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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제 민주주의 원리와 운영 목표 본문
민주주의의 양대 유형: 다수제와 합의제 민주주의
말뜻 그대로라면, 민주주의는 국가가 그 ‘주인’인 시민의 뜻과 선호에 따라 운영되는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뜻과 선호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주인들 간의 선호는 서로 다르기 마련이고 그 선호의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데 어떻게 국가를 (파악 자체가 불가능한) 주인의 뜻에 따라 운영해갈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의 이상에 근접할 수 있는 규칙이나 절차 혹은 제도를 만들어 그것들에 의해 국정을 운영해가는 정치체제인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의 문제란 결국 절차와 제도 디자인의 문제일 뿐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정치제도와 절차는 나라마다 다를 것이므로 (절차적)민주주의의 유형을 분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레이파트(Arend Lijphart)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그 제도 디자인의 내용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나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이 택하고 있는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선진국가가 운영 중인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이다.
레이파트는 그 두 유형의 민주주의를 10대 특성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소위 ‘3대 정치제도’에서 나타난다. 우선 선거제도이다.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대표제 혹은 다수결형 선거제도를 통해 의회를 구성한다. 예컨대, 그 전형인 소선거구 1위대표제의 경우 지역구 득표율 1위에 오른 후보만이 그 지역민 전체를 대표하여 의회에 진출한다. 2위 이하의 후보들에게 던져진 표는 모두 사표(死票)로 처리될 뿐이다. 여기서는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에 ‘비례성’(proportionality)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를 채택한다. 유권자들은 기본적으로 개별 후보가 아닌 정당에 대하여 투표한다. 각 정당의 전국 득표율이 산출되면 그것에 비례하여 의석을 나누는 것이다. 1등을 뽑는 게 아니니, 크든 작든 모든 정당이 각자 시민들로부터 받은 지지만큼의 대표권 혹은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특성은 정당체계에서 나타나는 바, 이것은 선거제도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소선거구 1위대표제에서는 선거를 거듭 치를수록 지역구 1등을 양산해낼 수 있는 인적, 물적, 지역적 자산이 풍부한 거대 정당들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군소정당들은 탈락하게 되어 있다. 종국엔 거대 양당 중심의 양당제가 확립된다는 것이다. 반면, 비례대표제에서는 모든 정당들이 등수 혹은 승패에 관계없이 자신들이 획득한 지지율만큼의 의석을 배정받게 되므로 다양한 사회 세력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이 원내에 진입하게 된다. 다당제의 발전은 당연한 귀결이다.
세 번째 특성인 행정부 형태의 차이도 선거제도 및 정당체계와 연관된다. 소선거구 1위대표제로 양당제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과 같은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행정부 형태는 단일정당정부이다. 선거경쟁이 주로 거대 정당 둘 사이에서 벌어질 경우 어느 한 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수상 선출을 포함한 정부구성 권한이 의회에 있는 의원내각제에서라면 의례히 그 다수당이 단독으로 행정부를 구성한다. 한편, 대륙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서 보듯 합의제 민주주의의 행정부는 전형적으로 연립정부이다. 셋 이상의 유력 정당들이 비례대표제로 의석을 나누는 환경에서 어느 한 정당이 총의석의 과반을 차지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따라서 단일 정당에 의한 행정부 구성은 드문 경우이고,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정책기조 등이 서로 다른 여러 정당들이 연립정부를 맺는 것이 통상적이게 마련이다. 즉 합의제 민주주의는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등의 정치제도 환경에 의해 제도적으로 강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유형을 결정하는 가장 기초적인 정치제도는 선거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 34개 회원국 중 다수제 민주주의의 전형적 선거제도인 상대다수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한국 등 대여섯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합의제 민주주의의 전형인 비례대표제 혹은 비례성이 상당히 보장되는 혼합형 선거제도를 택하고 있다. 사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상당수의 대륙 유럽 국가들 역시 다수대표제 등 영국식 경향이 강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둘씩 합의제 민주주의로 전환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럽을 중심으로 선진국 민주주의의 표준이 합의제 민주주의로 수렴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도 이 같은 전환은 이루어졌다. 영국의 원형보다도 다수제적 성격이 더 강한 민주주의를 운영한다고 평가받아오던 뉴질랜드가 1993년 소선거구 1위대표제를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전격 대체하였고, 그 후 다당제-연립정부 형태의 국가로 변모해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엔 캐나다에서도 뉴질랜드를 본받아 전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초정파적 개혁운동이 부쩍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사실은 다수제 민주주의의 원조 국가인 영국에서조차 1970년대 초반 이후 줄곧 비례대표제 도입 요구가 증대돼왔다. 1970년대 중반에는 북아일랜드의 모든 지방선거를 비례대표제로 치르기로 결정하였고, 그 후 다른 여러 곳에서도 지방선거는 비례대표제로 치러지고 있다. 또한 1999년부터 유럽의회의 영국의원은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발되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엔 영국의 중앙정치 차원에서도 대기업과 자민당 그리고 노동당의 개혁파 등이 주도하는 선거제도 개혁운동이 본격화되어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 정교한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의회 ©EP
이 같이 다수제 민주주의가 쇠락하고 합의제 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다수제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심각한 문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수제 민주주의와 ‘배제의 정치’
다수제 민주주의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승자독식’ 또는 ‘패자전몰’ 제도라는 것인데, 다수제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인들은 의회에서 다수당 지위를 차지한 단일 정당에게 정치권력을 몰아주면 임기 동안 그 정당이 자율성과 책임성을 갖고 효율적으로 국정 운영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효율적인 국정 운영이란 결국 정치권력을 차지한 다수당이 민주국가의 주인인 시민의 뜻을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구현해가는 것을 의미하는 바, 이때 선된다. 즉 ‘배제의 정치’가 다수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는 것이다.
소수가 배제되고 무시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많은 경우 오히려 실질적인 다수가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33%의 득표율로 1위에 당선된 지역구 국회의원은 사실 67%의 선거구민이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지역 대표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33%의 소수만을 대표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지역구 정치에서는 오히려 67%의 다수가 배제되거나 소외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 지역구의 대표권을 오직 그 소수대표자 한 사람이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 정교한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의회 ©EP
국회의 과반의석을 차지한 단일 다수당이 이러한 소수대표 의원들로 구성돼 있을 경우, 이 당은 이른바 ‘제조된’(manufactured) 다수당일 뿐이다. 그 당의 상당수 의원들은 사실상 소수파를 대표할 뿐인며 따라서 그 당은 소수 대표 정당일 뿐인데, 지역구 1등이 많은 까닭에 50%가 넘는 국회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다수당 지위를 ‘억지로’ 갖게 되어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50% 이하의 득표율로 당선된 대통령이 행정부를 장악할 경우에도 이 소수대표의 문제가 발생한다.
의회 및 행정부의 구성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소수대표의 문제 혹은 불비례성의 문제는 자칫 사회통합의 위기로도 이어질 수 있다. 비록 소수대표일지라도 일단 합법적으로 정부를 장악한 정치세력은 승자독식 제도의 특성을 활용하여 독선, 독주, 심지어는 독재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갈 수 있다. 이 경우 다 합치면 다수가 될 여러 소수파 그룹들이 정치과정과 그 과실 분배 과정에서 소외됨으로써 사회 혼란과 정치 불안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배제의 정치가, 그것도 특정 소수의 이익을 위해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배제하는 ‘일방 폭주’의 정치가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와 포괄의 정치
비례대표제와 다당제의 정착으로 인해 단일 정당에 의한 권력독식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그리하여 여러 정당들이 정치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는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 간의 상호 의존과 협력이 불가피하며 따라서 정치과정은 양보와 타협에 의해 진행되기 마련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당연히 다수제 민주주의보다는 이러한 합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잘 보장된다.
합의제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는 ‘사회적 자유’의 충만함으로 이어지곤 한다. 사회적 자유는 가난, 실업, 공공재 부족 등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합의제 민주주의에선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를 십분 활용하여 사회정책 및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주로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당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따라서 국가의 분배 및 재분배 정책 강화를 스스로 견인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제 민주국가들보다 합의제 민주국가들에서의 경제적 불평등 정도가 덜하고, 복 지수준이 더 높으며, 약자나 소수자 배려가 더 철저하다는 것, 그리하여 합의제 민주 주의가 다수제 민주주의보다 사회통합 측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실증 연구에 의해서 도 충분히 검증된 사실이다. 특히 조세나 복지정책 등을 통한 합의제 민주정부의 재분배 수행능력은 다수제 정부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가 복지 및 분배친화적 민주체제라고 한다면, 다수제 민주주의는 시장 및 경쟁친화적 민주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합의제 국가들이 다수제 국가들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과 같이 경제민주화와 보편주의 복지국가 건설에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들은 모두 비례대표제 국가들이며, 모두가 다당제 국가들이며, 모두가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와 같이 연립정부가 기본인 합의제형 권력구조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협치 혹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구조화된 현대식 다당제의 정립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다. 연립정부 형태의 권력구조가 확립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일 역시 필수적인 과제이다. 물론 대통령중심제에서도 연립정부의 형성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지 사람변수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터라 불안정하다. 선거제도의 개혁과 권력구조 개헌이 하나의 패키지 작업으로 동시에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이유이다.
글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eacommunity@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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