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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러, 최대 규모 수감자 교환 이면엔 치열한 '외교전' 본문
서방과 러시아 간에 전격 성사된,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인 수감자 24명의 교환 이면에는 미국과 러시아, 유럽 여러 나라의 최고 권력자와 외교관, 정보기관의 치열한 외교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여러 관계국 정부의 역할 못지않게 러시아에 수감돼 있던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에반 게르시코비치(32) 기자 모친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협상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불씨가 됐다고 WSJ이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 러 군수품 생산 취재하다 '스파이 혐의' 체포
보도에 따르면 게르시코비치 기자의 모친 엘라 게르시코비치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백악관에 도착했다.
회의 참석에 앞서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해선 안 된다는 백악관 측의 당부가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 에반 게르시코비치 기자는 러시아의 구금 시설에서 풀려나 러시아 관용기를 타고 튀르키예로 향하고 있었다. 서방과 러시아 간 수감자 교환이 이뤄지는 제3국으로 채택된 곳이었다.
게르시코비치 기자는 지난해 3월 말 취재 목적으로 러시아 우랄산맥 동쪽 도시 예카테린부르크를 방문했다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체포됐다.
러시아 검찰은 그가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시를 받고 군수 업체의 비밀 정보를 수집했다고 주장했다. 게르시코비치 기자의 결백 주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법원은 지난달 그에게 간첩죄 유죄를 판결하고 징역 16년형을 선고했다.
WSJ은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보낼 탱크들을 놀라운 속도로 재정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취재하기 위해 소식통을 인터뷰할 예정이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러시아 군수품 생산 관련 소식은 친정부 매체들도 자랑스럽게 공개적으로 다루던 내용이었다면서 러시아 당국이 그를 근거 없이 부당하게 구금했다고 비판했다.
◇ 게르시코비치 석방될 때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라탄 '푸틴의 남자'
게르시코비치 기자가 풀려날 무렵 독일에서 수감 중이던 러시아 정보기관 출신 바딤 크라시코프가 튀르키예의 VIP 공항 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다.
크라시코프는 2019년 독일 베를린에서 조지아 출신인 전 체첸 반군 지도자 젤림칸 칸고슈빌리를 살해한 혐의로 2021년 독일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크라시코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콕 집어' 석방을 원했던 인물로, 게르시코비치 기자와 더불어 이번 수감자 교환의 핵심 인물이었다.
게르시코비치는 푸틴 대통령과 과거 사격장을 같이 방문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서방 정보당국자들이 그가 과거 푸틴 대통령의 개인 경호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정도로 푸틴 대통령이 특히 아끼는 인물로 보고 있다고 WSJ은 전했다.
일부 러시아 전문가는 그와 푸틴의 관계가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을 지냈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하고 있다.
크라시코프는 수감 시절 교도관에게 "러시아는 나를 감옥에서 썩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 크라시코프 석방 원하는 푸틴…미묘한 WSJ 기자 체포 시기
사실 크라시코프 석방을 위한 러시아 측의 노력은 게르시코비치 기자가 구금되기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러시아는 지난 2022년 미 해병 출신 폴 휠런과 크라시코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문제는 크라시코프가 미국이 아닌 독일에 수감 중이었다는 점이었다. 당시는 독일과 미국 모두 이 같은 수감자 교환 요구가 터무니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크라시코프 석방을 위한 러시아의 노력을 집요했다. 그들은 독일이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3월에도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이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에게 푸틴 대통령이 여전히 휠런과 크라시코프의 교환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WSJ은 "바이든 행정부가 크라시코프를 휠런과 교환할 생각이 없다면, 아마도 미국 주요 신문사의 특파원이라면 교환 의사가 있을 것"이라는 게 푸틴 대통령의 생각이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게르시코비치 기자가 체포된 시점은 보르트니코프 국장이 번스 국장에게 수감자 교환 의사를 다시 전달한 지 정확히 2주 뒤였던 것이다.
◇ "러 저항의 상징 '나발니' 석방 요구하자"…구글 전(前) CEO도 나서
게르시코비치 기자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부당하게 수감됐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실제로 게르시코비치가 정부를 위해 일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미 당국이 확인하고서부터 미 정부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저 카스텐스 미국 인질 문제 담당 특사는 곧바로 미국에 거주하는 불가리아 출신 탐사보도 기자인 크리스토 그로제프를 만나 수감자 교환 대상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그로제프는 크라시코프가 베를린에서 암살 범행을 저질렀을 당시 그의 신원을 처음 보도했을 정도로 러시아 비밀요원 취재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와도 친분이 있는 그는 다큐멘터리 '나발니'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로제프는 휠런과 게르시코비치 기자 외에 나발리를 교환 대상자 목록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했고, 이 아이디어는 이후 급물살을 탔다고 한다.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도 나서 나발니를 교환 대상에 포함하면 독일도 교환에 응할 수 있다고 바이든 대통령을 설득했다.
◇ 독일 '암살자 석방'에 난색…'나발니 포함' 협상안에 결국 찬성
최대 난관은 독일 정부를 설득하는 문제였다. 독일 외교당국은 살인죄로 수감 중인 전문 암살자 크라시코프의 석방에 계속해서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특히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은 크라시코프를 석방하는 전례를 만들면 러시아나 그외 독재국가들이 자신이 원하는 서방 수감자를 돌려받기 위해 더 많은 서방 인사들을 구금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독일 쪽 파트너와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독일 정부 내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면서 수감자 교환 논의가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게르시코비치 기자의 모친 엘라는 미국의 보수 성향 매체인 폭스 뉴스에 출연해 "아들이 구금된 지 250일이 지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대가가 무엇이든 해야 할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바이든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극우 논객 터커 칼슨도 지난 2월 푸틴 대통령을 인터뷰하면서 게르시코비치 기자의 석방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돼 있으나 양국 특수 기관 간에 특정한 조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터커 칼슨의 푸틴 인터뷰가 공개된 2월 초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워싱턴DC로 날아가 보좌진 없이 바이든 대통령과 둘이서만 회담하고 크라시코프를 나발니, 게르시코비치, 휠런과 교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수감자 교환 방안에 합의했다.
◇ 나발니 사망으로 협상 물거품 될 뻔…모친의 간청이 협상 재개 '촉매'
수감자 교환 협상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될 무렵 유럽 최대 안보 분야 국제행사인 뮌헨안보회의(MSC)가 개막하던 2월 16일 나발니가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푸틴의 숙적이었던 나발니의 갑작스러운 옥중 사망 소식은 그의 석방 협의가 막 시작된 무렵이어서 시기적으로도 미묘했다.
나발니 동료인 마리아 페브치흐는 "푸틴 대통령은 나발니가 석방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발니가 협상 막바지 단계에서 살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수감자 교환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나발니의 사망으로 교환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엘라가 다시 나선 것도 이 시기였다.
지난 4월 백악관 출입 기자 만찬에 초청된 엘라는 숄츠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을 진전시켜 달라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간청했다.
엘라의 간곡한 부탁에 이틀 뒤 바이든 대통령은 숄츠 총리에게 서한을 보냈고, 미국 대통령의 공식 서한은 협상 논의가 다시 힘을 받는 원동력이 됐다.
미국과 러시아의 정보 당국자들은 6∼7월에 걸쳐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으며,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서 "이제 거의 다 왔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최종 타결된 협상 내용은 규모와 복잡성 면에서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고 WSJ은 전했다.
러시아에서 풀려난 서방 수감자는 게르시코비치를 포함한 16명이었고, 동시에 서방에 붙잡혀 있던 8명이 러시아로 풀려났다. 그중에는 푸틴 대통령이 석방을 원했던 크라시코프도 포함됐다.
서방·러, 최대 규모 수감자 교환 이면엔 치열한 '외교전' | 연합뉴스 (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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