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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국가 개요와 국가사회주의 탈레반, 하미드 카르자이 국왕 본문
아프가니스탄 국가 개요와 국가사회주의 탈레반, 하미드 카르자이 국왕
CIA Bear 허관(許灌) 2007. 7. 21. 15:22
해안선:없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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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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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률 | 64% |
종족구성 | 파쉬툰족 42%, 타지크족 27%, 우즈벡족 9%, 하자라 9%, 기타 13% |
종교 | 이슬람교 99%(수니파 84%, 시아파 15%) |
독립 | 19190919(영국) |
헌법 | 04.1.4 제정 |
정체 | 공화제 |
정부형태 | 대통령중심제 |
원수 |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 대통령(04.12.7 출범) |
수상 | |
실권자 |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 |
대의기구 | |
정당 | 이슬람사회당, 이슬람당 |
정부성향 | 비동맹국 |
UN가입 | 19461119 |
비동맹가입 | 19610901 |
GDP | 71.4억불(2005), 1인당 GDP : 308불 |
무역 | - 2005년도 기준 - 수출: 149억 3,400만불(천연가스, 과일, 카페트) - 수입: 212억 1,700만불(식량, 공산품) |
국방비 | (2005) |
군사력 | 육군 2만 7,000명(2003년) |
군맹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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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한국 | 북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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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수립 |
修交日 : 最初修交日 :2002-.1 斷交日 :1978-09-17 |
修交日 :1973-12-26 | ||
공관개설 |
駐 아프가니스탄 | 駐 韓 | 駐 아프가니스탄 | 駐 북한 |
공관정 |
유영방(200402) | 나빌 말렉 아스가르(200403) | ||
겸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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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협정체결 |
-문화협정(76.11) -경제협력·통상증진협정(78.3) -민간항공협정(76.5) -경제 및 과학기술협정(78.10) -문화협정(77.1, 78.10) -해운협정(84) -경제기술과학협력 및 무역증진협정(85) -문화협정(85) -사증면제협정(85) -이중과세방지협정(87) -투자보장협정(90) -항공협정(96) |
-민간항공협정(76.5) -경제 및 과학기술협정(78.10) -문화협정(77.1)(78.10) -무역협정(78.10) -양국 통신사간 보도교환 및 상호협조협정(79.2) -양국외무부간 협조협정(87.6) | ||
對남북한 통상 |
通商 (2005) - 수출: 3억 1,600만불(섬유류, 광물성연료) - 수입: 6억 6,200만불(수송기계, 석유화학제품, 철강제품) |
通商 (2005) - 수출: NA - 수입: NA | ||
남북한의 주요진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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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수 |
僑 民 : 0名 滯留者 : 145名 |
僑 民 : 0名 滯留者 : 0名 |

지리 |
- The World Factbook 2004, 美 C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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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및 1인당 GDP |
- IMF World Economic Outlook 2004.4 * 이라크, 쿠바 등과 未독립·도서 국가는 美 CIA The World Factbook 2004 참고 |
무역·통상 |
- Direction of Trade Statistics, 2004.6. IMF - 무역통계연보, 2003.12 관세청 * 이라크, 쿠바 등과 未독립·도서 국가는 美 CIA The World Factbook 2004 참고 |
군사력/국방비 |
- Military Balance 2003-2004, IISS |
기타 |
- 해외동포현황, 2003.7, 외교부 - Chiefs of State and Cabinet Members of Foreign Governments 2004.8, 美 CIA |
공식 이름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Republic of Afghanistan). 다리 페르시아어로는 Jomh ![]() ![]() ![]() ![]() ![]() ![]() ![]() | |||||||||||||
(1) 아프가니스탄 국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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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주요 농업지역인 북부 평원지대, 리게스탄 사막을 비롯해 주로 사막과 반(半)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서부 고원지대,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포함해 히말라야 산맥의 연장지대인 중부 산악지대 등 3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아무다리야 강(고대에는 옥수스 강)이 북쪽의 여러 공화국들과 국경을 이루며 흐르고, 길이 1,150km의 헬만드 강은 여러 차례의 관개공사를 거쳐 남서부 고원지대에 필요한 농업용수 대부분을 공급한다. 중부 산악지대는 아(亞)북극기후로 여름은 짧은 반면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아주 춥다.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겨울에는 춥지만, 여름에는 더운 반건조 스텝 지대이거나 사막지대이다. 연강우량은 남서부 사막지대의 75㎜ 미만에서부터 힌두쿠시 산맥의 1,270㎜ 이상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의 지역이 메마르고 기름지지 못한 산악지대 또는 사막지대이지만 북부 평원지역 일부는 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농업지대이다. 전국토의 1/8가량을 차지하는 농경지 가운데 1/3에 관개시설이 되어 있으며 이 관개지역에서 전국 작물의 80% 이상이 매년 생산된다. 막대한 양의 고급 철광석을 비롯해 중요한 여러 광물자원이 있으나 채광과 수송상의 문제 때문에 20세기말까지도 거의 개발이 안 된 상태이며, 북부 평원지역에 매장된 천연 가스만이 유일하게 개발되어 상당량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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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툰족이며 타지크족·우즈베크인·하자라인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파슈툰족은 주로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살며, 지금까지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한다. 타지크족들은 대부분 농민과 장인(匠人)들이며 주로 헤라트 북동부와 서부 주변지역에 산다. 우즈베크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힌두쿠시 산맥 북쪽 지역에 살며, 하자라인들은 중부 산악지대에 살면서 유목을 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토(파슈투)어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다리어로서 2가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토어를 쓰며 약 1/3(주로 타지크족·하자라인·샤하르아이마크인·키질바시인)은 다리어를 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투르크멘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3/4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약 1/4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이다.
인구는 전쟁과 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로 1980~85년에 연간 약 2%씩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었으나 19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인구성장률이 중앙 아시아 국가들의 평균수준으로 다시 돌아왔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지만 인구의 45%가 15세 이하의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층이 비교적 젊기 때문에 출생률은 여전히 높고 사망률이 떨어짐에 따라 인구의 자연증가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인구의 4/5 이상이 시골에 살며 약 1/5 정도는 유목생활을 한다. 가장 큰 도시는 카불이며 다른 주요도시로는 칸다하르·헤라트·마자르에샤리프·잘랄라바드·콘두즈 등이 있다. 도시의 거주지 대부분은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칸다하르, 북서쪽으로 헤라트, 북동쪽으로 마자르에샤리프를 거쳐 다시 남쪽 카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건설된 주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농촌 인구는 주로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ㄱ.파쉬툰족(42%)---파슈투어
아프간남부 (칸다하르) 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아프간인구의 38%를 차지하고 있는종족이다 원래 50%였는데 전쟁으로 인해 많이 죽은탓이란다.. 파쉬툰종족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좋다... 1747년-‘로야지르가’를 열어 국왕을 세운 지역이기도 하고, 아래 여섯번째 사진에도 보이듯이 "아흐마드샤 바바" 가 국왕으로 선출되어 나라의 국부가 나온 지역이기도 하다(현재<2006년>정치계에서도 크게 영향권있음) 칸다하르는 탈레반 본거지며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생들)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테러조직의 기지로 세운지역이기도하고, 9.11테러후 빈라덴의 은신처이기도하다.. 아편집산지의 중심지라서 양귀비를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지역이기도 하고 오랜 무정부 상태에서 2004년 카르자이 대통령이 출범한 지역이기도 하다
-알렉산더의 대제국 이후로, 아프가니스탄은 동족과 서쪽으로부터 침입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파쉬툰족은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만이 아니라 인도의 불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10세기 이후로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된 종교가 (이슬람교)였다. 현재 파쉬툰족의 99%가 이슬람교도이다 파쉬툰족은 끊이없는 전쟁으로 알려진 종족이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간 사람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것을 우려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탱크와 3만군의 군대를 보냈다. 그때 이후로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파쉬툰 종족이었다(아프간 인구의 50%를 차지하던 파쉬툰 종족이 전쟁으로 38%로 줄은 상태다) 아프간은 소련의 점령과 계속되는 내전(22년간 내전)으로 극심한 소동 속에 있었다 ㄴ.타지크족[― 族, Tadzhik]--2아프가니스탄 전체인구의 27%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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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생활수준이 최저인 농업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으로, GNP의 2/3는 농업이, 나머지는 광업·제조업·공공사업 부문과 교역이 차지한다. 대부분의 경작지에서 밀·옥수수·쌀·보리를 비롯한 곡식을 재배하며 채소·과일·견과·목화도 재배한다. 피스타치오를 비롯한 야생견과류는 수출할 정도로 많이 생산된다. 전국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메마른 산악지대와 약간의 목초지에서 자급자족에 필요한 육류와 유제품, 가죽과 양털을 생산하는 목축이 이루어진다. 가장 중요한 가축은 양이며 소·염소·당나귀·말·낙타도 기른다. 전체 노동인구 가운데 3/5 정도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광업은 천연 가스를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주로 농업과 목축 자원에 바탕을 둔 공업부문에서는 면직물·모직물·레이온·아세테이트 같은 직물생산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중요한 수출품인 모직 양탄자를 비롯해 전통적 수공예품 생산도 강세를 보인다. 물살이 빠른 강에 수력발전 시설을 설치하여 전국 전력 총생산량의 2/3에 가까운 전력을 생산하나 수력자원 이용률은 낮은 편이다. 소련군 침공 후 예산·세입·징세 제도는 점점 소련의 유형을 따르게 되었다. 교통수단은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 않으며 도로망 가운데 약 2/5만이 포장되어 있다. 전쟁으로 기존의 도로와 다리, 그밖의 여러 관련 구조물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2개의 국제공항과 비행장이 있다. 천연 가스와 건과·견과·양탄자 등이 주로 소련·인도·독일로 수출되며, 자동차·석유제품·설탕·방적사·직물 등을 소련·일본·중국에서 수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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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PDPA)이 주요도시들을 지배했다. PDPA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소련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통치권은 20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국토방위최고회의에 있다. 반면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입헌군주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단체와 일종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단체로 나누어졌다. 1988~89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반군은 농촌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PDPA도 도시지역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과도 정부는 모든 반군 파벌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정부 및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걸친 지방 통치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결핵과 세균성·아메바성 이질의 발생률이 높으며, 의사와 병원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약 25%에 지나지 않는다. 1979년 정부에서 7~15세의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의무교육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나 초등학교 취학연령 어린이들 가운데 실제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에 불과하며, 전쟁 때문에 고등교육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는 철저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선전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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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었다. BC 6세기에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일부인 키루스 2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일부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 박트리아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 2세기에는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에프탈 왕조와 사산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 왕조시대에는 이슬람교가 튼튼히 뿌리내렸다.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의 침략을 받았으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700년대초 페르시아 군주 나디르 샤에 의해 무굴 제국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나디르의 경호대장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굳히고 왕위를 계승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1772년 두라니가 죽은 후 부족 또는 종족 단위 사회로 회귀하려는 경향과 러시아·영국의 제국주의적 음모로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전쟁(1839~42, 1878~80, 1919)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점령을 시도한 영국에게 항복하지 않음으로써 기본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주제 아래 1930년대부터 계속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으나, 1970년대 정당정치가 안정을 잃게 되고 1973년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군주제가 종식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77년 파르캄당과 좌익 칼크('대중'이라는 뜻)당이 연합하여 PDPA를 결성했고, 1978년에는 함께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두 정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들의 마르크주의적인 개혁정책으로 농촌에서 큰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자 1979년 기존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소련군이 침공했다. 뒤이어 벌어진 전쟁에서 PDPA를 무너뜨리고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했으며,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달아났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 1988년 5월부터 1989년 2월 사이에 10만 명의 소련군이 철수했으나, PDPA가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PDPA와 반군 사이의 무력투쟁이 끊이질 않았다.
1992년 4월 마침내 반군 세력이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의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14년(1978~92)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났다.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지만 평화가 정착되지는 않았다. 민족이나 종교적 분파에 따라 나뉜 여러 게릴라 세력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과도기에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브가 툴라 모자데디가 1992년 6월 게릴라 지도자들의 회의기구를 이끌던 부라누딘 라바니에게 권력을 넘겼으나, 유혈사태가 종결되지는 않았다. 근본주의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이슬람당은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또한 시아파 이슬람교 당파 8개가 연합한 통일당은 이란의 지원을 받았는데 과도정부에 대해 권력 분점(分店)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미국 국무부 보고서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권을 장악한 측이 과거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인권 유린과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이탈리아·불가리아가 자국 외교관들을 철수시키는 등 상황은 악화되었다고, 파키스탄과 이란에는 여전히 수백 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었다.
1992년 12월 30일 1,335명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에서 라바니가 2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에 대해 10개의 주요 반군 세력 중 5개가 의회를 비난하며 라바니를 대통령에 선출한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오로지 이슬람교도에게만 정부의 일을 맡겼고 비(非)이슬람 기구 설치를 금지했으며 방송도 이슬람 율법에 따르도록 했다.
국방장관 아흐메드 샤 마수드 휘하의 정부군과 헤크마티아르를 따르는 헤즈브 이 이슬라미 사이에서 주로 발생한 끝없는 전투에도 불구하고 1993년 5월 22명으로 구성된 내각이 짜여졌으며, 수도 카불에 있는 마수드의 건물을 점령한 헤크마티아르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은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자금 등의 원조를 요청해 국가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1994년 1월 헤크마티아르의 군대와 아브드 알 라시드 도스탐 장군의 군대가 연합해 수도 카불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카불은 잿더미가 되었고 카불 인구 200만 명 중 150만 명이 이 지역을 탈출했으며 카불 바깥지역에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다. 1994년 3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 튀니지의 전(前)외무장관 마흐무드 메스티리를 대표로 한 평화사절단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내는 등 평화정착에 노력했으나 성과는 별반 없었다. 라바니 대통령의 임기가 1994년 6월로 끝이 났지만 그는 권좌를 내놓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은 그의 임기를 6개월 연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정국이 계속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중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1994년 탈리반을 결성, 라바니 대통령과 다른 반군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를 표방했다. 탈리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리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라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리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표방하며 여성을 억압하고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특히 2001년 3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를 당하자 미국은 우사마 이븐 라딘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지명, 그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집권 탈리반이 거부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 주도의 일부 서방국가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세력인 북부동맹이 이 전쟁에 합세한 끝에 탈리반은 붕괴되었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교도들과 이란에 있는 180만 명의 난민을 이유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일정 부분 관여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란 견제세력을 지원했다. 파키스탄에는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파슈툰족의 영원한 고향이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밖의 나라들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력이 양성하는 테러리스트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량 생산·거래되는 마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관련된 러시아·유럽 연합(EU) 등 초강대국들이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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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수도 카불에 상주대사관(1975)을 설치했으나, 1978년 9월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공관을 폐쇄했다. 북한과는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오늘날까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2.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ㄱ.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 ㄴ.구분--무장 이슬람 정치단체이며 게릴라와 테러단체 ㄷ.설립연도--1994년10월 ㄹ.소재지--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ㅁ.설립목적--이슬람공화국 건설 ㅂ.주요활동--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수립 및 이슬람공화국 선포 그리고 이슬람교가 아닌 종교인이나 종교단체 시설등 처형이나 파괴등 급진적 이슬람정책 수행 ㅅ.내용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해 1994년에 이미 이프가니스탄 국토의 80%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Kabul)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결속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 아프가니스탄내 반군조직을 무장해제시킨 뒤 약탈과 강도,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접수(接收)가 어려워지자 지역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들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텔레비젼(TV)시청이나 사용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학대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등으로 아프가니스탄내 불교 유적과 불상등을 부수는 등 유례없는 유적파괴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더욱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만 빈 라덴과 그의 추종조직인 알 카에다를 숨겨 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영국 러시아등 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당 하였다 지금은 아프가니스타인 연합군 과도정부 수립으로 탈레반 잔당은 사라지고 있다 ㅇ.오마르(Omar Muhammad) 오마르는 출생에서 신상에 이르기까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인물로 나이 역시 2001년 현재 32세에서부터 39세 또는 40대 초반이라는 설등 다양하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 있어 아프가니스탄의 얼굴없는 지도자로 일컬어진다 소련(러시아)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1980년대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해 1989년에는 전투 도중 로켓탄 파편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들어 이슬람학생들로 조직된 무장단체 탈레반(Taleban)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 남서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해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이어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한 이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 탈레반 내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자 철저한 이슬람원리주의자로서 이슬람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에 위배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등 유례없는 폭압정책으로 인해 국제적인 지탄을 받아왔다 아프가니스탄내 힌두교도들에게 이슬람교도와 구별할 수 있는 인식표를 부착하도록 하는 한편 여성의 취업금지, 의무교육 폐지는 물론 친척남성이 동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외출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여성은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둘러야 하며 턱수염을 깎은 남성은 다시 자랄때까지 감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 밖에 도박금지와 텔레비젼.비디오 시청등 어떠한 형태의 오락도 금지하고 2001년 3월에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바미안석불을 파괴하도록 지시한 뒤 석불 파괴가 예상보다 늦어졌다는 이유로 속죄를 위해 소 100마리를 희생물로 바치는 연이은 폭압정책을 펼쳐 왔다 2001년 9월에는 미국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사건의 배후자로 알려진 국제 테러 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였다는 이유로 미국과 연합군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되살아난 탈레반, 파키스탄 북부에 ‘소국’ 미국이 아프간 전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인 탈레반을 무너뜨린 지 4년 만에, 탈레반 무장세력이 파키스탄 북부 ‘부족 지역(tribal area)’ 〈지도〉에 사실상의 ‘미니 국가’를 만들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1일 보도했다. 와지리스탄 주 등이 포함된 ‘부족 지역’은 주민 대부분이 탈레반 주류와 같은 파슈툰족이다. 원래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아 ‘부족 지역’으로 불렸다. 이 지역이 탈레반의 손 안에 떨어진 결정적 계기는 지난 9월 파키스탄 정부가 북(北) 와지리스탄 무장세력과 맺은 평화협정이다. 친(親)탈레반 무장세력의 줄기찬 공격에 시달리던 파키스탄 정부가 지역을 포기하자, 탈레반 천하로 변해 버린 것이다. 탈레반은 올 초에 이미 북 와지리스탄을 기반으로 ‘이슬람 국가’ 수립을 선언했다.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정보 소식통들은 “이슬람 무장세력이 이곳에서 자살폭탄테러 지원자를 훈련시키고 알 카에다 등에 인원·무기를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 훈련받은 탈레반 폭탄공격 테러요원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미국 ABC 방송이 단독 입수한 비디오 테이프를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3.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파슈토어: حامد کرزی, 다리어: حامد کرزای)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재 대통령이다. 2004년 12월 7일부터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1957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 칸다히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쟁을 싫어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인을 꿈꿔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의 군주제를 폐지하게 됨에 따라 카르자이 역시 정치의 꿈을 버려야만 하였다. 붉은 군대(소련)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로는 그는 파키스탄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그는 처음으로 정치인 생활을 하였다. 탈레반 정권 시절에는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는 탈레반에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2004년 12월 7일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원래부터 전쟁을 싫어하였다 | |||||||||||||
-카르자이, 군벌 사병(私兵) 척결 다짐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임시정부 수반은 중앙정부에 종종 반기를 들고있는 지방군벌들의 무장단체를 척결하는데 실패하면 사임하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뉴스위크가 보도했다. 이 주간지는 최신호(7월8일자)에서 카르자이 수반이 회견을 통해 '정부군 이외에 무장단체는 존재할 수 없다'면서 '나는 아프간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으며 (군벌운영 무장단체 척결에) 실패했다고 판단되면 사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무장단체들이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구성 중에 있는 정부군에 통합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카르자이는 '사병(私兵)이 아닌 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원하고 있다'면서 정부군에 통합되지 않은 무장단체는 '반군이며 우리는 이들을 섬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카르자이 수반은 아프간 당국이 이란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란과 미국이 관계를 정상화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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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영화 소개---칸다하르(KanDaHaR)
http://www.nkino.com/Movies/movie.asp?id=5940
부시대통령께서 백악관에서 <칸다하르>영화를 관람했고 이프간의 현실과 아프간 여성들의 애환을 이 영화로 간접체험 했다고 한다 <칸다하르>는 캐나다로 이민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나파스가 자살을 결심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칸다하르로 가는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칸다하르:Kandahar>는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칸다하르주 주도시이다 인구는 23만 7,500명이고 아프가니스탄 수도는 카불 다음 가는 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이다 주민은 아프간족과 타지크족이 반반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일하게 파슈토어를 공통어로 쓰는 도시이다 시내 도로는 직전이며 넓다 고속도로가 카불. 헤라트 및 파키스탄의 퀘타로 통하고 국제공항도 있다 상업이 번성하고 모직물. 과일 통조림공장이 있다 도시의 기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에 아라코시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두라니왕조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는 마호메트가 입었다는 옷을 안치된 모스크(이슬람사원)인 헤르카이 샤리프 지알리트, 바위동굴의 망루인 치힐지나, 1709년 사파비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길자이계 아프간인 미르 와이스 및 1947년 이곳에서 즉위한 아프가니스탄 건국자 이흐마드샤 두라니의 묘와 유적등이 있다 1880년 아프간군이 영국군을 격파한 옛 전쟁터 마이완드는 북서쪽으로 수십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페르시아인(이란인)은 아랍인과 종족이 다르지만 이슬람교로 라마단(금식월)을 준수하고 매년 Hajj기간 중 8-9만명의 순례객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성지를 방문하고 있으며 이슬람 율법(Islamic Code)은 특히 남녀의 유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페르시아안(이란인)은 식생활 유목, 촌락생활에서 유래한 바 많으며 날 것이나 비늘 없는 해산물(뱀장어, 조개등)을 먹지 않으나 새우는 비늘이 없어도 좋아한다 그리고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지시하고 있다 이란인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Ferdowsi, Sadi, Hafez등 뛰어난 시인의 작품 싯 귀절을 일상생활에 새기고 있으며 이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하고 있다 1997년 8월 하타미(Khatami) 신정부 출범이후 <문명간의 대화> 통한 개혁, 자유화, 개방화정책을 가속화해왔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의 역할과 당면한 과제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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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주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군은 남부지역에서 공세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나 탈레반 잔당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고 있습니다.이 시간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의 역할과 당면한 과제를 전문가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심층 진단하는 보도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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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은 26개 나토회원국들이 파견한 2만 명으로 편성돼 있습니다. 나토군은 2003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초기에는 국제안보지원군이라는 명칭아래 주로 수도, 카불과 북부와 서부 지역 일원에 배치돼었습니다. 나토군의 활동목표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정부의 재건과 안정확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나토군은 2006년 7월말경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 대한 군사활동을 미군측으로부터 넘겨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토군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서 훨씬 어려운 활동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은 회교 극단주의 세력인 탈레반의 전통적인 거점이었고 2001년 미국 주도의 연합군에 의해 권좌로부터 축출된후에도 여전히 탈레반 잔당의 활동거점이기 때문입니다.
카불 주둔 나토군의 특별고문, 그레그 밀스씨의 말입니다.
“ 아프가니스탄의 최남단 지역의 주들은 주된 아편생산지입니다. 특히 칸다하르와 헬만드주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남부의 주들은 파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국경선은 다수 부족인 파슈툰족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부 주들은 전통적으로 가장 격렬한 저항 세력으로서 카불 중앙정부의 통제에 완강히 저항해왔습니다. 파슈툰족의 대부분은 중앙정부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카불 중앙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리는 것을 공공연히 거부하기도 합니다.”
나토군은 미군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의 군사활동을 넘겨받는 즉시 탈레반 잔당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쳤습니다. 나토군 병력에 대한 저항분자들의 공격이 증대되고 양쪽의 사상자수가 늘어났습니다.
미국의 민간연구기관인, 외교관계협회, 나토관계 전문가인 챨스 쿱찬 연구원의 말입니다.
“ 저항분자들은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량폭탄 같은 게릴라 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지속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탈레반 잔당과 나토군 양측의 사상자수는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진다는 것은 일정 수준의 조직과 전투태세가 갖추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나토군은 어느정도 당혹해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한편, 탈레반에겐 잃을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나토와 아프가니스탄 관계 전문가인 마이클 윌리엄스씨의 말입니다.
“ 시간은 탈레반 편입니다. 그들은 공격의 강도와 기간을 그들이 원하는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고 대중속에 잠입하기도 합니다. 내 생각으론 유럽의 대중과 정부들이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진정한 결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금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토의 고위 관계관들은 최근 탈레반 소탕을 위해 병력증강을 요청했지만 소수 국가들만 부응했을 뿐이고 폴란드군은 위험한 남부지역에서는 활동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챨스 쿱찬 연구원은 나토가 이미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군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 나토군은 발칸반도와 코소보 지역을 포함해 여러 곳에 병력과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미군이 주로 부담하고 있지만 영국, 폴란드 등나토 회원국들도 상당수의 병력을 이라크에 파견했습니다. 게다가 레바논 남부의 유엔평화유지군 증강에 따라 프랑스가 많은 병력을 파견하는 등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주도적으로 병력파견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콩고에도 유럽연합군이 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원할 새로운 자원을 어떻게 충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은 탈레반 잔당을 소탕하고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의 안보를 지원하는데 있어서 굉장한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관측입니다.
영국의 나토관계 전문가, 마이클 윌리엄스씨는 나토가 국제적인 동맹체로서 활동하려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을 거두는 일이 극히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 나토만이 아니라 일본, 호주, 한국,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들이 나토의 활동에 참여할 뜻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호주는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 전투병력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도 이라크에서 미국 주도 연합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나토 이외의 나라들이 국제안보 협력차원에서 참여할 용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토는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에 국제적 동맹의 활동을 촉구하고 있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안보확보 지원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토가 주창해온 국제적 동맹이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
따라서 나토의 아프가니스탄 활동은 서유럽 동맹이 냉전종식에 따르는 서유럽 역할의 재정의를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군사력을 유럽밖으로까지 확장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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