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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닌: 나무로 배터리를 만들 수 있을까?
CIA Bear 허관(許灌) 2023. 1. 8. 23:49
전기차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과학자들은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재료를 찾고 있다. 이러한 차세대 재료의 후보로 나무 조직을 지지하는 구조 물질을 만드는 '리그닌'이 떠오르고 있다.
약 8년 전, 핀란드의 한 종이 생산기업이 시대 변화를 감지했다. 디지털 미디어가 성장하고, 사무실에서 인쇄하는 일이 줄었으며, 무언가를 보낼 때 우편을 이용하는 사례가 적어지고 있던 것. 종이 사용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핀란드의 '스토라엔소'는 스스로를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유림을 가진 곳 중 하나"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 회사는 나무 제품과 종이, 포장재에 들어가는 나무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8분 만에 충전되는 전기차 배터리에도 도전하고 있다.
이 회사에는 나무에서 나오는 고분자(폴리머) '리그닌'의 활용 가능성을 연구하는 엔지니어들이 있다. 종에 따라 다르지만, 나무의 약 30%는 리그닌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셀룰로오스이다.
스토라엔소의 리그닌 기반 배터리 솔루션 '리그노드'를 이끌고 있는 로리 레토넨은 "리그닌은 일종의 접착체처럼 셀룰로오스 섬유를 결합시켜 나무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리그닌에는 탄소가 들어 있다. 탄소는 '애노드(전기 자동차 배터리에서 음극을 뜻함)'라는 배터리 주요 구성 요소의 재료다. 휴대 전화의 리튬 이온 배터리에는 보통 흑연 애노드가 들어간다. 흑연의 구조를 보면 탄소가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
스토라엔소 엔지니어들은 회사에서 나오는 폐 펄프에서 리그닌을 추출하고, 이를 배터리 애노드용 탄소 재료로 가공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를 위해 회사는 스웨덴 기업 '노스볼트'와 제휴 중이며, 이르면 2025년부터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다.
전기 자동차를 구입하고 가정에 에너지를 저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향후 배터리 수요도 급격히 증가할 전망이다. 레토넨은 "그 수요는 정말 놀랍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고 했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배터리를 위한 필요 전력량이 매년 수백 기가와트시(GWh) 단위로 늘어났다. 하지만 컨설팅기업 '맥킨지'에 따르면, 2030년에는 매년 수천 GWh에 달하는 추가 수요가 생길 전망이다. 화석 연료에서 탈피하려는 인류의 노력 때문이다.
문제는 환경이다. 오늘날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리튬 이온 배터리는 재료를 채굴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피해를 준다. 또한 이러한 배터리에 들어가는 일부 재료는 독성이 있고 재활용이 어렵다. 많은 재료가 열악한 인권 상황을 가진 국가에서 조달된다는 점도 문제다.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 피해의 예를 들어 보자. 인조흑연을 만들 때는 탄소를 몇 주간 섭씨 3000도로 가열해야 한다. 컨설팅 기업 '우드맥킨지'에 따르면, 이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중국의 석탄 화력 발전 등으로 충당한다.
과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배터리 재료를 찾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과학자들은 이러한 재료를 나무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배터리는 캐소드와 애노드가 필요하다. 각각 양극과 음극이라 불리는데, 이온이라 불리는 하전 입자가 이들 사이를 이동한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배터리 과학자이자 현재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엔지니어 질 페스타나는 배터리가 충전되면 리튬이나 나트륨 이온이 양극에서 음극으로 이동한다며 자동차가 여러 층을 가진 주차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리를 잡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런 주차장 구조로 된 재료에 필요한 특징은 리튬이나 나트륨을 쉽게 흡수하거나 배출하면서 동시에 부서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전기차 전력 공급 등에 배터리가 사용될 때, 이온은 전자를 방출한 후 다시 양극으로 이동한다. 방출된 전자는 전기 회로 배선을 따라 이동하며 차량에 에너지를 전달한다.
페스타나는 흑연이 "매우 흥미로운" 물질인 이유는 이러한 반응을 일으키는 믿을 만한 애노드 역할을 충실히 잘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리그닌에서 얻은 탄소 구조를 포함한 대체 물질들도 이에 못지않은 역할을 증명하고자 경합 중이다.
리그닌의 잠재력을 연구 중인 기업들은 스토라엔소만이 아니다. 스웨덴의 '브라이트 데이 그래핀'은 리그린에서 다른 형태의 탄소인 '그래핀'을 만들어 배터리를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레토넨은 스토라엔소가 '리그노드'라 이름 붙인 자사의 탄소 애노드 재료의 성공 가능성을 믿고 있다. 그는 스토라엔소가 리그닌을 단단한 탄소 구조로 바꾸는 방법이나 그 구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리그닌도 가공 과정에서 열을 가해야 하지만, 그 온도가 인조흑연 생산만큼 높지 않다고 했다.
레토넨은 리그닌으로 만든 탄소 구조는 "무정형" 또는 불규칙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구조는 이온의 이동성을 훨씬 더 높여줍니다."
스토라엔소는 이 점이 8분 만에 충전되는 리튬 이온이나 나트륨 이온 배터리 생산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급속 충전은 전기차 배터리 개발사들의 핵심 목표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의 마그다 티티리치 연구팀도 자체 연구를 통해 리그닌 유래 탄소 애노드를 살펴봤다. 이들은 연구에서 산소가 풍부한 결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복잡하고 불규칙한 탄소 구조를 갖춘 전도성 덩어리를 만드는 건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티티리치는 이 결함 때문에 양극에서 온 이온이 나트륨 이온 배터리 음극과 반응을 더 잘하는 것 같다며, 이로 인해 충전 시간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도성 덩어리는 배터리용으로 아주 환상적인 소재입니다."
뉴욕주 로체스터대학의 와이어트 텐해프도 실험실 환경에서 리그닌에서 유래한 애노드를 만들어냈다. 그는 리그닌이 많은 잠재적 쓰임을 가진 "멋진" 부산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연구팀은 실험에서 리그닌을 사용해 리튬 이온 배터리의 일반적인 구성 요소인 접착제나 구리 기반 집전체가 들어가지 않는 자립 구조 애노드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하면 리그닌 유래 탄소 애노드는 비용 면에서도 유리해진다. 하지만 그는 리그닌 애노드가 흑연 애노드에 비해 상업적 경쟁력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리그닌 애노드가) 현재 상용화된 흑연을 대체할 만큼 비용이나 성능 면에서 도약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속 가능성 문제도 있다. 첼시 발디노 국제청정운송위원회 연구원은 애노드 생산에 사용되는 리그닌이 종이 생산의 부산물에서 나오는 한, 배터리를 위해 추가로 나무를 베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토라엔소 대변인은 현재 회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목재는 "종이 가공 공정에서 부차적으로 나온 것"이며, 이를 활용한다고 해서 벌목하는 나무의 수가 늘거나 펄프 제조에 사용되는 목재량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페스타나는 리그닌으로 애노드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리그닌을 공급받는 임업 역시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펄프 산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재료 자체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조달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스토라엔소의 2021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는 "모든 목재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파악하고 있으며 100% 지속 가능한 자원에서 충당하고 있다."
리그닌을 배터리에 활용하는 방법은 애노드만이 아니다. 지난 4월 이탈리아의 한 연구팀은 리그닌 기반 전해질 개발을 다룬 논문을 한 편 발표했다. 전해질은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으면서, 전극 사이에 이온이 흐르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전자가 배터리가 연결된 전기 회로를 따라 원하는 경로로 이동하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전자가 전극 사이에서 단순히 튀어나가는 현상(이러한 현상은 스마트폰을 멈추게 한다)을 막아주는 것이다.
지안마르코 그리피니 밀라노공대 교수에 따르면, 오일에서도 전해질용 고분자를 얻을 수 있지만 대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공급원을 찾는 것이 훨씬 혜택이 크다.
그는 자신의 연구팀이 태양 전지판에 리그닌을 사용하는 실험(이 실험의 성과는 좋지 않았다)을 한 후 전해질로 주제를 바꿨다고 말했다. "리그닌은 갈색이기 때문에 빛을 일부 흡수한다"며 "태양 전지에 사용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효율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터리에선 색깔이 문제되지 않는다.
애노드 생산 과정에서 리그닌은 열처리를 통해 구성 탄소로 쪼개진다. 자칭 '폴리머 가이(고분자 광)'라는 그리피니는 이것을 고분자 형태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의 연구팀은 실험용 칼륨 전지에서 이온의 이동을 돕는 겔 형태의 고분자 전해질을 개발했다. 그는 "꽤 괜찮은 성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 모든 아이디어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하지만 티티리치는 리그닌에서 추출한 고분자를 전해질에 사용하거나 리그닌으로 만든 탄소를 애노드에 활용해 배터리를 만드는 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올해 초 한 논문에서 나온 나무 전자 부품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도 리그닌이 쓰이게 될지도 모른다. 리그닌이야말로 '나무 위에 지은 집'에 딱 어울리는 기술 아닐까? 지나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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