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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1974년 8.15광복절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세)은 누구인가?(추적자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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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1974년 8.15광복절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세)은 누구인가?(추적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9. 18:11
.문세광(文世光)은 누구인가
문세광(文世光)은 경남 진양(진주)가 본적으로 1951년 12월 일본 오스카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에서 석면제조업체에 다니던 경남 진양(진주)이 고향인 재일동포 민단(民團) 출신 문병태의 3남으로 태어났다
문세광은 시립(市立) 성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업에 염증을 느끼고 고등학교 2학년때 중퇴했으며 오사카 재일한국인 거류민단 이쿠노기타(生野北)지부에 가입했다 이후 플라스틱 공장공원과 휴지 수집상, 소화기 판매원, 빌딩 유리청소부등 각종 노동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보인 것은 고등학교 시절때부터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공산당 선언> <모택동어록> <김일성선집>등 각종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고 이 과정에 <일본의 자본주의 사회구조 및 교포사회의 불만을 해결하는 길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가 공산주의화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과 투쟁이 섬취하게 되었고 공산주의화 되는 길이라고 믿음을 갖게됐다
문세광은 고교 중퇴 뒤 민단계열의 재일한국청년동맹등의 단체에 가입 공산주의자임을 감추고 표면상 민단을 위해 활동하는 것처럼 가장 , 각종 집회시위를 선동해 민단 분열을 꽤했다고 한다1972년 9월 3일 오사카에서 열린 민단과 조총련의 단합대회에서 김효룡을 만나 조총련에 포섭된 문세광은 이듬해 김대중납치사건에 발생하자 김대중구출대책위원회에 가입, 주(駐)오사카총영사관을 점거해 영사관 직원을 인질로 김씨와 교환을 계획하기도 했다
문세광은 1972년 9월 오사카의 한 페스티벌홀에서 단합대회에서 조총련 인사 김효룡을 처음 만았고 그 이후 김호룡은 1972년 9월 5일 오후 8시쯤 처음 문세광 집을 방문했고 이후 수 차례 약년 동안 문세광 집을 방문해 각종 선물로 환심을 산 뒤 북한 관련 자료로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다
문세광에게 남편의 명의의 가짜 여권을 만들어 준 요시이미키코(당시 24세 여성)은 문세광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비슷한 사상으로 인해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지만 두 사람이 장래를 약속하기도 했으나 민족이 달라 따로 결혼했고 이후 자주 만나 서로의 활동을 격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세광과 요시이미키코는 1973년 11월 신분위장 출입국 가능시험과 권총을 구입하기 위해 부부를 위장해 홍콩으로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문세광은 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 여성)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 명의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1974년 8월 6일 오전 1시 KAL기편으로 김포공항으로 국내에 들어와 1974년 8월 15일 오전 8시께 <거물>로 가장 검문검색을 수월히 피하기 위해 호텔 도어맨에게 부탁해 빌린 포드 20M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투숙했던 조선호텔을 나섰다
문세광이 탄 차량은 입장이 허가된 비표도 없었음에도 극장입구를 무사히 통과했고 문세광은 기념식장에 들어서면서도 검문을 받았지만 일본어를 구사하며 VIP로 행세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문세광은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뒷 좌석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고 앉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38구경(스미드 웨슨)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문세광은 긴장한 탓인지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총탄 1발이 오발돼 자신의 대퇴부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는다
문세광은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석사이의 통로로 나와 권총을 겨누며 다친다리를 이끌고 연단을 향해 돌진했다
문세광은 연단을 향해 두번째 총탄을 발사했지만 총탄은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던 연설대 원쪽 편에 맞았고 박정희대통령은 경축사를 읽어 나가다가 느닷없이 앞에서 총을 겨누는 암살자을 보고 몸을 연단 안으로 숨겼고 장내가 정리될때까지 연단 안에 숨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연단 귀빈석에 앉았던 대부분의 인사들도 혼비백산해 머리를 숙인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귀빈석에 있었던 국무총리 정일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현장을 피했고 서울시장 양택식은 역시 그랬다 그런데 정일권보다 양택식이 더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은 왜 그랬을까 양택식은 엉덩이(궁둥이, 히프)를 관중석 그러니까 카메라 장면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틀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그 사진이 지상에 공개되어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빼어 어두운 관객석을 향해 겨냥했지만 문세광은 불발탄이 된 3탄에 이어 네번째 총탄을 발사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경축사를 읽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뒤에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여사의 우측 머리를 명중시켰다
문세광은 이어 한 참석자가 발을 걸어 넘어지면서도 마지막 한 발을 발사했지만 5탄은 연단뒤에 게양된 태극기를 향했다 1탄이 발사된 후 이 모든 과정이 불과 수 초내에 이뤄졌다
문세광은 그때서야 좌석 맨 앞쪽에 앉아 있던 경찰관등이 덮처 체포됐고 머리에 중상을 입은 육영수 여사는 인근 서울대학병원으로 후송돼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이날 밤 7시 결국 서거했다
문세광은 저격사건 이후 두달 가량이 지난 1974년 10월 19일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문세광의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 목적 살인죄등 모두 6가지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선고문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이 모두 인정돼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원심대로 사형이 확정돼 1974년 12월 20일 혁명가적 열정 젊은 나이 23세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문세광은 유서에서 "김대중 선생사건, 유엔총회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혔으며 그 자신이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고 일본정부는 수사결과에서 밝혔다 문세광 사형으로 죽었을 당시 그의 처와 두살 짜리 아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죽었다

(1)김효룡(당시 47세, 한국인)
-남한 출신으로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니시(生野西)지부 정치부장
-김효룡이가 문세광을 포섭하여 김대중 구출대책위원회 소속으로 주(駐)오사카총영사관을 점거해 영사관 직원을 인질로 김대중선생과 교환할 것을 계획함
-일본지역 남한출신 친북세력들이 창립한 통일혁명당 일본지역 대표부 소속으로 알려지고 있음
(2)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 일본 여성)
-일본인 출신
-문세광과 요시이 미키코양은 고등학교 동창
-공산주의자
-요시이 미키코양은 저격사건 이후 단순한 여권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음(문세광은 요시이 미키코양의 남편 명의의 여권으로 한국 입국)

2.<박정희 저격 사건> 한국정부과 일본정부 양국 수사는 어떻게 왜 달랐나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20100000020050120052227K7.html
(1)한국정부 수사내용(김일두 서울지검장의 한국측 특별수사본부 수사결과)
-문세광 단독범행이 아닌 조총련, 북한과의 연계로 김일성 지령-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세)이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박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1974년 8월 6일 오전 1시 KAL기 편으로 김포공항으로 입국, 범행을 저질렀다
문세광이 1972년 9월 5일께 조총련에 포섭돼 반정부 활동을 펴오다가 1974년 5월 5일 북한 공작선 겸 무역선인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 범행을 저질렀다는게 당시 수사본부의 설명이다
범행을 위해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길정행웅)라는 이름의 위조여권을 사용됐고 일본에서 훔친 권총과 탄알을 훔쳐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춰들여왔으며 그 배후는 50세 가량의 머리가 벗겨지고 마른 채격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지도원과 조총련 오사카(大阪) 이쿠노(生野) 서(西) 지부 정치부장 김호용(金浩龍, 47세)등 2명이라고 수사본부는 밝히고 있다
문세광과 김호용의 관계에 대해 1972년 9월 3일 오사카 소재 패스티벌홀에서 개최된 단합대회 때 처음 만나 알게 된 뒤 김호용이 매월 평균 2차례씩 약 1년간에 걸쳐 문세광의 집을 드나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다
특히 1974년 정월에는 한덕수 조총련의장의 "혁명을 위해 일층 노력해주도록"이라는 말과 함께 정초 선물로 인삼주와 과실주를 김호용이 문세광에게 전했다고 당시 수사본부는 발표한 바 있다
문세광의 범행 동기에 대해 수사본부는 문세광이 김호용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북한 및 조총련에서 발간한 각종 팜플렛과 공산서적에 현혹돼 공산사상에 물들었으며 남한내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는 대통령을 암살, 이를 인민봉기의 기폭제로 삼아야 한다는 김호용의 선동에 고무돼 대통령 저격을 결의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김호용은 또 1973년 1월과 1974년 7월 24일 각각 일화 50만엔과 80만엔의 거사자금을 문세광에게 건넸다는 내용이 당시 수사본부의 발표에 포함돼 있다
수사본부는 사건발생 10일 만인 24일 오전 문세광을 반공법, 국가보안법, 내란목적 살인, 일반살인, 살인미수, 출입국관리법, 총포화약단속법, 여권법, 문서위조등 13가지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구속송치했으며 김호용과 요시이 유키오와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등 3명도 공동정범으로 입건, 기소중지 의견을 붙여 송치했다

(2)일본정부 수사내용(오사카 경찰청 산하 특별수사본부 수사결과)
일본측은 사건 직후 오사카 경찰청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차리고 문세광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 지 닷새 후인 12월 25일까지 132일간 수사를 벌였다
-문세광의 단독범행 규정-
문세광은 1973년 9월께 한국내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박 대통령 암살을 결의하고 범행을 계획, 실행했다는 게 핵심이다
문세광은 이를 위해 지인인 요시이 미키코를 만나 그녀의 남편인 요시이 유키오의 호적등본 주민표를 받아 일반 여권을 교부 받아 1973년 11월 19일 요시이 미키코와 함께 홍콩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74년 2월 12일부터 3월 11일까지 동경의 아가후도 병원에 입원해 거기에서 범행을 위해 한국행을 결심하고 다시 요시이 미키코의 협력을 받아 6월말 부정여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후 문세광은 또 범행에 사용할 무기를 얻기 위해 오사카시(市) 남구 다카쓰 파출소에 침입, 권총 두자루와 실탄 10발을 훔쳐 8월 6일 오사카 공항에서 서울로 건너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조총련-->문세광"으로 이어지는 핵심고리인 김호용과 문세광과의 관계에 대해 "김호용이 문세광의 저격행동을 사전지휘했다는 뚜렷산 증거가 없다"는 게 일본측의 결론이다 분명한 연계설을 주장하는 한국정부 측과 명확하게 다른 시각이다
특히 일본은 문세광의 저격은 <과실살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 1974년 8월 29일 외무부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은 <과실살인>임에도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정부의 수사발표에 불만을 드러냈다
나아가 일본정부측은 문세광이 김호용으로부터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선물을 받았다는 한국정부측의 주장과는 달리 "1974년 정월 문세광은 김호용으로부터 과실주와 조총련 중앙본부 한덕수의장 명의의 연하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문세광의 거사비용과 관련해서도 일본정부측은 "문세광이 1974년 8월 1일 자신의 처에게 15만엔의 저금통장을 주고 약 60만엔을 갖고 한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고 수사결과에 명시해 문세광이 "스스로" 마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범행동기에 대해서도 문세광이 유서에 <김대중 선생 사건, 유엔총회 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혔으며 그 자신이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고 일본정부측은 풀이했다
범행 결심과 실행을 문세광 개인에게 맞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문인지 일본정부 측은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김호용에 대해서는 강제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요시이 미키코에 대해서는 여권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보석으로 풀어줬다

(3)일본지역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
북한정부는 4.19혁명 후 노동당 <3호청사>내 대남공작부서 중 통일전선부 조국통일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1964년 무렵 남한지역에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68년 경 간첩 김종태등을 검거 된 후 와해되었고 그후에도 북한정부는 세계 각국 북한정부 비공식조직으로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조직 설치하여 반미투쟁과 대남공작활동을 해왔다
일본지역 통일혁명당 대표부가 1960년 후반기 창당하였고 1986년 8월 8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칭하였다
문세광이가 활동한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북한정부 <3호청사> 통일전선부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인지가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통일혁명당(한민전)이 남한지역 친북 김일성주의자들의 모임이고 투쟁 단체이다
박정희정부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저격사건 이전에 남북협상으로 김성주와 이후락 남북회담이 추진되었고 남북냉전분위기보다는 화해분위기었다 남북화해분위기에서 유신헌법 공표와 유신선거로 남북냉전분위기로 전환과정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김대중구출대책위원회를 주도한 단체었다

3.문세광 자료
(1)문세광 재판 장면 사진과 육영수 여사 저격당시 장면 사진 자료
http://kr.blog.yahoo.com/mrtry7228/1360111.html?p=1&pm=1
(2)1970년대 검찰 주요 사건 자료
http://www.sppo.go.kr/intro/his_main0314.htm
-1970년 3월 17일 정인숙 여인 살해사건 발생 그리고 서울지방검찰청 4월 20일 범인 정종욱(정인숙의 친오빠)등 2명 기소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선포(10월 유신)
헌법일부 조항의 효력정지와 12월 27일 제7차개헌 유신헌법 제8대 박정희대통령 취임
-1974년 8월 15일 비상조치 시국에서 육영수여사 사망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발생 육영수 여사 사망, 서울지방검찰청 1974년 9월 12일 범인 문세광 기소.
(3)긴급조치와 육영수
http://user.chol.com/~songwoo/driyg253.htm
(4)공개문서로 재구성한 "박대통령 저격순간"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40301000020050120052527K1.html
(5)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 문서발췌
A.발췌1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30000000020050120091405K0.html
B.발췌2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40301000020050120094826K5.html
(6)문세광 저격사건 5대 의혹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120/020100000020050120052329K8.html
A.육영수 여사, 과연 문세광 총에 맞았나
-사건당일 현장에서 발사된 총성을 7발 그 중에서 문세광 5발이 장착되는 스미스 웨슨(일명 리볼버) 권총을 사용했고 범행 뒤 한발이 권총 약실에 남아 있어 모두 4발을 발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대법원의 문세광 사형판결문도 문세광이가 발사한 1탄은 오발(자신의 허벅지), 2탄은 연단, 3탄은 불발, 4탄은 육영수 여사, 5탄은 태극기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불발탄이 권총 약실에 남아 있었고 따라서 권총이 안울렷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사본부 요원이었던 고(故) 이건우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은 사건발생 15년이 흐른 지난 1989년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뒤집는 증언을 했다
그는 "현장검증 전(前)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 갔다"며 탄흔에 기초해 제1탄을 오발, 2탄은 연단, 3탄은 태극기, 4은 천장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비교해 보면 일치하지 않는 한 발을 두고 수사발표에서는 육영수 여사를, 이건우 계장은 천장을 맞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극장을 크게 울렸던 7번의 총성 중 문세광에 의한 것이 아닌 나머지 3발을 과연 누가 어디에서 쐈느냐가 완전 규명되지 않았다
경호원이 쏜 총탄이 합창단원 장봉화양을 맞췄지만 나머지 두 발의 <행적>이 묘연한 것이다 당시 탄착지점은 오발로 인한 문세광씨 자신의 허벅지, 육영수 여사, 합창단원 장양, 연단, 태극기, 천장등 모두 6군데였다 수사발표에서의 7번의 총성과는 다르지만 불발탄을 계산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수사발표대로하면 경호원이 쏜 총탄 중 2발은 천장과 장양을, 이건우 계장의 주장대로라면 제3자의 총탄 중 2발은 장양과 육영수 여사를 향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B.제3의 저격수가 있었나
육영수여사는 관객선에서 바라봤을때 연단의 우측에 앉아 있었다 문세광이가 행사장 좌측 뒷자석에서 앞으로 뛰어가며 총탄을 발사했기 때문에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영수 여사의 머리는 좌측으로 기울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격 뒤 육영사 여사의 머리는 우측으로 넘어와 있었다
제3의 저격수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는 대목이다
또 문세광의 저격 뒤 무대 왼쪽에서 한명이 단상 위 육영수 여사 뒤쪽으로 뛰어올라가 육영수 여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뒤로 숨는 뜻한 모습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한명이 앞서 올라간 사람 뒤에서 권총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총구가 육영수 여사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C.문세광의 1974년 8월 6일 KAL로 김포공항으로 입국 후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박정희대통령저격 순간까지 10여일간의 국내 거주 의혹
문세광은 10일여간 기간동안 한국에서 무엇을 했을까
D.출입비표 없이도 대통령 행사장에 들어갔다?
-청와대 경호과장이 검문완화 지시를 전날 내렸고 극장 로비에서 문세광씨가 청와대 경호계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던 문세광씨가 비표도 없이 차량을 행사장에 진입시키고 극장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혹을 남기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문세광씨가 김포공항으로 입국할때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스에 숨겨온 권총이 적발되지 않았고 일본인 명의의 위조여권을 사용했는데도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혹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E.너무나도 다른 한일(韓日) 수사결과 발표 내용
F.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 있나
문세광씨는 당초 한국정부를 지지하는 민단 산하단체였던 한청에서 활동했고 이후 민단이 김대중씨와 연결된 한민통으로 분리됐고 한청 역시 한민통 산하단체로 변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정한 직업이 없던 문세광씨가 어떤 세력에 의해 포섭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7)<박정희 저격사건 문서공개> 문세광 행적
http://www.donga.com/fbin/output?rellink=1&code=a_&n=200501200316
-김호용. 요시이 미키코 사진 소개
(8)박정희 저격 사건 사진
http://photo.donga.com/user/themepro/theme_view.php?nude_code=20050121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