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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 사망설 신빙성이 있는 자료인가?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오사마 빈 라덴 사망설 신빙성이 있는 자료인가?

CIA Bear 허관(許灌) 2008. 10. 2. 23:39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장티푸스로 사망설과 파키스탄 북서부 지진 와중에 사망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 생존하여 은거 중이거나 파키스탄과 나토 군 생포설, 알 카에다과 반미단체 연합 주도로 미국 금융위기 조작설등이 있습니다. 설사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가까운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의 부족 마을, 또는 카슈미르 지방에서 원시적인 환경 속에서 도피 중이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빈 라덴은 십중팔구 죽었을 것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 장티푸스로 사망설

 

● 앵커: 프랑스의 한 신문이 오사마 빈 라덴이 지난달 장티푸스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프랑스 정보당국의 기밀문서를 인용했는데 미국과 프랑스당국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애매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성주 기자입니다.
● 기자: 프랑스의 지역신문 레피블리카는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지난달 파키스탄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프랑스 정보당국의 기밀문서를 인용한 이 기사는 빈 라덴이 장티푸스에 걸렸으나 고립된 장소에 있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첩보는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이 지난 4일 처음 입수했으며 추가정보 수집 끝에 결국 지난달 23일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이 신문은 전했습니다.
사우디 당국은 시신 매장지점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신문이 인용한 기밀문서에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등 고위 관리들이 이 문서 내용을 보고받았다는 기록도 함께 있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이 기밀문건이 어떻게 유출됐는지 조사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보도와 관련해 미국 당국은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 같은 기밀 문서가 보도된 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확인되지 않은 정보라고 말했습니다.

 

佛 신문“빈 라덴 파키스탄에서 사망”… 佛 당국‘확인 불가’

[쿠키 지구촌= 프랑스] 프랑스의 한 지역신문이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사망설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3일(한국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로렌 지역 일간지 레스트 레퓌블리칸은 국방부 기밀 문서를 인용해 빈 라덴이 지난달 파키스탄에서 장티푸스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대외안전총국(DGSE)이 21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4일 이런 내용의 정보를 입수했으며 사실 확일을 위해 추가 정보 수집에 나선 결과 빈 라덴이 지난달 23일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우디 당국은 빈 라덴이 장티푸스에 걸렸으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탓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숨진 것으로 추정했으며 사망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빈 라덴의 시신 매장 지점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기밀 문서에 작성 당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 내무 및 국방 장관이 문서 내용을 보고받았다는 기록도 들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독일,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진행중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빈 라덴 사망설 보도와 관련해 ‘정보기관의 비밀문서가 공개된 것에 대해 조금 놀랐다’며 ‘하지만 이 내용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대외안전총국도 이번 보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빈 라덴이 활동하는 모습은 2004년 공개된 비디오테이프에서 마지막으로 보였으며 이후 올해 들어서까지 여러 차례 음성 메시지가 공개된 바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신은정 기자

 

* 파키스탄 지진 와중에 사망설..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최고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최근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지진 와중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독일 일간지 빌트가 정보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빌트는, 미국 첩보위성이 지난 주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에서 빈 라덴을 마지막으로 관측했으며 이 지역이 이번 강진으로 4만여 명이 사망한 곳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며 이같이 추정했습니다.

빌트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진 발생 이후 해당 지역에서 생명의 조짐을 더는 발견하지 못했다며 빈 라덴이 흙더미에 깔려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익명의 정보기관원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Osama Bin Laden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사나이’ 오사마 빈 라덴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조상은 대대로
예멘의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서 살았다. 하드라마우트는 산악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땅으로, 일년 내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다.
깊은 신앙심을 가진 하드라마우트 주민들은 주로 무역과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로 이주해 거부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다.
빈 라덴 가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그 가문 사람들은
부호임에도  생활이 검소하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았다.

 

짐꾼에서 거부가 된 아버지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 무하마드 빈 라덴은 1930년경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제다 항구의 짐꾼으로 일하다 1931년 건설회사를 차렸는데 많은 하청을
따게디어  단시일 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무하마드 빈 라덴은 왕궁 건설 프로젝트를 땄고 뛰어난 건축실력으로
사우디 국왕 알 사우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사우디 왕족 중 특히 알 사우드의 동생인 파이잘과 친했다.
1964년 알 사우드와 파이잘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알 사우드 국왕은 물러나고
파이잘이 국왕이 됐다. 이 과정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은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 공으로 공공사업부 장관이 됐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율법에 엄했던 부모의 이혼

오사마 빈 라덴은 1957년 3월10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태어났다.
오사마는 아랍어로 ‘젊은 사자’란 뜻이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50명의 자녀를 보았는데 오사마 빈 라덴은 17번째 아들이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종종 자식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혼동을 일으켰다.
시리아 사람인 오사마의 모친은 딸도 여럿 낳았으나 아들은 오사마가 유일했다.

오사마의 모친은 나중에 무하마드 빈 라덴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아들과의 연락은 계속돼, 1990년대 초반 오사마가 수단에 머무를 때도
아들을 찾았으며, 2001년 초 손자인 오사마의 아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도 참석했다.

빈 라덴 가문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다. 또한 이슬람 3대 성지인 예루살렘,
메카, 메디나의 이슬람 사원 재건축을 맡아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자식들을 엄격히 훈육했다. 오사마 역시 어린 시절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오사마가 10세이던 1967년, 그의 부친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유산은 주식 형태로 자손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오사마 빈 라덴보다 열살 많은
장남인 살림 빈 라덴이 가문의 사업을 꾸려갔다.

장남 살림은 어린 시절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영국 귀족가문 출신인 캐롤라인
카레이(Caroline Carey)와 결혼했다. 사업관계로 미국 텍사스를 자주 방문했던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Orlando)에도 저택을 갖고 있었다.
살림은 기타를 잘 쳤으며 자가용 비행기를 스스로 몰고 다니기 좋아하는
파일럿이었다.

 

그는 가문의 기업을 국제적 재벌로 키웠다. 빈 라덴 가문은 건설뿐 아니라
발전소 건설, 석유 탐사, 광업, 통신업에도 진출했다.
살림은 1998년 미국 텍사스에서 소형 비행기를 몰다 추락 사고로 죽었다.
수년 후 캐롤라인 카레이는 아랍의 관습대로 살림의 동생인 할리드와 결혼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청소년기에 방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것이다. 1975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레바논은 중동의 파리(Paris)’로 불렸다. 중동 지역의 부유층은 레바논으로 자주 휴가를 갔다.
엄격한 금욕 생활을 강요받던 아랍인들이 이곳의 나이트클럽, 카지노, 술집 등 향락업소를 자주 출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도 레바논을 여행할 때 몇 번 향락업소에 출입했으나 호기심 차원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1971년 여름, 14세의 빈 라덴은 두 형과 함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어 연수를 받았다. 이때 가깝게 지냈던 한 스페인 여성은 빈 라덴에 대해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이 여성은 빈 라덴이 록 음악이나 패션에는 관심이 없었고 런던 풍경을 싫어했다고 전했다.

17세가 되던 해에 빈 라덴은 시리아인 어머니의 인척인 아가씨와 결혼한다(빈 라덴은 이후 3명의 처를 더 얻었다). 그리고 곧 제다에 있는 명문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
입학해 1981년 경제학 및 행정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빈 라덴은 대학에 다닐 때 이슬람주의자 조직의 하나인 무슬림형제단을 알게 되고
뛰어난 이슬람 학자들인 압둘라 아잠, 무하마드 쿠트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 두 사람이 빈 라덴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압둘라 아잠은 이후,
참된 의미의 국제 지하드 네트워크를 최초로 조직하며 명성을 떨쳤다.
저명한 이슬람주의 학자인 무하마드 쿠트브는 사이드 쿠트브의 형제다.
사이드 쿠트브는 지하드 운동 핵심 교재인 ‘사인포스트(Signpost)’의 저자. 1966년
사이드가 이집트에서 처형되자 무하마드 쿠트브가 죽은 형제의 일을 떠맡았다.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군이 침공한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80년 1월, 빈 라덴은
파키스탄으로 가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라비니와 압둘 사이아프를 만났다. 빈 라덴은 오래전 성지 순례중 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사우디로 돌아온 그는 가족에게 무자헤딘 지원자금을 모으자고 제의했고 파키스탄에도 자주 가 모금 활동을 벌였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군에 대항해 이슬람 세계가 벌인 투쟁은 1930년대 일어난 스페인 내전과 닮은 점이 많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전세계에서 몰려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을 상대로 싸웠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독실한 무슬림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군과 맞섰다.

빈 라덴은 모금 활동과 참전할 이슬람 전사 모집 운동에 열중했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이슬람교 국가에는 무자헤딘 훈련캠프가 세워졌다. 미국의 CIA도
비밀리에 이슬람 전사들의 대소 항전을 도왔다.

 

스타가 된 빈 라덴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빈 라덴은 직접 對소련 항쟁에 참전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아프간에 온 전사들은 1만6000명이 넘었다. 빈 라덴은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빈 라덴의 전우인 어떤 사람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사로서의 빈 라덴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었다. 그는 항상 최선두에 서서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스스로 왕궁
같은 자신의 집에서 걸어내려와 아프가니스탄 농민,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 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고 참호를 팠다. 그것이 바로 민중과 같이 하는
‘빈 라덴의 방식’이었다.”

1989년 2월, 거의 10년 만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소련은 나지불라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카불에 세우고 돌아갔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권, 여러 이슬람 정파의 세력다툼으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1989년 말, 빈 라덴은 영웅이 되어 사우디로 돌아왔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을
아프간 성전의 이상적인 모델로 받들었다. 빈 라덴은 수없이 많은 이슬람 사원
집회에 초대돼 연설했다. 그의 격정적 연설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는 공식적으로만 25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지하조직이 복사 배포한 테이프 수도 엄청났다.

빈 라덴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한다면 그 무엇도 이슬람교 국가를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아프간 성전은 이교도 초강대국에 대한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슬람교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이어온 사우디 왕가는 빈 라덴의 연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 가문의 사업체가 외국정부와 민간기업에게서 많은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우디에 돌아온 빈 라덴은 자신이 주장해온 이슬람적 생활방식을 실천했다.
호화 저택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침대도 없이 마루에서
잠을 잤다. 이때 그의 집을 방문한 이집트 언론인 에삼 데라즈는 빈 라덴이 마루
귀퉁이를 사무실로 삼고 가족들 또한 마루 한켠에서 생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에삼 데라즈도 방문 기간 내내 침대가 아닌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1990년 8월2일,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하루 만에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침공으로 빈 라덴이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음이 입증됐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후 대중 연설을 통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파드 국왕에게 사우디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우디 왕가는 겁에 질려 전전긍긍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사우디군은 이라크군의 상대가 못 됐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을 비롯해 쿠웨이트 난민이 물밀듯 밀려오자 사우디는 더욱 공포에
휩싸였다.

빈 라덴은 즉시 국방부장관인 술탄 왕자를 만나 이라크의 침공에 대비한 그의 계획을 전했다. 10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계획서에서 그는 빈 라덴 가문의 건설회사 중장비를 동원해 신속히 방어 요새를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취약한 사우디군을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사우디 이슬람전사’들로 보강할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백전노장들이었다. 빈 라덴은 이들을 쿠웨이트에 침투시켜 민중 지하드를
전개하자는 의견도 덧붙였다.


빈 라덴은 이 같은 계획을 사우디 정보부장인 투르키 왕자에게도 전했다. 이슬람국가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쫓아낼 수 있다면 사우디도 이라크를 격퇴할 수 있으며, 같은 이슬람교도인 이라크 병사들도 지하드에는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빈 라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군 등 ‘이교도’의 군대가 사우디의 신성한 땅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경고했다. 외국군의 사우디 주둔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우디 국민의 정서상 도저히 정서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의 침략이 우려되는 위기상황에서 빈 라덴은, 여전히 나라를 걱정하는 사우디 왕가의 매우 충성스런 신하였다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파드 국왕은 결국 미군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빈 라덴을
비롯한 많은 사우디의 엘리트,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사우디 왕실은
이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결국 메카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회의에서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격퇴할 때까지만 외국군 주둔을 용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빈 라덴은 사우디에 계속 머물며 중간 노선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이라크를 비난하고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동시에 신성모독을 내세워 외국군의 사우디 영토 내 주둔을
맹비난했다. 그는 미국 상품 불매운동 같은 시민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우리가 미국 상품을 사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는 공범자가 된다.
미국기업들은 아랍 세계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미국 정부에 세금으로 낸다.
미국 정부는 그 돈으로 이스라엘에 매년 30억달러를 원조하고 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라고 빈 라덴은 역설했다.



1991년 이라크군이 철수했는데도 미군주둔은 계속되었다.  빈 라덴은 사우디 당국의
이런 조치에 크게 반발하였다.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지닌 빈 라덴은 이제
사우디 왕가의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가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집안의 모든 사업체를 파산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사우디에서는 신변마저 위태로워진 빈 라덴은 가족들과 함께 1991년 여름, 수단으로
망명하였다.  수단에서의 그는 역량을 발휘하여 외자유치 통로이자  이슬람 무자헤딘을
키우는 지도자였다.  고속도로를 닦고 농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수단 경제에
기여하는 바도 컸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몹시 검소한 생활을 솔선하여 집에는
에어컨, 냉장고, 자동차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
1996년 말, 빈 라덴은 별도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지않앗음에도 이란의 테헤란
에서 열린 이슬람주의자 회의에서 종교지도자로 공인되었다.
그는 장문의 바얀(bayan, 종교지도자의 정책교서)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번째 對美 선전포고였다. 
걸프전에서 명성을 떨친 CNN 의   Peter Arnett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말 했다.



911 피습 이후_ 최초로 알자지라 방송에 나타난 모습
Osama bin Laden on
27 December 2001.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다...사우디 정부는 미국에게 충성함으로서
이슬람 세계에 반역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슬림이 승리하리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에게 내린 계시대로 통치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미국이 팔레스틴, 레바논, 이락크에서 저질러진 무슬림 학살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정부는 이 소름끼치는 범죄들을 저질러므로써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포기하였다.  .......유대인에 굴종하는 미국의 오만함은 사우디를 점령할
정도로 극에 달했다.  이러한 침략적이고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미국에
지하드를 선포 했다.  지하드를 수행해 신의 말씀이 높이 찬양되도록 하고 미국군인
들을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몰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