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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선생 며느리가 전하는 `독립운동의 상처' 본문
강제병합 100주년인 올해 100세가 되는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 서차희 할머니와 이시영 선생의 둘째 아들 이규열 선생의 결혼식 사진. 서 할머니의 막내딸 이재연씨는 "당시 종로구의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부모님의 결혼식 하객만 해도 3천여 명이었고, 축의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이 모였으나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연합뉴스)
"돈을 사랑했으면 으리으리하게 살았을 것이고, 권력을 사랑했으면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고, 대신 얻은 것은 외로움이었다"
28일 독립운동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인 서차희(100) 할머니의 강북구 수유동 자택에서 만난 서 할머니 막내딸 이재원(60.여) 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옛 시절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 선생은 조선시대 명문가의 후손으로, 1910년 국권을 빼앗겼을 때 만주로 망명해 사재를 털어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에 힘쓰는 등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운 서 할머니 대신 그동안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거나 직접 겪은 가족사를 풀어내며 이씨는 금세 옛 기억에 젖어들었다.
서 할머니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이듬해인 1933년 스물 세 살 나이에 이시영 선생의 둘째 아들 이규열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이씨는 종로구의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부모님의 결혼식 하객만 해도 3천여 명이었고, 축의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이 모였으나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때 주례를 독립운동가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이 보셨습니다. 신혼생활을 즐길 새도 없이 혼인 보름 만에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상해로 떠나셔서 할아버지와 각지에 흩어진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일본이 침략 범위를 확산하던 시절 독립운동가 가족의 삶은 어디에서도 평탄치 않았다.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 이후 현지에서 지배력을 키우던 일본군은 수시로 부부를 찾아와 '이시영 선생이 있는 곳을 말하라'며 협박을 일삼았다.
1930년대 후반 둘째 종문씨를 낳으려고 부부는 고국에 돌아왔으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씨는 "귀국 뒤에도 주재소로 끌려가서 온종일 굶는 일이 다반사였고, 가까운 곳에 갈 때도 일본인들이 항상 미행했다고 합니다. 아침을 먹기 전 이미 순사가 집에 찾아와 밥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해방 뒤 이시영 선생이 초대 부통령에 올랐을 때도 일본 강점기 때 재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을 한 터라 형편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이시영 선생의 다른 후손들이 기억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떨까.
이시영 선생 유족회 대표를 맡은 서 할머니의 차남 종문(70)씨는 "워낙 엄하셨고 가족을 살갑게 대하신 적은 없었지만 국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언제나 강조하신 기억은 선명하다"며 "능력과 분수에 맞지 않게 높은 자리에 올라 놀고먹는 것을 특히 비판하셨다"고 할아버지를 기억했다.
3남 종건(66)씨는 "온 가족이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있을 때 손자들이 소란을 피우면 할아버지께선 자신의 방에 불러놓고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담배를 피우셨다. 무릎이 저릴 때쯤 '나가봐라'고 한마디 하셨는데 워낙 무게감이 있어 아무 말 없어도 가족들이 기에 눌렸다"고 말했다.
1952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이시영 선생까지 작고하자 서 할머니는 홀로 힘겹게 다섯 남매를 키워야 했다.
독립유공자의 배우자나 자녀를 우선해 지원하는 현행법상 정부로부터 변변한 도움도 받지 못했고, 최근에야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선정돼 동 주민센터에서 지원하는 생활보조비 등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재원씨는 "과거 어르신들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국가가 지금 우리 가족을 책임지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친일파 재산을 왜 국가가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는지 이상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종문씨는 "독립운동을 한 것은 선조의 선택이었고 후손들 문제는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조부님 묘를 내가 55년간 관리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최근에 묘역을 만들어줘 고맙고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서울시 지원을 받아 서 할머니 집에서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는 백은숙(45.여)씨는 "2년 정도 집안일을 도왔는데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이런 외딴곳에 산다는 것에 놀랐다. 편찮으시지만 항상 나라 걱정을 하는 할머니 모습이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hapy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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