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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미·한 세계 첫 연합사단 출범..."북한 위협 억제"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미·한 세계 첫 연합사단 출범..."북한 위협 억제"

CIA Bear 허관(許灌) 2015. 6. 5. 21:35

 

                                  6월 3일 경기도 의정부시 캠프 레드클라우드에서 열린 미한연합사단 편성식에서 군인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다

미국과 한국 군 당국은 오늘 (3일) 미-한 연합사단 편성식을 개최하고 세계 최초의 2개국 혼성 사단을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미국이 다른 나라 군대와 부대를 편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주한미군 ‘캠프 레드 클라우드’에 팡파레가 울려 퍼집니다. 세계 최초의 2개국 혼성 사단인 미-한 연합사단 편성식 현장입니다.

유사시 주한미군과 한국 군이 하나의 부대를 이뤄 전투를 수행하게 되는 겁니다.

미 2사단을 모체로 만들어진 미-한 연합사단은 미군과 한국 군 30여 명으로 구성됐으며, 평시에는 미-한 연합참모부 형태로 운영되다 전시에는 미 2사단 예하 부대와 한국 군 기계화 보병여단으로 편성됩니다.

연합사단장에는 테드 마틴 주한미군 소장이, 부사단장에는 인성환 한국군 준장이 임명됐으며, 유사시를 대비한 작전계획은 미-한 공동으로 작성할 방침입니다.

[녹취: 테드 마틴 미-한 연합사단장] “So what we have  reorganized a … the combat team structure in the US army...”

테드 마틴 미-한 연합사단장은 연합사단의 편성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북한의 위협을 억지할 수 있을 것이며 한반도의 방위력 또한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은 미 2사단의 막강한 화력과 한국 지형에 익숙한 한국 군이 한 부대를 이루게 되면 전투력이 배가 되고 연합방위태세도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성환 미-한 연합사단 부사단장입니다.

[녹취: 인성환 미-한 연합사단 부사단장] “오늘 연합사단이 편성됨으로써 앞으로 한-미 간 전투적 차원에서 연합훈련이 활성화되어 결과적으로 연합방위태세가 한층 강화될 것입니다. 아울러 미래의 연합작전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군 관계자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는 8기계화 보병사단 중 한 개 여단이 연합사단에 배속될 것이며 미군의 효율적인 작전 운영을 위해 유사시 어느 부대를 어떻게 동원할지, 무슨 작전을 펼칠지는 미군과 지속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연합사단은 대북 억지 뿐아니라 유사시 북한 지역에 있는 대량살상무기 시설을 파괴하는 등 특수임무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미-한 양국은 유사시 연합방위태세를 강화하고 북한의 위협을 억지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연합사단 창설에 합의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한상미입니다.

 

동아시아 평화유지군 차원으로 일본과 한국 등에 미군이 주둔해오고 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에도 미국 주도로 대서양 유럽군사기구 나토모델 다국적 군사기구 등장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중국 동북3성(만주)와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영향력에 있다

김일성은 만주공산당 참여한 소련군 극동연방관구 부대출신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으로 소련과 중국 공산당 인물이다

러시아는 소련공산당 정부를 붕괴시키고 등장한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정부(자유민주정부)이고 중국 등소평정부는 모택동주의 1인 장기집권을 청산하고 등장한 5년 중임제 주석제 실용주의 정부이다  중국은 아직도 모택동주의 무장단체 좌익군정 잔재 군정분리주의로 국가주석은 국가원수이며 군사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다

북한은 김일성주의 유일사상으로 세습제 좌익군정(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총참모부)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주의 이외 모든 사상을 부정한다

 

 

 

 

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滿州(만주)] Ruler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漢(한)-한나라의 청천강 이북지역 점령과 한사군 설치 그리고 청천강 이남 고조선 유민으로 진국등장]->Goguryea[A.D 313-668, Korea People:고구려]->Tang[A.D 668-698, Han China People:唐(당)나라]->Balhae[A.D 698-926, Korea People:조선족과 여진족 연합정부]->Liao[A.D916-1125, Khitan China People:遼(요)나라-거란족:(다우르족:達斡爾族(달알이족))]->Jin[A.D 1115-1234,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金(금)나라-여진족 또는 만주족]->Mongol[A.D1234-1368, Mongol People:蒙古(몽고)나라-몽고족]->Ming[A.D 1368-1644, Han China People:明(명)나라]->Qing[A.D 1616-1912,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淸(청)나라-만주족]->Republic of China[A.D 1912-1932, Han China People:중화민국-중국 국민당]->Manchukuo[A.D 1932-1945,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滿州國(만주국)-만주족=여진족]->소련 극동군 만주국 점령[1945년 8월 18일,8월 폭풍작전]->중국연합군 반환[1945년 11월, 소련극동군과 인민해방군이 점령 이후 소련군이 중국 연합군 동북3성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임표에게 넘겨 줌]->People's Republic of China[1949년 10월 1일~ Han China People: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동북3성(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중국영토지역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하며 과거에는 만주(滿洲)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요녕성), 지린 성(길림省(성), 길림성),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3개 성(省)이 포함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동북 3성(만주지역)은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조선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북 3성(만주지역) 역사적 지배세력은 조선족(한민족)과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漢族, 한나라 후손)이다

-동북 3성(만주지역)의 인구는 현재 약 1억 명으로,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8%에 해당한다.

동북 3성(만주지역) 지방의 민족 구성은 한족(漢族)이 92.4%를 차지하는데, 그 대부분은 청조(淸朝) 300년 간,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이주하여 왔다. 19세기 말의 동북 3성 인구는 300만 미만이었으나, 그 후 1년에 50∼100만의 인구가 주로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으로부터 유입하였다. 소수민족은 787만인데, 그 중 210만이 만주족(滿洲族)으로 주로 랴오닝성(요녕성)에 살고, 113만이 한족(韓族)으로 지린성(길림성) 동부 국경지대에 옌볜[延邊] 한족(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몽골족 32만은 네이멍구 지역에 살고, 후이족[回族] 23만은 대도시에 분산거주하며, 그 밖에 퉁구스계(系)의 다구르족 ·오로촌족 ·시보족 ·오웽크족 및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만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종전 후 거의 전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러시아 극동지구[극동 연방관구]

 

러시아 극동지구[극동 연방관구]는 9개 자치주로 구성 돼 있다

1.아무르 주 2. 유대인 자치주 3.캄차카 지방 4.하바롭스크 지방 5.마가단 주 5a.축치 자치구 6.사하 공화국 7.사할린 주 8.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러시아 극동지구[극동 연방관구]는 9개 자치주 중 하바롭스크 지방,  사할린 주(사할린 섬),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등지가 한민족 고구려나 발해 영토였고 아직도 한국인(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동아시아지역  한중일 구역(한자문화권, 한자어를 사용하는 나라 중국, 한국, 일본등 삼국)"

 

 

 

                                                                                         동아시아 지도

중국은 동북아시아지역과 동남아시아지역,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분포 돼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 다수민족 한족은 한반도, 일본 남부지역 민족과 문화적으로 공유해왔다. 만주, 극동지역에서는 조선족(한국), 만주족, 거란족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일본 북부지역에서도 문화적으로 공유해왔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고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중국은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형태로 국가원수(국가대표-외교권과 중앙정부 수반)는  국가주석이고 군 통수권자는 군사위원회 위원장이다. 작은 내각수장은 총리이다

국가주석의 임기는 임기제한 5년 중임제이며 총리 임기는 의회 의원 임기와 동일하다 총리의 임기는 5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임기는 제한이 없다

중국이 다당제와 자유선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군제도 군사위원회(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를 폐지하고 국가주석이 군통수권자가 돼야 한다"

*인민(人民)--개개인의 국민--기본권 향유자로서의 국민--권리장전 사람을 지칭할때는 인민으로 사용해야 정확하다(루소 사상:회의제 정부론)
*국민(國民)--주권자로써의 국민--이념적 통일체로써 국민--대한민국 사람을 지칭할때는 국민로서 사용해야 한다(로크 사상: 국민 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출)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고,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사회민주주의) 공존(존중) 민주공화국(자유사회 선진국)이다"

 

"The Chinese government can advance as position and role to national military establishment and U.N. Forces which people's liberation army is not political party army though become power change atServiceman integration attention(Gunjeongtonghapju's)  Civilian government( people's government )[President and Cabinet]  inMilitary administration separation(Gunjeongbunriju's) leftist military administration[the Armed Service Committee]  

中国政府爲軍政分離星期的左翼軍政[軍委]至軍政合倂星期的文民政府(人民政府、民間政府)[主席和内閣]要成爲權力變更, 才能以解放軍不是小党的國家和聯合国軍往前走地位和作用

중국정부는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군사위원회]에서 군정통합주의 문민정부(인민정부, 민간정부)[주석과 내각]로 권력변경이 돼야 인민해방군이 당군이 아닌 국군과 유엔군으로 지위와 역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만주국 지도(지금 중국 동북 3성)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미국을 모델로 건설된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의 실험국가였다. 공화제 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오족협화란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일본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협력해서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낙토란 서양의 패도에 반대되는 아시아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왕도라고 해서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한 후 만주국 구상을 계획했다. 국제연맹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창춘인 신징을,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황제는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로 옹립했다. 1932년 9월에 일만의정서를 조인해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4년 9월 제정 수립으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는 군대도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에게 패하는 등 무능력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을 공격(8월 폭풍작전)함으로써 8월 18일 망하였고,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같은 해 11월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소련 붉은군대와 함께 만주국을 점령하고 동북 3성 통치권을 인겨받은 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1차 세계대전(레닌, 전쟁 중립선언과 공산주의 세력 전쟁 불개입선언)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과 동서유럽(동서폴란드) 군사적 점령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 이론: 독일 노동자의 당 히틀러의 나찌즘, 소련 공산당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 소련침공

-1941년 7월 소련과 영국, 반독일전선 구축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반독일전쟁 참여(중국인등 아시아 출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독전쟁 참여)

-일본의 소련과 외몽골 침공

1938년 7월 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년 5월 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이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으로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의 식민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가 대통령직은 승계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 28일에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틀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대제독 칼 되니츠가 총리를 승계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 4월 29일에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문서5월 7일 랭스에서 서명되었고, 5월 8일(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에 베를린에 비준되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5월 11일 프라하 공세까지 저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군은 1945년 4월 말까지 필리핀에서 필리핀 전투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다. 1945년 1월 루존 상륙과 3월에는 마닐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루존에서 계속되었으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다른 섬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저항했다.

1945년 5월, 호주군은 보르네오 전투를 시작하며 섬을 점령했다. 영국, 미국, 중국은 북부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5월 23일에는 영국군이 양곤을 점령했다 중국은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서후난 전투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월에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6월 말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군의 폭격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고, 미군 잠수함은 봉쇄 조치를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연합군의 지도자가 포츠담 회담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전 회담의 협정을 확인하고,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대안은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 중에 영국은 선거를 시작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며, 미국은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 폭탄을 투하한다. 두 폭탄이 터진 사이, 소련군은 얄타 회담의 조건에 따라 8월 폭풍 작전으로 만주로 진격하며 관동군을 항복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청진 등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다. 또한, 소련군은 사할린 섬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미군 전함 USS 미주리 (BB-63)에 서명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한국전쟁 남침 지휘부 "군사위원회"

 

                                                                 북한 수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북한 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 (사진)

한국전쟁 다음 날 6월 26일  남침 지휘부 7인 군사위원회(군사정부)를 구성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수상, 인민군 총사령관-조선공산청년회,중국 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6인 위원은 박헌영(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출신), 홍명희(부수상-근로인민당 당수 출신), 김책(부수상 겸 산업상, 전선총사령관-화요파,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 최용건(민족보위상=국방상,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과 중국 공산당, 조선민주당 당수, 인민군 총사령관 출신), 박일우(내무상,전선사령부 부사령관-조선의용군 부사령관 출신) ,정준택(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과 일제시기 화학공장 기사(技師) 출신) 등이다

 

전쟁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시체제에 부합되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군사위원회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비상한 정세와 관련하여 그리고 전쟁에서 전체 인민의 역량을 급속히 동원할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모두 7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6명은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부, 정준택으로, 이 군사위원회는 일체의 주권을 장악하고 모든 기관, 정당, 사회단체, 군사기관들은 군사위원회의 결정과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다음날인 6월 27일 상임위원회는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시상태가 선포된 지역에서는 지방정권기관을 대신하여 지방군정부(지방군정)라는 것을 조직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국가보위와 사회질서 및 국가안전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전시상태가 선포됨으로 인해 지방군정부(지방군정)도 도,시에 설치 되었는데, 지방군정부(지방군정)는 지방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군 대표 및 내무기관 대표 각각 1명씩으로 구성하여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지방군정부(지방군정)의 임무는 지방인민위원회의 권한을 대부분 대행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주요 시설 및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을 의무노동에 동원하고 군부대 및 군사기관을 위한 건물 제공의무를 지며, 군사상 필요에 의해 자동차와 우마차의 동원의무를 선포하며, 각 기업소와 단체 주민들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수용하며, 전시지역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등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치로 말미암아 북한의 모든 권한은 김일성을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한 군사위원회에 집중 되었다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0년 7월 1일 북한 전지역에 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은 위급한 정세에 대하여 원수들을 소탕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는데, 동원 대상은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남녀가 해당 되었다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김일성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정령을 채택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일원을 점령하자 남한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발포했다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 정치위원회에서 전쟁에 의한 통일노선..

김일성이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한 건"에 관하여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보고 가운데서 현단계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하고, 현단계에 있어서는 무력통일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망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 다음 가는 석차이기 때문에 토론을 하기 위하여 최초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약간의 보충을 하겠습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자기 토론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보고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뒤 김일성의 보고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이것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남한에는 현재 20만명의 남로당원이 지하에 있어 만일 인민군이 남하한다면, 20만의 남로당원들이 내응해서 군사작전을 원호할 것으로 믿습니다"고 끝을 맺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1949년 3월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홍명희 등 부수상등 북한 대표단 소련방문, 스탈린과 회담

-남로당 책임비서 이승엽[박헌영 최측근,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 역임]

이승엽은 남한에서 이승만정권과 미제국주의들을 분쇄 타도하기 위하여 일어난 빨치산들을 영웅적이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투사라고 강조했으며 이들을 전심전력 원호하는 것이 참으로 가장 중요한 거족적 파업이라고 주장했다(남조선 정치정세와 인민들의 구국투쟁)

-1950년 5월 김일성, 박헌영등 북경방문, 모택동과 회담 

-최용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 하였다.

6월 한국전쟁 직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가을 그는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950년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년 7월 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년 2월 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를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소련군 극동지역 군인들이다. 냉전시대 군사개념상 북한과 만주일부 지역이 소련군 극동사령부 통제를 받았다 

실제로 개전당시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군 장교는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고문에서 '작전지휘'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바 있다

 

독일 통일정책: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으로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고,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이다"
1단계-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반공산주의)
자본주의 3대원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시장경쟁원리등
2단계-민주화 정책(민주주의=반국가사회주의)
남북 통일정부는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공동 민주연합 정부 구성   - 반공반독재구국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