.
극동연방대학교 (북한에서는 "원동 국립 대학교"라고 일컬음) - (줄여서 데베페우,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едераль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ДВФУ)
네벨스코이 명칭 국립 해양 대학교 (Морско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адмирала Г.И. Невельского, МГУ им. адмирала Г.Н. Невельского)
국립 블라디보스토크 경제 서비스 대학교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экономики и сервиса, ВГУЭС)
국립 태평양 의과 대학교 (Тихоокеан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едицин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ГЭ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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