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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 남편 필립공, 99세로 별세 본문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이 향년 99세로 별세했습니다.
영국 왕실은 성명을 내고 필립 에든버러 공작이 오늘(9일) 아침 윈저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습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애도성명을 내고 “그는 왕실과 군주제가 영국민 삶의 균형과 행복에 필수적인 기관으로 남아 있도록 헌신했다”고 밝혔습니다.
필립공은 지난 2017년 고령을 이유로 왕실 공식업무에서 은퇴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예방 차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런던 버킹엄궁을 떠나 버크셔주 윈저궁에서 머물러왔습니다.
최근엔 심장 수술을 받고 1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한 뒤 지난달 16일 퇴원했습니다.
그리스 왕족 출신인 필립공은 영국 해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와 만나 1947년 결혼했습니다. 5년 뒤인 1952년 엘리자베스 공주는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슬하에는 왕위 계승자이자 고 다이애나비의 전 남편 찰스 왕세자와 앤드루 요크 공작, 앤 공주, 에드워드 웨식스 백작 등 3남 1녀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는 21일 95세 생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VOA 뉴스
영국 왕실 필립공 별세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에든버러 공작)이 별세했다고 버킹엄궁이 밝혔다. 향년 99세다.
버킹엄궁은 성명을 내고 "여왕께서 사랑하는 남편 필립공의 죽음을 알리게 돼 매우 슬프다"며 "필립공이 9일 아침 윈저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필립공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실 업무를 수행한 통치자의 배우자다. 그는 지난 3월 16일 한 달간의 병원 입원 후 원저성으로 돌아왔다.
버킹엄궁은 이후 추가적인 발표는 나오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성명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왕실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는 9일(현지시간) 다우닝가 총리관저에서 행한 연설에서 필립공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 영감을 줬다"고 평했다.
존슨 총리는 "필립공은 영국 왕실과 왕가를 이끄는 것을 도와 왕실이 우리 국민 생활의 균형과 행복에 명백히 필수적인 기관으로 남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로 기독교인의 모범이 됐다"고 전했다.
버킹엄궁은 필립공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조기를 걸었고, 사람들은 버킹엄궁과 윈저성 등을 찾아 꽃을 헌화하며 애도를 표했다.
BBC 왕실 특파원 니콜라 스위첼은 필립공의 별세는 "국가적으로 슬픈 순간"이라며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73년을 함께한 남편을 잃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위첼은 "필립공은 여왕이 성공적으로 통치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며 "그는 여왕의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했고 그런 여왕을 지지하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덧붙였다.
필립공은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와 1947년 결혼했다. 공주는 5년 뒤 여왕 자리에 올랐다. 이후 그는 영국 왕실 역사상 왕 또는 여왕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배우자가 됐다.
필립공은 지난 3월, 런던 중심지에 있는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서 한 달간의 병원 치료를 받았다.
런던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에서 기저 질환인 심장 질환과 관련된 시술도 받았다.
필립 공의 장례식은 윈저성 세인트 조지 교회 예배당에서 왕실장으로 거행될 예정이다.
국가 문장원은 고인의 뜻과 왕실 전통에 따라 국장을 치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반에게 고인의 시신을 공개해 조문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도 생략한다.
왕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장례식 계획을 조율 중이다. 국가 문장원은 사람이 몰릴 것을 우려해 대중에게 "안타깝지만, 장례식을 대신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아직 정확한 장례 일정은 발표되지 않았다.
필립공과 엘리자베스 여왕 사이에는 자녀 4명과 손주 8명, 증손주 10명이 있다.
장남 찰스 왕자는 1948년 태어났다. 1950년엔 앤 공주, 1960년엔 앤드류 왕자, 1964년엔 에드워드 왕자가 출생했다.
필립공은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태어났다.
필립공의 아버지 앤드류 왕자는 그리스 국왕 조지 1세의 아들이다. 필립공의 어머니 앨리스 공녀는 바텐베르크 가문의 후손이다.
'깊은 애도'
영국 정치권은 모두 한 목소리로 필립공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영국이 비범한 공복"를 잃었다면서 "여왕에 대한 그의 대단한 책임과 헌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코틀랜드 니컬라 스터전 행정수반은 필립공의 별세 소식에 "슬픔에 잠겼다"고 밝혔다. 그는 트위터에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고 썼다.
세계 각국에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필립공은 "우리가 다시는 볼 수 없을 세대를 구현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필립공을 "위대한 목적과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고 추모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그는 뛰어난 군 복무 경력을 갖고 있으며 지역사회를 위해 선봉에 섰다"고 필립공을 기억했다.
[부고] 필립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변함없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널리 존경받았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역할이었겠지만 전직 해군 지휘관이자 많은 분야에 대해 강한 신념을 지닌 그로선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강인함은 오히려 그가 소임을 다 하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촉매제가 됐다.
그는 여왕의 부군으로서 헌법상 직책은 없었다. 하지만 여왕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며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필립공은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태어났다.
출생 증명서엔 생일이 5월 28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가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필립공의 아버지 앤드류 왕자는 그리스 국왕 조지 1세의 아들이다. 필립공의 어머니 앨리스 공녀는 바텐베르크 가문의 후손이다.
1922년 쿠데타로 그리스의 왕권이 무너졌고, 혁명 재판소는 그의 아버지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필립공의 가족은 영국 조지 5세 국왕이 보낸 함선을 타고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 아기였던 필립공은 항해 내내 오렌지 상자로 만든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가족의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학업을 시작한 필립공은 7세 때 외삼촌 마운트배튼 백작이 있던 영국 잉글랜드으로 건너왔다. 이후 이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이 시기 필립공의 어머니는 조현병 진단을 받고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필립공은 어머니와 거의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1933년 그는 독일의 저명한 유대인 교육자 커트 한이 운영하던 독일 남부의 한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한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탈출길에 올랐다.
해군 경력
스코틀랜드로 거처를 옮긴 커트 한은 고르돈스톤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필립공은 독일에서 두 학기만을 수학한 뒤 이곳으로 전학했다.
독립심을 강조하는 고르돈스톤 학교의 스파르타식 교육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10대 소년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즈음, 필립공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영국 공군(Royal Air Force)에 지원하고자 했지만 외가 쪽이 해군 전통을 갖고 있었기에 브리타니아 해군사관학교 생도가 됐다.
조지 6세 국왕과 엘리자베스 여왕(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이 해군사관학교를 순방차 방문했을 때 필립공은 어린 두 공주, 엘리자베스와 마가렛의 호위 임무를 맡았다.
당시 만남은 열세 살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필립공은 1940년 1월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인도양에서 처음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하며 자신의 뛰어난 가능성을 빠르게 증명했다.
지중해 함대의 밸리언트 잠수함에 파견된 그는 1941년 마타판곶 해전에 참가하며 공보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함선 탐조등을 담당하는 군관으로서 그는 야간 작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필립공은 2014년 BBC Radio 4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또 다른 함선을 발견해 중간 전조등을 켰다. 해당 함선은 15차례의 직격탄 기습 공격에 사실상 거의 곧바로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1942년 10월까지 그는 영국 해군 역사상 최연소 중위로 복무하며 월러스 구축함대에 올랐다.
약혼과 결혼
그는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엘리자베스 공주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여러 차례 왕실 초청을 받아 버킹엄 궁전에 머물기도 했다.
1943년 크리스마스를 필립공과 함께 보낸 후 엘리자베스 공주는 해군 제복을 입은 그의 사진을 드레스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의 관계도 점점 깊어졌다. 하지만 왕실 내부에선 그들의 관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혹자는 당시 그를 "거칠고 예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1946년 여름 필립공은 조지 6세 국왕에게 딸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의 약혼이 발표되기 전 필립공은 새로운 국적과 새 성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그리스 왕실 칭호와 국적을 포기하고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또 어머니의 영국식 성을 따서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바꿨다.
결혼식 전날 조지 6세 국왕은 그에게 '전하' 호칭을 부여하고, 결혼식 당일엔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이란 이름을 내렸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947년 11월 20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 당시 수상 윈스턴 처칠은 전쟁 후 암울했던 시대에 "화려한 불빛"과 같은 결혼식이었다고 말했다.
경력 단절
결혼 후 해군에 복귀한 필립공은 몰타에 배치됐고 두 사람은 여느 군 가족과 비슷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48년 첫 아들 찰스 왕세자가 버킹엄 궁에서 태어났고, 1950년엔 앤 공주가 탄생했다. 이후 앤드루 왕자(1960년)와 에드워드 왕자(1964년)가 태어난다.
1950년 9월 2일 필립공은 모든 해군 지휘관들의 열망인 소령 자리에 오르며 군함 매그파이호의 지휘를 맡게 됐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경력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조지 6세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엘리자베스 공주는 더 많은 왕실의 공적 임무를 맡게 됐고,남편의 역할도 필요해졌다.
1951년 7월 필립공은 해군을 떠났다. 이후 어떤 역할도 맡지 않았다.
그는 후회를 품고 사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해군에서의 경력을 마무리하지 못한 데 대해 이후 유감을 표시한 적이 있다.
오늘날엔 그가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면 해군 본부 제1군사위원으로 떠올랐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1952년 필립공 부부는 국왕과 왕비 대신 영연방 국가 순방을 시작했다.
현대화를 위한 노력
2월, 케냐의 한 사냥용 산장에 머무르던 중 두 사람은 조지 6세 국왕의 부고를 듣게 됐다. 국왕은 심장에 치명적인 관상동맥 혈전증을 앓고 있었다.
필립공은 아내에게 '이제 당신이 영국의 여왕이 됐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야 했다.
필립공의 측근은 당시 그가 "세상의 반쪽"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설명했다.
해군에서 물러난 그는 앞으로 여왕의 부군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대관식을 앞두고 왕실은 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음으로 모든 우선권을 가진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에겐 어떤 헌법적 권한도 없었다.
필립공에겐 왕실을 현대화하고 개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궁내 보수주의자들의 견고한 반대에 부딪혀 그는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매서운 일격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활발한 사회 생활에 쏟아냈다. 그와 친구들은 매주 런던 소호의 식당에서 만남을 가졌다.
장시간의 유쾌한 점심 식사 후엔 나이트클럽을 방문하곤 했다. 그가 화려한 동행들과 함께 있는 사진이 종종 찍히기도 했다.
필립공이 그나마 자유로운 권한을 가질 수 있었던 곳은 가정이었지만 성을 물려주는 문제와 관련해선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는 자녀에게 자신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물려 주려 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결정에 따라 왕가의 윈저 성을 따르도록 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자녀에게 성을 물려주지 못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나는 빌어먹을 아메바에 지나지 않는다"고 친구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필립공은 자녀들에겐 무뚝뚝하고 둔감한 아버지로 평가받았다.
찰스 왕세자의 자서전을 집필한 조나단 딤블비에 따르면 왕세자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공개적인 비판으로 힘들어 했으며 맏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쉽지 않았다.
강인한 성격
필립공은 찰스 왕세자가 자신이 다녔던 고르돈스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딘가 내성적인 천성을 가진 아들에게 이 학교가 도움이 될 거란 선의의 믿음에서였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향수병과 잦은 따돌림으로 인해 학교를 싫어하게 된다.
필립공의 태도는 때때로 외로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 본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자립심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지진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필립공은 영국 청년 복지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 같은 관심사는 1956년 매우 성공적인 '에든버러 공작 어워드'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600만 명 이상의 만 14~25세의 장애 및 비장애 청소년들이 이 프로그램을 거쳤다.
이 프로프램은 청년들이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도전을 겪으며 팀워크와 성취감, 자연에 대한 존중을 기를 수 있도록 설계됐다.
필립공은 과거 BBC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한 분야에서라도 청년들이 성공한다면, 그 성취감은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공작으로서의 일생 동안 그는 다양한 활동에 직접 참여하며 하루하루 운영되는 프로그램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도덕 관념
필립공은 야생 동물과 환경 보호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1961년 인도 여행 중 호랑이를 총으로 사냥한 일이 알려져 소동을 빚기도 했다.
잡은 호랑이를 트로피처럼 전시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그는 세계야생동물기금(World Wildlife Fund)에 자신의 상당한 영향력과 에너지를 썼고 이후에는 자연스레 세계자연기금(World Wide Fund for Nature)의 수장을 맡았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지구의 이토록 환상적인 생물 다양성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며 "모든 건 상호 의존적"이라는 말을 남겼다.
"삶이냐 죽음이냐, 즉 멸종과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면 우리는 도덕 관념을 좀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굳이 필요치도 않은데 왜 특정 종을 멸종시키려 하죠?"
그는 자신의 들꿩 사냥 논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어떤 종을 사냥감으로 삼는다면, 그 종이 이듬해에도 생존해 있길 바라겠죠. 마치 농부처럼 말이죠. 미래에 수확을 하려면 지금 완전히 박멸해선 안 되는 겁니다."
솔직한 화법
그러나 그가 전 세계 숲을 보호하고 어류 남획을 금지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은 널리 호평을 받았다.
필립공은 산업에 관심이 많았으며, 공장들을 방문하곤 했다. 현 노동재단(Work Foundation)의 전신인 단체 산업사회(Industrial Society)의 후원자 역할도 자처했다.
1961년 당시 기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여러분, 지금은 정말 열심히 일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말하며 특유의 솔직함을 발휘했다.
이 같은 화법은 천박함으로 번역되거나 때로는 그를 곤란에 처하게 했다. 특히 해외에 나갔을 때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상황 판단을 못 한다'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1986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중국을 방문할 당시 사적인 자리에서 그는 '가느다란 눈'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타블로이드 신문은 그의 발언을 난타했지만, 당시 중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2002년 호주를 방문했을 때는 한 원주민 사업가에게 "아직도 서로에게 창을 던지느냐"고 물었다.
갈등
그의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히려 솔직한 모습과 정치적 발언의 틀에서 벗어났다며 좋아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그의 '실언'도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필립공은 평생에 걸쳐 스포츠에 대해서도 많은 열정을 드러냈다. 요트를 탔고, 크리켓과 폴로를 즐겼으며 국제승마연맹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조나단 딤블비가 쓴 찰스 왕세자 자서전 출간 당시 필립공과 그의 맏아들 사이 갈등이 재조명됐다.
자서전에선 필립공이 찰스 왕세자에게 다이애나와의 혼인을 강요한 것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필립공은 자녀들의 파혼 당시 그 힘든 시간 동안 누구보다 더 세심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왕실 사람과 결혼하며 겪은 어려움들의 기억 때문인지, 가족 관련 문제가 있을 때 그는 앞장서서 문제를 이해하려 했다.
해외 순례
필립공은 그의 4자녀 중 앤 공주, 앤드루 왕세자, 찰스 왕세자 등 3명이 파혼하자 크게 상심했다.
그러나 그는 사적인 일에 관해선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1994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개인적인 일로 발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필립공은 나이가 들어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세계자연기금(World Wide Fund for Nature) 활동차 두루 돌아다녔고 여왕의 해외 순방에도 동행했다.
1994년 그는 어머니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 순례길에 올랐다. 필립공의 어머니는 그곳에 묻히길 원했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1995년 전승기념일 50주년 기념일, 또 다시 그에겐 가슴 아팠을 순간이 찾아왔다.
당시로부터 50년 전, 일본이 항복했을 당시 필립공은 도쿄만에 있는 영국 구축함에 타고 있었다.
전승기념일 그는 다른 참전 용사들과 함께 극동 캠페인 행진에 참가해 여왕 앞을 지나갔다.
다정한 면모
필립공은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학대를 받았던 군인들에게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무뚝뚝한 필립공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부드러운 면모를 보였는데, 이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이후 대중의 왕실에 대한 적대적 태도의 영향이기도 했다.
2007년 그가 다이애나비와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됐는데 이 편지는 평소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을 불식시켰다.
필립공을 '사랑하는 아빠'로 부를 만큼 다이애나비는 그에게 많은 의지를 했고 이는 필립공에게 쓴 편지 속 부드러운 어조에서도 드러났다.
다이애나비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도디의 아버지 모하마드 알 파예드는 다이애나비의 죽음이 필립공의 지시에 의한 살인일 것이라며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시관은 이러한 주장을 강하게 부정했다.
현실적인 접근
필립공은 영국 사회의 중심에 서 있던, 강한 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남자였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으나 늘 2인자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가 지닌 공격적 성향과 왕실 사람으로서 매사 조심해야 했던 그의 위치는 자주 부딪혔다.
과거 BBC와의 인터뷰에서 필립공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면서 "갑자기 내가 일을 하는 방식이나 관심사, 혹은 상황에 따른 내 반응을 모두 바꿀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직 은퇴
필립공은 2017년 8월 공직에서 은퇴하며, 그동안 수행했던 여왕 부군의 역할과 자신이 만든 자선단체의 직분도 내려놓았다.
버킹엄 궁전에 따르면 1952년 이래 그는 혼자서 2만2219건의 업무를 수행했다. 테레사 메이 전 영국 총리는 그의 삶을 "공직에서의 훌륭한 인생"이라 평가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필립공은 그 해 자신의 70주년 결혼 기념일을 축하했다.
그는 고관절 수술을 받고도 마차를 타고 윈저성 주변을 돌아다녔고 2019년 1월 샌드링엄 근처에서 발생한 심각한 차 사고에서도 살아남았다.
당시 다른 차에 타고 있던 여성 두 명이 다쳤다. 필립공은 자발적으로 운전먼허증을 반납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필립공과 여왕은 윈저성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으며 지난 1월 백신을 접종했다.
강인함과 인내
필립공은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영국인들의 삶에 크게 공헌하고 군주를 돕는 역할을 해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도 기여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변함없고 지속적인 지원이었다. 필립공은 자신의 전기를 쓰는 작가에게 자신의 임무는 "여왕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여왕은 결혼 5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영국 역사상 최장수 왕족 배우자인 남편의 이러한 희생에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는 평소 칭찬받는 것에 인색한 편이지만, 언제나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줬다"며 "그가 스스로 알리진 않았지만 나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이 나라 또 여러 국가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말했다.
[부고] 필립 에든버러 공작 - BBC News 코리아
필립공: 사진으로 본 필립공의 생애
필립공: 사진으로 본 필립공의 생애 - BBC News 코리아
필립공 별세: 여왕 곁 70여 년 지킨 필립공의 삶
필립공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변함없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널리 존경받았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역할이었겠지만 전직 해군 지휘관이자 많은 분야에 대해 강한 신념을 지닌 그로선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강인함은 오히려 그가 소임을 다 하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촉매제가 됐다.
그는 여왕의 부군으로서 헌법상 직책은 없었다. 하지만 여왕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며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필립공 별세: 여왕 곁 70여 년 지킨 필립공의 삶 - BBC News 코리아
영국, 필립공 별세...애도 물결
"우린 오늘 단지 많은 사랑을 받고 존경받는 공인이 아니라, 헌신적인 남편이자 다정한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인, 그리고 최근에는 증조할아버지가 된 이를 잃었습니다."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는 9일(현지시간) 다우닝가 총리관저에서 행한 연설에서 필립공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 영감을 줬다"고 평했다.
존슨 총리는 "필립공은 영국 왕실과 왕가를 이끄는 것을 도와 왕실이 우리 국민 생활의 균형과 행복에 명백히 필수적인 기관으로 남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버킹엄궁은 필립공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조기를 걸었고, 사람들은 버킹엄궁과 윈저성 등을 찾아 꽃을 헌화하며 애도를 표했다.
영국, 필립공 별세...애도 물결 - BBC News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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