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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미국의 청탁으로 일본군과 전투, '한반도 해방'에 큰 공헌"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소련군 미국의 청탁으로 일본군과 전투, '한반도 해방'에 큰 공헌"

CIA Bear 허관(許灌) 2015. 8. 15. 19:53

 

8월 15일 한국, 북한에서 각각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해방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이 날은 과거 소련 붉은군대에 있어서도 의미 깊은 날이다. 1945년 8월 독일과의 전쟁으로 수백 만의 아들, 딸들을 잃고 초토화된 구소련은 연합군의 청탁으로 새로운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 마지막 잔영을 초토화하고 극동 지역국들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유를 안겨줄 새 전투에 참전했다.

일본 관동군을 맞이해 소련군 다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만주전에서 일본 지상군을 무릎 끓리며 소련군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 의지를 꺽은 채 한국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과 냉전은 일련의 스테레오칩을 만들며 심지어 역사적 진실마저 왜곡시켰다. 한반도 해방에 소련군이 세운 공헌 대해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 한국센터장이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공개했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고 무조건 항복 협정에 서명한 이후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종식과 일본 군국주의를 파멸하고 한반도를 해방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소련군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설이 해마다 한국 언론에 돌고 있다.

소련이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척한 상황'을 마치 이용해 손쉽게 극동 지역 파이 조각을 취하려 한다는 이 분명치 않은 역사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소련군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항복시키는데 보다 큰 희생이 치러질거라는 계산을 미리 했다'고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말한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가 만주,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들을 집결시킬 경우 전쟁이 1년 더 소요될거라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 상륙시 100만 여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예상됐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국제 정상들의 서신왕래 내용안에도 엿볼 수 있다. 이외 다른 설들은 거짓이다. 그 어떤 역사적 근거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70주년 승전과 관련해 또 다른 역사 해석이 있다. 한반도 해방과 분단을 묶으려는 시도로 역사적 사실과 그 관련 증거 문서들은 이 해석이 거짓된 논제임을 말해 준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전문가와의 2차 인터뷰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

 

 

 

8월 13일 소련군 한반도서 일본군 패배 결정적 역할한 청진상륙작전 실시

1945년 8월 13일 이반 유마셰프 사령관 지휘 아래 태평양 함대 소일 전쟁 가운데 '청진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한반도 북부 연안 정친시에 소재한 일본 해군 기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 기지를 진면 일본 제국 육군 주력 부대 가운데 하나인 관동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둔지에는 중위인 소키티 니시바키와 케이사쿠 무라카미가 지휘하는 해군 기지 3개 부대 등 일본 군 4천명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소련 태평양 함대 해병대는 바실리 투루신 13 여단장 바실리 투루신 소좌 지휘 아래 작전을 실시했다. 배로부터의 상륙은 스투제니치니코프 군 중좌가 지도했다.  

상륙 및 화륙 지원에는 12척의 상륙함 7척의 원양 구축함, 기뢰 부설함, 8척의 순찰함, 6척의 잠수함 보트와 18척의 어뢰 보트가 작전에 참여했다. 상공에서는 태평양함대 해군의 250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지원했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선봉 부대의 상륙과 어뢰 보트는 적들에게 뜻밖이었다.  상륙 작전 첫 째날 항구에서는 상륙 작전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도시 구역으로 바짝 다가섰다. 8월 14일과 15일 청진 항구에는 2개 대대 6천 여 명 이상의 주요 육전 부대원들이 상륙했다.

 

이반 치스치코프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1 극동전선 25여 군부대가 도시로 다가갔다. 이들은 이 시각 청진 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 육전대를 지원했으며 해군 기지를 장악했다. 그리고 작전은 끝났다. 관동군은 붉은 군대에 맞서 방어 조직 구성을 위해 병력을 철수하며 일본섬을 차단했다. 

청진를 점령하는 가운데 500여 일본국이 사망했으며 2,500명이 포로가 됐다. 소련 해병대의 경우 300명이 사망했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던 이유는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소련에 내주지 않으려는 속셈에서였다"

올해면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70주년이다. 미국은 전쟁 범죄로 간주되는 행위에 대해 아직도 사과하지 않았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핵폭탄 투하로 일본의 항복을 재촉하고 미국군과 평화적인 일본인들 수십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예를 들어 일본계 미국인 역사가 츠요시 하세가와는 이 문제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일본연구센터장 발레리 키스타노프는 지적하고 있다:

"Racing the Enemy라는 자신의 책에서 츠요시 하세가와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적으로 항복하도록 한 것은 핵폭탄이 아니라 소련의 전쟁 개입이었다고 결론 맺었다. 일본이 미국과의 회담에서 수용할만한 조건 하에서 항복하려고 누구보다 소련을 중재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그러나, 소련의 전쟁 개입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런던의 왕립군사박물관 역사가인 케리 체맨은 원폭 투하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에서 14만명, 나가사키에서 8만명이 사망했으며, 일본 군사지휘부는 만주와 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연맹군들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곳에는 강하고 잘 훈련받은 관동군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자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소련의 전쟁 개입과 만주 침략은 허사가 됐다. 학자들은 그 당시 핵폭탄 투하의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 밖에도 태평양함대 사령관 같은 일부 미국 장군들은 1945년 핵폭탄 투하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먼과 그의 고문들은 일본 두 개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하겠다고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트루먼과 그의 고문들은 일본의 강제 항복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의 징후가 처음 나타났다. 2차 세계대전 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폭탄은 '냉전'의 첫 작전이었다고 발레리 키스타노프는 말한다:

"원폭 투하는 현재 미국의 병기고에 전례없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소련에 보여주고자 하는 주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6월 2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의 최근 기사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승인한 트루먼 대통령의 이런 동기를 확인해 주고 있다. 아사히 신문에 쿠즈닉 미국 과학자의 인터뷰가 게재되어 있다. 기자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원폭 투하의 실제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트루먼 대통령은 러시아가 전쟁에 참여하고 미국이 얄타 회담에서 약속한 양보를 얻어 내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원했다는 것이 과학자의 결론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얄타 회담의 결과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전체가 구소련에 복귀되어야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하는 경우 스탈린에게 사할린이나 쿠릴 열도를 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폭 투하 이후 조차도 일본 군부는 전쟁을 계속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 조차도 원폭 투하가 일본에게 투하되는 마지막 폭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구소련이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에서 전쟁을 시작한 후에도 일본은 항복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보관된 문서들이 공개될 때 객관적인 관점이 보다 폭넓게 대중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과 여러 국가들에게 대중적이 될 것이다."

 

전쟁 후 일본은 오랫동안 사실상 미국의 점령 하에 있었으며, 경제적 예속 하에 있었다. 미국은 전쟁 후 서유럽 복구를 위한 마셜 플랜과 유사한 프로그램을 일본을 위해 마련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일본의 경제 기적이 상당 부분 일어나게 됐다. 워싱턴 정부 입장에서 이것은 실제적으로 이타적인 것이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군사 정치 동맹자가 되었다. 이런 여건에서 일본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기억하는 것은 불편한 것이었다. 원폭 투하와 관련한 기념 행사를 진행하면서도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서 누가 이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기억을 점차적으로 지워가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확실히 일본-미국의 관계에 이득이 될 것이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


 일본 식민지 시대 만주국 지도(지금 중국 동북 3성)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미국을 모델로 건설된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의 실험국가였다. 공화제 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오족협화란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일본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협력해서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낙토란 서양의 패도에 반대되는 아시아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왕도라고 해서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한 후 만주국 구상을 계획했다. 국제연맹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창춘인 신징을,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황제는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로 옹립했다. 1932년 9월에 일만의정서를 조인해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4년 9월 제정 수립으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는 군대도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에게 패하는 등 무능력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을 공격(8월 폭풍작전)함으로써 8월 18일 망하였고,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같은 해 11월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소련 붉은군대와 함께 만주국을 점령하고 동북 3성 통치권을 인겨받은 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1차 세계대전(레닌, 전쟁 중립선언과 공산주의 세력 전쟁 불개입선언)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과 동서유럽(동서폴란드) 군사적 점령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 이론: 독일 노동자의 당 히틀러의 나찌즘, 소련 공산당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 소련침공

-1941년 7월 소련과 영국, 반독일전선 구축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반독일전쟁 참여(중국인등 아시아 출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독전쟁 참여)

-일본의 소련과 외몽골 침공

1938년 7월 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년 5월 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이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으로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의 식민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가 대통령직은 승계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 28일에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틀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대제독 칼 되니츠가 총리를 승계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 4월 29일에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문서5월 7일 랭스에서 서명되었고, 5월 8일(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에 베를린에 비준되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5월 11일 프라하 공세까지 저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군은 1945년 4월 말까지 필리핀에서 필리핀 전투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다. 1945년 1월 루존 상륙과 3월에는 마닐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루존에서 계속되었으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다른 섬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저항했다.

1945년 5월, 호주군은 보르네오 전투를 시작하며 섬을 점령했다. 영국, 미국, 중국은 북부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5월 23일에는 영국군이 양곤을 점령했다 중국은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서후난 전투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월에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6월 말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군의 폭격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고, 미군 잠수함은 봉쇄 조치를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연합군의 지도자가 포츠담 회담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전 회담의 협정을 확인하고,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대안은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 중에 영국은 선거를 시작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며, 미국은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 폭탄을 투하한다. 두 폭탄이 터진 사이, 소련군은 얄타 회담의 조건에 따라 8월 폭풍 작전으로 만주로 진격하며 관동군을 항복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청진 등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다. 또한, 소련군은 사할린 섬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미군 전함 USS 미주리 (BB-63)에 서명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 또는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은 일본 제국미국하와이를 공격할 때에 소비에트 연방이 중립을 지키자는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소비에트 연방포츠담 회담에서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하고 8월 8일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함으로써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소련과 일본간의 중요한 외교조약. 정책조정과 정보교환의 실패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추축국과 동맹국들사이에서 특징적인 것이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을 때,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1941년 3월에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소련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 알려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도쿄로의 귀국길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을 성립시켰다. 이 조약은 상대국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각국이 제3국과 적대관계에 돌입할 경우에 중립을 보장했다. 이같은 합의는 심오한 결과를 초래했고,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의 중립을 가져왔던 것이다. 조약은 5년동안 유효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5년 후 추가로 5년동안 자동연장될 것이었다.


1939년 이래, 일본은 소련과의 타협을 추진해 왔고, 이는 중국 정복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측이 먼저 1940년 5월, 6월에 불가침조약을 제안했고, 당시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로의 진출을 고민하던 때였고, 이를 위해서 소련의 중립이 중요했다.


일본과 소련의 협상은 1940년 8월에 시작되었다. 협상과정에서, 소련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고, 불가침조약 대신에 중립협정을 제안했고, 이는 서양열강과의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면, 일본은 남방진출이라는 자신의 공공연한 야망을 드러내면서,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모델로 삼은 보다 구속력있는 조약을 제안했던 것이다. 일본측 안은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의 내용과 유사했고, 소련이 내몽고와 만주국을 포함하는 중국 북부의 3성에서 일본의 전통적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답례로, 일본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이란)으로의 소련의 진출을 지지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 4월의 일소중립조약은 남동 태평양으로의 일본의 진출과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 스탈린의 대일정책은 1941년 6월 이전의 그의 독일에 대한 입장과 유사했다. 그는 극동의 소련군 장군들에게 만주와 몽고 국경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공격을 한다면,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북쪽으로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41년 가을 소련 침공을 심사숙고 했다. 특히 만주의 관동군 지휘부는 이를 지지했지만,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유럽열강의 일시적 쇠약이라는 권력의 공백상태를 이용하는, 남방진출을 선호했다. 일본은 노몬한사건이라는 소련과의 과거의 충돌 결과, 시베리아의 험악한 날씨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석유와 고무라는 당시 일본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로한 자원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941년의 일소중립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만약 독일과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협력했다면, 소련이 패배했을지도 모르고, 추축국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중립 덕분에, 소련의 극동지역은 소련의 서부전선에 1941년과 1944년 사이에 25만명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약은 또한 소련이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일본도 이 조약을 통해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과의 전쟁 동안,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4천만톤의 석탄, 1억4천만톤의 목재, 5천만톤의 철, 천만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과의 무역이 미국과의 일본의 전쟁을 도왔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1945년,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했다.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그의 서양 동맹국들에게 극동에서의 영토적 양보의 대가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2-3개월안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동참할 것이라 약속했다. 유럽에서 승리를 거둔지 3달 후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소련 대일전 참전

소련 대일전 참전이란 소련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일본 제국과의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8월 9일 일본 제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을 말한다. 소련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소련얄타 회담을 통해 8월 초 일본 제국과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를 하여 일본 제국소련의 전쟁이 만주국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서 사할린 섬도 탈환하였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대일 참전에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연합국들의 채근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주 전의 포츠담 선언(45년 7월26일)에서도 빠졌다. 41년 일본과 체결한 중립(불가침) 조약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다.

그러나 수면 아래서는 계속해서 대일 참전의 실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훗카이도(北海道) 분할 통치를 대일 참전의 요구 조건으로 내세우는 등 전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최대한 몸값을 높이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 결정적으로 일본의 패망을 앞당기자 허겁지겁 일본에 선전 포고한 것이다. 결국 소련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지 이틀 뒤인 45년 오늘 부랴부랴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포츠담 선언에 합류했다. 일주일 뒤 히로히토(裕仁)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나왔다. 원자 폭탄 투하 뒤 미국은 소련의 홋카이도 분할 통치론을 묵살하고 나섰다. 결국 그들이 분할한 곳은 패전국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한반도였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일주일만 빨리 나왔어도 한반도의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대목이다.

만주국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을 멸망시켰고 8월 9일에는 북한의 웅기, 나진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8월 11일에 점령하였다. 이후 남진을 계속하면서 8월 13일에 청진으로 진출하였다.그리고 일본 제국이 8월 15일에 정식으로 항복함으로써 조선은 해방되었다 소련은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에도 8월 16일이 돼서야 청진을 점령하였으며 유일하게 조선정상진이 소련 군인으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반면 일본 제국만주국소련에게 내주어야 했고 이어 소련의 계속된 남진을 하여 일본군 무장 해제로 조선의 북쪽에서도 후퇴해야 했다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

 

8월 폭풍 작전

 

 

 

8월 폭풍 작전 또는 만주 전투(작전)(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 連対日参戦 (れんたいにちさんせん))는 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으며, 소비에트 연방만주국을 멸망시켰고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 등을 일본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만들었다. 소련군은 만주38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몽강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모스크바 표준시로 5월 9일 0시 43분)에서 3개월이 지난 8월 9일에 이루어졌다. 8월 6일 히로시마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만 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1.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년 4월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년 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백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8월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을 부여했다. 그러나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월 8일 오후 5시(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으로는 오후 11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월 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2.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중 25개 사단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750,000명에 이르는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27,000,000 명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대싱안링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제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3.소련군의 공격 준비

 스탈린만주 공격을 위한 총 책임자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소련군은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전략방면군을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는 바실렙스키가 취임했다.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제1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제2극동전선군에는 전 칼리닌전선군 사령관푸르카예프 상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년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4.8월 폭풍작전 전개와 결과

소련군은 블라디보스토크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제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월 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월 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으며, 한반도에서도 8월 8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월 11일 웅기(선봉)를 시작으로, 8월 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월 13일에는 청진으로 진출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어 8월 16일이 돼서야 점령했고 조선정상진소련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맞서싸웠다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시(8월 23일 진주, 9월 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철수)와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괴뢰 국가만주국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뤼순(大連)의 해군 기지를 점령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장병들 모습

 

몽강연합자치정부(중국어: 蒙疆聯合自治政府, 병음: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 또는 몽강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몽강국은 당시 만주국 챠하 주와 수이유엔 주를 통치 범위로 했으며, 수도는 장자커우였다

내몽골 독립 운동가인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덕왕)에 의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蒙古軍政府)로써 수립되었고, 1937년 10월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盟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뒤에 1939년 9월 1일에 다시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개칭한다. 그러나 뎀치그돈로프(덕왕)는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인물로,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 괴뢰국이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덕왕만주국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멸망, 현재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약간의 대포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전차나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소총 등의 총류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마민족인 만큼 기병대가 많이 있었다

 

 

                                                                                                 몽강국(내몽골 자치구)

쿠릴 열도 상륙 작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영어: Invasion of the Kuril Islands, Kuril Islands Landing Operatio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소련군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쿠릴 열도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쿠릴 열도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쿠릴 열도

 

웅기 상륙 작전

 

웅기 상륙 작전(러시아어: Десант в порт Юки)은 제2차 세계 대전 소련 태평양 함대가 일제 강점기 조선 선봉군의 항구 지역에 펼친 상륙 작전이다.

소비에트 연방군은 1 극동전선군에 편재되어 있는 지휘관 키릴 메레츠코프 하의 25 군에게 현재 소개 작전을 하고 있는 일본군의 한반도 해안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초기 국경 공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일본군의 반격 시도를 막기 위해 한반도의 북부에 있는 항구에 대해 일련의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상륙 작전은 제독 이반 스테파노비치 유마셰프가 맡게 되었다. 첫 번째 상륙 지점은 소련 국경 지역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인 웅기군이었으며, 이후 목표 지점은 나선청진 지역이었다.

8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소련 항공군과 어뢰 보트가 항구를 폭격하기 시작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결과에 따르면 최대 12척의 선박이 침몰하고 방공 및 항만 시설이 무력화되었다. 8월 11일에는 육군 병력이 웅기군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을 위해 13 해병 여단이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서 정찰대와 75개 대대로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해군 병력으로는 미국에서 랜드리스로 공수한 프리킷함 2척과 부설정 2척이 있었다. 이 해군 병력들은 제독 이바노프가 지휘했다

소비에트 연방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후, 8월 13일에 청진시를 폭격하면서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일본군 나남사단이 기다리고 있어서 소비에트 연방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소비에트 연방은 끝내 8월 15일 이후에도 끝내 청진시를 해방시키지는 못하고 최소 8월 16일에 돼서야 청진시를 해방시켰다

 

다운폴 작전

다운폴 작전(영어: Operation Downfall)은, 연합국일본 제국 내지를 침공하기 위한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이 계획은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 폭탄 투하일본의 항복, 8월 폭풍 작전으로 인한 소련의 침공으로 중단되었다. 이 작전은 올림픽과 코로넷으로 나뉘었다. 1945년 8월에 시작하는 이 작전은 올림픽은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일본 남부의 규슈 섬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그 후, 1946년 봄의 코로넷 작전은 혼슈 섬도쿄 근처 간토 평야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다. 올림픽 작전에서 점령된 규슈 섬의 토지를 이용해 공중 지원을 하기로 예정되었다.

일본의 지리뿐 아니라, 일본 침략 계획은 매우 명로하여 그들은 정확하게 연합군의 침공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케수고 작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일본인은 규슈 점령 후, 작은 구역에서 방어 계획을 세웠다. 사상자 예측은 광범위하지만, 일본 민간인의 저항 정도에 따라서 예측은 연합군 사망자가 수백만 명으로 예측되고, 그리고 일본인 사망자도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될 것이었다.

 

다운폴 작전의 계획도. 규슈에서의 작전은 올림픽 작전, 혼슈에서의 작전은 코로넷 작전으로 불렸다[올림픽 작전 - 1945년 8월 예정. 코로넷 작전 - 1946년 3-4월 예정 (일본 항복으로 인해 취소)]

1.다운폴 작전 계획

다운폴 작전(Operation Downfall)의 미군 지휘관 책임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제독 체스터 니미츠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제독 어니스트 킹, 윌리엄 다니엘 레이히와 육군 장군 조지 마셜, 미국 육군 항공대핸리 H. 아놀드였다. 당당시 더글러스 맥아더는 당시 총 군대의 장군들 중 5성급의 장군들 위에서 작전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특별 "최고 등급"에 승진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를 승진시키려는 이 제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비공식적인 논의의 수준일 뿐이었다.

당시,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은 고위 관료 몇몇만 알고 있는 최고 비밀로써 일본 침략 초기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원자 폭탄이 일단 사용이 가능해지고 충분한 병력을 생산할 수 있다면, 마셜 장군은 침공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려고 하였다.

태평양 전쟁 전반에 걸쳐, 유럽 전역과 달리 연합군은 총사령관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지역별로 나뉘었는데, 예를 들어 1945년에 체스터 니미츠는 연합군 C-C 태평양 지역이었고, 더글라스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지역이었다. 통일된 명령은 일본 침공을 위해 필요했다. 군간 알력은(미국 해군은 니미츠를 원했지만 실제로는 맥아더가 지휘) 계획에 참견을 하고 위협적으로 심각했다. 궁극적으로, 해군은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상황적으로 필요할 때 맥아더가 지휘를 하게 하였다

(1)고려상황

계획자가 생각해야 하는 고려 사항은 시간과 연합군의 사상자, 그리고 빠른 일본 항복 유무였다. 이전의 1943년 퀘백 회의에서, 영미 공통 기획팀은 일본 본토 침략을 가정("일본 패배에 대한 이해와 계획")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연락도 하지 않았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전쟁을 연장하는 것은 국민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대신, 퀘백 회의에서 연합참모진독일 항복 이후 하나 이상의 항복 강요 작전에 대해 합의했다.

미국 해군과 공군은 일본에 대한 봉쇄로 항복을 촉구했다. 그는 인근의 조선이나 상하이 등을 점령하여 항공 기지로 이용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며, 미국 육군 항공대는 일본에게 폭격 예정지 전단을 내렸다. 반면, 미군은 침공을 하지 않는 이러한 전략은 '무한정 전쟁을 연장'하며 불필요한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해군이 제안하는 측면 공격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 본토로부터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궁극적으로, 육군 관점이 승리했다.

육체적으로, 일본 본토로의 위풍당당한 목표를 제시하고, 바다를 매개로 한 침공에 유용한 해변을 지정했다. 단, 규슈 섬(일본 최남단 섬)과 간토 지방의 해변(서남과 동남이 도쿄와 맞닿음)은 현실적인 침공 지역이었다. 연합군은 2단계로 침공을 계획했다. 올림픽 작전은 규슈 섬을 침공하는 작전이었다. 항공 기지 설립 후 항공기의 영역이 닿으면, 코로넷 작전으로 도쿄 만을 침공하는 작전이었다.

(2)가정

일본의 지형이 알려졌지만, 미군 계획자들은 그들은 옹호 세력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5년 초, 그들은 모든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음 가정을 주장했다

  • "점령 작전은 제국의 가용 군사력 뿐 아니라, 열광적인 적대적 시민들에 의한 저항에 부딪친다."
  • "올림픽 작전 시행시, 남부 규슈에서의 3개 사단과, 북부 규슈에서의 3개 사단에 맞닥게 된다."
  • "규슈에서의 작전에서, 총 적대 세력은 10사단을 넘지 않으며, 이 수준은 신속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 "코로넷 작전 시행시, 도쿄 근처에서 약 21개 사단과 관동 평야에서 약 14사단과 충돌하게 된다."
  • "적군은 우리의 중화기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아시아 본토에서의 공군을 차출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 2천대에서 2,500대의 항공기 차출이 예상되는데, 이 상황에서 규슈에서 맞설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

(2)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

 

                                                                                올림픽 작전은 일본 규슈 남부 공격 작전이었다

규슈 섬을 침공하는 올림픽 작전은, X-데이라고 불리며 1945년 11월 1일 예정되었다. 통합 연합군 해군 함대를 포함하여, 42척의 항공 모함, 24척의 전함, 400척의 구축함과 호위함으로 구성되었다. 14개의 미군 사단이 초기 상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준비 거점으로는 오키니와를 사용하며, 목적은 규슈 남부 점령이었다. 이 일대는 나중에 코로넷 작전에서 이용할 거점이 될 것이었다.

올림픽 작전에는 파스텔 작전이라는 이름의 기만 작전도 포함되었다. 파스텔 작전은 일본의 참모 총장을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직접적인 침략 작전 대신 일본을 에워싸여 포격 작전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것은 타이완 섬, 중국 연안, 황해의 기지 점령이 필요했다.

제 21 공군의 역할은 주요 연합군으로서 일본 본토를 전략 폭격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전술 항공 지원은 극동 항공군 (미국)(FEAF)가 시행하여 제5 항공 부대, 제7 항공 부대, 제13 항공 부대가 시행할 예정이었다. FEAR는 큐슈와 혼슈 남부에서 일본 비행장과 주요 교통로(예:간몬 터널)을 폭격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주요 침공 X-5일에, 다네가 섬, 야쿠 섬, 고시키지마 열도 등 주요 연안 섬 점령을 시작해야 했다. 오키니와 점령은, 본토에서 가까운 정박지 수립의 가치를 증명하고 상륙 해변으로의 수송과 공중 폭격 후 손상된 병력 수송을 위해 중요했다.

큐슈 공세에서, 미 제6군미야자키 시, 아리아케 시, 구시키노 시 등 이 세개가 목표 지점으로 설정되었다. 만약 큐슈 공세가 시작되면, 이 지점에서 4-5시에 시작되어 7시까지 끝마칠 것이다. 오스틴, 뷰익, 캐딜락 회사들을 통해 스튜드 베어켓을, 윈톤을 통해 링컨-제퍼를 수급받아 35개의 상륙 장갑차를 사용했다. 각 상륙에 할당된 군단들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군사력 비는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되었다. 1945년 초, 근처 항구 아리아케가 방어되는 동안 미야자키는 거의 방비 상태에 있었다. 구시키노가 약하게 추천되었지만, 미국 해병대는 지형 특성 때문에 그 곳으로부터의 상륙은 거부되었다.

침공의 목표는 섬 전체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섬의 3분의 1이며 지도에서의 점선과 같이 "제한되어 있었다". 남부 규슈는 코로넷 작전에 필요한 준비와 운영에 중요한 기지를 제공할 것이었다.

 

 

(3)파스텔 작전(Operation Pastel)

올림픽 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작전이었으며, 약 8만의 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것으로서 대규모 작전계획이었다

(4)코로넷 작전(Operation Coronet)

 

                                                              코로넷 작전은 도쿄를 포함한 간토 평야 점령 작전이었다

혼슈 섬과 간토 평야를 침공하는 코로넷 작전Y-데이라고 불리며 1946년 3월 1일 시작 예정이었다. 코로넷은 초기 점령을 위한 25개 사단과 그 때 당시 가장 큰 상륙작전이 일어날 예정이었으며, 초기 점령이 목적이었다. (오버로드 작전 당시에 비교하여, 그 때는 12개 사단이 상륙했었다.) 미국 제1군보소 반도쿠주쿠리 해변으로 상륙하고, 미국 제8군히라쓰카 시사가미 만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두 군대는 북쪽의 내륙인 도쿄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5)이동

올림픽 작전은 태평양의 거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었으며, 영국 연방영국 태평양 함대를 포함하여 18척의 항공 모함(연합군 공군 전력의 25%)과 4척의 전함을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필리핀 전역오스트레일리아 제1 전술 공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군에게 일본 전역에서의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맡았다. 올림픽 작전을 위해 타이거 군은 긴 범위의 중폭격기로 구성되어 10편대로 유럽의 RAF 폭격 분대에서 오키니와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만약 올림픽 작전에서 증원이 필요하면 코로넷 작전에서의 병력을 이용할 수 있었고, 유럽, 남아시아, 호주에서의 병력으로 재배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제1군(15사단)과 미국 제8 공군은 유럽에 있었다. 미군의 재배치는 미국에서의 동원 해제로 인해 복잡해져서, 이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군인과 장교가 전역함에 따라 사단의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레이 스케이트에 의하면:

미국의 계획은 미군이 아닌 연합군의 육군은 관동 평야에 대한 침공 참여 가능성이 없었다. 이 계획에서 모든 전투, 예비 병력, 추가 증원은 모두 미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코로넷 작전의 계획은 1945년 끝여름으로 예상되고, 모든 주요 연합군은 병력을 제공하고 여러 토론에서 크기, 임무, 장비 등은 이들을 지원하고도 남을 정도의 높은 수준이었다.

호주 정부는 호주 육군의 1개 사단을 올림픽 작전에 지원하려 하였으나, 미국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서방 연합군 간의 협상에 따라, 코로넷 작전에서 호주 보병 부대와 영국 육군, 캐나다 육군으로 이루어진 영국연방 군단이 지원하기로 하였다. 지원팀에는 이 나라 뿐 아니라 다른 영국 연방 국가도 속해 있었다. 때문에 맥아더 장군은 언어, 조직, 구성, 장비, 훈련, 교리의 차이로 영국령 인도군을 제외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군단은 미국 군단의 지휘하에 있어야 하며 오직 미국 장비 및 군수품을 이용해야 하고, 작전 시행 6개월 전에 미국에서 훈련받는 것을 제안했다. 영국 장교인 대위 찰스 케이틀리는 영국연방 군단을 이끌 지휘관이 되었다. 호주 정부는 그 장교는 일본과의 전투 경험이 없음을 비판하며 장군 중위 레슬리 모르체드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단의 세부 사항이 정해지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2.케츠고(決號, 결호) 작전

한편, 일본도 계획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1945년 여름에 미군의 본토 침공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 후 연합군은 태풍 시기로 인해 수륙 양용 상륙 작전이 위험하다 판단되어 다른 작전을 시행할 수 없었다. 일본은 침공이 일어날 장소로, 남부 규슈의 미야자키 현, 아리아케 해 또는 사쓰마 반도로 예상했다

일본은 더이상 전쟁의 승리에 대한 현실적인 전망이 없었고, 일본의 지도자들은 연합군의 일본 정복 동의는 너무 대가가 크고 휴전보다는 전체적인 패배가 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계획은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으로 "케츠고 작전" (일본어: 決号作戦 (けつごう さくせん)) (작전 암호명 "결정)이었다. 일본군은 비밀리에 나가노 지하 제국 본부에서 연합군의 공격시 천황과 제국 참모 총장이 모여 본부로 쓰게 되었다

(1)가미카제

우가키 마토메 제독은 1945년 2월 소환되어 규슈의 제5 해군 항공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제5 해군 항공대는 오키나와 침공과 관련된 함선에 대한 가미카제 공격인 탱고 작전에 배치되었고, 연합군의 규슈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일본의 방어는 가미카제 공격에 의존했다. 전투기와 폭격기 뿐 아니라, 품질이 나쁜 시험용 비행기도 이용하고 임무를 위해 거의 모든 훈련사가 동행되었다. 육군과 해군이 가진 7월 기준 1만 기의 항공기(10월에도 다소 있었음)는 침공을 위해 거의 모두 동원되었다. 우가키는 또한 규슈 해안 근처에서 연합군 함선을 공격하기 위한 소형 자폭 보트도 수백 척 생산했다.

2천기의 가미카제 전투기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시작하여 9척의 함선을 파손시켰다. 규슈는 더 유리한 상황(예:지형상 미국 레이더 효율 감소)로 인해 그들은 가미카제 공격이 미국 병력의 6분의 1 정도로 방어를 압도할 것이라 예상했다. 일본 항공기는 약 400척 이상의 함선이 좌초될 것이라 예상하고, 그들은 조종사 훈련 이후 표적을 순양함이나 구축함으로 바꾸어 사상자가 오키나와보다 더 컸다. 한 참모의 연구에서, 가미카제는 상륙 전 침공 부대의 절반에서 3분의 1 정도 파괴할 것이라 추정했다

(2)해군

1945년 8월, 일본 제국 해군은 실질적으로 군대가 해체 직전이었다. 남은 이용 가능한 군함이라고는 6척의 항공모함, 4척의 순양함, 1척의 전함만 있었다. 그들은 "20척의 작전 구축함과 40척의 잠수함이 바다에서 몇 일 동안 유지 중"이라고 말한다

해군은 결국 100척의 코루급 소형 특잠수함, 250척의 카이루급 소형 특잠수함, 400척의 가이텐 유인 어뢰, 그리고 800척의 신요를 생산했다.

(3)육군

모든 상륙 작전에서, 수비군은 두 가지 전략이 있는데, 하나는 해변에서의 방어 또는 종심방어이다. 전쟁 초기(타라와 전투의 예)에서는, 일본군은 해변에서의 강력한 방어를 전개했다. 이 전술은 함포사격지원 전술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 후반에, 팔라우 전투, 이오 섬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략을 전환하여 전략적인 위치에 병력을 배치하여 종심 방어를 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규슈의 방어를 위해, 해안에서 미군이 상륙한 후 거점을 만들기 전에 안전한 교두보를 확립하지 못하는 상황의 전진선인 약 몇십 킬로미터 내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반격은 멀리 돌아서 행하며, 주요 활동은 상륙에 대한 준비 이동이었다.

 

1945년 3월, 규슈에서 전투 사령부를 설치했다. 4개월 후, 일본 제국 육군은 만주국, 일본령 조선, 일본 북부 등에서 병력을 징집해 왔다. 8월, 일본군은 총 90만명의 14개 사단과 3 전차 여단을 모집했다. 일본군은 새로운 병사를 징집하기 쉬었으나 그들을 무장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8월에, 일본군은 65만명을 징집하나 충분한 장비는 40만명, 기본적인 무장도 30만명밖에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규슈 전투의 결과에 대해 이해 관계에 모든 결정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거의 그 곳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추정으로, 규슈의 병력은 탄약이 본토에 있는 모든 탄약의 40%가 있었다.

또한, 일본이 주관했던 전투 자원군은 남자 15-60세, 여자 17-40세까지 모집하여 총 280만명을 모았다. 무기, 교육, 훈련은 매우 부족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무강선 머스킷, 장궁, 죽창 등으로 무장했다.

징집되었던 한 고등학생 카사이 유키코는 스크래치 송곳으로 무장하며 "나는 미군을 죽이는 것이 목표다. ...(중략) 나는 복부를 목표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45년 8월 2일 규슈에서의 미군의 일본군 병력 예상도.

 

북한서 한반도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소련 군인을 추모

행사는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러시아 대사, 최고인민회의 상임 부위원장 양형섭, 고두철 부총리 등이 주도했다.

중국, 베트남, 쿠바,이란, 이집트 대사관 대표들도 소련 군인의 메모리 행사에 참석했다. 러시아 대표단에는 또한 연해주 수출개발센터의 대표들도 포함했다.

그 후 1945-1950년 기간 동안 조선 땅에서 사망한 소련 군인과 시민이 묻혀있는 평양의 묘지에 화환을 얹었다.
소련군인기념비는 또한 청진, 해주, 남포, 동님, 신의주, 원산, 함흥과 나선에 설립되었다. 한국의 해방을 위한 전투에서 4700명 이상의 소련 군인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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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 대조국전쟁 북한 참전 용사에 훈장 수여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6일 열린 북한 참전 용사 메달 시상식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전 7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가 상을 수여했다.

이날 시상에서는 북한인민군 리을설 원수를 포함해 7명이 훈장을 받았다. 이들 모두는 1942년부터 1945년 하바롭스크 지역 뱌트스코예 마을에 배치된 소련 제2극동전선군 88독립보병여단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북한 인민무력부 및 외무성 대표들과 북한 기자들이 참석했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


 소련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

 

                                                            중국(장개석정부), 몽강국(내몽골자치구), 만주국, 소비에트 연방(소련), 한반도

1942년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중국 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창설된 군대.[동북항일연군교도려, 88여단, 88특별저격여단]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 만주지역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항일 빨치산 부대를 만들어 저항하였다. 이들 부대는 1936년 3월에 이르러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3개 사단을 두었는데, 그 중 제3사는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였다. 제3사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활동무대도 백두산 부근이었다. 같은 해 7월 항일연군 1, 2군이 통합되어 제1로군이 되었고, 제3사는 제6사가 되었다. 김일성이 이끄는 제6사는 1937년 6월 4일조선의 보천보를 습격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1937년부터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만주의 항일연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940년 초 항일연군 지도부는 소련 측과의 협의를 통해, 소련령으로 들어가는 부대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항일연군은 소련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김일성의 제2방면군(그동안 군제 개편이 되면서 6사는 다시 제2방면군이 되었다)도 소련으로 들어갔다.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으면서도 일본을 견제하고 있던 소련은 자신의 영토에 들어온 항일연군을 적절히 활용할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이들을 주축으로 한 여단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여단 창설이 시작되었고, 9월 15일 완료되었다. 명칭도 88독립보병여단(88여단)으로 확정되었다. 여단은 소련 극동전선군 군사회의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었으며, 여단장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장 저우바오중(周保中)이 맡았다. 참모부장은 소련인 사마르첸코가 맡았고, 예하의 각급 부대장은 조․ 중 빨치산 지휘자들이 맡았다. 부지휘관(부대대장)은 소련군관이 담당하였다. 정치담당 부지휘관도 항일연군 측에서 맡았다. 여단에는 4개의 대대와 독립통신대대, 독립보병대대가 있었고, 1944년에는 자동소총대대가 신설되었다. 자동소총대대는 현지 소수민족들을 포함한 소련인들로 구성되었다. 제1대대는 항일연군 제1로군의 조선인 대원들을 기본으로 구성하였고, 대대장은 김일성이었으며, 안길이 정치담당 부대대장을 맡았다. 최용건은 여단의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소련으로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590명 정도였고, 이들 중 최소 190여 명은 조선인으로 확인되고 있다. 590여 명 중 197명은 소련군 첩보기관으로 파견되었으며, 다수의 여성대원을 포함한 60여 명은 집단 농장으로 갔고, 12명은 휴양소나 병원으로 보내졌다. 이처럼 다른 기관으로 파견된 이들을 제외한 320여 명이 여단에 편재되었고, 그중 조선인은 약 1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88여단의 주요 임무는 소만(蘇滿) 국경지역 정찰이었다.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만주지역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묶어 소규모 빨치산 부대를 창설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에 따라 여단은 소규모 부대를 만주로 파견해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들 사이에 들어가 비밀 조직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전투행위는 최소한의 범위에서만 이루어졌다. 1943년 이후에는 이들 소규모 부대 활동은 급감하였고, 정찰활동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여단의 임무는 일본의 패망이후를 겨냥한 역량 보존에 맞추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단 내에도 중국공산당 조직이 가동되고 있었는데, 1945년 7월 말신동북위원회와 조선공작단으로 재편되었다. 조선공작단의 지휘체계는 김일성이 군사정치, 최용건이 당의 영도, 김책이 두 사람을 지원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해방 후 조선에서의 활동에 맞추어졌다.

1945년 8월 9일소련극동전선군의 전면적인 대일전을 앞두고 여단의 소련국적 대원 344명이 다른 부대로 차출되어 나갔고, 290여 명의 조중 국적의 대원들은 만주지역 정찰업무에 동원되었다. 대일전이 개시되고 난 직후인 8월 11일 여단 주력병력은 참전 대기 명령을 받고 전투준비에 돌입하였지만, 곧이어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실질적인 전투참여는 없었다.

대일전이 종결된 후 여단 병력은 개별적으로 소련군 점령지역의 경무사령부에 배치되었다. 김일성이 이끌고 있던 제1대대 병력도 조선의 38선 이북 각 지역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및 고문으로 47명, 통역 15명, 지역방위 및 기타 기관으로 37명이 배치되었다. 여단의 중요 인물들에게 소련은 적기훈장을 비롯해 1급 조국전쟁 훈장, 2급 조국전쟁 훈장, 붉은별 훈장, 용맹 메달, 전투공훈 메달 등을 수여하였다. 김일성은 “1931∼1940년 만주에서 일본 점령자들과의 투쟁에서 빨치산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소속 부대를 전투 작전에 훌륭히 준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여단장 저우바오중, 참모장 쉬린스끼, 부참모장 최용건 등과 함께 최고훈장인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