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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천국(工作員天国) 일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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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천국(工作員天国) 일본

CIA bear 허관(許灌) 2016. 2. 14. 20:10

지금부터 42년 전,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살 된 사건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을 "적화 공작 기지 "로 본다. 그 사건으로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이 태어났다.
아직 '반공'이 중요한 정치 과제였던 시대배경도 있지만, 범인 문세광은 오사카의 재일 한국인에서 일본인 행세를하고 한국에 입국해 범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사건 전 일본에서 침투하는 북한 간첩의 많음에 한국측은 선처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가 이에 정확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이다.

조선 대학의 전 간부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 북한의 대외 정보 기관의 지시를 받고 공작 활동에 당첨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여전히 스파이 천국인 일본의 실정을 감동 때 "공작 기지"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조선 대학교는 일본의 제도는 각종 학교이지만, 조선 학교의 최고 학부라고 할 자리 매김이다. 교육 기관으로서의 존재 자체는 합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공작원이 침투, 활동의 거점이되고 있던 모습이다.

*조총련 조선대학교 개요

조총련 조선대학교가 1956년 6월 8일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조총련계 인사들에 의하여 2년제 대학교로 설립하여 지금까지 13,000명졸업생을 배출하여 운영 되어오고 있다
전(全) 학생이 기숙사제로 조선연극부등 총 8학부로 1,000명 정도의 학생이 현재 수학하고 있었으며 졸업생들은 주로 조선학교의 교원 및 총련신보나 잡지의 기자로 취직하며 총련 동포가 경영하는 금융기관에도 취직하고 있다

1.조선대학교의 창립과 건학정신---김일성주의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주체사상
-1996년 6월 23일 한덕수 조총련의장 말
조선대학교 창립 40주 기념보고 축사 통해 조선대학생의 "김정일의 전사화" 다짐
-반미 반일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논리
-200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50주년을 기념하는 "조총련 중앙대회"가 조총련 간부들과 조선대학교 학생등 2천여명이 모여 도쿄의 조선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조선대학교는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대학이다 서만술의장은 "조총련은 민족차별과 멸시 속에서 재일동포 사회의 민족성을 지켜왔다"며 "김정일장군을 받들어 새로운 전진과 비약을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2.입학자격--조총련계 중고급학교 졸업생
<도쿄 조선중고급학교>는 도쿄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급부 3년, 고급부 3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각 학년은 5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반에는 약 25-3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중급부와 고급부 수업은 일본어 수입을 제외한 모든 수업이 한국어로 진행되고 있다 교복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하교 한다

3.조선대학교 학장
(1)1957년 4월 한덕수 조선대학교 학장
(2)현재--장병태 학장

4.조총련 조선대학교 활동 자료
(1)각종 반미(反美) 반한(反韓) 집회주도--조선대학교는 대한민국 부정하고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정하는 재일동포 자녀들이다
(2)김일성 김정일주 노선 활동이나 문화행사. 집회등 주도
1998년 2월 13일-2월 14일 경애하는 장군님 탄생 56돐 기념 재일조선학생 중앙구연대회 조선대학교에서 진행
(3)평양방문과 반미 자주학교 참여와 활동
입북 <한총련> 대표들과 총련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상봉의 기쁨을 안고 노래도 부르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이에 앞서 <한총련> 대표들은 사회주의 조국에 체류하고 있는 총련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 학생들, 재일조선학생 조국방문단 성원들과도 상봉하였다

5.21세기 조총련 조선대학교가 나아갈 방향
(1)21세기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고도소비사회이다 일본사회에서 자본주의 3대 원칙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부정하는 김일성 김정일주의 주체사상 건학(建學)으로 학교를 운영할때는 부도로 운영될 수 있으며 우수한 한국인(조선인) 2세들이 후진국 정신으로 낙후될 우려가 많으며 일본시민들의 지지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조총련 조선대학교도 21세기 고도소비사회에서 대학의 자율권이 인정되는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다
(2)주체사상은 국가사회주의 이념으로 일본 군국주의 이론과 일맥상통하여 조선대학교 학생들을 세계 각국 공산주의 운동의 혁명전사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 전사로 육성할 수 있다 대학과 학생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된 열린사회 교육장이 돼야 한다
(3)조총련 조선대학교가 북한정부 도움보다는 김일성 김정일 사조직으로 육성되어 북한정부 정치.경제. 사회.문화등의 연구가 아닌 김일성 김정일 연구로 타락하여 한민족의 문화단절을 시도할 우려가 많고 남북분단 획책의 도구로 이용되는 실정이다
조총련 조선대학은 있는 그대로 한민족(조선민족)의 우수성과 일본 교류협력의 구심점이 돼야 할 시기이다
(4)조총련 조선대학교 학생이나 졸업생이 조총련내부 "학습조" 주도세력이 되어 남북전쟁을 획책하는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민전 일본대표부로 활동하거나 전(全)아시아와 태평양지역 공산화도구로 되지 말아야 한다
조선대학교 학생이나 졸업생은 한국인(조선인) 핏줄이지만 일본 거주지로 일본 국민이다 일본 국왕제를 부정하고 NLPDR노선을 견지하는 조총련 "학습조"가 되지 말아야 한다
조총련 학습조는 "위대한 김일성원수가 조직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가 지도하는 재일조선인 김일성 김정일주의자의 혁명조직"이며 활동임무는 조국을 엄호방위하고 일본에서 주체혁명을 위업을 이루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 한다는 것이다
(5)조총련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남북국가를 동시에 인정하거나 공산국가 북한보다는 자유민주국가 남한을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다

한국인 2세들도 일본지역에서 한국인 2세 일본사람과 국적으로 노력하여 일반 공무원이나 경찰. 검찰이나 법관 공무원, 사업가. 교육자.연예인. 경영인.국회의원등이 될 수 있으며 일본 수상도 될 수 있다 그런 분들이 되기 위해서는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된 열린사회에서 가능하다

 

 


*조총련(朝總聯)과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주요 자료

1.조총련(朝總聯,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은 재일본 한국인 가운데 북한을 지지하는 친북 재일교포단체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NLPDR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단체 조총련을 결성하여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으로 궁극적으로 대남적화통일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고 일본 공산화에 주력하고 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약칭:朝聯)이 결성되었으나 김천해(金天海)를 중심으로 친북단체로 기울어졌다 조련(朝聯)이 김천해의 공산주의 노선에 따라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 과격한 불법투쟁을 벌이자 일본정부는 폭력단체라는 이유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1950년 4월 2일 잔류조직이 모여 조선인단체협의회를 결성했는데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로 고쳤다

1951년 1월 9일 이를 토대로 재일조선민주전선(在日朝鮮民主戰線, 약창:民戰)을 결성, 폭력투쟁노선을 이어갔다

1954년 8월 30일 북한의 남일(南日)이 한덕수(韓德銖)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1955년 5월 25일 한덕수를 의장으로  북한 직속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총련은 명목상 최고의결기관으로 전체대회가 3년마다 소집되기는 하지만 사실상 한덕수 1인 체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1년 2월 21일 한덕수 의장 사망이후 현재 의장은 서만술, 책임부의장은 허종만, 부의장은 박재로. 권순희. 오형진. 남승우. 양수종. 이기석. 고덕우등 7명이다 북한이 해외 공민조직이라고 주장하는 조총련의 역할은 통일 운동이라는 대남공작과 애국사업으로 불리는 대북경제지원 사업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남공작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은 현직 조총련 의장 서만술이며 애국사업 책임자는 허종만이다 

행동강령에는 제일동포의 거주. 재산. 직업. 언론출판등의 권익을 옹호하고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북한노동당 일본지부나 다름없다 기본활동 목적은 일본의 좌익세력과 연계하여 일본에 남한 침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고 한반도는 물론 전(全)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국 공산화 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 전초기지의 역할도 맡고 있다 특히 조총련내부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학습조(學習組)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 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투쟁(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전략의 효과적 수행등에 있다

 

과거의 조총련은 중앙위 산하에 48개 지방본부와 200개 지부, 18개 산하단체와 23개 사업체를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었고 조총련계 학교는 한때 유치원, 초.중등학교, 대학교등 300여곳이나 되었으며 북한정부의 유혹적인 정책 말에 따라 1959년 재일 조선인 동포 10만명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남한)의 경제성장과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그리고 국제적 지위 향상으로  조총련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

일본 전체국민의 0.6%, 50만명이상이 재일 한국인으로 그 중에서 대한민국 국적 민단(民團) 동포가 40만명이고  10만명이 조선의 국적이다 2005년 5월 25일 창립 50주년을 맞은 조총련의 모습은 초라했다 4만 6,000여명에 이르던 조선학교 학생 수는 1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굵직한 자금줄인 조선은행의 각 지역 조합은 파산하거나 강제합병 되고 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는 이들이 매년 1만여명에 이른다 한때 일본사회에서 민족혼의 상징하던 조총련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는 김정일의 일본인 납치 시인 이후 일본인들에게 찢기고 오물을 뒤집어쓰는 등 폭력의 대상이 돼버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조총련 50주년을 맞아 보낸 메시지에서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조속히 해결돼야 북일(北日) 국교 정상화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때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교포는 총련도 결국 조국인 북한체제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걷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조총련도 21세기 고도소비사회에서 변화돼야 할 시기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에서 진보진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 반미. 반일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NLPDR)노선 국가사회주의 침략이론을 버리고  일본 국왕제를 인정한 후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통합 사회로 나아가는 재일 한국인 동포들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 조선대학교:1956년 6월 8일 설립과 운영

*신문(기관자)--조선신보:1945년 10월 26일 창간

 *방송(통신사)--조선통신사 

*가극단--금강산 가극단

(1)한덕수(韓德銖)

ㄱ.출생-1907년생(生)

ㄴ.출신-경북 경산(慶山)

ㄷ.학력--일본대(日本大) 전문부 중퇴

ㄹ.경력

1927년 7월 도일(度日-일본으로 이주) 

1945년 일본공산당 가입

1945년 가나가와현(懸) 본부 공산당 위원장

1949년 9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1951년 1월 재일조선민주전선(民戰) 중앙위원

1955년 5월 조총련 수석의장

1957년 4월 조선대학 학장

1958년 조총련 중앙상임위 의장

1959년 재일 조선인 10만명 북송 주도

1967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72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6년 4월 노력영웅칭호

1977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

1982년 4월 김일성훈장 서훈

1986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9년 9월 조총련 의장 유임

1990년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1990년 8월 조국통일상 수상

1992년 5월 조총련 의장 8선(8選) 유임   

1994년 4월 26일 신병 치료차 입북(入北- 북한 방문)

1994년 4월 28일 김일성과 함께 회견

1994년 6월 7일 김일성과 면담

1994년 7월 9일 김일성 조문

1994년 7월 20일 김일성 중앙추도대회 참석

1994년 10월 10일 일본 귀국 앞서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편지와 <김정일 장군님께 드리는 노래>등 2곡의 노랫말 전달

1994년 10월 16일 김일성 사망 1백일에 즈음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헌화

1994년 10월 19일 단군릉 참관

1994년 10월 22일 박성철 부주석. 김용순 당 대남 비서  전송 속에 일본으로 귀환

1994년 11월 15일 일본 사회당 서기장 구보 와타루와 일본 정치인들의 방북 문제 논의

1995년 2월 조총련 중앙위 제16기 4차회의서 김정일의 연내 당중앙 총비서 및 국가 주석직 취임시사

1995년 4월 15일 김일성 83회 생일 기념 중앙대회서 김정일에의 충성다짐(조선문화 회관)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중앙대회 참석

1995년 6월 15일 조총련 제16기 5차회의 확대회의 개최 <김일성충성세력화> 다짐

1995년 7월 5일 김일성 사망 1주기행사 참석차 북한 방문

1995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2주기 중앙 추모대회 진행

1995년 7월 9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추모연회 참석

1995년 7월 14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조총련 추모단 인솔 <한덕수경공업대학> 참관

1995년 9월 8일 북한정권 수립 47주 중앙보고대회 참석

1995년 9월 17일 제17차 조총련 전체대회서 의장에 재선

1995년 9월 25일 조총련 제1부의장 이진규(李珍珪) 장례식 참석

1995년 10월 26일 조선신보 창간 50주 기념식서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보도활동 촉구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 참석

1996년 1월 30일 <문예.체육일꾼모임> 개최  그리고 에술,체육 통한 조직확대 역설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맞아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 다짐하는 "글" 전달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기념 재일본조선인 중앙대회 개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대북지원 사업 강화 다짐

1996년 6월 8일 조선대학교 창립 40주 기념보고 축사 통해 조선대학생의 <김정일의 전사화> 다짐  

1996년 6월 18일 조총련발간 대중잡지 <이어>창간축하모임 참석  

1996년 6월 23일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진행

1996년 10월 5일 증등교육실시 50주 중앙대회 참석 

1997년 1월 22일 90회 생일 맞아 김일성 훈장 서훈

1997년 5월 8일 김일성. 김정일의 교육원조비 송금 40주기념 중앙감사대회 참석

1997년 5월 17일 조총련 금강산 가극단 새회관 준공식 참석

1997년 5월 29일 김정일장군의 노래보급을 위한 총련 일꾼들의 모임 참석

1997년 6월 27일 진행된 <조선신보> 복간 45주년 기념 모임 참석 연설

1997년 7월 6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추모대표단 한덕수단장 인솔, 평양도착

1997년 7월 8일 김정일 예방과 환담 그리고 김일성 3주기 맞아 조의(弔意)

1999년 1월 1일 김정일에 신년축하문 보냄

2001년 2월 21일 오후 8시 20분 94세 나이로 사망

 

 

(2)허종만

ㄱ.출신--경남 고성

ㄴ.경력

1959년 조총련 도쿄도(東京都) 본부위원장

1986년 9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1993년  7월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 책임부의장(신설)

1994년 2월 28일 평양서 김정일과 친선담화

1994년 7월 17일 김일성 조문, 김정일에 충성다짐

1995년 3월 20일 김정일이 조총련 예술단에 베푼 목란관연회에 당비서 김기남 김용순과 함께 참석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제일 조선사회과학자 <학술보도회> 연설 통해 학자들이 김정일 사상 실현 기여 강조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95년의 조직강화의 해> 강조

1996년 6월 27일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 지지 일본위원회" 결성 20주 기념 모임 참석

1996년 10월 조총련 청년상공회 중앙간사회 제1기 2차 확대회의 연설 통해 대북 합영. 합작 사업 주력 강조(대북투자회)

1997년 7월 8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중앙추모대회 참석(동경 조선문화회관)

2005년  조총련 결성 50주 기념 행사때 김영남  축하 메세지 낭독

-->허종만은 대북 투자와 대북 경제송금을 주도했으며 조총련 학습조 실질적 책임자로 알려지고 있다

 -http://zine.media.daum.net/mega/h21/200506/03/hani21/v9251826.html

 

 

2001년부터 조총련을 이끌고 있는 서만술의장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조총련 조직국장과 사무총국장등 핵심라인을 거친 한덕수의 직계, 한덕수 의장 사망 후 조총련 안팎에선 대북 송금 사업을주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이 두터운 허종만 책임부의장의 승인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서만술의장의 낙점이었다

위축된 조총련의 조직을 추스르려면 성품이 부드럽고 인화에 강점이 있는 서만술의장이 적임이라고 북당국이 판단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지난 2002년 북일정상회담 직전에 해산했던 비공식 조직 "힉습조"를 부활시켜 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조총련이 이번에 학습조를 부활시켜는 것은 자금조달과 조직강화, 그리고 대일(對日), 태평양연안 공작을 강화하려는 목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朝)란

ㄱ.일본 재판부에 제출된 조총련 내부 자료에 따르면 학습조는 "위대한 김일성 원수가 조직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가 지도하는 재일조선인 김일성 김정일주의자의 혁명조직"이며 활동임무는 조국을 엄호방위하고 일본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이루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ㄴ.조총련은 학습조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학습조 조직 기반으로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학습조-통일혁명당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 저력의 효과적 수행, 동북아지역의 북한정부 연락선 구축(잠수함 기지구축), 무기구입과 밀매 추진, 반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등을 운영하면서 자금확보등에 주도하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활동 자료

ㄱ.조총련 학습조는 동북아 지역 북한정부 간첩망과 반미구국전선 조직  

ㄴ.조총련 학습조는 북한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직

조총련 소속 공작요원 소위 "학습조" 3,000명 및 재일(在日) "한통련", 재미(在美) "한청련", 해외 "범민련"등  친북전위 조직 16,500명등 대남공작에 활용

ㄷ.북한 불법 수출에는 총련의 비공개조직인 "학습조"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공안당국의 조사를 인용해 보도 또한 16일 다산케이(産經)신문은 세이신기업이 미사일 추진 연료완성에 필요한 제트 밀을 판매한 곳은 사실상 북한 인민무력부라고 보도했다

ㄹ. 조총련 학습조는 북한과 북한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하는 재일 조선인계의 신용조합에 강한 영향력 행사

반합법적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 운영과 자금확보

ㅁ.1998년 한 재일동표가 조긴 아이치(朝銀 愛知)를 상대로 이 지점 부의장이 횡령한 자신의 예금 약 17억 5천만엔을 반환해달라고 청구 재판 자료

-재판 과정에 원고측은 "학습조"라는 조직이 조긴 아이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고 이 재판 판결문을 보면 "피고(조긴 아이치)의 간부는 전부 학습조원에서 등용되었다 조긴 아이치는 금융기관으로서 본래의 업무 이외에 조총련의 활동자금이나 북한에 돈을 보내는 특수임무를 행하고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원고인 재일동포 기업가는 "나의 예금은 북한에 대한 송금이나 한국의 유학생 조직, 일본내 친북계 국회의원의 정치자금에 쓰였다"고 말했다 

ㅂ.1999년 여름 일본 자민당 외교부회에서 공안관계자는 학습조에 관하여 "전국에 약 1000개 조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ㅅ.전(前) 일본 공안조사청 조사 제2부장 스가누마 고코(管沼光弘)씨는 2001년 11월 15일자 슈칸 분(週刊 文春)에 북한이 그 동안 은밀히 제3세계에 무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돈세탁 장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ㅇ.김정일은 1999년 4월 20일 조총련 제1 부의장 서만술에게 "외유내강(外柔內剛) 방식으로 조총련을 재건하라"라고 지시했다

"외유(外柔)" 는 조총련이  우경화하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살정도로 취직센터와 노인 복지정책등 다양한 정책을 펴서 동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었다 "내강(內剛)"은 학습조(조선노동당 일본조직-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에서 철저하게 김정일 숭배사상을 고취하라는 것이었다

ㅈ.일본근해 괴선박 격침사건--테러요원 침투를 위한 대일(對日) 한민전 공작선과 필로폰을 밀무역하는 북한 선박이었을 가능성 제기

마약과 현금등 막대한 규모의 현물을 싣고 있었다

ㅎ.북한은 2001년 7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 49척을 밀수입한 사실이 있다 

 

조총련도 대한민국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노선과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노선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버리고 서구사회 진보진영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

    

1974년 8.15광복절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세)은 누구인가?(추적자료)

문세광(文世光)은 누구인가
문세광(文世光)은 경남 진양(진주)가 본적으로 1951년 12월 일본 오스카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에서 석면제조업체에 다니던 경남 진양(진주)이 고향인 재일동포 민단(民團) 출신 부친 문병태와 모친 육말란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문세광은 시립(市立) 성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업에 염증을 느끼고 고등학교 2학년때 중퇴했으며 오사카 재일한국인 거류민단 이쿠노기타(生野北)지부에 가입했다 이후 플라스틱 공장공원과 휴지 수집상, 소화기 판매원, 빌딩 유리청소부등 각종 노동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보인 것은 고등학교 시절때부터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공산당 선언> <모택동어록> <김일성선집>등 각종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고 이 과정에 <일본의 자본주의 사회구조 및 교포사회의 불만을 해결하는 길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가 공산주의화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과 투쟁이 섬취하게 되었고 공산주의화 되는 길이라고 믿음을 갖게됐다
문세광은 고교 중퇴 뒤 민단계열의 재일한국청년동맹등의 단체에 가입 공산주의자임을 감추고 표면상 민단을 위해 활동하는 것처럼 가장 , 각종 집회시위를 선동해 민단 분열을 꽤했다고 한다1972년 9월 3일 오사카에서 열린 민단과 조총련의 단합대회에서 김효룡을 만나 조총련에 포섭된 문세광은 이듬해 김대중납치사건에 발생하자 김대중구출대책위원회에 가입, 주(駐)오사카총영사관을 점거해 영사관 직원을 인질로 김씨와 교환을 계획하기도 했다
문세광은 1972년 9월 오사카의 한 페스티벌홀에서 단합대회에서 조총련 인사 김효룡을 처음 만았고 그 이후 김호룡은 1972년 9월 5일 오후 8시쯤 처음 문세광 집을 방문했고 이후 수 차례 약년 동안 문세광 집을 방문해 각종 선물로 환심을 산 뒤 북한 관련 자료로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다
문세광에게 남편의 명의의 가짜 여권을 만들어 준 요시이미키코(당시 24세 여성)은 문세광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비슷한 사상으로 인해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지만 두 사람이 장래를 약속하기도 했으나 민족이 달라 따로 결혼했고 이후 자주 만나 서로의 활동을 격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세광과 요시이미키코는 1973년 11월 신분위장 출입국 가능시험과 권총을 구입하기 위해 부부를 위장해 홍콩으로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문세광은 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 여성)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 명의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1974년 8월 6일 오전 1시 KAL기편으로 김포공항으로 국내에 들어와 1974년 8월 15일 오전 8시께 <거물>로 가장 검문검색을 수월히 피하기 위해 호텔 도어맨에게 부탁해 빌린 포드 20M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투숙했던 조선호텔을 나섰다
문세광이 탄 차량은 입장이 허가된 비표도 없었음에도 극장입구를 무사히 통과했고 문세광은 기념식장에 들어서면서도 검문을 받았지만 일본어를 구사하며 VIP로 행세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문세광은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뒷 좌석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고 앉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38구경(스미드 웨슨)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문세광은 긴장한 탓인지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총탄 1발이 오발돼 자신의 대퇴부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는다
문세광은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석사이의 통로로 나와 권총을 겨누며 다친다리를 이끌고 연단을 향해 돌진했다
문세광은 연단을 향해 두번째 총탄을 발사했지만 총탄은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던 연설대 원쪽 편에 맞았고 박정희대통령은 경축사를 읽어 나가다가 느닷없이 앞에서 총을 겨누는 암살자을 보고 몸을 연단 안으로 숨겼고 장내가 정리될때까지 연단 안에 숨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연단 귀빈석에 앉았던 대부분의 인사들도 혼비백산해 머리를 숙인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귀빈석에 있었던 국무총리 정일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현장을 피했고 서울시장 양택식은 역시 그랬다 그런데 정일권보다 양택식이 더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은 왜 그랬을까 양택식은 엉덩이(궁둥이, 히프)를 관중석 그러니까 카메라 장면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틀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그 사진이 지상에 공개되어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빼어 어두운 관객석을 향해 겨냥했지만 문세광은 불발탄이 된 3탄에 이어 네번째 총탄을 발사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경축사를 읽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뒤에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여사의 우측 머리를 명중시켰다
문세광은 이어 한 참석자가 발을 걸어 넘어지면서도 마지막 한 발을 발사했지만 5탄은 연단뒤에 게양된 태극기를 향했다 1탄이 발사된 후 이 모든 과정이 불과 수 초내에 이뤄졌다
문세광은 그때서야 좌석 맨 앞쪽에 앉아 있던 경찰관등이 덮처 체포됐고 머리에 중상을 입은 육영수 여사는 인근 서울대학병원으로 후송돼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이날 밤 7시 결국 서거했다
문세광은 저격사건 이후 두달 가량이 지난 1974년 10월 19일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문세광의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 목적 살인죄등 모두 6가지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선고문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이 모두 인정돼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원심대로 사형이 확정돼 1974년 12월 20일 혁명가적 열정 젊은 나이 23세(만 22세)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문세광은 유서에서 "김대중 선생사건, 유엔총회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혔으며 그 자신이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고 일본정부는 수사결과에서 밝혔다 문세광 사형으로 죽었을 당시 그의 처 강성숙씨와 두살 짜리 아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죽었다

(1)김효룡(당시 47세, 한국인)
-남한 출신으로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니시(生野西)지부 정치부장
-김효룡이가 문세광을 포섭하여 김대중 구출대책위원회 소속으로 주(駐)오사카총영사관을 점거해 영사관 직원을 인질로 김대중선생과 교환할 것을 계획함
-일본지역 남한출신 친북세력들이 창립한 통일혁명당 일본지역 대표부 소속으로 알려지고 있음
(2)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 일본 여성)
-일본인 출신
-문세광과 요시이 미키코양은 고등학교 동창
-공산주의자
-요시이 미키코양은 저격사건 이후 단순한 여권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음(문세광은 요시이 미키코양의 남편 명의의 여권으로 한국 입국)

2.<박정희 저격 사건> 한국정부과 일본정부 양국 수사는 어떻게 왜 달랐나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20100000020050120052227K7.html
(1)한국정부 수사내용(김일두 서울지검장의 한국측 특별수사본부 수사결과)
-문세광 단독범행이 아닌 조총련, 북한과의 연계로 김일성 지령-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세)이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박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1974년 8월 6일 오전 1시 KAL기 편으로 김포공항으로 입국, 범행을 저질렀다
문세광이 1972년 9월 5일께 조총련에 포섭돼 반정부 활동을 펴오다가 1974년 5월 5일 북한 공작선 겸 무역선인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 범행을 저질렀다는게 당시 수사본부의 설명이다
범행을 위해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길정행웅)라는 이름의 위조여권을 사용됐고 일본에서 훔친 권총과 탄알을 훔쳐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춰들여왔으며 그 배후는 50세 가량의 머리가 벗겨지고 마른 채격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지도원과 조총련 오사카(大阪) 이쿠노(生野) 서(西) 지부 정치부장 김호용(金浩龍, 47세)등 2명이라고 수사본부는 밝히고 있다
문세광과 김호용의 관계에 대해 1972년 9월 3일 오사카 소재 패스티벌홀에서 개최된 단합대회 때 처음 만나 알게 된 뒤 김호용이 매월 평균 2차례씩 약 1년간에 걸쳐 문세광의 집을 드나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다
특히 1974년 정월에는 한덕수 조총련의장의 "혁명을 위해 일층 노력해주도록"이라는 말과 함께 정초 선물로 인삼주와 과실주를 김호용이 문세광에게 전했다고 당시 수사본부는 발표한 바 있다
문세광의 범행 동기에 대해 수사본부는 문세광이 김호용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북한 및 조총련에서 발간한 각종 팜플렛과 공산서적에 현혹돼 공산사상에 물들었으며 남한내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는 대통령을 암살, 이를 인민봉기의 기폭제로 삼아야 한다는 김호용의 선동에 고무돼 대통령 저격을 결의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김호용은 또 1973년 1월과 1974년 7월 24일 각각 일화 50만엔과 80만엔의 거사자금을 문세광에게 건넸다는 내용이 당시 수사본부의 발표에 포함돼 있다
수사본부는 사건발생 10일 만인 24일 오전 문세광을 반공법, 국가보안법, 내란목적 살인, 일반살인, 살인미수, 출입국관리법, 총포화약단속법, 여권법, 문서위조등 13가지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구속송치했으며 김호용과 요시이 유키오와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등 3명도 공동정범으로 입건, 기소중지 의견을 붙여 송치했다

(2)일본정부 수사내용(오사카 경찰청 산하 특별수사본부 수사결과)
일본측은 사건 직후 오사카 경찰청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차리고 문세광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 지 닷새 후인 12월 25일까지 132일간 수사를 벌였다
-문세광의 단독범행 규정-
문세광은 1973년 9월께 한국내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박 대통령 암살을 결의하고 범행을 계획, 실행했다는 게 핵심이다
문세광은 이를 위해 지인인 요시이 미키코를 만나 그녀의 남편인 요시이 유키오의 호적등본 주민표를 받아 일반 여권을 교부 받아 1973년 11월 19일 요시이 미키코와 함께 홍콩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74년 2월 12일부터 3월 11일까지 동경의 아가후도 병원에 입원해 거기에서 범행을 위해 한국행을 결심하고 다시 요시이 미키코의 협력을 받아 6월말 부정여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후 문세광은 또 범행에 사용할 무기를 얻기 위해 오사카시(市) 남구 다카쓰 파출소에 침입, 권총 두자루와 실탄 10발을 훔쳐 8월 6일 오사카 공항에서 서울로 건너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조총련-->문세광"으로 이어지는 핵심고리인 김호용과 문세광과의 관계에 대해 "김호용이 문세광의 저격행동을 사전지휘했다는 뚜렷산 증거가 없다"는 게 일본측의 결론이다 분명한 연계설을 주장하는 한국정부 측과 명확하게 다른 시각이다
특히 일본은 문세광의 저격은 <과실살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 1974년 8월 29일 외무부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은 <과실살인>임에도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정부의 수사발표에 불만을 드러냈다
나아가 일본정부측은 문세광이 김호용으로부터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선물을 받았다는 한국정부측의 주장과는 달리 "1974년 정월 문세광은 김호용으로부터 과실주와 조총련 중앙본부 한덕수의장 명의의 연하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문세광의 거사비용과 관련해서도 일본정부측은 "문세광이 1974년 8월 1일 자신의 처에게 15만엔의 저금통장을 주고 약 60만엔을 갖고 한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고 수사결과에 명시해 문세광이 "스스로" 마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범행동기에 대해서도 문세광이 유서에 <김대중 선생 사건, 유엔총회 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혔으며 그 자신이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고 일본정부측은 풀이했다
범행 결심과 실행을 문세광 개인에게 맞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문인지 일본정부 측은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김호용에 대해서는 강제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요시이 미키코에 대해서는 여권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보석으로 풀어줬다

(3)일본지역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
북한정부는 4.19혁명 후 노동당 <3호청사>내 대남공작부서 중 통일전선부 조국통일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1964년 무렵 남한지역에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68년 경 간첩 김종태등을 검거 된 후 와해되었고 그후에도 북한정부는 세계 각국 북한정부 비공식조직으로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조직 설치하여 반미투쟁과 대남공작활동을 해왔다
일본지역 통일혁명당 대표부가 1960년 후반기 창당하였고 1986년 8월 8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칭하였다
문세광이가 활동한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북한정부 <3호청사> 통일전선부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인지가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통일혁명당(한민전)이 남한지역 친북 김일성주의자들의 모임이고 투쟁 단체이다
박정희정부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저격사건 이전에 남북협상으로 김성주와 이후락 남북회담이 추진되었고 남북냉전분위기보다는 화해분위기었다 남북화해분위기에서 유신헌법 공표와 유신선거로 남북냉전분위기로 전환과정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김대중구출대책위원회를 주도한 단체었다

3.문세광 자료
(1)문세광 재판 장면 사진과 육영수 여사 저격당시 장면 사진 자료
http://kr.blog.yahoo.com/mrtry7228/1360111.html?p=1&pm=1
(2)1970년대 검찰 주요 사건 자료
http://www.sppo.go.kr/intro/his_main0314.htm
-1970년 3월 17일 정인숙 여인 살해사건 발생 그리고 서울지방검찰청 4월 20일 범인 정종욱(정인숙의 친오빠)등 2명 기소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선포(10월 유신)
헌법일부 조항의 효력정지와 12월 27일 제7차개헌 유신헌법 제8대 박정희대통령 취임
-1974년 8월 15일 비상조치 시국에서 육영수여사 사망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발생 육영수 여사 사망, 서울지방검찰청 1974년 9월 12일 범인 문세광 기소.
(3)긴급조치와 육영수
http://user.chol.com/~songwoo/driyg253.htm
(4)공개문서로 재구성한 "박대통령 저격순간"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40301000020050120052527K1.html
(5)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 문서발췌
A.발췌1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30000000020050120091405K0.html
B.발췌2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40301000020050120094826K5.html
(6)문세광 저격사건 5대 의혹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20100000020050120052329K8.html
A.육영수 여사, 과연 문세광 총에 맞았나
-사건당일 현장에서 발사된 총성을 7발 그 중에서 문세광 5발이 장착되는 스미스 웨슨(일명 리볼버) 권총을 사용했고 범행 뒤 한발이 권총 약실에 남아 있어 모두 4발을 발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대법원의 문세광 사형판결문도 문세광이가 발사한 1탄은 오발(자신의 허벅지), 2탄은 연단, 3탄은 불발, 4탄은 육영수 여사, 5탄은 태극기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불발탄이 권총 약실에 남아 있었고 따라서 권총이 안울렷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사본부 요원이었던 고(故) 이건우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은 사건발생 15년이 흐른 지난 1989년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뒤집는 증언을 했다
그는 "현장검증 전(前)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 갔다"며 탄흔에 기초해 제1탄을 오발, 2탄은 연단, 3탄은 태극기, 4은 천장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비교해 보면 일치하지 않는 한 발을 두고 수사발표에서는 육영수 여사를, 이건우 계장은 천장을 맞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극장을 크게 울렸던 7번의 총성 중 문세광에 의한 것이 아닌 나머지 3발을 과연 누가 어디에서 쐈느냐가 완전 규명되지 않았다
경호원이 쏜 총탄이 합창단원 장봉화양을 맞췄지만 나머지 두 발의 <행적>이 묘연한 것이다 당시 탄착지점은 오발로 인한 문세광씨 자신의 허벅지, 육영수 여사, 합창단원 장양, 연단, 태극기, 천장등 모두 6군데였다 수사발표에서의 7번의 총성과는 다르지만 불발탄을 계산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수사발표대로하면 경호원이 쏜 총탄 중 2발은 천장과 장양을, 이건우 계장의 주장대로라면 제3자의 총탄 중 2발은 장양과 육영수 여사를 향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B.제3의 저격수가 있었나
육영수여사는 관객선에서 바라봤을때 연단의 우측에 앉아 있었다 문세광이가 행사장 좌측 뒷자석에서 앞으로 뛰어가며 총탄을 발사했기 때문에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영수 여사의 머리는 좌측으로 기울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격 뒤 육영사 여사의 머리는 우측으로 넘어와 있었다
제3의 저격수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는 대목이다
또 문세광의 저격 뒤 무대 왼쪽에서 한명이 단상 위 육영수 여사 뒤쪽으로 뛰어올라가 육영수 여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뒤로 숨는 뜻한 모습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한명이 앞서 올라간 사람 뒤에서 권총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총구가 육영수 여사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C.문세광의 1974년 8월 6일 KAL로 김포공항으로 입국 후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박정희대통령저격 순간까지 10여일간의 국내 거주 의혹
문세광은 10일여간 기간동안 한국에서 무엇을 했을까
D.출입비표 없이도 대통령 행사장에 들어갔다?
-청와대 경호과장이 검문완화 지시를 전날 내렸고 극장 로비에서 문세광씨가 청와대 경호계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던 문세광씨가 비표도 없이 차량을 행사장에 진입시키고 극장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혹을 남기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문세광씨가 김포공항으로 입국할때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스에 숨겨온 권총이 적발되지 않았고 일본인 명의의 위조여권을 사용했는데도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혹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E.너무나도 다른 한일(韓日) 수사결과 발표 내용
F.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 있나
문세광씨는 당초 한국정부를 지지하는 민단 산하단체였던 한청에서 활동했고 이후 민단이 김대중씨와 연결된 한민통으로 분리됐고 한청 역시 한민통 산하단체로 변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정한 직업이 없던 문세광씨가 어떤 세력에 의해 포섭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7)<박정희 저격사건 문서공개> 문세광 행적
http://www.donga.com/fbin/output?rellink=1&code=a_&n=200501200316
-김호용. 요시이 미키코 사진 소개
(8)박정희 저격 사건 사진
http://photo.donga.com/user/themepro/theme_view.php?nude_code=20050121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