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중국과 인도 국경선에 배치된 핵 미사일 본문

Guide Ear&Bird's Eye/인도

중국과 인도 국경선에 배치된 핵 미사일

CIA Bear 허관(許灌) 2018. 4. 29. 21:25


                                                           핵탄두 탑재 가능한 중국 전역을 사정권에 넣는 탄도 미사일 "아그니 5"(사정 5000 ㎞·m)[모습]

공산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4 차레 전쟁을 벌였다.
1950년 한국전에 개입,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1962년에는 인도를 침공했다. 1969년에는 소련과 국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1978년에는 베트남을 공격했다.
첫 번째 국가인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사적 대립 국가로 분류할 수 있는 적국이 아니었다.

소련과 베트남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고 인도는 비동맹그룹 창설 국가였다.

1 세대 때 발표되 5 세대 때인 지금까지 여전히 중국 외교원칙으로 견지되고 있는 평화 5원칙은 저우언라이 원칙으로  불리는데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와의 교감 하에 탄생됐다.

이런 인도에 대해 등 뒤에 비수를 찌르듯 군사 공격을 가한 것은 영토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4 번의 전쟁 모두 영토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국전 개입은 일본의 괴뢰국에서 중국의 영토로 되찾은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은 만주의 불안한 위상이 촉발시켰다.

소련과의 군사 충돌 베트남과의 전쟁 또한 정리되지 않은 국경선 문제가 이유였다.

인도와 의 전쟁 역시중국 입장에서는 티베트의 불안한 위상 때문이었다.

티베트는1911년 신해혁명 이후 1950년까지 사실상의 반독립 국가 지위를 누렸던 곳이다.

1959년 티베트 무장 봉기 후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세우자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 개입 전야의 위기감을 느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향해 진군하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미군을 지켜 보며 그가 만주를 탐내려는 것으로 간주했듯이 이러한 일련의 사태 진전을 티베트를 중국 판도에서 분리하려는 움직임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오쩌둥의 한국전 개입이 오버액션의 선제 조치였던 것처럼 중국의 인도 침공은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과잉 방어적 선제적 경고 조치였던 것이다.

1962년의 '뱃 속의 실리'는 '혓바닥의 명분'을 제압했다


1954년 4월 29일 중국과 인도가 서명한 ‘중국의 티베트(시장西藏지구와 인도간의 통상 및 교통에 관한 中印협정’의 첫 머리에 평화5원칙이 삽입됐다.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 지침이 된 이 원칙은 상호영토주권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 등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 5원칙'이라고도 불린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앞서 1953년 12월 31일 티베트 문제 회담을 갖기 위해 베이징(北京)에 온 인도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 원칙을 밝혔고 인도 대표단도 이에 적극 찬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