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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자결하는 것” 본문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자결하는 것”
CIA Bear 허관(許灌) 2010. 1. 10. 16:16혁명.
나는 1972.10 유신 직후 제3군단장으로 복무하면서 헌법을 보았다. 몇 차례고 보았다. 그러나 이 헌법이 아무리 보아도 민주 헌법이 아니고 그 목적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읍니다. 그 순간 나는 격분했고, 박 대통령이 한없이 미워졌읍니다. 당장 옆에 있으면 주먹질을 할 정도로 미워졌읍니다. 이 때 나는 생각했읍니다. 이 목숨 하나 바쳐서라도 이 자유를 회복해야 하겠구나 하고. 그 해 신체제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은 전방 군단 연말시찰을 했다.
나는 이 기회에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을 하고 준비를 했다. 군 영내에 깊숙이 들어 온 이상 얼마든지 가능했읍니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대통령을 맞았으나 차마 결행할 생각이 우리들의 정리 때문에 일어났다 사그라지고 일어났다 사그라지곤 했읍니다. 결국 못하고 말았읍니다. 자신을 졸장부로 생각, 비웃었읍니다.
그 후 다음 해인 1973. 3 생각지도 않던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본인 의사도 물음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알려 왔읍니다. 본인은 군인으로 좀 더 봉사하겠다고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30년 군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49세에 예편했다. 생각하면 고생도 되었으나 보람도 있었다. 서운한 감 금할 길이 없었다.
국회의원 생활 10개월쯤 되어 중정 차장으로 발령되어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중정 근무를 했다.
중정 근무 당시 민청학련 사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본인은 민주화 운동과 통제에 도전하는 정당한 주장자들을 처벌하는데 나의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했다. 나는 항상 주장했다. 소수로 처벌대상을 추리라고, 그러나 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때로는 혼자서 격분도 해 보았다.
긴급조치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놈의 정치가 어디에 있나. 주인은 국민인데. 국민을 우매하게 보아도 분수가 있지 나는 생각했다. 국민은 우매하게 보일는지 몰라도 결코 우매하지 않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다. 국민이 우매하다면 하늘이 우매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우매한가. 하늘을 우매하다고 보는 사람이 우매하지.
국민은 정부에 대해서 백번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백한번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형안과 아량을 못 가진 자는 나라를 맡을 수 없다. 우리 정부는 국민을 적을 대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집권 있고 나서 국민도 정치도 있다는 생각과 태도는 이미 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상실된 것이다. 우리 정부에는 고위관리도 많고 유능한 자도 많으나 단 한 명도 똑똑히 나라의 장래나 국민의 권리를 대변해 주는 이는 없었다.
고등군사재판정으로 이송 중인 김재규씨. |
나는 그후 10개월 후에 건설부 장관으로 전보되었다. 나를 전보한 것은 영전을 시켜려는 목적이 아니라 신 만만치 않으니 좋게 해서 내보내 준 것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밉고 미운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여하히 해야 하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독재는 박 대통령 각하 혼자서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는 그저 따라 하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우리 국민들 전체도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누가 여하한 방법으로 유신독재 체제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그러나 아무도 용기를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구나 내가 하는 방법 이외에는.
이리하여 1974. 9. 14일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을 받는 자리,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방법을 결심하고 당일 나는 권총을 몸에 품고 입장했다.
그러나 막상 결행하려고 하니 또 인정이 나를 가로막았다. 불발로 마치고 서글펐다. 자신의 못남을 뉘우쳤다. 그러다가 해는 바뀌어 다음 해인 1975. 2 연두순시 때 건설부에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다. 나는 그 날도 완전한 준비를 해 놓았다. 또 마찬가지로 용기부족과 인정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유서와 태극기를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
그 후 1976. 12. 4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셔서 집무실로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인은 좋다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조금도 틈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미련스럽게 틈만 있으면 슬슬 완화해보시도록 이야기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국내 여론은 물론 혈맹의 우방 미국이 우리 나라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자유 우방이 우리에 대해서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 등.
그러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1979. 4 혁명을 결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미루다가 10. 26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
혁명의 목적은
1. 자유 민주주의 회복
2. 국민의 희생을 더 이상 없애고, 예상되는 불행을 예방한다.
3. 적화를 예방한다.
4.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국방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 외교 면에서 호혜의 이익을 도모한다.
5. 국제적으로 독재국가라는 낡은 이미지를 씻고 한국민의 명예를 회복한다.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여는 유신 체제로 지탱하고 있는 핵인 박 대통령 각하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의 성공
10.26 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 이는 마치 자유가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보를 절개해서 물을 흘려 보내는 것과 같다. 이제는 천하 누구도 이 자유의 물결을 가로막을 자는 없다. “이는 천명이요. 대자연으로의 섭리이다.”
혁명 결행해서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는 기적이다. 나는 죽을 가능성을 90%로 보았다. 경호요원들의 권총실력으로 보아 우리 동지 몇 명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살았다. 혁명 결행이 중요하지만은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혁명 과업수행이다. 근 20년 동안에 어지러진 쓰레기가 산적해 있지 않은가.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으로 시정할 것인가.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오정건, 장동운, 길재호 등 수많은 부정치부자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유신 헌법을 기초하여 국민을 우롱한 자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긴급조치 9호를 기초한 자,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그후의 각종 의혹 사건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권력과 결탁하여 집중 융자로 특혜를 받은 대기업들, 중소 기업들의 파산을 외면한 처사는 누가 책임지겠는가 등 설거지꺼리가 수업이 많이 있다. 이대로 두고도 이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하겠는가.
나는 진로방해로 중도에서 아무 것도 손대지 못하고 말았다. 원컨대 개인은 여하히 되어도 좋으나 나라의 근기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과도기에 요직에 있는 자들이여 나라 장래에 대한 책임을 느끼라. 눈을 뜨고 똑바로 세상을 보라. 이 나라 국민은 3.1 운동과 4.19를 치른 슬기로운 국민이다. 솥뚜껑으로 자라를 잡아보아라. 누르는 힘이 다하면 살아서 다시 기어 나온다.
이 원리를 모르면 바보다. 1개 군인 소장의 정치 경험으로 국사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최 대통령은 이런 소인배에 국가의 중대사를 맡겨도 좋은가. 최 대통령께서는 감정을 떠나 허심탄회한 생각으로 국사를 다루고 계시는가. 나는 당신을 높이 평가했으나 아무런 실수 없길 바란다.
<혁명과 희생>
박 대통령께서는 유신체제를 방어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완벽을 기했다. 따라서 자신과 체제개혁을 숙명의 관계로 만들어 놓았다. 한쪽의 희생 없이는 한족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항상 필요하고 국민의 여망이 있으면 고칠 수도 있어야지 완전폐쇄를 시켜서는 혁명 이외 방법이 없게 된다. 대통령의 희생은 원통한 일이나 민주회복을 위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재판에 출석 중인 김재규씨. |
<우리 나라의 앞으로의 전망>
자유민주주의는 누구도 못 막는다. 이제 과도기를 거쳐 신정부는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를 할 것이다. 이는 오로지 10.26 혁명의 성과이다.
민주회복을 최대통령은 인위적으로 혼란이라는 이유를 들어 천연시키길 것이다. 이는 큰 어폐이다. 계엄이 해제되거나 장기화되면 촉진투쟁이 일어날 것이다. 2, 3월 개학기가 위기가 될 것이다. 언론 보도 통제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절대 현명한 방법이 못된다.
일시에 대폭발이 되어 그 동안의 불만이 터진다. 생활급이 못되는 노동자가 대정부 투쟁을 할 것이고 종교계, 기독교 중심으로 자유화 투쟁이 거세게 일 것이다. 국회가 개원되면 정국은 흔들릴 것이고 물가고를 못 잡으면 국민들의 대 정부 불신임이 고조되어 막기 어려울 것이다.
중세금정책도 문제가 될 것이다. 정부 정책발표가 조령모개하고 경제부처 장관들의 보조 불일치로 국민들의 정부신뢰도는 더욱 하락할 것이다.
앞서서 대책을 강구하는 것만이 불행을 막을 수 있다. 모든 투쟁 요인을 사전에 없애야 한다. 두고볼 일.
북괴는 평화공세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국론분열을 부채질 할 것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착실히 대처해야 한다. 국민이 민주통일이념을 확고히 하게 지도해야 한다. 국민에게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과연 여하히 찾을지?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정책이 나올 것이다. 물론 자유호가 제일 먼저 주장될 것이다. 이런 제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대책이 연구 검토되고 있는지. 우선 복수 토의라도 있는지 알고 싶다.
누가 토의를 할 것이며 구상을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고물가 대책>
국민의 생활안정을 보장하느냐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생필품 중 절대적 품목을 골라서 무한정 생산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지원해서 물량 확보가 되어야 한다. 대만을 보라. 물가 조정을 잘 하고 있다. 봉급자들의 생활급이 보장되도록 정부는 개입 조정해야 한다.
국민들의 협조를 호소해서 지지와 동조를 받아야 한다. 재벌 대기업들의 애국심 발휘를 유도해야 한다.
<혁명 성공 후의 나의 계획 복안>
3,5개월 이내에 완전한 민주회복을 해서 속히 정국을 안정시킨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국내에 충만하게 한다. 못살아도 불행한 것이 아니다.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하며 같이 노력하는 우애에 넘치는 사회를 만든다. 그리하여 국민과 정부가 남이 아니라는 국토를 만든다.
신정권을 보위하여 5.16과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다. 정부의 행정기능이 집권당에 위해서 좌우되지 않게 해서, 여하한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행정기능은 일사불란하게 대민 봉사를 한다. 여당 우위의 사고방식을 제거한다.
선거에 대한 과열을 방지하고 행정부의 절대중립을 보장한다. 정권의 교체나 지도자의 교체는 정당한 민의로서만 이뤄지게 하고 인위적 방식으로 장기집권은 절대 못하게 한다. 사회의 부조리는 근절시킨다. (사회정의를 구현한다).
집권자의 여하한 횡포도 용서하지 않는다. 대대적 국민운동으로 민주국민 교육을 통해서 국가관. 사회관. 생활관을 함양한다.
건국후 한번도 못해본 진정한 민주사회를 만들고 명랑한 복지사회를 만든다. 본인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국민운동회를 맡아서 사회발전에 기여함이 목적이다.
<국회의 처사>
국회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스스로 민의를 대변하는 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완전히 회복되는 날 지금의 국회의원들을 무엇을 했다고 하겠는지. 정말 민의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지 한심할 지경이로다.
걸핏하면 국회조사단 운운하던 친구들이 10.26 혁명에 대해서는 한마디 조사단 운운 말이 없으니 이런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국회의 관심 밖이라니.
정말 진정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유권자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한번이라도 좋으니 똑바로 민의를 반영해서 정부가 국민의 민의에 따라서 방향을 정하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게 하시는 여러분이 이러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자주 병드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지 않는 책임은 비단 행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입법부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앞으로 국회에 대해서 양심 있는 정치인으로서 민주발전에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들에게>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자유가 병들었던 것도 우리의 노력부족과 무관심에서 빚어졌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어지고 나서 그 귀중함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유는 우리 대한민군의 기본입니다. 이게 없으면 공산주의도 못 막고 국토방위도 못하고 사회발전도, 경제발전도 복지사회도 다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무엇이 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 아니 되고 맙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암흑의 사회로 곧 지옥입니다. 자유는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킵시다.
“오늘은 나를 위하고 내일은 후손들을 위하여”
“대통령과 대법원장에게 서신을 준비해보자”
“나를 앞세워 타인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김재규
1945년 9월 경북사범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김천중학교의 교사로 재직중 1946년 9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육사 제2기로 그해 졸업·임관했다. 이승만(李承晩) 집권기에는 이종찬(李鍾贊) 계열의 장교로 인식되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종찬 장군의 도움으로 군에서의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6·3사태 때에는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후 보안사령관·3군단장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1973년 3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그해말 중앙정보부의 차장으로 임명됐다. 1974년 9월 건설부(지금의 건설교통부)장관에 취임, 중동건설 수출을 적극 추진하는 일을 맡았다. 이어 1976년 12월 제8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시는 유신체제가 그 스스로의 한계상황을 노출시키면서 와해되던 시기로서 1975년 발동한 긴급조치 9호 등의 억압적 조치로 명맥을 유지하던 때였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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