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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정상회담 제안과 100억 달러 요구"있었다 MB 회고록서 밝혀 본문
"북, 정상회담 제안과 100억 달러 요구"있었다 MB 회고록서 밝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이 자신의 임기중에 수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해왔고,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남북 특사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물밑 접촉을 벌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이 정상회담을 위해 100억 달러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고, 천안함 폭침에는 동족으로서 유감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등의 입장차로 실제 회담이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또 회고록에서 북한 측이 고위급 채널이나 중국을 통해 여러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타진해왔다고 밝혔다.
서거한 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북한 조문단은 청와대를 예방해 김정일 위원장의 뜻이라며 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두 달 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원자바오 총리가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바란다고 한 사실도 공개됐다.
원자바오 총리는 10여 일 뒤, 태국에서도 재차 김정일 위원장이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에 따라 임태희 전 노동부 장관을 싱가포르로 보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접촉을 한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북측이 옥수수 10만 톤과 쌀 40만 톤, 100억 달러 등의 대북 지원을 줄기차게 요구해 결국 회담이 무산됐다.
남북은 또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와중에도 물밑 접촉을 이어가기도 했다.
천안함 폭침 넉 달 뒤 북측의 요청으로 우리 측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엔 북측 고위급 인사가 서울을 방문해,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이 때도 북측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동족으로서 유감이라고 발뺌하거나 쌀 50만 톤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후 서울을 방문했던 류경 북한 보위부 부부장이 정상회담 실패에 따른 책임으로 처형되고, 천안함 사과 문제 대립으로 회담은 동력을 얻지 못했다.
2011년, 한중일 정상회의에서도 원자바오 총리가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했지만 남북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고 이 전 대통령은 전했다.
"巨山後廣, 後廣巨山[經過廣泛的大山,經過廣泛的巨山. 歷史人物]"
1984년 5월 18일 김정일 직접 쓴 논설《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발표했습니다
대남기구 민족민주전선은 남한지역 반미단체로 파악됨. 예:반미청년회나 반미여성회 등.
북한에서 반미는 애국운동으로 북한 특권층 이데올로기입니다 남한 반미세력은 북한 상류층 입장이고 북한 평민층 입장이 아닙니다. 반미노선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세력은 남한내부 김정일세력입니다
1.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로부터 독일국민의 해방을 위하여 제정된 법규는 이 기본법의 규정에 의해서 침해받지 않는다. [독일연방헌법 제139조-해방법률]
북한정부는 군정분리주의(軍政分離主義) 세습제 좌익군정 체제입니다 세습제 좌익군정은 국방위원회와 인민군이 북한 의회와 내각을 지배하는 권력구도입니다(북한이나 베트남등 남녀 징병제 국가-중학교 졸업 후 17세때 군 입대하여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군 복무.여자 현역 군인은 학력이 높고 다양한 직종에서 군 복무)
세습제 좌익군정 독재정부일때는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이 NL(북한군부, 세습제 좌익군정이론-先軍정치와 반미,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과 PD(인민의회 정부론, 북한내부 반정부세력 즉 민주파)로 분리돼 북한정부 내부 권력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파(PD)세력은 극단적 민족주의 그룹(NL, 세습제 좌익군정이론-先軍정치와 반미,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이 일인(1인) 장기집권이나 세습제 봉건주의(가족주의, 혈통주의) 김일성 왕조 국가로 독재정부나 전체주의 정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북한헌법, 제1공화국 헌법 순수내각책임제 인민의회정부론(김두봉 헌법), 제2공화국 헌법 사회주의 헌법(김일성 헌법-국가사회주의), 제3공화국 헌법 세습제 좌익군정(김정일 헌법-국방위원회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북한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 중 NL계열(북한군부, 세습제 좌익군정이론-先軍정치와 반미,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이 북한 김정은 권력 추종세력이며 대남간첩(북한 특권층 입장) 또는 북한정부 내 항미론자들입니다 민주파(PD)는 친남한이나 친서방 인민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순수 내각책임제 인민의회정부론 세력입니다
2.북한 내부 내전은 평민층 영양실조와 식량난입니다
북한 제3공화국 헌법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세습제 좌익군정(국방위원회)으로 민생경제 붕괴, 상류층(대학 출신, 특권층) 과 평민층(의무교육 중학교 출신,전체 주민 70% 이상) 계급 양극화로 평민층 영양실조나 식량난(끼니 걱정) 현실입니다(중국정부 입장은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개인의 능력과 유상입학 대학진학 하는 것으로 통계자료임. 배부른 북한 상류층, 영양실조 평민층, 기아위기 빈곤층 분류됨)
1990년대 초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이 1990년대 초반 420만명, 1990년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즉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난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지역입니다(토지 이외 모든 물건 사적소유 허용. 단, 토지는 국가와 협동농장 소유. 외국투자들 소유 평양 양각도 호텔 등지 안마, 마사지 접대부 운영으로 국제 깡패 폭력단 존재)
북한 평민층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취업과 돈벌이)입니다 일자리 창출(취업과 돈벌이)은 세습제 좌익군정 국방위원회(인민군과 인민군 정치 지도원, 북한 군부 의회장악=군사평의회)를 청산하고 인민회의제 정부 내각(의회와 내각) 중심으로 권력개편과 개혁개방정책(자유화 개방화정책)을 추진해야 합니다
3.인민의회 정부론은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습니다 인민의회 정부론은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로 공산주의국가나 사회주의 헌법(국가 사회주의)에서 실행돼오고 있습니다.인민의회 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노선 정책추진으로 평민층 식량난과 민생경제 파탄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췌장암으로 몇년간 고생하다가 사망했습니다. 북한 인민군 내부 일부 군인들은 김정은을 보고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세습제 좌익군정(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얼굴마담(바지사장) 김정은 , 골초(골통) 김정은, 코흘리개(철부지) 김정은, 외세 비밀경찰이 데리고 있는 고양이 김정은 등으로 호칭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북한 상류층은 대학 출신으로 노동당 간부(국가 공무원)나 군 간부(직업군인) 등
북한 여성들이 선호하는 결혼 상대자로 현역 군인, 노동당 당원(공무원), 대학출신 엘리트 그룹(북한 상류층)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주의) 충성세력으로 인민군 중 평민층 자녀들의 자유화 민주화 세력이 될때 수평적 권력교체나 수직적 권력교체(혁명)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1993년 12월경 귀가 빙빙 돌아가는 뇌분해기(머리소리함) 요원이 선발돼 그 다음 해 남북정상회담과 8월 김일성 전 주석 사망을 머리소리함으로 체험한 요원 許灌
*북한 헌법
1.제1공화국--인민민주주의 헌법(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순수 내각책임제)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1)제1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ㄴ.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총사령관-김일성 내각수상(노동당 총비서=노동당 당수)
2. 제2공화국-사회주의 헌법(사회주의 공화국, 주석제 또는 신대통령제)
(1) 제2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ㄴ.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2)제1공화국 내각수반 및 군 통수권자(총사령관)
ㄱ.김일성 국가주석 겸 내각수반,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및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 1972년 12월 15일-1991년 12월경
ㄴ.김정일 군 통수권자(인민군 총사령관, 노동당 중앙 군사부위원장) 1991년 12월--1998년 9월 5일
3.제3공화국-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제3공화국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2)인민군 총사령관과 군정(내각) 책임자(세습제 좌익군정): 국방위원회와 인민군 총참모부
김정일 국방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총비서)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과 당 제1비서) 2012년 4월 12일--현직
*북한 국가수반(국가원수)
-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북한정부 통치자(실권자-군 통수권자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ㄱ.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 1945년 8월 15일-1948년 9월 9일
(ㄱ)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북한 김일성 前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중국 공산당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ㄴ)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ㄷ)후세인과 김일성등 국가사회주의 세력은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 주도 소련 군부쿠데타를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군부 쿠데타를 반대했다
중국과 소련등 반미세력이 퇴진하면서 일어난 사건 임표사건, 소련군부 쿠데타등이다 북한정부는 항시 반미세력편에 가담했다(김일성세력은 임표 반란나 소련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극동소련군 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다)
a.중국정부와 미국정부, 일본정부 국교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1971년 임표등 중국 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주은래 등소평등 수교 교섭세력 승리
b.1992년 한국과 소련국교 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소련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 옐친등장
ㄴ.김일성 총리 겸 인민군 총사령관(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ㄷ.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ㄹ.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ㅁ.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ㅂ.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북한 의회는 친미,친서방 성향이고 군부는 반미, 반서방 성향이다(구소련 권력기구 성향과 비슷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북측 대규모 지원 요구로 불발"
지난 2009년 4월 이명 당시 한국 대통령(오른쪽)이 북한의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으로 서울을 방문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운데), 김양건 통일전선부부장을 청와대에서 접견했다.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남북 간 고위 인사의 비밀 교차방문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08년에서 2013년까지 한국의 제17대 대통령을 지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천안함 폭침에 따른 5.24 대북 제재 조치 직후인 2010년 7월 한국 국가정보원 고위급 인사가 북한을 방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이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연락을 해 국정원 고위 인사와의 만남을 요구했다면서 북측의 요구로 방북이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방북한 국정원 인사를 통해 남북 상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먼저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전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폭침 당사자가 아닌 동족으로서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전해왔고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라 여겨져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이 전 대통령은 설명했습니다.
이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를 찾는데 50일이 소모됐다면서 무력보복 조치를 취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러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인 2010년 12월에 북측 인사가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2010년 12월 5일 북측 인사가 서울에 왔으며 남북한은 협의 끝에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뤘고 북측 인사는 예정보다 하루 더 서울에 머문 후 돌아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북측 인사가 북한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처형됐다는 소식을 2011년 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또 남북한이 2011년 초 뉴욕에서, 5월 베이징에서 추가로 만남을 가졌지만 천안함 폭침 사과 문제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한국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 간의 이른바 ‘싱가포르 접촉’ 당시 북한이 쌀과 비료 등 대규모 경제 지원을 요구한 사실도 공개됐습니다.
이어 11월 7일과 14일 개성에서 한국 통일부와 북측 통일전선부 간 실무접촉이 잇달아 열렸지만 북측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과 쌀 40만t, 비료 30만t, 북측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 등을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이 전 대통령은 밝혔습니다.
중국 원자바오 총리가 남북 간 다리 역할을 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원자바오 총리는 2009년 1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이 전 대통령에게 자신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났는데 김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뜻을 전달했고 2주 뒤 태국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다시 만난 원자바오 총리는 김정일 위원장이 이 전 대통령을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또한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으로부터 2011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이 20~30cm 높이의 단상에도 혼자 올라가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은 3개월 후인 2011년 12월 사망했습니다.
이에 앞서 북한은 이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대통령 당선에 도움을 줘 감사하다’는 내용의 이 전 대통령의 친필 서한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같은 북한의 요구가 선거 동안 북한이 자신을 비방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이 당선됐다는 의미로 여겨져 어이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한상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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