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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 본문

흑해 주변국/루마니아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

CIA bear 허관(許灌) 2018. 5. 5. 13:45


차우셰스쿠의 잔인한 독재를 싫어하던 군인들도 정권의 수혜를 입던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를 제외하고 시민들 편에 서서 시민들을 도와주게 되고 이는 유혈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루마니아 군인들이 자유화 민주화 세력에 가담]

외채에 시달리던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다르게 루마니아는 외채는 다 갚았다. 그러나 이는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밀어붙이던 괴악한 경제 계획의 산물로 이로 인해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동구권에서도 알바니아에 뒤 이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일로에 치달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차우셰스쿠의 통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소소한 시위도 유혈 진압하여 국민들의 저항을 원천 차단하였기에 1989년 중순까지만 해도 루마니아는 끄떡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한달이 지난 1216일 헝가리계가 많이 살고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도시 티미쇼아라(Timișoara)에서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던 개신교 소속 퇴케시 라즐로(Tőkés László) 목사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교구에서 사임하고 지역 주민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대규모 사상자를 낸 소위 티미쇼아라 사건이 터진 이후 본격적으로 루마니아에도 저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221일 이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셰스쿠가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관제 집회를 열었지만 이것이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역효과를 내고 마침내 다음날인 1222일 루마니아에서도 본격적으로 반차우셰스쿠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잔인한 독재를 싫어하던 군인들도 정권의 수혜를 입던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를 제외하고 시민들 편에 서서 시민들을 도와주게 되고 이는 유혈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차우세스쿠 비밀 보안군과 대결이 일어남으로써 사실상 절반은 준내전 비슷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차우세스쿠는 북한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결국 시민들에게 붙잡혀 체포를 당했고, 그의 아내였던 엘레나 차우세스쿠와 함께 1225일 크리스마스에 처형됨과 동시에 보안군의 준동도 대부분 진압된다. 이렇게 루마니아도 1989년의 마지막 주를 해피엔딩(...)으로 장식하면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사건을 루마니아 혁명이라고 부르며, 19891225일 혁명 이후 루마니아인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민주화를 쟁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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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우셰스쿠 공산독재의 종식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루마니아 국민들의 모습. 솔리다르노시치 깃발도 보인다.

루마니아는 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냉전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진 자본주의화의 바람은 루마니아에도 불었다.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를 체포하자, 루마니아 서쪽의 도시 티미쇼아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차우셰스쿠 정권은 이를 잔혹하게 유혈진압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수천명이 학살당해서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는 둥 하는 근거없는 소문[18]이 서방 언론을 통해서 확산되었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매우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민주화 시위가 루마니아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국민을 감시하던 정보부 또한 민심을 읽었지만, 이미 민심을 돌이킬 수가 없는 지경이며 그의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차우셰스쿠에게 이런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차우셰스쿠 부부는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도 이란을 23일의 일정으로 방문하면서 그해 갓 취임한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를 만나는 위엄까지 보였다.

 

사실, 차우셰스쿠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을 감시하고 도청했으며 우상화 작업을 철저히 해왔다. 1984년에 일어난 쿠데타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국민들의 소소한 저항은 항상 유혈진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19891221일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차우셰스쿠는 평소에 하던 대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 국민들을 불러놓고 지지대회를 벌였다. 이 과정이 차우셰스쿠 입장에선 정말 재수가 없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광장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열성당원들이 모여서 차우셰스쿠의 연설을 화려하게 장식해야 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늦는 바람에 연설이 취소되었단 소문이 퍼지면서 모여있던 열성당원들은 거의 해산해버렸고 이에 허겁지겁 인근의 노동자들을 닥치는대로 징발해서 모아놨는데 난데없이 꼴보기 싫은 폭군의 연설에 강제로 모인 사람들은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평소처럼 자화자찬식의 연설을 했지만, 연설 중간 광장에 모여 있던 국민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차우셰스쿠여! 우리도 사람이다", "학살자를 타도하자!", "루마니아는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식으로 야유를 퍼붓고 티미쇼아라 시위의 무력진압에 항의를 하는 구호를 외치는 등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루마니아의 자유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었고,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몰락의 시초였던 이 역사적인 순간을 방송국을 통해서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급하다면 240초부터 보자. 240초부터 이러한 광경이 나온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연설에 군중이 야유와 비난을 퍼붓자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을 흔들어 보이는 뻘짓을 했고 공산당 보안국 간부들이 "어서 관저로 들어오십쇼!"라고 재촉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자후에 군중이 진정할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hallo!"만 미친듯이 외쳐댔다. 옆에서 엘레나는 재촉하는 간부들과 야유하는 군중에게 "닥치시오!"라고 을러댔고 결국에는 부부가 같이 군중들에게 "동무들, 입 좀 닥치시오!"라고 악을 써대는 상황이 되었다.

 

한참동안 목이 쉬도록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질러도 군중이 잠잠해지지 않자 당황한 차우셰스쿠는 멍청하게 손이나 흔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530초 경에 보다못한 엘레나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Talk to them, talk to them!)' 라고 말한 것이 결정타였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국가의 단합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허겁지겁 연설을 마무리했지만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고 옆에서 엘레나와 공산당 간부들만 열심히 박수를 쳐댔다. 한편 군중들의 성난 함성은 마침내 폭발했다. 차우셰스쿠는 예정된 것인지는 몰라도 연설중에 901월부터 전국민의 월급을 2000 레이에서 2200 레이로, 노인 연금도 800 레이에서 900 레이로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당근으로 국민들을 진정시키기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텔레비전 연설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지만, 라디오는 방송을 계속 진행되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알려졌다. 방송이 나간 후 상황은 급변했다.

 

여기서 차우셰스쿠의 희대의 병크가 터지는데 차우셰스쿠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국방장관인 바실레 밀리아(Vasile Milea) 장군에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맹비난하면서 앞으로도 병사들에게 데모 군중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갈아치워 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장군은 앞에서는 차우셰스쿠의 말을 따르는 듯이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발포명령을 끝내 내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부는 그의 암살을 데모 군중들에 의한 암살이라고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다른 소식통들은 차우셰스쿠의 지시에 따른 처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에 데모 군중에 의해 국방장관이 암살될 정도라면 이미 시위는 엄청난 수준이며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자 군 내부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 우리 보스가 우리 국방장관까지 죽이네? 그럼 우리는 시위를 진압해도 살아남기 굉장히 힘들겠네?우리한테 주는 것도 없으면서 뒷통수를 치냐?! 차우셰스쿠를 죽입시다! 차우셰스쿠는 나의 원수! 이런 입장으로 돌변하여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빅토르 스탄쿨레스쿠 장군은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 끝까지 차우셰스쿠와 연루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의해 끝내 국방장관으로 임명당했다. 당연히 후임 국방장관은 시위대 편이었다.

 

그리하여 22일에는 시위를 진압하러 보낸 정규군이 혁명 세력에 가담해 차우셰스쿠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정규군과 세쿠리타테 사이의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루마니아 공산당도 차우셰스쿠를 제명시켰다. 국민들 뿐 아니라 군과 당에게까지 버림받은 차우셰스쿠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대다수의 반대파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루마니아 정규군이 차우셰스쿠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차별대우 때문이다. 이 당시 정규군과 보안군의 대립은 루마니아 판 임오군란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차우셰스쿠는 정규군을 신뢰하지 못했고 낙태와 콘돔 사용 등의 피임을 금지하면서 급증한 고아원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뽑아다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비밀 경찰과 특별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 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 를 조직했다. 친위대 역할을 맡은 보안군에게는 정규군에도 지급되지 않은 최신 장비와 높은 보수가 주어졌고 이에 정규군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가 체포된 후 즉시 총살된 것도 보안군의 반격을 염려한 탓이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처형 직후까지도 보안군의 지하요새는 건재했으며, 이들을 진압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후 차우셰스쿠 시대에 태어난 고아들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큰 골치가 되었다.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 혼란 상황에서 고아원이 더이상 그나마의 재정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더욱 삶이 열악해진 아이들이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즉시 도주를 시도했고 관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북한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확증된 것이 없다. 북한 이외에도 소련,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쿠바, 모로코, 리비아, 앙골라 등 많은 국가들이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당시 국제 전문가들과 외신들 사이에서 망명 후보국으로 언급, 거론된 적이 있었다.

 

조종사 바실레 말루찬 중령은 차우셰스쿠의 망명 계획을 껄끄럽게 생각했고 자신이 차우셰스쿠 부부의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 엘레나의 잔소리에 대한 불만 등이 많았기 때문에 비행 중 일부러 기체를 요동치게 하면서 '반란군의 대공 사격을 받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헬리콥터 탈출이 힘들다고 판단한 차우셰스쿠는 육로로 이동하기 위해 착륙 명령을 내렸다. 안전한 곳에 헬리콥터를 비상 착륙시킨 말루찬 중령은 경호원들이 속임수를 알아채고 자신을 사살할 것을 우려해 곧장 소속 부대로 도망쳤다. 실제로 조종사의 증언에 따르면 엘레나가 자신을 무섭게 째려봤다고 한다.

 

차우셰스쿠 부부와 경호원은 도로에 달리던 시민의 차를 징발해 계속 도피하면서 은신처를 수소문하느라 바빴고, 사람들에게 계속 "자신의 대의에 동의하는가"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편인지를 꼭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군대가 등을 돌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 곳을 잃어 우왕좌왕하다가 어느 산림 감시원의 숙소를 발견해 그 곳에 은거하기로 했다. 하지만 감시원들은 차우셰스쿠 일당에게 순종하는 척 하면서 혁명군 측에 몰래 자신들의 숙소에 있다고 고발했고, 결국 23일 차우셰스쿠 부부는 도주한 지 하루도 안 돼서 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에도 차우셰스쿠 부부는 자포자기 했는지 군대의 총사령관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거나, 군인들이 먹는 식단을 가져다 주자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며 입에도 대지 않았고 이 지방의 특산품인 고급 빵과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엄청나게 희귀했던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해 매 끼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건강 때문에 소금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고 항의했고, 설탕이 든 음식을 주면 각하는 당뇨가 있는데 왜 이런 걸 주냐고 아내 엘레나는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 놓았다. 또한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서 욕조를 갖다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리하던 세쿠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금슬은 좋았는지 갇힌 상황에서도 둘이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고 한다. 거기에 자신이 군중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게 해달라거나, 자고 있던 자신을 깨워서 텔레비전 방송국에 자신을 데려다 주면 100만 또는 200만 달러의 돈을 줄 수 있으며, 달러를 주기 전에 가까운 마을 보이네슈티에 감춰둔 돈 수백만 레이의 돈을 준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세쿠 소령은 그토록 태양처럼 받들라고 교육받은 차우셰스쿠의 진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이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돈은 발견되지 않았다.

 

혁명정부는 차우셰스쿠 부부 체포 이전부터 그들의 재판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헌법에 의한 재판을 주장하였지만 혁명군부에서 "차우셰스쿠가 항소하여 살아있을 경우 그들의 추종자들이 역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고, 그러면 큰 내전으로 변할 것이다. 결국 외국군대가 루마니아에 들어올거고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차우셰스쿠와 똑같이 처벌받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군법에 의한 군법 재판으로 그들을 처벌하기로 하였다. 판결도 내부적으로는 차우셰스쿠가 완전히 미쳤다는 증거 등이 나오지 않은 이상 무조건 사형에 처하기로 결론 내려진 상황에서 그들의 신병만 확보되면 바로 속결하기로 하였다. 그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는 친위 세력을 두려워해 일찍 처형했다는 의견도 있다. 일단 세쿠리타테 같은 차우셰스쿠파와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혁명세력은 숨어있는 차우셰스쿠파의 저격이나 테러로 크게 고생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 재판을 위해 가던 사람이 총을 맞기도 했다.

차우셰스쿠 이후 집권한 리에스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리에스쿠 정권이 차우셰스쿠 일가만 빠진 차우셰스쿠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차우세스쿠 실각 이후에도 옛 공산당 정권 요인들은 대부분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차우셰스쿠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의 루마니아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빨리 차우셰스쿠만 제거하여 문제를 봉합하려 들었다는 분석도 있다.19891225, 크리스마스 한 작은 초등학교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비밀재판이 열렸는데 이 재판에서 검사는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므로 상관없다"고 하면서 사형을 구형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변호사까지 검사로 돌변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의 변호사 카를로가 말하길,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의 경우는 처음이요.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

 

 

얼마나 썩어빠졌으면 중립을 지켜야할 법정에서까지 대놓고 감정적인 의견이 나올 정도로 차우세스쿠는 그야말로 인민의 적이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누구도 자신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변호와 항소를 거부했다. 만약 항소하였다면 당시 형법상 최소 열흘 정도는 더 살 수 있었겠지만, 항소는 법정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항소조차 거부했다. 물론 항소하겠다 해도 당시 상황상 인정되었을지는 미지수.

 

그래도 변호는 해야 하니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제안한 게 '정신 이상'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정신병이 인정되면 아무리 재판을 엉성하게 해도 사형만큼은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권에서조차 정신 이상은 의무적인 감형 사유로 규정하고 있었다. 루시안 스타니악이 엄벌주의가 일반화된 공산권 시절 사형을 면한 것은 정신병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이것도 거부했고 항소도 포기하여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런 엉성한 재판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은데, 차우세스쿠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명확한 재판으로 그의 악행을 두고두고 씹을 수 있게 정식 재판을 거쳐서 전세계에 그의 악행을 알린 후 사형에 집행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재판 직후 줄로 묶어서 끌고 나가는 과정도 가관이었는데 차우셰스쿠는 "무엄하다! 감히 날 줄로 묶으려 들다니!"라며 상황파악을 아직도 못했고 엘레나는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며 난리를 피웠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권리 운운하며 포박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끝내 꽁꽁 묶이고 말았다. 끝내 결박된 차우셰스쿠 부부는 흥분해서 병사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쳐댔다.

 

이 때 엘레나가 한 말이 "난 너희들을 어머니로서 대해왔다!"였다. 그러다 결국 죽는다는 공포에 겨워 하소연했으나 병사 중 하나가 싸늘하게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소."라고 일갈했다. 엘레나는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다니!"라고 울부짖으며 끌려나갔다. 차우셰스쿠는 더해서 자신을 잡으러 온 혁명군들이 "인민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소!"라고 외치자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유가 "내가 인민의 아버지인데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인민 운운한다는 거냐?"였다나. 차우셰스쿠를 총살한 병사들 중 한 명은 "오늘 난 아버지를 죽였다"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오후 4시 사형판결 1시간 반만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탈출할 때 입었던 값비싼 정장을 그대로 입고 건물에서 끌려나와 담벼락에 세워져 총살형을 당한다. 이 후 총살형을 집행할 육군 제64공수연대에서는 기존의 사형집행 방법에 따라 부사관급 이상 소총수 열 명에 실탄 다섯 발을 준비하여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총살형을 일반 징집병이 집행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헌병대 부사관급 이상이 총살형 집행을 맡으며, 그마저도 실탄은 일부에게만 지급한다.

하지만 군인들은 '나도! 나도 죽일 거야!'를 외치며 서로 자기가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아주 난리를 부렸고 결국 8명이 차출되었는데 그들 전원이 차우세스쿠를 죽이길 원하자 최종적으로 대위, 상사, 하사 계급의 군인 3명만 차출되었다. 부대측은 이들에게 규정대로 부부당 5발씩 총 10발만 지급하려 했지만 부대원들이 탄창 하나씩 갈기기로 약속하고 한 사람당 탄창 2개씩 총 180발을 준비한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

 

536초경 엘레나와 차우셰스쿠의 시체가 나오는데 엘레나의 시체가 꽤나 참혹하다.

 

차우세스쿠는 재판에서 사형이 결정되자 눈물을 흘렸고 죽기 직전까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다가, 1절도 못 마치고 총살형이 집행되어 사살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터내셔널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절의 가사가 당시 상황과 완벽히 일치한다.

 

일어나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아

 

일어나라, 굶주림의 노예들아

이성의 불길이 분화구에서 타오르니

이것은 마지막 외침이 되리라

과거는 깨끗한 판으로 덮일지니

억압받은 민중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상은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뒤바뀌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전부가 되리라.

 

 

처형 장면은 군인들에 의해 녹화된 후 프랑스 A2-TV[24]를 통해 전세계 언론을 통해 공중파를 탔다. 여담으로 미국에서 처형장면을 아침속보로, 그것도 무삭제 방영하는 바람에 이런 거에 민감한 자들에게 심대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다행히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조사 결과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에게는 약 120발의 총알이 박혔다고 한다.

 

그런데 부검 결과 차우셰스쿠의 경우는 총살 직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71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어마어마한 공포감에 그 정도 연령이었으면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루마니아의 국민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민주화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시민들에 섞인 한 여성은 울음을 터트리면서 "도대체 왜 차우셰스쿠를 그렇게나 쉽게 죽인 거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겪게 해야지!" 라고 했다고 할 정도니 차우셰스쿠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이 작자에 대한 집행을 끝으로 루마니아에서 사형제는 기존에 있던 사형수까지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형태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민주화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 사형집행인 셈. 더군다나 일부 지식인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를 '퇴치한' 것이므로 사형이 아닌 엑소시즘. 고로 민주화 이후 사형 집행은 전혀 없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고.

 

총살형을 당한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체는 원칙대로 부검 뒤 가족에게 인도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찢어진 텐트로 둘둘 말려 헬기에 실은 뒤 부쿠레슈티 교외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 내려놓았는데, 시신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육군 수색대가 샅샅이 뒤져 다음날 아침 운동장 차고에서 시신을 찾아냈다. 하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시신을 그곳에 두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정부는 시신을 인도하려 했지만 가족이 풍비박산났기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자 그냥 공동 묘지에 매장하는 형태로 장례를 치렀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그런지 묻어주는 것까지 규탄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우셰스쿠의 처형 소식이 북한에 전해지자 김정일은 최단 시간 내에 처형 장면 비디오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이 때는 김일성이 생존 중이었는데, 김일성은 루마니아 군대가 차우셰스쿠를 배반했다는 점, 그리고 소련이 이를 방관했다는 점에 상당히 충격을 먹었다고... 그래서 아들 김정일에게 하루빨리 군권을 넘겨 김정일이 군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남한과의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도 서둘러 추진하게 된다. 루마니아를 포함한 동유럽 공산권 붕괴에 대해 소련은 아오안이고, 미국은 갈수록 세계에서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기댈 언덕이 없어진 북한은 일단 남한만이라도 끌어들여 평화공존을 기치로 내걸면 어떻게든 체제 붕괴는 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꼼수를 부린 것이다.

 

덕분에 유럽 쪽의 북한 외교관들이 고생깨나 했다고.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이 장면을 본 김정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우리도 저 꼴이 된다." 라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제 아비와 친목질 하던 작자가 분노한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져서 끔찍하게 살해당한데다가 자기도 국민들을 착취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니, 똑같이 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김정일은 우리나라에게는 전보다 더 기만적인 화전양면전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북한 내의 반대파들을 더더욱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게 된다.

 

덩샤오핑도 역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봤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면서 한참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공산당의 한 간부가 "반동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한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바뀌면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덩샤오핑 본인이 천안문광장에서 직접 피로써 반동분자를 때려잡은건 기억 못하는가 보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공동묘지 한 구석에 처박히듯 묻혔다. 보통 서양식 무덤은 대리석을 이용해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의 무덤은 그냥 흙 봉분으로 되어있으며 잡초와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가 최근에야 위의 사진처럼 깔끔해졌다. 비석도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세워졌다. 부부 매장도 허용되지 않아서 그의 아내의 묘지는 차우셰스쿠의 묘지에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머리의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 되도록 묻혔다.

 

여러모로 독재자의 집권과 비참한 최후를 한 몸에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의 처인 엘레나의 무덤 위에는 지금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구별이 안 갔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사후 평가가 높아지면서, 지지자들의 청원에 힘입어 이 가묘는 나중에(2010) 다시 재발굴되었고, 감식팀의 감정 끝에 유골이 수습되어 이장, 정식으로 묘가 세워졌다. 위에 보이는 묘가 바로 그 차우셰스쿠의 묘지. 이장된 이후, 차우셰스쿠의 처형일이나 생일마다 지지자들이 몰려와서 꽃을 놓고 추모집회를 가진다고

한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군 모습(사진)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사진]


차우셰스쿠의 사후 평가가 높아지면서, 지지자들의 청원에 힘입어 이 가묘는 나중에(2010) 다시 재발굴되었고, 감식팀의 감정 끝에 유골이 수습되어 이장, 정식으로 묘가 세워졌다. 위에 보이는 묘가 바로 그 차우셰스쿠의 묘지. 이장된 이후, 차우셰스쿠의 처형일이나 생일마다 지지자들이 몰려와서 꽃을 놓고 추모집회를 가진다고 한다[사진]








마니아 민주화 혁명 25주년을 맞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21일(현지시간) 기념 행사가 열렸다. 반(反)공산주의자들이 거리로 나와 행사를 즐겼다. 공산주의 문장을 잘라낸 국기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거나, 일부 시민들은 종이 상자를 모아 불태우기도 했다. 

지난 1989년 루마니아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 22년간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축출당했다. 당시 차우셰스쿠가 반정부 시위대 유혈 진압을 시도하면서 1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차우셰스쿠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전복시킨 루마니아는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198912월 반체제 봉기를 통해 1990년 개방과 시장경제를 표방한 공화국체제로 변화하였으며 이 정치 체제는 국가원수으로서의 대통령권한과 행정부수반으로서의 총리가 존재하는 프랑스의 체제와 유사하다

199011, 루마니아는 민주화되었다. 그 뒤에도 수많은 폭동과 시위를 거쳐 199611, 시민의회 후보인 콘스탄티네스쿠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공산정권이 무너진 지 7년만에 민주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형 집행을 끝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자유화 개방화정책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대통령이나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기본권보장,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