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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중국 공산당 뉴스, 연변일보) 본문
일본침략군과 진행한 첫 련합작전 반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첫 승리-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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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전투의 도화선
도문 일광산(해발 397.7메터)은 아름다운 산이다. 깎아지른듯한 괴암절벽으로 병풍쳐져 있는 일관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을 휘여잡고 흐르는 두만강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있어 신비한 운치를 돋쳐준다.
일광산턱밑에 있는 마을이 유명한 삼툰자(三屯子 지금의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제7촌민소조)마을이다. 간평 혹은 새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을은 1920년 당시에는 화룡현 월신사(月新社)에 귀속되여있었다. 일광산에서 내려다보면 간평대안의 마을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원래는 종성군에 소속)강양동철도역과 마을이다. 돌아서서 바라보면 도문과 조선 남양이 지척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밑으로 법진령고개길이 뉘연히 누워있다.
1920년6월4일 아침 5시, 신민당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도강한후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 일본군헌병군조 후꾸에 산다로이하 4~6명을 감쪽같이 섬멸하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강양동습격전은 당시 연변의 각 반일단체들에서 진행하고있는 조선국내진입작전의 일환이다.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군경주둔지거나 경찰서를 습격하는 일이 련속 일어났는데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습격사건은 1650여차나 되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라고 한다.
그날 박승길부대는 돌아가고 걸만동방면으로부터 다른 한갈래의 반일부대가 강양동습격을 목표로 삼툰자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두만강남안 종성수비대 순라병들이 강양동방면으로 향하다가 두만강북안의 항일군을 발견하고 총질, 이에 반일부대도 맞불질을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강양동초소가 습격당하고 삼툰자마을에서 일본군종성수비대와 항일군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총격전을 벌리였다는 급보를 접한 남양수비대의 아라요시중위는 6월6일 오전 11시 자기소대와 야마모도헌병오장이 거느린 헌병을 포함한 17명을 거느리고 삼툰자에서 7~8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경내로 기여든후 범진령을 에돌아 삼툰자서쪽 작은 골짜기로 내려와 마을 뒤산을 점령하고 반일부대를 일거에 소멸한 목적으로 삼툰자마을을 습격하였으나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자 악에 받쳐 마을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분풀이하고는 범진령을 넘어 반일부대 종적을 따라 계속 추격하다가 일광산기슭에서 숙영하면서 대안의 후원을 바라고있었다. 밤 10시, 수십명의 무장한 반일부대는 삼툰자 서북쪽고지에 이르러 숙영하고있는 일군의 보초선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퇴각, 쌍방의 손길은 별반 없었다.
6월5일, 일본군 야스가와소좌는 조선주재 제19사단의 명령을 받고 보병 제73련대(라남)소속 기관총 1소대와 보병 제75련대(회령)소속 보병 1개 중대로 이른바 《월경추격대대》를 편성하여가지고 6월6일 저녁 9시부터 해란강과 두만강합수목에서 10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도강을 시작하였다. 한편 일광산에서 숙영하고 있던 아라요시부대는 안산방면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하를 건너 곧추 안산방면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헌병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보병 약 200명, 헌병 8명, 경찰 10명 합계 220여명이였다》(최홍빈 《봉오동전투에 관한 몇 개 문제》)
봉오동을 진군하기 위하여 일본군추격대는 길 안내를 찾으려고 정찰병을 후안산마을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에 가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 모금대가 전안산 최명국네 집에서 저녁을 먹은후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 와 등불을 밝혀놓고 금후 행동방안을 상의하고있었다. 일본군정찰병들이 후안산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한집에 불이 켜져있는지라 누구의 집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 갑자기 뛰여든 일본군정찰병을 향해 최명국 등 반일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쏴눕히고 집을 뛰쳐나와 북쪽 고려령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에게 불질하였다. 일본군은 항일군의 꼬리를 물고 계속 추격해왔다. 전투는 2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캄캄한 밤중에 진행된 준비없는 싸움이 였던지라 쌍방은 그다지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일본군 1명이 죽고 독립군 1명과 최진삼의 처가 희생되였으며 마을사람 5명이 체포되였다.
★ 일제와의 첫 겨룸
물파란 호면에 주변의 산자락이 곱게 비껴있는 봉오동저수지, 멀리 초모정자산의 번듯한 이마가 보기 좋게 안겨온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요한곳이기만 하다.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이곳이 대일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가. 그번 전투는 전 중국에서 일제와 격돌한 첫 전투였다.
저수지뚝아래에 있는 봉오동반일전적시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1920년6월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족독립운동대한북로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동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소속부대, 아라요시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진을 쳐놓고있다가 오후 1시경 일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반일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꺽어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독아주었다.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중공도문시위 통전부 도문시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 1993년6월7일
유적비밑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아직 콩크리트를 바르지 않은 비완성상태였다. 기념비왼켠에 름름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있는데 하늘을 날아오를 기상이여서 그제날 영웅들의 정신이 살아숨쉬는 것 같아 보였다. 한 아름으로는 안을 수 없는 보기에 끼끗한 소나무였다.
1920년6월7일 아침 4시45분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후안산에서 최명국일행과 교전하다가 계속 추격하여왔는데 전위중대가 드디여 리화일부대의 매복권에 들어서게 되었다. 리화일부대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긴 후 쏜살같이 고려툰 뒤산 산둥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쪽을 후퇴해버렸다. 돌연습격을 받은 일제는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대오를 정배해가지고 리화일부대가 후퇴한 방향으로 추격하여 8시30분경에 하촌마을에 들어섰으나 이미 온 마을이 텅 비여있을때였다. 헛물을 켠 일본군은 골짜기를 따라 중촌으로 진격했다. 중촌에서 늦은 아침을 지어먹은 일본군은 계속하여 상촌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마구 총탄을 퍼부어 많은 살상자를 냈으며 한 농민을 길잡이로 상촌을 향해 진격했다. 낮 12시경 일본군 척후병들이 반일부대의 매복권내에 들어섰고 오후 1시경에 일군추격대 전부가 드디여 매복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상촌에서 일본군은 북동과 남동을 수색했으나 마을은 텅 비여 사람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그제야 독립군의 매복전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남동 앞골짜기로 하여 비파동으로 퇴각하려 시도하였다.
《땅!》
산골짜기를 찢는 맵짠 총소리와 함께 일본군 지휘관 한놈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총소리는 홍범도장군이 총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산과 동산에서 분노의 총탄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일본군은 두정의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산을 향해 돌격했다. 이때 서산지휘소에서 작은 붉은 수기를 흔드니 골짜기홈채기에 매복했던 허형근소대가 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허형근소대의 매복지점으로 돌격하고 다른 한갈래는 서산으로 계속하여 돌격해갔다. 이에 허형근소대는 접근하는 적들을 대응하는 한편 서산을 향해 돌격하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드디여 적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허형근소대를 덮쳤다.
이번에는 동산에 매복해있던 최명록부대가 허형근소대에 덮쳐드는 일본군주력부대를 향해 맹사격을 했다. 동서로 되는 교차사격권에 든 일본군은 황급히 퇴각하려 했다. 이때 남산에 매복해있던 신민단부대가 적을 향해 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동서남 삼면의 교차사격을 받게 되었고 남쪽의 퇴로까지 차단되였다. 일본군은 쩔쩔 매다가 병력을 집중하여 동쪽방향으로 퇴각로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때는 오후 4시20분경이였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굵다란 우박이 폭풍과 함께 마구 쏟아져내려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겹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빌어 흩어진 부대를 긁어모아 가지고 비파동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반일부대도 억수로 퍼붓는 우박과 비 그리고 전투에서 지쳤는지라 더는 추격하지 않고 싸움터를 수습한후 왕청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련합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부대들이 계획적으로 매복전을 진행하여 일본침략자를 격파시킨 항일군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로서 중국의 반일무장투쟁의 첫 발단을 열어놓았다.
봉오동전투는 또 연변의 반일무장부대들의 첫 련합작전이였다. 1920년3월 홍범도는 조선국내에 대한 진공작전을 효과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대한의군단의 본영을 명멸구로부터 왕청현 대감자로 옮기고 당시 연변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와 손잡고 군무위원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회군과 련합하여 정일 제1사령부를 설립하였고 후에는 최진동과 련합을 도모했다.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11일 홍범도, 최진동 등 북로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도합 4개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은 봉오동에서 회의를 열고 련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5월28일에는 대한의군단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가 련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사령부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두었으며 병력을 집결하여 강력한 조선국내진격을 계획하고 주요 간부와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광범한 대중들에게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무장을 들고 굳게 뭉치기만 하면 그 어떤 침략자라도 격파할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김철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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