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고르바초프, 그가 북한에서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 된 까닭은? 본문

Guide Ear&Bird's Eye/북한[PRK]

고르바초프, 그가 북한에서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 된 까닭은?

CIA bear 허관(許灌) 2022. 9. 4. 20:00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이 지난 30일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이 오랜 투병 끝에 30일(현지시간) 향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54세 최연소 나이에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에 오르며 권력의 정점에 선 그는 1989년 12월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미소 냉전 체제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냉전 종식과 동유럽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일각에서는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동유럽을 서방에 넘겨준 '배신자'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몰락은 같은 세력권이던 북한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결국 북한이 홀로서기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에게 '고르바초프'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강인덕 경남대 석좌교수는 BBC 코리아에 "북한 입장에서 고르바초프는 수정주의자, 볼셰비키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깨버린 반 막스주의자"라고 설명했다. 그가 북한에서 가장 적대적인 인물로 꼽힌다는 얘기다.

당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86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 당시 사회주의 동구권 국가에서 시작된 개혁 운동 및 자유 운동을 모두 승인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85년 11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당시 소련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90년대 들어서는 동독에서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사실상 독일 통일을 허락했다.

공산당 일당 독재였던 소련과 동유럽을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내가 당 서기장으로 임명됐을 때 이미 소련의 경제는 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중앙집권적 스탈린주의 때문에 소련의 정치 및 경제가 망가지고 있었고, 이를 재건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강 전 장관은 "이러한 영향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북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북한에서 그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반 공산당적 인물이 됐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결국 개방 압력이 북한에까지 오면서 결국 김일성 주석이 '나진선봉' 지역을 만들게 된 것"이라며 "그만큼 당시 고르바초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전했다.

실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당시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를 선언하며 "하나의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도 타국의 국내 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1968년 8월 소련의 체코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소련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내놓은 주장이다.

결국 이는 공산주의 세력권이 연달아 무너지면서 북한이 '홀로서기'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태림 국립외교원 교수는 "고르바초프에서 시작된 개혁∙개방과 소련의 해체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북한 체제를 더욱 고립시켰고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으로까지 이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교수는 "결국 북한이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만 군사력을 증강시켜야만 하는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강조했다.

2017년 4월 15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태양절 열병식에 천마호가 전차들과 행진하고 있다

한소 국교 정상화 그리고 북한

북한에 치명타가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1990년 노태우 정권 시절에 이뤄진 한소 국교정상화다.

이태림 교수는 "독립된 러시아 초기, 즉 옐친 정권 시기로 넘어오면서 체결된 한소 수교가 북한에 큰 충격이 됐고 이후 러시아가 북한보다 한국과의 협력에 방점을 두면서 북한 입장에선 어찌 보면 배신 당했다고 느끼는 시기가 분명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국과의 수교 및 협력에 대한 소련의 기대가 상당히 컸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90년대 말까지 러시아가 한국을 더 중시하고 북한을 소홀히 했던 측면이 있었지만 당시 한국과의 관계가 러시아가 원하는 만큼 이뤄지지 않았고, 이후 푸틴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북한 균형 외교 등 새로운 북러 관계의 시작이 됐다"고 설명했다.

강인덕 전 장관은 "1990년 미국 유엔 건물에서 국교 정상화 사인이 이뤄졌고 이후 동유럽 민주화, 미국과의 INF 미사일 조약 체결 등이 이어지면서 북한은 긴장될 대로 긴장하게 됐다"고 부연했다.

그는 다만 "북소 관계는 이미 1956년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북소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북한이 중공과 소련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면서 1956년 말 '주체사상'을 직접 만들게 됐다"면서 "그때 사상적으로는 주체, 정치적으로는 자주, 경제적으로는 자립, 군사적으로는 자위 노선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1972년 최규하 대통령과 장기영 경제부총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1960년대 초반 소련 주도의 COMECON-동유럽 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하라는 소련 측 요구가 있었지만 가입할 수 없었다. 소련은 대학생이고 우리(북한)은 소학생이다. 그들은 우리한테 가져가는 것은 싸게 가져가면서 파는 물건은 비싸게 판다. 소련과 장사하면 구멍만 남는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