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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 본문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문명자(미국명 줄리 문, Julie Moon, 1930년 10월 28일 ~ 2008년 7월 21일)는 재미 교포 언론인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MBC TV 주미 특파원으로 근무했고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 미국기자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줄리 문’이라는 미국 이름은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이 지어준 것이다.
1930년 경상북도 금릉군에서 태어나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한국 전쟁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 메이지 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다. 배우자는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 특파원 최동현이고 아들 리처드, 딸 주리아가 있다.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대한민국 최대 여성지 <여원>의 도쿄 지국장으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조선일보 주미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부임한 뒤 동아일보, 경향신문, MBC TV 특파원을 거쳤다. 대한민국 출신 기자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의 덩샤오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을 인터뷰했다. 1965년에는 린든 존슨 미국 제36대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전투병력 파병 방침을 전하는 등 여러 특종으로 명성을 쌓았다.[2]
1980년 4월 미국의 여성 기자 17명을 이끌고 단장의 임무를 맡아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고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방북 취재를 시작해 1992년,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을 인터뷰해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1992년 80회 생일을 맞은 김일성과 인터뷰를 했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평양을 방문해 조문하기도 했으며,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 김정일을 인터뷰 해 취재 내용을 월간 <말>에 기고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보도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비난 발언 등으로 신변 위협을 받자 1973년 11월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 망명 신청은 미국과 일본의 주요 언론에 소개될 만큼 국제적인 화제가 되었다. 1974년 통신사 <유에스아시안뉴스>를 설립으며 <유에스아시안뉴스> 주필로 지내던 와중에 2008년 7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 미국기자협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재미 한인으로서 미국 주류 사회에 깊숙이 진출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출생:1930년 10월 28일
경상북도 대구부 (現 대구광역시)
숙명여자고등학교 (졸업)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 / 중퇴)
메이지대학 경제학부 (상학 / 학사)
와세대다학 대학원 (국제법 / 수료)

김형욱
출생: 1925년 1월 16일
황해도 신천군
실종:1979년 10월 7일 ~ 8일 (당시 54세)
프랑스 일드프랑스추정
본관:김해 김씨
호:봉산(鳳山) · 산남(山南)
최종계급:준장
지휘: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중앙정보부 부장
주요 참전:한국 전쟁
학력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
1950년 육군보병학교 수료
1951년 육군공병학교 수료
1951년 육군포병학교 졸업
1953년 육군대학 졸업
1963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1967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명예 박사 학위
1969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1969년 경희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1973년 중국문화대학 명예철학 박사

차지철
출생일: 1934년 11월 6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경기도 이천군 부발읍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4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본관:연안
연안 차씨(延安車氏)는 황해남도 연안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호:용천(龍川)
학력
오천공립국민학교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1953년 용산고등학교 졸업
1954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수료
1955년 미국 육군포병학교 수료
1956년 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 수료
1956년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수료
1957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수료
1958년 대한민국 육군기갑학교 수료
1960년 미국 육군 레인저 스쿨 수료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1964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65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최종 계급:중령 (대한민국 육군)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54년 7월 20일 ~ 1962년 8월 21일
근무 중앙정보부 경호대(GT)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 경호실 실장 1974년 8월 22일 ~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출생일: 1924년 4월 9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사망일: 1980년 5월 24일(5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본관:김녕(금녕) 김씨
김녕 김씨(金寧 金氏)는 경상남도 김해시의 옛 지명인 김녕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호:덕산(德山)
학력
안동농림고등학교 졸업
일본 제국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 양성소 졸업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과 공학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정치학 석사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6년 ~ 1973년 4월 25일
최종계급:중장(中將)
지휘:6사단
보안사령부
3군단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차장:1973년 1월 6일 ~ 1973년 9월 6일
대한민국의 제11대 건설부 장관:1974년 9월 18일-1976년 12월
대한민국의 제8대 중앙정보부장:1976년 12월 6일-1979년 10월 26일
주요 참전:한국 전쟁

박정희
출생일:1917년 11월 14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사곡동
사망일:1979년 10월 26일(61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본관:고령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경상북도 고령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호:중수(中樹)
약력
1932.3.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제11회)
1937.3.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1937.4.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
1938.4.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 훈도
1940.4.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예과 입교
1942.3.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예과 졸업
1942.4 만주국 육군 대부근무
1942.10.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유학생대 편입
1944.4.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유학생대 졸업
1944.4. 만주국 육군 견습군관
1944.7. 만주국 육군 소위 임관, 제5군관구 제8보병단 배장(소대장)
1944.12. 만주국 육군 제8보병단 부관실 을종 부관 겸 단기 책임자
1945.7. 만주국 육군 중위 진급
1945.9.21 한국광복군 제3지대 핑진대대 2중대장
1946.12.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제2기, 3등)
1946.12. 조선경비대 포병 소위 임관, 춘천 8연대 배속
1946.12. 남조선로동당 입당, 군사총책
남로당 총비서 박헌영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 간첩으로 총살형(1958년).
박헌연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정부 초대 외상, 군사위원회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등을 역임했다
박헌영의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간첩으로 처형됨으로서 남로당계열 내부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 되었다
남로당 이후 당(黨) 수준 조직으로는 1960년대 박정희 군부의 5.16 쿠데타이후 NLPR 김일성주의 노선 통일혁명당이 등장했고 1990년 1월 새세대 주체사상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가 등장했다
1947. 조선경비보병학교 수료
1947.9. 조선경비대 대위 진급
1948.8. 조선경비대 소령 진급,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배속
1949.1. 육군 소령 불명예 전역,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문관
1949.2. 남로당 연루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50.6. 대한민국 육군 소령 복직,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
1950.9. 육군 중령 진급, 육군본부 수송지휘관
1950.10. 제9보병사단 참모장
1951.4. 육군 대령 진급
1951.5. 육군정보학교 교장
1951.12. 육군본부 교육국 작전차장
1952.10. 포병 전과, 광주 육군포병학교 입교
1953.2. 제2군단 포병단장
1953.5. 제3군단 포병단장
1953.11. 육군 준장 진급
1954.1. 미국 육군 야전포병학교 유학[29](1월 ~ 6월 27일)
1954.7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4.10 육군포병학교 교장
1955.7. 제5보병사단장
1957.3. 육군대학 졸업
1957.3. 제6군단 부군단장
1957.7. 제7보병사단장
1959.3. 육군 소장 진급
1959.7. 제6관구사령관
1960.1.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
1960.7.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1960.12.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1961.5. 군사혁명위원회 부위원장
1961.5. 군사혁명위원장
1961.5.20.~1961.7.2.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1961.7.3.~1963.12.16. 제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8. 육군 중장 진급
1961.11. 육군 대장 진급
1962.3.24.~1963.12.16.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1962.6.18.~1962.7.9. 내각수반
1963.8.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전역
1963.10.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1963.12.17.~1967.6.30.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1963.12. 무궁화대훈장 수훈
1963.12. 제2, 3대 민주공화당 총재
1967.5.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1967.7.1.~1971.6.30. 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 (재선)
1971.5.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1971.7.1.~1972.12.26. 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 (3선)
1972.12. 제8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간선)
1972.12.27.~1978.12.26.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 (4선)
1972.12.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1978.12. 제9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대한민국 육군 대장간선)
1978.12.27.~1979.10.26.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5선)
1979.1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참전:중일 전쟁
여순 사건 (남조선로동당 14연대)
6.25 전쟁
최종계급
만주국 만주군 중위
대한민국 육군 대장

만국(만주국)은 한족,만주족, 몽골족, 조선족(한민족),일족( 야마토 민족) 등 5대 민족이 연합으로 건국한 국가이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태국(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대한민국 역대 헌법 자료]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대한민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모범국입니다
대한민국은 자국 영토에 있는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 민주주의 파트너 국가와 함께 전 세계 자유와 법치 보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남한(대한민국)은 민영자본체제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라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남과 북이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대한민국 헌법 Ⅰ.제1공화국[제헌헌법] 4281년 7월 12일 제정 1948년 7월 17일 공포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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