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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운동연합 “어젯밤 北에 대북전단 보냈다” 본문

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탈북민 자료

자유북한운동연합 “어젯밤 北에 대북전단 보냈다”

CIA bear 허관(許灌) 2020. 6. 23. 10:53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이 22일 밤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하고 있다(사진=자유북한운동연합

북한이탈주민(탈북민)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23일 전날 밤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서 북한에 대북전단 50만장을 살포했다고 주장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그 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대북전단을 보냈다”면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아주 어두운 곳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에서 계속 추적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마추어인 회원들을 교육시켜 대북전단을 살포했다”며 “수소가스 구입이 어렵고 있던 수소가스도 다 압수당해 17배 비싼 헬륨가스를 이용해 대북전단 50만장을 풍선 20개에 매달아 바람 따라 북한 지역으로 살포했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앞서 지난 20일 “대북전단 100만장 살포 준비는 이미 지난 3월 마쳤다”며 “해당 전단이 북한 지역에 떨어진 것을 위치정보(GPS)로 확인하고 나서 살포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 대표가 공개한 대북전단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사진이 실려 있으며 “어찌잊으랴 6.25, 민족살육자 김정은·여정 할애비 김일성 침략자를 인민이여 일어나라!”는 구호가 쓰여 있다.

박 대표에 따르면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 6명은 ‘6·25 참상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대북전단 50만장과 ‘진짜용 된 나라 대한민국’ 소책자 500권, 1달러 지폐 2000장, SD카드 1000개를 20개의 대형풍선에 매달아 살포했다.

이들은 “잔인한 가해자 위선자에겐 그토록 비굴하면서 약자이고 피해자인 탈북민들에겐 악마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입에 재갈 물리고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마저 박탈하려는 문재인 종북좌빨독재정권, 여기가 서울인가 평양인가?”라고 대북전단 제재를 규탄했다.

박 대표가 공개한 대북전단은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은 국무위원장,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얼굴 사진이 실려 있고 하단에 ‘어찌잊으랴 6.25, 민족살육자 김정은·여정 할애비 김일성 침략자를 인민이여 일어나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1943 년  10 월  5 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 88독립저격여단( 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  제 1 열 좌로부터 : 바탈린 ( N. S. Batalin,  巴达林 ,  소련 ),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 ( 李兆麟 ,  일명  張壽籛 [ 张寿篯 ],  중국 ),  왕일지 ( 王一知 ,  주보중 부인 ),  여단장 주보중 ( 周保中 ,  중국 ),  김일성 ( 金日成 ,  제 1 영장 ,  조선 ),  부여단장 시린스키 (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 1904~?) 。 제 2 열 : 장광적 ( 张光迪 ,  중국 ),  풍중운 ( 冯仲云 ,  중국 ),  왕효명 ( 王效明 ,  중국 ),  왕명귀 ( 王明贵 ,  중국 ),  팽시로 ( 彭施鲁 ,  중국 ) 。 제 3 열 : 양청해 ( 杨清海 ,  중국 ),  서철 ( 徐哲 ,  조선 ),  강신태 ( 姜信泰 ,  강건 ,  조선 ),  김광협 ( 金光侠 ,  조선 ),  수장청 ( 隋长青 ,  중국 ) 。 제 4 열  :  안길 ( 安吉 ,  조선 ),  박덕산 ( 朴德山 ,  조선 ),  최용진 ( 崔勇进 ,  조선 ),  도우봉 ( 陶雨峰 ,  중국 ),  김경석 ( 金京石 ,  조선 )[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김일성이 지휘했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 6사에서 활동하지 않은 동북항일연군의 요인들 중에서도 최용건 등 같이 만주파에 포함된 인물들이 있다(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세력. 주요 인물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김일 등이 있다)

이 만주파는 해방이후 갑산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을 정권투쟁에서 몰아내고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를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 되었으며 북한의 현대사는 김일성과 만주파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 김일성은 북한과 조선로동당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고 만주파의 영수에 불과했다.

 

1.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 3 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1, 2군이 남만주에서,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3 政治部主任-李鉄秀]

4여단 단장 수상태 [4 団長-隋祥太]

6여단 단장 유인봉[6 団長-劉仁鳳]

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8여단[8]

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5여단[5]

7여단[7]

 

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이청()[政治主任-呉成崙. 季青]

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1여단 단장 최현[1 団長-崔賢]

2여단[2]

3여단[3]

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4여단[4]

5여단[5]

6여단[6]

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7여단 단장 김주현[7 団長-金周賢]

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8 政治委員朴徳山金一]

9여단[9]

10여단[10]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1여단 단장 최춘국[1 団長-崔春国]

2여단[2]

 

교도여단[教導団]

 

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1여단[1]

2여단[2]

3여단[3]

2사단[第二師]

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4 政治委員-金光侠]

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5 政治委員-朴東和]

6여단[6]

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8여단[8]

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9 政治委員姜信泰姜健]

 

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ㄱ.1일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일로군 1(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 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 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 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ㄴ.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2(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 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 9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 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軽機二丁), 대포1(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6사단(第六師)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 5,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 조선인 5,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ㄷ.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

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

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

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ㄹ.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 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 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 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 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일본인 1, 조선족 13, 만주족 9, 백계 러시아인 2)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 전상자 27,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3 방면군(第三方面軍) 1939년 제2로군 제5(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 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 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 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

                            

ㅁ.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5(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 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年。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 。 左三為金貞淑 。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 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2.제88독립 저격여단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 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7月的合影(1945 7월 촬영)]

 

1947년 5월,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5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1)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 3 5,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 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 1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 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 6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2)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 3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북한정부의 국정(國政)과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를 알고 있습니까?

북한정부의 국정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며 북한정부의 사회구성체는 국영자본체제입니다[북한 제3공화국 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북한 역대 헌법 자료)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Ⅰ.북한 제1공화국 헌법[인

blog.daum.net

 

국영자본체제 북한(자료)

1인당 GDP(국민소득) 583달러(2012년도)로 채무불이행 국영자본체제 북한

1.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 국영농장)를 의미한다

북한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북한 헌법 제20)

국가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이다. 국가소유권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 철도, 항공운수, 체신기관과 중요공장, 기업소, 항만, 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 국가는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주도적역할을 하는 국가소유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장성시킨다(북한 헌법 제21)

사회협동단체소유는 해당 단체에 들어있는 근로자들의 집단적소유이다. 토지, 농기계, , 중소공장, 기업소 같은것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할수 있다. 국가는 사회협동단체소유를 보호한다(북한 헌법 제22)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헌법 제24)

 

북한정부도 토지, 농기계등 국가소유나 사회협동단체 소유 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평양정부 내부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2.북한 남녀징병제 국가로 남자 10년간, 여자 7년간 군 복무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인 70만명이 많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중국은 직업군인 지원 모병제이지만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12 북한 인민군 병사의 수는 120만 명으로 이 중 여성 군인은 15% 17만명에 달했다. 북한의 인구는 약 2400만명으로 1000명에 7명이 여성 군인인민군 군인 100명에 15명이 여성 군인 ​​셈이다

북한정부는 북한 아동들의 영양부족으로 인민군 입대 신체 조건을 "138cm이상, 몸무게 43Kg 이상"으로 실행하고 있다

 

14세때 징병명부 등록, 15세때 신체검사, 16세부터 인민군 입대를 하고 있다

 

 

병역 근무 자리 비리가 북한 군부내 가장 큰 비리로 알려지고 있다 

매관행위는 인민군을  감시하는 총정치국 정치 지도원이라는 유리한 자리에는 5 ~ 2 만 달러 (50 ~ 200 만 원), 지방 관리는 약 5 천 중국 위엔화 (8 만원)에 직위를 사고 파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식통은 "공직에 붙으면 뇌물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1주일에 의거을 회수 할 수 있다고 된다"고 말했다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3.3공화국 헌법과 자영업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에 자영업이 늘고 있다. 1990년대 장마당 상인으로 출발한 자영업자들이 숙박업, 개인 버스, 사금융업, 아파트 매매 등으로 활동을 넓히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북한에 돈주로 불리는 신흥자본가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고 영국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지난 1029일 평양발 기사에서, “돈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돈주가 외화를 써가며 비공식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전했다.

돈주1990년대 후반 발생한 고난의 행군의 산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상점이 문을 닫자 주민들은 너도나도 장마당으로 나와 장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바로 돈주라는 것이다.

"써비차는 개인이 하는 운송, 버스, 택시 이런 건데, 사람도 싣고 짐도 싣고, 경제난 이후 개인들이 먹고 살려고 만든 건데, 이것 없이는 이동을 못해요.”

이밖에 숙박업자, 노래방 업자, 비디오 촬영업자, 매대 분양업자도 생겨난다

4.북한 부채 140억달러

미 재무부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30여개국에 140억달러의 빚을 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별 부채 규모는 1위 중국( 698000만달러), 2위 러시아(101000만달러), 3위 일본(3억달러), 4위 스웨덴 (33000만달러), 5위 이란(3억달러)과 독일(3억달러), 6위 프랑스(28000만달러), 7위 태국 (26000만달러), 8위 오스트리아(21000만달러), 9위 시리아(14000만달러), 10위 스위스 (1억달러), 11위 대만(8600만달러) , 12위 이라크 (5000만달러) 등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회의정부 인민민주주의를 포기하고 1970년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으로 인민경제 파탄 일인 장기집권과 가족주의 권력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를 수립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남한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군사 및 경제 원조 등으로 북한 전체 부채 절반 수준 698000만달러이다

5.북한 영화는 우리식 사회주의 김일성노선으로 군대 방식으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남한 사람이나 서양사람은 적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정치 선전물로 입장료는 무료이다

북한 영화는 예술성이 없고 권력의 시녀이다

북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영화도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며 정치 선전에 적합하여야 한다.

북한 영화의 촬영은 군의 관리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연자가 하는 말과 시간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대북정책과 대남정책

머리소리함 Guide Ear요원들은 대북정책과 대남정책을 잘 이해하여 생활화 해야 합니다 대북정책과 대남정책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제거돼야 할 요원입니다

남한(대한민국)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이며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1.대북정책-민주연합정부(민주국가) 수립론

북한의 국정(國政)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이며 북한의 사회구성체는 국영자본체제이다

1단계: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 구성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론은 북한정부 입장으로 북한 내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민주세력이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를 지지 하는 전체주의 김정은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개혁개방세력 즉 민주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북한정부에서도 북한정부 의회 내부 민주연합정부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연합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야 가능하다

-주체연호(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주의) 폐지

-김일성 가계 권력(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

-김정은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

-북한 김정은 독재정부 붕괴는 국제적으로 친북 좌파세력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국영자본체제 해체와 민영자본체제 도입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붕괴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 극동군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수립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남북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2단계: 남북민주연합 공동정부(민주국가) 수립

북한 지역 민주정부와 남한지역 민주정부의 연합으로 공동정부(민주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 타도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수립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자료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대한민국 헌법 Ⅰ.제1공화국[제헌헌법] 4281년 7월 12일 제정 1948년 7월 17일 공포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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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남정책-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수립론

1단계: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반미 반일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

남한지역에서 반미 반일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은 1차적으로 민족주의 노선 반미, 반일전선으로 좌우익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 친미 친서방 세력 제거와 반미 반일정부를 수립하고, 2차적으로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으로 우파 민족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공산주의자 주도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반미, 반일전선구축과 극렬 민족주의 노선 정부 수립(민족해방전선)

-인민 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인민회의정부론)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권력이 의회에 집중 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국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공산당이나 노동당, 사회당의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미국, 일본등 서방세력을 몰아내고 우파 민족주의 세력조차도 타도한 후 자국사회주의 노선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주체사상파 주도로 남한정부를 장악하게 하는 모델(남북한 주체사상파 연합정부론)

 

2단계: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수립.

김일성, 김정일주의 이외 모든 주의나 세력 숙청과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김일성, 김정일주의 이외 기타 노선이나 세력 숙청(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모택동주의자나 마스-레닌주의자 그리고 친중국이나 친러시아 세력 제거(숙청)

김일성 추종세력(김일성주의) 이외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숙청이나 제거

-북한 인민군이 모든 권력 장악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정부 대남정책은 1단계로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중국식 사회주의 국가수립이며 2단계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북한 헌법)

*북한헌법 자료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Ⅰ.북한 제1공화국 헌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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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을 되새겨 보아야 할 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강철서신(반제청년동맹)->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새세대(1990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

민족민주혁명당 사건(民族民主革命黨 事件, 약칭 민혁당 사건) 199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내에서 지하 정당 활동을 하던 민족민주혁명당을 적발하여, 그 구성원인 김영환, 하영옥, 이석기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북한은 1980년대 학원가 친북 투쟁을 주도한 주사파 핵심세력을 포섭해 조선노동당에 가입시켜 남한 내 혁명 전위조직으로 민혁당을 구축했다. 이에 따라 김영환, 이석기, 하영옥 등은 1989년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청년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 을 결성하고, 이후 전국적인 조직사업을 위해 이를 당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1992년 민혁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남한 사회를 '식민지 반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하고, 민족자주권을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당면목표 아래, 노동자, 농민,인텔리, 학생, 도시 소시민, 소자본가들을 동력으로 하여 반미 자주화와 반파쇼 민주화를 투쟁노선으로 채택하여,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NLPDR)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활동하였다.

민혁당 중앙위원 김영환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2차례 밀입북해서 김일성을 만나 공작금을 수령하였으며, 하영옥은 김영환의 권유로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북한훈장을 수여받았다. 민혁당은 김영환, 하영옥, 박아무개(이석기는 나중에 중앙위원이 됨)로 구성된 당 중앙지도부 아래에 도당 성격의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와 지역별위원회(울산, 성남, 부산, 마산·창원), 부문별 사업지도부(청년운동, 통일운동, 시민단체, 학생운동, 수도남부지역)를 두었다.

이석기는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이상규는 수도남부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이의엽, 박경순은 민혁당 지역조직인 영남위원회 위원장(부산위원회 및 울산위원회 등)이었으며, 김창현, 방석수는 영남위원회 조직원이었고, 서울대의 애국청년선봉대를 비롯한 학생운동도 민혁당의 지도 하에 있었다.

민혁당의 존재는 1998년 여수에서 격침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반잠수정에서 하영옥이 간첩과 연락해 왔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처음 밝혀졌다. 이후 민혁당 및 이른바 '영남위원회'는 법원에서 반국가단체 또는 이적단체로 인정되었고, 위 사건 관련자들은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유죄판결이 선고되어 확정되었다.

서울고법 형사1부는 피고인 이석기에게 징역 2 6개월을 선고하면서 민혁당은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 전술에 따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기 위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반국가단체라며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씨가 북한과 수시로 연락하며 지침을 받고 상황을 보고하는 등 북한과 연계해 왔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석기에 대해선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종사했다고 명시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은 전국적 단위로 결성된 친북 지하무장조직이고, 오픈조직(합법단체)은 범민련(범청학련), 한국총학생회연합이나 대학 총학생, 농민회, 노동단체등으로 활동했다 해방 50 1995, 문민 김영삼정부 때 남북전쟁 시기로 규정하고 대남활동을 하다가 김일성 전주석 사망과 함께 와해되기 시작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은 주체사상 김정일주의를 표방함으로 김정일 집권에 공헌했다는 평가도 있다. 북한정부의 대남공작기구는 재중총련, 재일총련,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등의 조직으로 대남공작을 추진해오고 있다.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은 남한지역의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북한을 지지하는 친북단체들이다

 

-남한(대한민국)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이며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북한의 국정(國政)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며 북한의 사회구성체는 국영자본체제이다

북한정부를 지지하는 단체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과 국영자본체제를 인정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극렬민족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인사로 자주노선이나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하는 세력들이다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 계열은 NLPDR노선으로 민중당 내부 자주계열이다

민중당 내부 반미, 반일, 사회주의 친북 행동세력이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다

 

-1993 12월 중순경 머리소리함 Guide Ear로 태어날 때부터 생존 당시까지 뇌 기억이 검증된 26년 경력 머리소리함 요원 허관(許灌)[머리소리함 Guide Ear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반미청년회, 자주대오) 등을 해체 하는데 사용됨]-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정부(민주국가)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