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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사건(林彪事件, 임표사건)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린뱌오사건(林彪事件, 임표사건)

CIA Bear 허관(許灌) 2013. 7. 31. 00:34

 

                                                                                              임표 시체 모습
중국 공산당 수립 이래 중국 최대의 정치사건이 린뱌오사건이다
린뱌오(임표)는 문화대혁명때 마오쩌둥사상을 절대화하고 인민해방군을 지휘하여 마오쩌둥을 도왔다
그 공으로 중국 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자대회(1969년)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971년 9월 12일 마오쩌둥이 항조우(杭州)로부터 열차를 타고 상하이(上海)에 가려고 했을때 린뱌오(林彪)가 열차폭파를 기도했다
그러나 린뱌오의 딸 린더우더우(林豆豆)가 이를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고함으로써 마오쩌둥은 비행기로 베이징(북경)에 돌아갔다
그날 오후 린뱌오는 암살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베이다이허(北載河)까지 달아난 후 트라이던트 비행기를 타고 소련에 망명하려 했지만 다음날 아침 몽고 영내에서 추락사 했다
이 사건을 1973년 중국 공산당 제10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통하여 발표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린뱌오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70년 8월 제9기 중앙위원회 제1차 총회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미수에 그쳤다 이어 1971년 3월 반혁명 무장쿠데타계획인 <571 공정기요(工程紀要)>를 입안하였고 1971년 9월 8일 반혁명 무장쿠데타를 일으켜 주석 마오쩌둥을 모살(謀殺)하고 별도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음모가 실패로 끝난 후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몰래 비행기를 타고 소련수정주의 진영으로 도피 당과 나라를 배반하려다가 몽골의 운데르한에서 추락해 죽었다 <571공정기요(工程紀要>는 571(우치이)는 무장봉기를 뜻하는 우치이(武起義)의 발음을 빗댄 말이며 유포되어 있는 기요(紀要)에 의하면 마오쩌둥을 현대의 진시황제라 하여 그를 타도하여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린뱌오사건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공산주의 친소 임표진영과 실용주의 친미 친서방 주은래 진영의 투쟁에서 미국과 중국수교 그룹인 실용주의자 주은래진영의 승리로 내다보고 있다
임표는 후베이성(湖北省) 황강(黃崗)출생으로 1926년 황푸군관학교(黃織軍官學敎)를 졸업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조선의용대 김무정등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다
임표는 1927년 국공분열 후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으며 주덕(朱德)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게릴라활동, 1934-1935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 하였다
1936년 항일군정대학 교장. 1937년 팔로군 115사단장. 1947년 8월 만주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기를 접수하고 동북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으며 동북성사령관으로 만주를 장악하였다 린뱌오는 만주를 장악과 일본군 무기로 중국 전체지역를 점령할 수 있는 군비토대를 마련했고 팔로군 부대로 중국내전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 하였다
린뱌오는 1967년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오쩌둥 강청과 결합 미국과 중국수교세력이며 실용주의자 주은래,등소평 세력을 제압하고 군의 힘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하였고 1969년 중국 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하려다가 주은래 등소평등 세력에게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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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습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습니다(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전쟁 참전 결의안 선거에서 기권을 했으며 한국전쟁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 이후 소련 공산당 출신 허가이나 박헌영등이 북한 권력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 출신 김일성이가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한국전쟁 때 인해전술 떼거리 중국 인민해방군 100만명이 희생했다 중국도 남북지역 구분으로 한국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한족보다는 남부지역 1억 규모 인구 장족과 만주지역 다수 민족인 거란, 만주족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한족이 전쟁에 개입할 때 독립운동과 세력확대로 새로운 군사대국으로 등장을 시도해왔다 중국지역에서 한족 이외 다른 민족의 인구 3억에서 4억 규모이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출신으로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 연합군 소련 극동사령부 88특별여단 소속 대대장 출신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지역과 한반도지역 점령한 후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군 88특별여단 주축으로 중국 내전 공산혁명에 주력부대었다 임표 동북3성 총사령관으로 만주국을 소련군과 함께 점령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중국내전 승리에  결정적  지위와 역할을 했으며 내전승리 이후 조선의용대 출신 지원과 함께 남침을 추진했다 임표, 팽덕회 동북 3성등이 한국전쟁 배후세력으로 활동했다 임표는 모택동 다음 2인자로 문화혁명 주도와 중미수교 이후 모택동을 암살하려다가 실패이후 소련으로 망명 도중 살해되었다 중국정부 내부 반미 친북 김일성세력이 소련군 지원세력이다 임표나 김일성등은 소련군 즉 KGB 조직원이었다 이들 소련방위대로 중국과 북한에서 활동해왔다 중국 동북 3성이 남침을 도와줄때 북한정부가 남침을 할 것으로 본다 중국과 미국 수교이후 조국을 소련으로 생각하는 소련 공산당 전위대가 대부분 제거되었다 중국이나 북한 내부 공산주의 세력 태자당 출신이 과거처럼 외국세력에 아부할 가능성도 있다)

 

*2차대전 때 소련측 연합군 만주국 무력점령과 동시에 동북3성 소련군 88특별여단(임표등 팔로군) 장악 그리고 소련군 88특별여단 조선족(한국인) 출신이 소련군과 함께 38도선 이북지역 점령--->동북3성 주력부대 임표등 중국내전 개입-->중국 모택동부대 본토 장악---->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동북 3성 조선족(한국인) 북한 인민군 주축으로 구(舊) 일본 관동군 탱크로 남침-->남한지역 남로당이 지하세력이 무장봉기와 인민위원회 구성--->일시적으로 남한 점령-->유엔 한국전쟁 개입과 유엔군 구성-->유엔군 38도선 이북지역 진격---->중화인민공화국(중공군) 개입과 38도선 이남지역 진격--->정전협정 체결

-중화민국 장개석부대는 중국 남부지역 장악과 인도, 영국군 연합으로 동남아 점령을 했지만 동북3성이 모택동부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만주지역에서 세력 상실

-극동지역과 일본 북해지역 소련군 장악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평민층 지지기반 확대와 인민위원회 설치로 공개재판으로 남한지역 민간인(양민) 처형 학살, 전쟁물자 현지에서 조달하는 약탈전쟁 방식등으로 남한지역 평민층 저항으로 북한정부 전면적 전쟁이 패배했다고 평가.  유엔이 남한과 일본등 그리고 동남아 공산화(공산정부 등장)에 대한 우려  

1.중국과 소련등 반미세력이 퇴진하면서 일어난 사건 임표사건, 소련군부쿠데타등이다 북한정부는 항시 반미세력편에 가담했다(김일성세력은 임표 반란나 소련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극동소련군 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다)
(1)중국정부와 미국정부, 일본정부 국교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1971년 임표등 중국 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주은래 등소평등 수교 교섭세력 승리

(2)1992년 한국과 소련국교 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소련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 옐친등장


*반미전선의 한계 "박헌영의 미제간첩 처형과 임표 반란사건"

북한 지도부내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등 셋 사람의 노선상의 투쟁이 북한정부 통일방법상의 논쟁이다 김일성은 소련군 극동사령부 휘하부대 88특별여단(정찰특수부대) 대대장출신으로 남과 북 통일방법상 입장에서 무력통일 NLPDR 전면전을 주장했으며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위원장 출신으로 인민무장혁명과 서울점령론을 주장했다그리고 독립동맹과 신민당 출신으로 김두봉은 남북협상론을 제안했다

*아래 사진 설명: 소련군정 및 북로당 간부들

 

앞줄 우로부터 허가이. 김일성. 소련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령. 김두봉. 소련군 정치국장 이그나치포 대좌. 김책 뒷줄 우로부터 주영하. 박일만. 최창익등(북로당과 남침세력)

1.NLPDR과 전면전론자---김일성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과 전면론이란

김일성은 전쟁(무력)으로 부산과 제주도까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이 전면전론자들의 입장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 만주지역과 사할린 그리고 일본열도 북방섬 일부 점령

-소련군 극동사령부, 한반도 38도선 이북 북한지역 점령(20만 소련군 북한지역 배치)

-중국 공산화 그리고 소련군 극동사령부, 조선의용대 등 중국 공산화 참여

-1950년 전후 조선의용대와 소련군사령부 한인 출신 북한 인민군 창설에 참여

-만주 동북 3성 임표군대 김일성 남침 지원과 만주국 일본 관동군 탱크 지원

 -1950년 6월 25일 김구 선생 1주기

그 날 남침 감행 독일 외무성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소련지도부는 1949년에 한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북한이 먼저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아 남침을 감행하면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1950년 1월 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은 김일성주석의 남침 지원 요청을 승인한다고 통보했다 두 지도자는 그해 4월 10일부터 25일 사이에 세 차례 회담을 가졌다

스탈린은 만약 미국이 병력을 개입시킨다면 소련은 북한을 직접 지원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김일성주석은 어쩔 수 없이 2005년 5월 13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 모택동(마오쩌둥)에게 남침계획을 설명했다

 모택동(마오쩌둥)은 만약 미국 군대가 개입하면 중국이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러나 소련(소련군 극동사령부)의 지원을 바랐을 뿐 중국이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일본 관동군 무기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1)한반도 공산화 이후 일본 공산화 시도도 가능했는가 논쟁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일본열도 공격을 시도했는가 논쟁--소련은 2차대전때 사할린과 일본 북방섬 일부를 점령했다

(2)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사회당 정부는 북한정부를 지지했는가 논쟁

(3)미국 독자로 한국전쟁 개입을 했다면 북한 김일성부대 승리 할수 있었다는 자료 입장 그리고 유엔과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 남한정부 승리했다는 입장

(4)전면전 자료

ㄱ.낙동강 전선까지 점령한 부대는 만주지역 조선의용대와 소련군 극동사령부 조선인 출신 부대 간부들이었다 이들이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지역에서 빨치산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다(빨치산 부대 지휘관은 대부분이 북한 인민군 출신이었다)

ㄴ.미국등 유엔군의 투입으로 북한출신 인민군이 당황했다

ㄷ.전쟁 이후에도 공중과 해상은 미국이나 영국등 연합군이 장악함으로 육지에서 인민군 승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본 공산화에 대한 위기로 일본 전체 국민들의 항거도 대단했다

ㄹ.급진적 무상몰수 무상분배 공동토지경작방식 토지개혁과 신계급 등장 중농계급 토지를 몰수하거나 공동 분배 방식으로 전환함으로 소자본과 중농등 자산계급(토지 소유자)들의 항거가 심했고 이승만정부 권력기관 면단위 행정기관을 해체하고 인민위원회 권력등장 과정에 인민재판으로 무고한 주민들의 처형이 많아지면서 주민 항거가 일어났다

-북한정부의 약탈경제 전쟁방식(범죄) 전쟁물자를 어음이나 조세등의 명목으로 빼앗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 이 전쟁방식은 미국등 연합군과 정반대 모델이다 미국등은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등을 주민들에게 지원해주었고 전쟁물자를 자국이나 연합국에서 원조로 수행하지만 약탈전쟁 물자조달방식 인민전쟁은 현지 주민들에게는 큰 호응이 없었다

 

*린뱌오사건(林彪事件, 임표사건)
중국 공산당 수립 이래 중국 최대의 정치사건이 린뱌오사건이다
린뱌오(임표)는 문화대혁명때 마오쩌둥사상을 절대화하고 인민해방군을 지휘하여 마오쩌둥을 도왔다
그 공으로 중국 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자대회(1969년)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971년 9월 12일 마오쩌둥이 항조우(杭州)로부터 열차를 타고 상하이(上海)에 가려고 했을때 린뱌오(林彪)가 열차폭파를 기도했다
그러나 린뱌오의 딸 린더우더우(林豆豆)가 이를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고함으로써 마오쩌둥은 비행기로 베이징(북경)에 돌아갔다
그날 오후 린뱌오는 암살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베이다이허(北載河)까지 달아난 후 트라이던트 비행기를 타고 소련에 망명하려 했지만 다음날 아침 몽고 영내에서 추락사 했다
이 사건을 1973년 중국 공산당 제10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통하여 발표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린뱌오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70년 8월 제9기 중앙위원회 제1차 총회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미수에 그쳤다 이어 1971년 3월 반혁명 무장쿠데타계획인 <571 공정기요(工程紀要)>를 입안하였고 1971년 9월 8일 반혁명 무장쿠데타를 일으켜 주석 마오쩌둥을 모살(謀殺)하고 별도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음모가 실패로 끝난 후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몰래 비행기를 타고 소련수정주의 진영으로 도피 당과 나라를 배반하려다가 몽골의 운데르한에서 추락해 죽었다 <571공정기요(工程紀要>는 571(우치이)는 무장봉기를 뜻하는 우치이(武起義)의 발음을 빗댄 말이며 유포되어 있는 기요(紀要)에 의하면 마오쩌둥을 현대의 진시항제라 하여 그를 타도하여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린뱌오사건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공산주의 친소 임표진영과 실용주의 친미 친서방 주은래 진영의 투쟁에서 미국과 중국수교 그룹인 실용주의자 주은래진영의 승리로 내다보고 있다
임표는 후베이성(湖北省) 황강(黃崗)출생으로 1926년 황푸군관학교(黃織軍官學敎)를 졸업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조선의용대 김무정등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다
임표는 1927년 국공분열 후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으며 주덕(朱德)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게릴라활동, 1934-1935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 하였다
1936년 항일군정대학 교장. 1937년 팔로군 115사단장. 1947년 8월 만주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기를 접수하고 동북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으며 동북성사령관으로 만주를 장악하였다 린뱌오는 만주를 장악과 일본군 무기로 중국 전체지역를 점령할 수 있는 군비토대를 마련했고 팔로군 부대로 중국내전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 하였다
린뱌오는 1967년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오쩌둥 강청과 결합 미국과 중국수교세력이며 실용주의자 주은래,등소평 세력을 제압하고 군의 힘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하였고 1969년 중국 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하려다가 주은래 등소평등 세력에게 제거되었다..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88특별여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 군인출신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중심의 반일연합전선 군대조직이었다

2005년 3월 저녁 북한주재 러시아대사관 방문과 러시아전쟁 60돌 기념메달 받아
러시아 2차대전 승전 기념메달, 왜 각국 정상 중 김정일만 받았을까? 정답: 김일성을 소련군 참전용사로 규정 아들에 수여
제2차세계대전 승전기념 메달은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제작됐다 러시아와 당시 동맹국 국민 중 생존한 참전용사 및 그 후손이 수여 대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아버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2차대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주석은 한인과 중국인, 만주인(여진족)으로 구성된 극동의 소련군 88특별여단의 제1교도영(대대)장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으나 일본이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정작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88여단 인사들은 광복 후 북한에 25만명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88여단 출신의 중국인 생존자 27명과 몇몇 북한인사들도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로 만들어진 지름 32mm의 이 메달에는 승리라는 단어와 <1941-1945>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10만여 개가 제작됐으며 제작 단가는 20달러(한국 돈 약 2만원)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2.남로당 독자적 무장혁명과 서울점령론---박헌영 노선

--김일성(북한출신, 북로당)과 박헌영(남한출신, 남로당)의 사상투쟁--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위원장, 북한 외무성 부수상 출신답게 남한 민중 스스로 무장혁명과 투쟁을 촉구했다 그리고 남침방법론상에서도 개성과 서울을 점령한 후 이승만정부와 협상을 주도하면서 명분을 축적하면서 남한 민중 스스로 무장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

(1)노동당내부 남로당 계열 주도권 장악논리

(2)남한혁명은 남한 민중 스스로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남한운동권 독자론 입장--남로당 당원에 의하여 남한 혁명 추진 주장

(3)서울점령한 후 이승만정부와 협상을 중시했으며 남한 민중 스스로 투쟁 촉구

(4)한국전쟁 당시 박헌영 노선 논리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할때 지하 남로당이 무장혁명으로 면.군. 시등 행정기관 장악하라 통지 그리고 유엔군이 한국전쟁 개입 이후에는 빨치산 투쟁을 촉구했으며 독자적인 빨치산부대가 아닌 인민군에 가담하라는 지시

(5)한국전쟁 이후 박헌영 노선 논리--전쟁패전은 김일성 극좌모험주의로 책임 허가이.박헌영등의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지지와 이승엽등은 강동정치학원 중심으로 무장혁명 투쟁을 주도하다가 미국 간첩으로 제거 처형됨

(6)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음모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됨---미국간첩과 남한정부 스파이로 처형
ㄱ.반당과 종파분자
(ㄱ)1950년 4월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 합당으로 조선노동당 창립 전후 주도권 싸움으로에 남조선 노동당 핵심 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등을 팔아먹었다는 죄명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 남로당 극좌모험주의 무장 폭동노선으로 남로당이 와해되었다는 죄명
(ㄴ)1950년 4월 남북노동당 합당 이후에도 종파분자로 남로당 당수로 활동해왔다는 점
ㄴ.간첩방조--미국간첩과 남한정부 스파이 죄명
(ㄱ)미국 간첩행위
박헌영을 위하하여 이승엽. 임화 이강국등이 정권을 전복음모를 꾀하고 미국 제국주의들을 위한 간첩행위를 해왔다는 것이다
http://nk.chosun.com/board/read.php3?table=bbs_dong&forum_id=3&no=1925
이화여대 출신 이중간첩 김수임(미8군 헌병대장의 애처)는 박헌영. 이강국과 C.I.A사이의 연결선일 것이다 김수임과 미국 헌병대장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독일유학파 이강국은 김수임과 동거하다가 북한으로 넘어가 최대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했다 일제시대에 박헌영은 아펜젤러나 미국선교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C.I.A가 박헌영을 이용할때 일제때 친분이 있던 선교사를 이용했고 중간역할을 김수임이 했어요 김수임은 오제도 검사에게 체포되어 1950년 6월 24일 간첩죄로 사형당했구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도 일제때부터 박헌영과 친한 사이였죠
-박헌영은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1946년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처리문제로 탈퇴했다
-박헌영 재판 자료 일부
"박헌영은 1948년 6월 하지에게 간첩 연락으로 파견하였던 서득은을 통하여 1920년도 상해생활에서 조선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이던 현애리스를 자기의 첫 애인으로 하였고 제2차대전 후 미국이 남반부에 상륙하였을 때 상면하였던 씨씨아이지케(CCIGK)에서 미국군대로 비밀공작하던 현애리스를 비롯한 몇 사람의 미국 정보원을 구라파를 통하여 북반부에 파견하였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하라는 하지의 지령을 받고 있던 차 추방당한 진보적 인사로 은폐하여 입국을 보장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애리스를 중앙통신사로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이경선)을 조국전선의 주요한 직위에 배치시켜 주면서 이들의 간첩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하여 주었던 것입니다"(북한정부는 1920년부터 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해온 박헌영이 하지의 밀명으로 현애리스와 이경선등의 간첩활동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이경선은 1899년 평안남도 순천군 후측면 합포리에서 태어났으며 1942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이경선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으며 그것이 해방 이후 새롭게 건설될 국가건설으로 이어졌다 해방직전 그는 미군 OSS(CIA)의 국내침투작전의 요원으로 미군에 입대하여 중국을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죄악을 목도하고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 같다 이름을 바꾸고 목사직을 버리고 나아가 기독교 신앙도 버렸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친북한적인 정치활동을 적극 나섰다 그 결과 그는 1949년 말 동유럽을 거쳐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국전선(남조선혁명전략기구)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과거 OSS(CIA) 요원 현애리스와 이경선(리사민)등이 북한 망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의심하였으며 고향도 주장과는 달리 북한이 아니었고 북한에 들어온지 5개월 내지 6개월 뒤부터 수상한 행동이 포착되어 감시가 강화되었다고 북한전직 고위관리는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1950년 3월 이들이 유럽여행을 요청하자 내무성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박헌영의 외무성측에서 출국사증을 내주어 출국하자 모스크바공항에서 이들의 몸과 짐을 수색하니 군대 관련 비밀자료등이 다시 발견되어 강제로 북한에 귀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이들이 미국간첩임을 밝혀졌지만 박헌영 사건이 터진 이후에 이 사건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1920년부터 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해온 박헌영이 하지의 밀명으로 현애리스와 이경선등의 간첩활동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사건을 1920년에 박헌영의 애인이었다고 몰고 간 현애리스를 중심으로 진행시켰고 이경선은 부차적인 존제였다
http://user.chollian.net/~ikch0102/n-61.htm 

(ㄴ)남한 간첩행위
a.박헌영이가 남한 민주당 신익희. 조병옥선생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도움 요청행위
b.다시 쓰는 독립운동 열전(列傳): 통일운동가 박진목 선생 "독립운동 목적 통일 달성 못해"
http://news.media.daum.net/society/affair/200505/09/khan/v9038148.html
해방 후 한때 남로당에서 활동한 박진목선생은 6.25가 나자 서울에 온 북한 내무상 이승엽을 만나 동족간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또 북한에 가서 전쟁을 끝내는 소위 <종전운동>을 벌이다 남북으로부터 간첩과 미군 스파이로 각각 몰려 감옥에 가기도 했다 북한 김일성은 1953년 12월 바로 이 만남을 박헌영. 이승엽등 남로당 출신을 숙청하는 빌미로 삼았다
ㄷ.정부 전복음모
(ㄱ)북한정부 군사위원 위원 겸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며 북한정부 2인자로 실질적 실권자 박헌영 부수상이 6.25직후 중국에 방문하여 "김일성 축출 제의"
http://news.media.daum.net/foreign/others/200504/26/munhwa/v8934326.html
북한 초대 정권의 내각 부수상 겸 외상을 지낸 박헌영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9월말쯤 방중(防中) 중국 지원하의 반김일성 군사무장혁명(반김일성 군사쿠데타)을 일으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친중국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베이징(北京)의 정통한 소식통이 2005년 4월 26일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소식통을 그러나 박헌영의 이 같은 계획은 당(黨).정(政).군(軍)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마오쩌둥(모택동)주석의 지원반대와 적극 만류로 무산됐다면서 모택동 주석의 군사지원만 약속받은 채 귀국했다고 덧붙였다
이 소식통은 모택동주석이 미군 주도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직후인 당시 박일우 내무상을 대동한 채 중국을 찾은 박헌영의 계획을 전쟁기간 중이라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김일성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 거절한 것으로 안다면서 이와 관련해 박헌영과 모택동의 대화록이 현재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중국 외교부의 1급 비밀문서에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소식통은 이어 이 내용은 모택동주석의 최측근이었던 스쩌(師哲) 전(前) 당 비서실 주임도 사석에 중언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미국의 한국전쟁 전문 연구가인 중국계 미국인 천젠(陳健)교수가 자신의 저서와 논문등에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박헌영은 이로 인해 결국 김일성의 격노를 사 나중에 미국의 간첩으로 몰리는 횡액을 입게 된다면서 그렇지 않았으면 실각하더라도 생명은 유지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와 관련 또 다른 소식통은 박헌영의 쿠데타 기도설(군사무장혁명)은 중국에서는 거의 확실한 근거를 가지는 학설이라고 전제하고 중국 외교부의 한국전쟁 관련문서의 비밀이 대거 해제되면 진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ㄴ)박헌영 보증인 허가이가 소련정부 도움 요청등과 함께 이승엽등의 강동정치학원 중심으로 무장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
(ㄷ)박헌영이가 남로당 당원을 팔아먹고 미국과 연합으로 한국전쟁을 획책하여 북한을 공격했다는 죄 

 

*5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와 박헌영. 이승엽 재판 자료

5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끝난 후부터 이 회의의 문헌토의사업을 전당적으로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핵심인물 12명이 반국가,반혁명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이어서 박헌영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 3~6일까지 최고재판소 특별군사법정에서 4일간 열렸고 윤순달(15US)과 이원조(12년)를 제외한 10명 전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이로부터 2년 4개월이 지난 1955년 12월에 열렸다.  재판 결과 박헌영에게도 사형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이승엽 사건의 주요 피고인들은 아래와 같다.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피고인들

•박헌영(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각 부수상)

•이승엽(당 비서 겸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

•임화(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박승원(당 연락부 부부장)

•이강국(무역성 조선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

•배철(당 연락부 부장)

•윤순달(당 연락부 부부장)

•이원조(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백형복(전 남한 치안국 중앙분실장)

•조용복(인민검열위원회 상급 검열위원장)

•맹종호(인민유격대 10조 대장)

•설정식(인민군 총정치국 정치위원)


이들의 죄목은 간첩행위, 남한 내 민주 세력의 파괴행위, 북한 정권 전복 음모 등 세 가지였다.


“박헌영은 일제시대부터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연결돼 미국의 간첩이 되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됐다가 공산당 지도자들을 밀고해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과 연결돼 남로당의 혁명역량을 파괴했고, 한국전쟁 시기 남로당 계열을 사주하여 공화국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였다.  이승엽 역시 해방 후 미군의 고용간첩이 되어 남로당의 기밀들을 넘겨주어 남한의 민주역량을 파괴했고 북한에 들어온 뒤에도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남로당 계열의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금강정치학원을 중심으로 무력을 확대하면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에서 박헌영,이승엽 사건 당시 직접 검열사업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인 신경완은 한 월간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헌영은 나름대로 야심과 속셈이 있었다.  그는 야망에 차 있던 남조선 해방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전쟁 패배의 요인을 김일성의 지휘 잘못으로 몰아붙여 일격에 김일성을 권좌에서 축출할 꿍심을 품고 있었다.  박헌영은 따라서 미군과 한국군이 또다시 밀고 북상해 오면 1950년 10월처럼 밀려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때 김일성에게 일격을 가해 당권과 정권을 탈취하리라 꿈꾸며 자기 속셈을 차리는 일을 암암리에 진행했다.  박헌영 일파는 김일성에게 인민군 재진격시 배후에 침투해서 배후에 침투해서 유격투쟁할 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한닫고 속이고 자기 일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북으로 밀려들어온 남로당원들로 유격부대를 조직하여 평양 주변의 중화와 상원에 제1지대,제3지대,제7지대,제11지대를 구성하여 집중 배치하고 10지대는 황해도 연백군에 배치했다.  그리고 남조선 혁명간부(공작원,유격대)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김일성과 한판 싸울 때 필요한 돌격대를 육성하는 금강학원이란 것을 김일성계의 이목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 서흥의 깊은 산골에 설치하고 돌격대를 육성했다.


박헌영은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에게 남한에 20만 명에 달하는 정예 남로당원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인민군대가 밀고 내려가기만 하면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켜 인민군대와 합세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단 며칠 만에 전국을 해방시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렇지만 남로당원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이 종결되면서 남로당은 괴멸했고, 박헌영은 돌아갈 곳도 지지기반도 상실했다.  때문에 박헌영은 적당한 시기에 김일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공화국 전복 음모’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3.김두봉의 남북대화와 남북협상론

김두봉은 원래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두봉은 부산기장(부산 김해) 출신으로 연희전문과 한글학회 출신 학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한 인물로 김구 김규식등과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신민당을 창당했으며 북한정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여운형.김구. 김규식등 남북협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남북전쟁보다는 외교적으로 협상적으로 남북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한사회에서 여운형.김구. 김규식등 친중국 인사들이 제거되고 남북협상론자 입지가 약화됨으로 실제로 실권자가 아닌 명목상 지도자로 전락하였고 김일성 우상화 신격화 작업으로 아무런 평가없이 쓸쓸하게 죽었다

 -김규식(한국독립당)과 김두봉(조선독립동맹)의 회담으로 광복군 창설

-광복이후 서울에 왔다가 평양으로 입북

 -남북 신민당 창당 -여운형과 남북협상

 -김구.김규식과 남북협상

 -김구선생 사망 1주 기념 그 날 남침(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