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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보응우옌잡·훈 센을 증인석에! 본문

동남아시아/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키신저·보응우옌잡·훈 센을 증인석에!

CIA bear 허관(許灌) 2009. 3. 19. 18:43

지난 2월1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는 ‘킬링필드’ 전범재판이 시작됐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전범재판에 합의한 때는 2003년 3월. 하지만 전범재판소는 2007년 7월에야 설치됐다. 재판의 시급함을 고려한다면 퍽이나 게으르다.

» ‘학살의 기록, 편린이라도 남겨두자.’ 민주 캄푸치아 시절 고문과 학살로 악명이 높던 투올슬렝교도소 소장 출신의 캉켁이우가 ‘킬링필드 전범재판’에 앞서 열린 예심법정에 출두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사진/ REUTERS/ TANG CHHINSOTHY

킬링필드 관계자, 현 캄보디아 총리

33년 전에 등장해 44개월 동안 유지됐던 ‘민주 캄푸치아’(크메르루주) 시대에 벌어진 일을 더듬어야 하는 이 재판에선 산천도 인물도 의구하지 못하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민주 캄푸치아 총리 겸 캄푸치아 공산당 서기장 출신 폴 포트는 1998년 크메르루주의 거점이던 당렉산에서 연금 중 숨졌다. 살아남아 피고석에 설 누온 체아(84)와 키우 삼판(77), 이엥 사리(83), 이엥 티리트(76)는 80대를 전후한 고령의 노인이다. 고문과 학살로 악명을 떨친 투올슬렝교도소 소장을 지낸 캉켁이우(67)가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한다.

1980년대 불현듯 알려지면서 지구촌을 경악시킨 킬링필드. 그 전범재판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은 1991년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결실을 보는 듯했다. 1993년 총선을 거쳐 지금의 캄보디아가 만들어진 즈음부터 전범재판이 임박했다는 말이 무성했다. 그새 15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들을 피고인으로 내세운 이 재판은 그렇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겹게도 ‘천천히’ 게으름을 피웠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겠다는 이 재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자’들이 있다는 방증이다.

캄보디아 현 총리인 훈 센과 베트남 정부는 이 재판을 달가워하지 않는 첫 번째 존재다. 훈 센은 킬링필드의 주범 격인 크메르루주군 장교 출신이다. 크메르루주의 양대 세력 중 하나와 결탁하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만들어진 괴뢰정권에선 외교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980년대 킬링필드가 외부로 알려진 것은 베트남과 당시 괴뢰정권의 ‘공’이다. 캄보디아에 대한 군사적 침공과 점령의 명분을 크메르루주의 학정 때문이라고 선전했던 베트남은 서방 기자들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여 자유롭게 어디든 취재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편의를 제공했다. 킬링필드의 진실을 베트남과 당시 괴뢰정권 책임자의 증언을 통하지 않고 구한다는 건 숲에서 생선을 찾는 격이었다.

국제적 판사들, 국내법에 따라 구성해

이 재판이 달갑지 않은 두 번째 존재는 미국이다.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이래 미국은 중국과 함께 크메르루주에 대한 신실한 후원자였다. 1980년대 크메르루주는 미국이 타이를 통해 제공한 미제 군수물자와 자금으로 싸울 수 있었다. 크메르루주가 킬링필드의 악마라면 미국은 서슴없이 악마와 손을 잡은 형제였다. 물론 이 일은 앞서 일어난 킬링필드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1968~73년에 걸쳐 이뤄진 무자비한 미군의 캄보디아 비밀폭격이 킬링필드의 시작이었음을 부인할 방법은 없다.

1975년 이후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죽음의 행렬은 ‘아사(餓死)의 행진’이기도 했다. 1975년 혁명 이후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30%대를 밑돌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쌀을 수출하던 캄보디아의 이런 비정상적 식량 자급률 저하의 주범은 바로 미군의 ‘비밀폭격’이다. 1969년 3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폭격을 승인한 뒤 미 의회가 폭격 중단을 결의한 1973년 8월까지 줄잡아 40만~60만 명의 캄보디아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광범위한 농토가 불모지가 됐다. 1999년 공개된 미 공군의 폭격 기록을 보면, 미군은 이 기간에 23만여 회 출격해 275만t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폭탄의 양과 맞먹는다.

» 베트남 짜우독에 마련된 킬링필드 희생자 유골탑. 베트남은 민주 캄푸치아의 ‘학살’을 빌미로 캄보디아를 침공해 괴뢰정권을 세웠다. 사진/ 유재현

미군의 비밀폭격과 그에 따른 사망자 수는 킬링필드의 ‘실체적 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킬링필드 희생자는 약 170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는 1975년 민주캄푸치아 성립 전의 캄보디아 인구에 난민을 대상으로 한 면접조사(‘귀하가 아는 사람 중에서 몇 명이 죽었습니까’라고 묻는 식)를 통해 집계한 사망률을 적용하는 간단한 산술로 만들어진 추정치다. 따라서 킬링필드로 인한 사망자를 파악하기 위해선 민주 캄푸치아 성립 직전인 1974년의 캄보디아 인구 규모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당시 캄보디아 인구를 추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노로돔 시아누크 정권 시절인 1962년 인구조사가 전부다. 킬링필드의 희생자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미군의 비밀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당신은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나의 양심은 결백하다.” 재판정의 피고인석에 서는 ‘불운’을 피한 폴 포트는 숨을 거두기 전인 1997년 10월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폴 포트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킬링필드 전범재판은 판결에 앞서 역사적 진실부터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 재판으로 진실이 가려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엔과 훈 센 쪽의 지리한 협상 끝에 마침내 설치된 킬링필드 전범재판소의 법적 지위는 ‘국제전범재판소’가 아니라 ‘캄보디아 특별재판소’에 불과하다. 유럽과 북미, 아시아 출신 판사들을 동원했지만, 국제법이 아니라 캄보디아 국내법에 따라 구성됐다. 국제적 면모를 갖춘 판사들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것도 캄보디아 최고법관회의였다.

유엔은 재판이 국제법이 정한 규정을 따르는지 감시하겠다고 강조하지만 공허하게만 들린다. 킬링필드의 진실을 밝히려면 캄보디아 비밀폭격을 주동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캄보디아 침공의 최고 책임자인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괴뢰정권의 총리였던 훈 센을 증인석에 세워야 한다. 하지만 캄보디아 전범재판은 어떤 외국인도 증인으로 채택하거나 피고인으로 기소할 수 없도록 돼 있다. 현직 총리 신분인 훈 센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발언을 촘촘히 기록해두자

전대미문의 대량학살로 세계를 경악시켰던 킬링필드가 20여 년 만에 전범재판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금 세계인 앞에 섰다. 그 재판정의 피고인석과 증인석에 서야 할 인물들은 모두 방청석이나 재판부 뒤에 드리워진 암막 안쪽에 앉아 있다. 이 허망한 재판에 지난 3년 동안 유엔은 5630만달러라는 거금을 썼다. 재판소 쪽은 지난해 6월 2010년까지 필요한 예산으로 유엔에 1억4900만달러를 추가 요청했다. 진실도 정의도 기대하기 난망한 2억달러짜리 초호화판 법정 드라마인 셈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노인들의 발언에 귀기울이고, 이를 촘촘히 기록해두는 것뿐이다. 그게 킬링필드에 대한 진실의 편린이다. 미래의 역사가 나머지 진실을 밝혀 온전한 진실을 복원해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다.

유재현 소설가 hyoooo@hanmail.net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4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