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김정은 후계자 만들려 암 수술 시기 놓쳐" 생모 고용희 사망전 사진 입수 본문
"김정은 후계자 만들려 암 수술 시기 놓쳐" 생모 고용희 사망전 사진 입수
CIA Bear 허관(許灌) 2025. 6. 16. 20:44북한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리는 생모(生母) 고용희(高容姬)의 비밀을 밝혀줄 사진과 증언이 공개된다. 고용희는 재일교포·무용수 출신으로 백두혈통 김정은의 숨기고 싶은 가정사다.
북한 전문 저널리스트 고미 요지(五味洋治) 전 도쿄신문 논설위원이 김씨 왕조가 숨기고 싶은 비화를 10년 동안 추적한 내용을 담은 ‘고용희-김정은의 어머니가 된 재일교포’를 출간한다. 오는 6월 말 문예춘추(文藝春秋)가 발행하는 ‘고용희-김정은의 어머니가 된 재일교포’에는 배다른 오빠의 증언, 은밀하게 촬영된 사진 등이 담겨 있다. 주간조선은 일본 언론에 공개되기에 앞서 고미 요지 전 논설위원과 만나 책에 실릴 내용과 사진을 입수했다.
해당 사진은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 공개하는 내용이다. 북송 전 어린 시절 고용희와 아버지 고경택 관련 비화 역시 가족 증언을 통해 공개된다. 발굴된 ‘사실’을 저자가 한국, 일본, 미국의 취재원들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한 것이 이번 책이다.
고미 요지 전 논설위원은 “훗날 일본과 북한이 관계를 개선할 때 지도자(김정은)의 혈통이 일본과 관련됐다는 사실은 귀중하다”며 “우호 관계 구축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고미 요지는 2012년 1월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과 주고받은 인터뷰와 이메일 등을 정리한 책 ‘아버지 김정일과 나’를 출간한 바 있다.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VX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했다.
2004년 사망 직전 사진
고용희는 유방암으로 인해 2004년 파리에서 치료받다 사망했다. 그때 고용희의 나이는 51세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 사진은 2004년 촬영된 것이다. 그간 고용희와 관련해 사망하던 해에 찍힌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다. 사진에 보면 고용희가 두꺼운 흰색 털모자를 썼고, 수행원들도 외투를 입은 것으로 보아 2004년 늦겨울이나 초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월 24일 사망한 그는 몇 개월간의 항암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고용희가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저 당시에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용희는 1990년대 초반 즈음에 유방암이 생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미 요지는 책에서 “고용희가 약물치료를 선택해 수술 기회를 놓쳤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고용희의 수술을 늦어진 이유를 북한 체제와 연관 지어 해석한다. 북한에서 숙청을 많이 보아왔던 고용희가 유방암 수술을 하면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재일교포란 불안정한 신분으로 인해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가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발병 초반에 약물치료를 선택했다고 책에서 주장한다.
1990년대 초면 김정일이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정남과 고용희의 차남 김정은 사이에서 후계구도가 정해진 즈음이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확정된 건 2010년 9월 제3회 조선노동당대표자회에서다.
이번 사진은 고미 요지가 프랑스 취재 과정에서 확보한 것으로 주간조선에 그 출처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프랑스 정부가 세계에서 북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측에서 사진을 촬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용희의 파리행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도 프랑스 언론을 통해서다. 당시 르피가로는 “고용희는 유방암 치료를 위해 1990년대 초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2004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보도했다.
이는 프랑스가 세계에서 북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다. 당시 프랑스에는 북한 고위층의 전화 도청, 이동 경로 추적 등을 통해 북한 정보가 쌓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의료 수준이 높고 인권을 강조한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미국 등과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다.
한국은 고용희 사망 사실을 수개월간 확인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 고위층이 파리를 찾은 이유다. 2006년 장성택의 딸도 파리에서 자살했다.
김여정 10대 시절 사진 공개
고용희가 1990년대 장남 김정철, 차녀 김여정과 함께 해외에서 찍힌 사진도 처음 공개됐다. 그간 김정일이 고용희를 매우 신뢰해 고용희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는 분석이 있었다. 그녀가 위조여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마음대로 해외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사진을 보면 이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이 사진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찍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88년생인 김여정이 10대 초반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1990년대 후반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당시 고용희가 유럽 여행을 갈 때는 김정일 전용기 ‘216호’를 이용해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 사진에 김정은의 모습은 담겨 있지 않다. 김씨 일가는 비자금을 특정한 신용카드로 사용했다. 포르투갈 이름의 카드로 마카오 중국은행과 연결된 미국을 대표하는 카드였다. 이러한 사실은 카드 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알려졌다. 1991년 김정은과 김정철이 도쿄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것이 확인된 것도 카드 때문이다. 고용희가 그 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이전 사용내역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김정은·김정철의 디즈니랜드 방문이 드러났다.
책에는 최초 공개되는 사진 외에도 고용희의 일본 방문 일화가 처음 공개됐다. 2000년 고용희는 동생 고용숙과 교토의 ‘미소라 히바리(유명 가수)관(館)’을 방문했다. 예상도 하지 못한 장소라 일본 정보 당국은 그가 고용희인지 몰랐다. 다만 일본 측은 사진은 남겼다. 그 사진을 본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명)는 “지도자 동지(김정일)의 와이프”라고 확인했다.
생부 고경택, 남 버리고 북으로
고용희의 배다른 오빠를 통해 생부 고경택에 대해 최초로 공개된 내용도 있다. 그동안 고용희 집안의 가족관계에 대해 다양한 소문이 있었다. 이번 출판을 통해 사실관계가 바로잡혔다. 고용희 친척의 육성 증언은 처음이다. 고용희의 배다른 오빠의 증언에 따르면 고경택은 여성 관계가 복잡했다. 우선 고용희의 어머니 이맹인은 고경택의 세 번째 여성이다. 일본에 손자까지 합치면 50여명의 친척이 사는 이유다. 이들은 김씨 일가의 친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불이익을 받을 것을 걱정해 쉬쉬하며 살아왔다.
일본 호적으로는 정식 부인은 한모씨다. 고경택이 북한으로 떠나기 전 일본에 남은 본처 소생 가족들은 북한행을 강하게 반대했다. 증언에 나선 고용희의 배다른 오빠는 본처의 아들로 1962년 아버지 고경택이 북한이 임차한 소련 선박을 탈 때 배웅했다. 원래 고경택은 본처 가족과 북한에 가려고 했다. 고경택은 본처와 7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는데 자식들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그런 나라가 어디 있냐. 가보지도 못한 나라(북한)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말렸다고 한다. 결국 아무도 고경택을 따르지 않았다. 고경택은 애인이었던 이맹인과 자식 3명(아들 1명, 딸 2명)만을 데리고 북한으로 향했다. 본처 가족 입장으로는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애인과 북한에 가버린 것이다.
고경택이 북한을 택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그는 일본에서 플라스틱, 파친코 사업을 했으나 사업이 어려웠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밀무역을 하다가 한국에서 붙잡혀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강제소환되었는데, 일본에서도 한국 밀입국이 문제가 되어 강제 추방될 처지에 놓인다.
남한과 북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처지에 놓인 고경택은 “박정희 군사독재는 싫다”며 북한을 선택한다. 1960년대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고경택은 당시 한국보다 공업화된 북한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당시 북한을 선택한 사람 중에는 조만간 통일되니 북한에 가도 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고미 요지의 주장이다.
고경택이 북송 후 가족과 연락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고경택은 북한으로 간 후 본처 가족에게 한 번 편지를 보냈는데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는 말만 있었고, 구체적으로 북한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적지는 않았다. 가족들은 검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30년이 지난 1989년 고경택은 조카에게 전화를 했다. 조카는 고경택이 북한으로 간 시점부터 오사카에서 병원을 하고 있었다. 조카는 북한으로 떠나는 고경택을 배웅하며 병원 전화번호를 전달했다고 한다. 전화번호는 30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고경택은 다급한 목소리로 “나 지금 마카오에 가족과 같이 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 마카오로 와 달라”고 조카에게 부탁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라 마카오에 가지는 못했다. 친척들은 고경택이 망명을 원한다고 생각했고 다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1991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원래 북송된 사람이 죽으면 북한 당국에서 “몇 일 몇 시에 죽었으니 호적에서 정리하라”고 연락이 온다. 일본의 재산·가족관계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죽었는지 이유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고경택의 가족은 북한의 연락이 아닌 한국영사관을 통해서 사망 소식을 듣는다. 한국영사관에서 고경택 사망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조총련으로부터 연락받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미 고용희가 김정일의 숨겨진 애인이라는 이야기가 일본 매체에 보도되기 시작한 때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오사카에서 고용희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최고 인재들이 가던 곳이 오사카였다. 김정일 장인 고경택은 주요 관심사였다. 한국 측은 고용희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 합창단을 통해 정보 입수를 시도하는 등 활발히 움직였다. 고미 요지는 일본 내 정보 당국자의 확인을 거쳐 김정은은 일본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정리한다.
1973년 7월 고용희가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로 일본에 왔다. 1973년 발행된 ‘조선화보 3월호’는 고경택 가족을 성공한 재일교포로 소개한다. 그 당시 일본 측의 대응과 비화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고용희는 류일숙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당시 약 230명 정도가 일본에 왔는데 일본 공안은 그 가운데 김정일 애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원의 사진을 확보해 분석했다. 고용희 사진 관리번호는 163번이었다. 20대 여성으로 범위를 좁혀서 쉽게 특정되었다. 북송 재일교포가 많은 지역의 경찰서까지 사진을 보내서 조사했다. 고용희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친척들은 고용희를 만나러 공연에 갔다. 고용희가 김정일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은 조총련을 통해 이미 일본에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일본 공안도 알고 있었다. 조총련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조총련 내부에서는 김정일의 애인인 듯하니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용희도 경계했다. 친척이 고용희를 찾아가자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북한에 돌아가서 그 사람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은 제사 등을 위해 북송 전 어린 시절 고용희를 자주 만났던 배다른 오빠의 새로운 증언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김정일은 고용희와 사이에서 김정은(차남)을 비롯해 김정철(장남), 김여정(차녀)을 낳았다. 그동안 고용희에 대해서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이며, 김정일의 신뢰를 받았으며, 유방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동안 북한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이전에 김정일이 고용희와 나라 정책을 논의할 정도로 둘의 신뢰가 대단했다고 분석한다.
김정일의 개인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1992년 김정일이 고용희 및 비서와 함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용 팩스 용지를 하나씩 검토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 증언이 근거다. 이러한 위상은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는 발판이 된다.
하지만 북한은 김정은의 모친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용희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왔다.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이 고용희를 기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마저도 최근에는 관련 자료들을 북한 정부에서 회수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책의 저자 고미 요지의 평가에 따르면 김정은은 일본에 나쁜 감정이 없다. 김정은이 일본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도 없다. 고용희는 나중에 일본어가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김정은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고용희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다. 가장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일본어였다. 김정은이 어머니에게 일본어를 배웠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고용희는 누구? 김정일 요리사에 의해 확인된 고용희의 존재
고용희는 일본 오사카 출신이다. 1962년 10살에 북으로 떠나서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사진도 없다. 소학교를 다닐 때 이름은 계속 바뀌었다. 확인된 이름은 고희훈(高姬勳), 다카다 히메(高田姬), 다카하시가즈(高橋和) 등이다. 한국어 성에 한 글자를 더 집어넣는 식이다. 고용희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11년간(1988~1996, 1998~2001) 김정일의 스시 요리사로 일한 후지모토 겐지다. 그는 2003년에 일본어로 출간된 회고록 ‘김정일의 요리사’(원제 ‘I was Kim Jong‑il’s Cook’·일명 Kim’s Chef)에서 고용희를 처음으로 언급하며, 그녀가 김정일의 부인이자 김정은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상세히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성격이 꼼꼼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고 보고 매일 있었던 일을 검은 수첩에 썼다. 다만 한국어를 일본어로 이해하다 보니 오해가 있었다. 김정은이 김정운으로, 고용희가 고영희로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유다.
김정은과 고용희가 동시에 등장하는 영상 자료는 2012년 6월 마이니치신문이 공개한 ‘위대한 선군 조선의 어머니’ 영상이다. 마이니치신문 기자가 후지모토에게 이 영상을 보여주며 고용희가 맞느냐고 묻자 “아! 사모님이다”라며 울었다.
후지모토는 김정은의 좋은 친구였다. 승마, 노래 등 취미가 같았다. 고용희 사진을 최초로 공개한 이도 그다. 후지모토가 몰래 찍은 사진이다. 고용희 사진을 처음 공개했을 때 일본에서는 암살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정은의 통치가 시작되고 다시 북한을 드나들기 시작하자 후지모토는 이용 가치가 있었다. 북한을 몇 번이고 오가며 일본과 북한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고용희-김정은의 어머니가 된 재일교포’의 저자 고미 요지가 일본 측 정보 당국자에게 확인한 결과, 후지모토는 양측(일본, 북한)의 서신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미 요지는 김정은이 애초 어머니를 신격화하려고 했으나, 재일교포라 간부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오사카 출신 재일교포라는 신분의 벽이 컸다. 김정은은 자신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생길 것을 걱정하게 된다. 고미 요지는 재일교포 어머니의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딸 등 여성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김정은의 페미니즘적 성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한다.
“김정은 후계자 만들려 암 수술 시기 놓쳐” 생모 고용희 사망전 사진 입수
“김정은 후계자 만들려 암 수술 시기 놓쳐” 생모 고용희 사망전 사진 입수
김정은 후계자 만들려 암 수술 시기 놓쳐 생모 고용희 사망전 사진 입수 주간조선
www.chosun.com
'Guide Ear&Bird's Eye22 > 북한[PRK]' 카테고리의 다른 글
SIPRI “북한, 약 50개 핵탄두 보유” (0) | 2025.06.22 |
---|---|
英국방정보국 “우크라전 북한군 6000명 사상, 도보 돌격 탓… 파병 1만1000명의 절반 넘어” (0) | 2025.06.17 |
"원수들의 침략적 본성은 안 변해"… 北, 6·25 앞두고 '정신교육' 매진 (0) | 2025.06.15 |
北, 美 입국 금지 대상 제외에 “의도적이라도 기뻐할 이유 없다” (0) | 2025.06.12 |
초저가 중국산 가발, 속눈썹…북한 감옥에서 만들어진다? (0) | 2025.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