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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 폭포와 이명박 대통령과 아웅산 수치여사 만남 모습 본문
이명박 대통령과 아웅산 수치여사 만남 모습(사진)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気色)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取)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김수영의 시 폭포]
one World, one dream, Liberty and Justice enlightening the World"
"Night Watch(intelligence) is Bird's Eye(eye, reading) or(and) Guid(ear, language)"
"世界潮流浩浩, 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中國 國父 孫中山 先生 手記]"
*김수영 [金洙暎]
시인.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본관은 김해.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969년 5월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그의 마지막 시〈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꾀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태도를 잘 보여준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사령 死靈〉 등의 초기시에서는 '느낀다, 생각난다, 본다'와 같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많이 썼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이며 상식적인 태도와 방법을 뛰어넘고자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이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음을 깨달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生硬性)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에 겪어야 했던 방황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1959년에 펴낸 첫 개인시집 〈달나라의 장난〉은 이런 시정신을 잘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시인들 가운데 김춘수와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반시론'(反詩論)에 있다. 그의 반시론은 1960년대 시의 주류인 참여시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시적 경향, 즉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시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에서 과거의 자기를 부정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에서도 일대 변화를 보였다. 그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초월적 태도와 조화의 논리에서 참여적 태도와 분열의 세계관으로 바꾸고, 또 세련된 간접표현 대신 독설과 요설이 뒤섞인 직설법을 쓰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4·19혁명과 그 정신이 퇴색되어간 현실에 있었다. 시 〈사령 死靈〉·〈그 방법을 생각하며〉·〈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에서는 1960년대 현실이 '자유·민주·정의·혁명' 등을 내세웠던 4·19정신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며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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