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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때 민간인 살해 일본군 출신 사형집행 장면 본문
남경대학살때 100명 목자르기 시합을 벌인 노다 다케시(野田毅)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소위,비전투원 300명의 목을 베어 살해한 다나카 군기치(田中軍吉)대위를 사형에 처했다
극동재판부는 당시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에게 불법행위와 포로학대혐의로 A급 전범으로 기소해 사형선고를 내렸다.
난징 군사법정에서는 당시 제 6사단장이었던 다니 히사오(谷壽夫)육군중장을 기소해 사형을 선고했다. 다니는 변호장에 학살은 나카지마 부대(제 16사단)가 일으킨 것으로 자신과 6사단은 관계가 없다고 써 놓았다.
한편 상해파견군의 사령관중 하나였던 아사카노미야(朝香宮) 중장은 황족이어서 천황과 황족은 전범처리하지 않는다는 맥아더 규정에 의해 그는 기소되지 않았다
1.난징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된다
2.극동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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