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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가다 본문
홍천-이진서
6.25전쟁이 27주년을 맞으면서 남한에서는 전사자 유해발굴 작업이 속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유해발굴 작업으로 56년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사연을 유해발굴이 한창인 강원도 홍천에서 이진서 기자가 보도합니다.
현장음: 할아버지가 보시기에 여쯤이 맞습니까? 주변도 보세요.
남한의 유해발굴감식단의 기동발굴반은 강원도 홍천에 살고 있는 올해 71살 서병찬 할아버지가 56년전 사망한 국군을 매장했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현장음) 발굴과장: 기억이 다 나세요.
할아버지: 그 당시에 여기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래위를 볼 때 이쯤 됩니다.
지난 8년 동안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을 맡아온 이용석 중령은 제보자의 설명을 듣고 바로 예를 올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50여년이란 세월을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속에 홀로 남겨져야만 했던 선배 전우의 혼백을 위로하는 겁니다.
이용석 중령: 참전용사 선배님들 저희가 늦게 찾아왔는데 용서 하시고 저희들이 최대한 노력을 해서 따뜻한 햇볕을 보게 해드릴테니까, 저희를 사랑해 주십시오. 일동 경례 바로 묵념 바로...
과일과 술로 간단한 제사를 지낸 후 유해발굴단 병사들은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 모양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http://www.rfa.org/korean/images/2007/06/14/lee_yongsuk-200.jpg)
유해감식단의 기동발굴반 이용석 중령 - RFA PHOTO/이진서
이용석 중령: 이렇게 첫 삽을 대서 흙이 좋은 곳에서는 통상 유해가 나오는 것은 것으로 볼 때 명당이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발굴을 할 때 개미가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개미가 있는 곳에서 유해가 안 나온 적이 없습니다. 뼈에 자기들의 먹이감이 있는 건지... 여기는 흙이 잘 파져, 그래서 유해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듭니다.
유해발굴단 과장 이용석 중령은 전쟁이 끝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고 남북이 대치했던 격전지가 대부분 산이나 골짜기이기 때문에 지형지물이 많이 변해서 유해발굴에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놨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시신을 직접 묻었다는 10건의 제보를 받고 발굴작업을 해보면 실제로 전사자 유해가 발굴되는 경우는 2건 정도 밖에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유해발굴의 사업의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용석 중령: 우리가 가능하면 나무하나라도 살기기 위해서 신경을 씁니다. 이 나무도 한 30년 자랐거든요. 우리가 발굴작업을 하려면 사실 이것도 잘라버려야 해도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유해발굴을 한다는 이유로 한 그루의 나무라도 마구 벨 경우 혹시나 환경단체 사람들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원성을 사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해발굴 작업은 최대한 자연을 보존하면서 유해를 발굴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땅을 정강이 까지 파자 바로 사망자 것으로 추정되는 군화가 나타나고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발굴작업반장 권재우 중사의 설명입니다.
권재우 중사: 지금 봐서는 M1 완탄인데 8발짜리 한 클립으로 보입니다. 탄띠에 걸리는 주머니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다 녹아 버렸고 탄클립하고 완탄하고만 서로 물려있는 상태입니다.
![](http://www.rfa.org/korean/images/2007/06/14/625_remain2-200.jpg)
발굴된 전사자의 유품들 - RFA PHOTO/이진서
발굴작업을 시작한지 30여분도 채 되지 않아 전사자의 유골과 함께 사용하지 않은 총알과 썩지 않은 신발의 고무 밑창이 계속 나왔습니다. 유해 발굴작업을 총 지휘하던 이용석 중령은 신이 나서 경험담을 쏟아냅니다.
이용석 중령: 제발 철모를 쓰고 있는 참전용사를 찾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내가 삽을 손을 댓는데 거기서 철모가 딱 나온 겁니다. 정말로 멋있는 철모, 하나도 상하지 않은 철모가 말입니다. 그것이 2007년 5월19일 15시 30분입니다.
기자는 유해 발굴작업 모습을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보자 서병찬 할아버지에게 56년전의 상황을 물어봤습니다.
서병찬: 교전을 그 당시에 자정, 한밤중에 전투가 벌어졌거든. 약 30분내지 한 시간 동안 심히 교전이 벌어졌어요. 그 당시에 아마 사망이 됐던 모양이에요. 2-3일 후에 큰댁은 어떻게 계신지... 내가 큰댁으로 가는 길옆이거든. 까마귀가 꽥꽥대서 왜그런가 하고 가보니까 아군이 사망돼있더라 이 말씀이에요. 알기 쉽게 말하자면 6.25사변 나던 그 이듬해 4-5월경 됩니다.
갑자기 찾아온 불볕더위 속에서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작업을 하던 유해발굴단은 사망자의 것으로 보이는 수통을 발견했습니다. 양철로 된 수통에는 날카로운 금속으로 긁어 새겨 넣은 숫자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이용석 중령은 현장에서 즉시 국방부에 확인을 요청합니다.
이용석 중령: 급해 숫자 확인해봐 0167621 급해 이게, 수통에서 군번이 나왔는데 0167621이면 6.25군번은 맞지 빨리 확인되는 대로 내 전화로 통보해줘. 병적확인관이 일단 6.25 군번은 맞다고 하니까 기다려 주기 바랍니다.
남한은 지난 2000년 6.25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1,800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중 신원 확인을 끝낸 유해는 53구, 그리고 유가족확인이 된 경우는 모두 25구입니다.
수통에 새겨진 번호가 확인되는 대로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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