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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 주범 펠리시앙 카부가가 프랑스에서 체포됐다 본문

Guide Ear&Bird's Eye/르완다

르완다 대학살: 주범 펠리시앙 카부가가 프랑스에서 체포됐다

CIA bear 허관(許灌) 2020. 5. 17. 13:38

미국은 카부가에게 한화 6천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르완다 대학살의 주범으로 꼽히는 펠리시앙 카부가(84)가 파리 인근에서 체포됐다고 프랑스 검찰이 밝혔다.

그동안 카부가는 파리 인근 아니에르쉬르센에서 거짓 신분으로 살아왔다.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그를 반인권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르완다 대학살 과정에서 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카부가에 대해 결정적인 제보를 한 사람에게 500만 달러(약 62억원)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1994년 후투족은 정치적 경쟁자였던 소수민족 투치족을 공격했다. 100일동안 이어진 학살 과정에서 희생된 투치족은 80만명에 이른다.

펠리시앙 카부가는 누구인가?

윌 로스, BBC 월드아프리카 서비스 에디터

후투족 출신 사업가였던 카부가는 르완다 학살에서 학살을 주도한 민병대에 자금을 댄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또한 악명 높은 라디오 텔레비지옹 리브르 데 밀 콜린(RTLM)을 설립했고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댔다. 이 방송국은 투치족을 살해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그런 카부가가 파리 외곽에서 가명을 쓰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놀랍다.

수년 동안 카부가는 케냐에서 살고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케냐 정치인들은 그의 체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26년이 지난 이제서야 그는 국제재판소의 재판을 받게 됐다.

어떻게 발각됐나?

프랑스 검찰과 경찰에 따르면 카부가는 자녀들과 공모해 거짓 신분으로 살아왔다.

그는 16일 오전 5시 30분(현지 시각) 체포됐다.

르완다 전 유고슬라비아의 전범들을 담당한 헤이그 소재 국제형사재판소 검찰의 표현에 따르면 '여러 장소를 동시에 수색하는 정교한 공동 작전'이 있었다.

세르지 브라머츠 검사는 성명을 통해 "펠리시앙 카부가의 체포 사건은 대량 학살 후 26년이 흐른 뒤라도 학살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임을 확인시켰다"라고 말했다.

이어 '국제 사회의 지원으로 국제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브라머츠는 프랑스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르완다, 벨기에, 영국,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룩셈부르그, 스위스, 미국, 유로폴과 인터폴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법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밟은 후 카부가는 국제형사재판소로 인도돼 재판을 받게 된다.

카부가는 1997년 대량 학살, 대량 학살의 공모및 이와 관련된 직접 및 대중적 모욕, 대량 학살 시도 음모, 대량 학살, 박해 및 박해에 대한 음모 등 총 7개의 혐의로 기소됐다.

현재 르완다 국제형사제판소에서는 프로타이스 미라냐와 어거스틴 비지마나가 재판을 받고 있다.

학살은 어떻게 자행됐나?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비아리마나가 탄 전용기가 격추되며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투치족 반군 르완다애국전선(RPF)의 소행이라며 비난했다.

체계적으로 조직된 민병대에게는 투치족 살해 명단이 전달됐고 많은 이들이 잔혹하게 처형됐다.

키갈리 학살 기념관에 전시된 학살 피해자들의 사진

민병대 중 하나는 여당의 무장 조직 인터라함웨였다. 이들은 도로를 봉쇄하고 라디오에서 원색적인 방송을 하며 가택수색으로 투치족을 찾아냈다.

학살을 중단하려는 국제 사회의 도움은 전무했다. 유엔과 벨기에의 군대가 르완다에 주둔해 있었지만 유엔 사절단에게 참전 의무는 없었다. 벨기에와 대부분의 유엔 평화유지군은 철수했다.

우간다의 지원을 받은 르완다 애국전선이 수도 키갈리로 진격했다. 약 2백만명의 후투족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도망쳤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수천 명의 후투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으나, 이를 부인했다.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후투족 십여 명이 집단 학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르완다 내 지방 법원에서는 수십만 명이 재판을 받았다.[BBC 뉴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