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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백(崔南白) "식민지" 소설책 본문

->제1, 2, 3공화국 구분(북한역사)/許灌 머리소리함의 漢文, 漢字書堂

최남백(崔南白) "식민지" 소설책

CIA bear 허관(許灌) 2013. 6. 13. 18:01

 

雩南 이승만 前대통령 賞(상)을 받은 단편소설 植民地를 장편소설화한 작품입니다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단체 귀가 빙빙돌아가는 사람들 머리소리함은 최남백 선생 행적 검증할때 존경하는 인물로 평가해오고 있습니다

 

최남백의 소설 '식민지(植民地)'는 "노름빚에 쫓긴 놈, 계집질 자금이 궁해진 놈, 노랭이 아비에게 돈 뺏어낼 놈, 심지어 고집불통 홀어미에게 학비 뜯어내려는 학도까지 독립군 군자금 모집자를 사칭하면서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일제하 본지 지면에 보도된 시국 표방 사건들의 양상도 이와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내 부하 200명이 먹을 저녁밥을 지어놓으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1921년 5월 26일자), 어느 독립단 사칭 강도는 '부하들 먹을 식량을 달라'고 겨우 닭 여섯 마리를 농가에서 빼앗은 뒤 이를 팔려다 붙잡히기도 했다.(1927년 7월 29일자)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35] ‘짝퉁 독립군’ 강도짓 늘자 臨政도 ‘처단’ 명령,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자료참조]

식민지 저자  南白 최근덕(崔根德) 선생님
193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삼가초등학교, 진주중학교,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마쳤다. 정신문화연구원 고전연구실장으로 일했으며 성균관대 유학대 교수로서 유학대학장, 유학대학원장, 성균관장을 거쳐 현재는 유교회 중앙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논어 인간학≫ ≪이야기 소학≫ ≪한국유학사상 연구≫ ≪고사성어 백과사전≫ 등 외에도 장편소설 ≪식민지≫, ≪반역≫ ≪화우도火牛圖≫ 등이 있다.
호는 南白(남백)으로 雩南(우남) 이승만 전대통령과 白凡(백범) 김구선생 아호를 이어받고 있다

 단편소설 "식민지"는 이승만전대통령 상(賞)을 받았다

 

1923년 1월 18일 오후 2시 35분 경성 시내 다옥정(茶屋町·현 중구 다동)의 한 전당포에 청년 한 명이 뛰어들었다. 그는 "나는 얼마 전 권총으로 일본형사를 쏘아죽인 상해 임시정부 요원인데, 도망할 여비가 한 푼도 없으니 돈 좀 내놓아라"고 위협했다. 경찰이 붙잡아 조사해 보니 아무 직업 없이 시내를 배회하는 건달이며, 전에도 독립군을 사칭해 강도짓을 했다고 자백했다. 조선일보 1923년 1월 20일자에 실린 이 사건은 1920년대에 성행했던 독립군 사칭 강도의 전형적인 경우다. "독립 투쟁을 위한 군자금을 내놓으라"며 재물을 빼앗는 이런 강도들을 당시엔 '시국(時局) 표방 강도'라고 불렀다.

민족 독립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시대에 기생충처럼 편승한 황당한 '짝퉁 독립군'들은 의외로 많았다. 1921년부터 1929년까지 본지에서 '시국 표방 강도'라는 제목이 들어간 기사가 106건이나 된다. '시국 표방 강도'가 너무 늘어나자 총독부가 특별 단속법을 만들려고 궁리 중이라는 보도(1929년 5월 24일자)도 보인다.


	1937년 경성 시내 한복판 신당동에서 벌어진 '시국표방'(독립군 사칭) 강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8월 30일자 조선일보.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현장 사진까지 곁들였다.
1937년 경성 시내 한복판 신당동에서 벌어진 '시국표방'(독립군 사칭) 강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8월 30일자 조선일보.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현장 사진까지 곁들였다.

최남백의 소설 '식민지(植民地)'는 "노름빚에 쫓긴 놈, 계집질 자금이 궁해진 놈, 노랭이 아비에게 돈 뺏어낼 놈, 심지어 고집불통 홀어미에게 학비 뜯어내려는 학도까지 독립군 군자금 모집자를 사칭하면서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일제하 본지 지면에 보도된 시국 표방 사건들의 양상도 이와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내 부하 200명이 먹을 저녁밥을 지어놓으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1921년 5월 26일자), 어느 독립단 사칭 강도는 '부하들 먹을 식량을 달라'고 겨우 닭 여섯 마리를 농가에서 빼앗은 뒤 이를 팔려다 붙잡히기도 했다.(1927년 7월 29일자)

물론 진짜 독립군들도 무력으로 군자금을 빼앗았지만 '짝퉁'과 달리 농민이나 소상인들을 터는 게 아니라 굵직한 친일 부호들 집을 쳐들어갔다.

시국 표방 강도 사건이 터지면 총독부와 독립군 양쪽 모두의 신경이 곤두섰다. 총독부로선 독립군 소행이 아닌가 긴장하여 범인 체포에 혈안이 됐다. 독립군으로서도 서민들까지 괴롭히며 독립운동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강도들이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이 때문에 1920년대에 임시정부는 '독립군 사칭 불량배'를 일본인 고위관료·고등밀정·친일부호 등과 함께 '칠가살(七可殺·처단해야 할 일곱 집단)'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다.(1920년 8월 18일자 '3월 이후 평북 일대에/독립당의 무단(武斷)행동')

독립군을 사칭하고 강도짓을 하려다 체포되면 잡범보다 훨씬 엄중하게 일경의 취조를 받을 텐데 굳이 독립군이라고 한 이유는 무얼까. '독립투쟁'에 대한 당시 동포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거짓말을 한 것 아닐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