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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도, 국방 파트너십 협약 서명 본문
"인도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를 존중하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입장에서 국내외정책 수립과 추진이 필요합니다."
영국과 인도가 22일 새로운 국방 파트너십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이날 협약에 서명한 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우리의 새롭고 확장된 국방, 그리고 안보 파트너십은 인도가 인도 국내 방위 산업뿐만 아니라 인도-태평양의 핵심 공동 이익을 방어하는 역량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존슨 총리는 또 모든 방면에 걸쳐서 영국과 인도의 관계를 강화하는 아주 훌륭한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양국이 서명한 국방 파트너십의 구체적인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존슨 총리는 양국이 육지와 바다, 공중, 우주와 사이버를 넘나드는 위협에 대응한 방위 조달에 있어서의 협력에 동의했다며 여기에는 신규 전투기 기술에 대한 협력과 바다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대응과 탐지를 위한 해양 기술 등이 포함된다고 밝혔습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두 정상이 회담에서 몇 가지의 역내 그리고 국제 발전에 대해 논의했다며 자유롭고 열린, 그리고 포괄적이고 규칙에 기반한 인도-태평양에 대해서 강조했다고 말했습니다.
모디 총리는 또 양국이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면서 양측 모두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고 갈등을 끝내기 위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전했습니다.
VOA 뉴스
-중국은 이 분쟁의 결과로 전바오 섬과 그 주변을 점령했으나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969년의 위기는 소련이 중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중국 역시 소련의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점령해서 당시에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조약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제국주의 미국'과 '수정주의 소련'의 두 적대적인 초강대국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마오쩌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고립을 인정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내밀던 유화의 손길을 잡게 되었다. 중국의 생각에 의하면 소련군이 미군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1971년, 미국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인 1979년에는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일본 + 인도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소련은 소련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단 소련의 전술, 전략적 우위가 확보되었고 고질적이었던 중소국경의 불안정한 상태는 해소되었으나 브레즈네프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서유럽을 향한 유화정책이 강화되었고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선으로 1969년 9월 서독 총리로 당선된 빌리 브란트와 회담, 1970년 8월 12일, 서독-소련 불가침 협정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서독이 폴란드의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하게 하였다. 1971년 9월, 서방도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SALT 협정, ABM 조약이 체결되는 등 한동안 순풍이 불었으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틀어졌고 브레즈네프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빌리 브란트가 귄터 기욤 사건과 성추문으로 사임함에 따라 난황에 부닥쳤다. 결국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소 관계는 끝내 틀어지고 데탕트는 종식되었다.
인도, 러시아제 S-400 내달 중순 중국 접경에 배치 완료
인도군은 러시아에서 도입한 S-400 트리움프 방공미사일을 내달 중순까지 국경 분쟁을 빚는 중국과 접경 지역에 배치 완료한다고 동망(東網) 등이 3일 보도했다.
매체는 인도군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러시아제 최신예 방공미사일 S-400 시스템을 중국 국경에 가까운 펀자브주 공군기지에 설치하는데 앞으로 6주 정도면 충분하다고 전했다.
당국자는 S-400 방공미사일 1차 배치를 진행 중이라며 중요 부품과 방공미사일 시스템의 주변 장치를 운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S-400 배치가 끝나면 방공미사일 작전 범위가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으로 확대한다고 설명했다.
인도는 2018년 10월 러시아와 5억 달러(약 5970억원) 규모 S-400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앞서 인도 외무부는 지난달 초 러시아 측이 인도에 5개 포대의 S-400 시스템을 공급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인도의 S-400 도입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제재를 경고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17년 입안한 '적대세력 대응 제재법(CAATSA'에 근거해 인도에 제재를 가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같은 S-400을 들여온 터키에는 제재 조치를 취했다.
S-400 시스템은 러시아 알마즈 안테이가 설계 생산했으며 최대 400km 거리, 고도 30km 이내 목표물을 요격 파괴하는 성능을 갖추고 있다.
항공기, 순항 미사일, 탄도 미사일은 물론 스텔스 전투기도 포착, 격추 가능하다는 평가다.
인도-중국 카슈미르 라다크 충돌...최소 20명 사망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인도와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 국가 중국 충돌은 종교분쟁보다는 국정(國政, 국가체제)의 대결 때문이다'
인도가 지난 15일 히말라야 인도-중국 접경 지역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로 적어도 인도군 20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생한 인명 피해는 해당 국경지역에서 45년 만에 처음 발생한 것이다
인도군은 화요일 오전 라다크 지역 갈완 계곡에서 중국군과 격렬한 충돌이 빚어져 자국 군인 3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요일 오후 추가로 부상 군인이 17명이 숨졌다며 최소 20명의 군인이 사망했다고 정정했다.
중국군은 피해 상황을 함구했지만, 인도군이 국경을 넘었다며 책임을 떠넘긴 바 있다.
BBC 외교 특파원 제임스 로빈스는 히말라야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는 두 나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며, 둘 다 핵보유국이라는 점에서 전쟁으로 이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고 말했다.
카슈미르 내 라다크 지역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나라의 오랜 영유권 다툼의 중심에 서왔다.
발생 경위
인도군은 화요일 오전 라다크 지역에서 일어난 충돌로 자국 대령 1명과 병사 2명 등 3명이 라다크 지역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이후 총 17명의 군인이 추가로 사망해 총 사망자 수가 20명으로 늘었다고 추가 발표했다.
인도는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자국 군대를 공격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중국 외교부 자오리젠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인도군이 15일 두 차례 국경을 넘어 도발"하여 심각한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고 말했다고 AFP 통신은 전했다.
'총격은 없었다'
두 나라는 모두 병사들이 총격을 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라다크 국경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총격 사건이 발생한 건 40년 전이었다.
총격 없이 어떻게 이러한 참혹한 사망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돌과 막대기가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지 언론은 인도 군인들이 "두드려 맞아 죽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국경 분쟁...왜?
라다크는 인도 북부 카슈미르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중국과 인도는 이 지역의 국경 문제로 1962년 전쟁까지 치렀지만, 국경을 확정 못 하고 대신 실질 통제선(LAC)을 설정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강, 호수, 눈길 등을 기준으로 통제선이 그어진 탓에 경계가 변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두 나라 군인들은 늘 긴장 상태를 유지했고 때때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로 지난 2017년에도 중국이 분쟁지역인 고원 쪽으로 국경 도로를 연장하려고 하면서 이 지역에서 충돌이 있었다.
중국은 인도가 군사 이동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도로를 건설한 것에 대해 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BBC 남아시아 에디터 암바라산 에티라잔은 국경 지역에서 군인들이 서로 밀거나 돌을 던지는 등의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수틱 비스와스, BBC 인도 특파원
두 핵보유국은 이 3440km에 걸친 토지를 어설픈 경계선에 의지해 나누어 지배하며 지내왔다.
두 나라의 국경수비대는 서로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이는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다만 총알은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발사되지 않았다.
이것이 몇 달간의 갈등 고조 끝에 지난 일요일 밤 일어난 충돌이 놀라웠던 이유다.
결과가 어찌 됐던 이번 사건은 인도 내 반중국 정서를 자극해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크다.
또 이미 코로나19 확산과 경제 위기 탓에 고생 중인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그의 정권의 외교 안보 정책에도 큰 도전이 될 것이다[BBC 뉴스 코리아]
중국-인도 충돌, 인도군 20명 사망
인도군은 인도 북부 라다크 지방의 국경 분쟁 지대에서 15일 인도군과 중국군이 충돌해 인도 측 장교와 병사 20명이 숨졌다고 16일 밤 발표했습니다.
인도 외교부는 성명에서 “중국이 일방적으로 현상 변경을 시도한 결과 충돌이 발생했다”며 “중국이 합의를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던 희생자가 나왔다”고 비난했습니다.
양국은 2013년에 서로 군사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합의했으며, 인도 언론은 군 관계자의 말을 빌려 충돌이 발생하면 돌을 던지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중국 외교부의 자오리젠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인도군의 부대가 15일 두 차례에 걸쳐 경계선을 넘는 위법 활동을 벌이며 중국 측에 도발과 공격을 감행한 결과 충돌로 이어졌다”고 밝힌 뒤 인도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며 인도를 비난했습니다.
양국은 지난 1962년, 국경선 등을 놓고 무력을 행사한 뒤 국경 분쟁 지대에서 충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달 상순부터는 양국 군의 병사가 대치를 계속하는 가운데 일부에서 소규모 충돌이 발생해 부상자도 나온 바 있습니다.
인도 언론에 따르면 양국의 충돌로 인해 인도군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1975년에 4명이 숨진 이후 45년 만으로, 국경 분쟁 지대를 둘러싼 양국의 긴장이 한층 고조될 것으로 우려됩니다.
중소 국경 분쟁
중소 국경 분쟁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국경인 아무르강과 지류인 우수리강 유역의 영유권을 놓고 1969년에 벌인 국경 전쟁을 말한다.
1969년 3월 2일,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군사 충돌은 9월 11일까지 계속됐다. 이는 영토 문제 뿐만 아니라 스탈린 사후 심화되었던 중·소의 대립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1.발단
1956년 헝가리 반소봉기가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맹주국이라는 소련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게다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비난하고 중국 내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일어나자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 이후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을 외치던 소련을 본 마오쩌둥은 소련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런 노선주의 논쟁으로인해 1960년대 이후로 소련과 중국간의 군사/과학/교육적 교류는 완전히 단절되고 특히 1960년 8월에는 중국 내에서 체류 중이던 소련 군사고문, 과학기술자들이 전면 철수하게 되고 마오쩌둥 역시 소련 내의 중국 유학생들을 귀국시키면서 표면화되었다. 중국과 소련은 양측을 준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국경지대에는 군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진먼 섬 포격전과 관련한 소련의 소극적 대응과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양국간의 입장차이로 인해 사이는 더욱 경색되었고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중국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어 마오쩌둥과 그의 측근들 입장에선 우려될 만한 사안이였다.
2.전개
우수리 강에서 발생한 홍수 때문에 전바오섬의 국경지대는 불명확해졌고, 중·소 양국 국경 수비대원들 간의 말다툼이 1969년 3월 2일 16시 12분에 양측 간의 몸싸움으로 번졌다. 중국 국경수비대원들이 소련군의 복싱에 밀리자 중국군은 특수부대원들을 동원해 봉술로 소련군을 제압했고, 소련군은 봉을 무기로 판단해 중국군을 총격으로 사살해 양측간의 난투극은 총격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3월 12일에 중국군 3개 소대 병력이 2개 소대 규모의 소련 국경 수비대를 기습하였으나 60여 명의 병력과 6대의 BTR 장갑차를 동원해 반격한 소련군에 크게 패하여 소련군이 14명 사망하고 중국군이 30명 넘게 사망하였다. 3월 15일에는 10대의 T-62 전차와 14대의 장갑차에 100여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소련군 제병합동부대의 기습에 85mm 대전차포와 59식 화전통으로 대응하던 중국군 보병부대가 소련군의 BM-21 로켓포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2일부터 2주 동안 벌어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공식 사망자는 59명이었고, 중국군의 사망자는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로 인해 중·소 국경지대에는 소련군 병력 65만 명과 중국군 병력 81만 명이 집결해 대치하였고,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은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포함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지시하였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핵방공호 건설을 지시하고 수도를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할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중국은 4월에 9차 당대회를 소집해 소련에 대한 후속 대응을 논의한 후 5월에 소련에 협상을 요청했지만, 7월 8일에 헤이룽 강 지역에서도 양국간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8월 13일에는 수백 명의 소련군이 헬기와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3.협상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자 1969년 9월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은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1987년 2월부터 국경 협상을 시작하였다. 양국은 4년여의 협상 끝에 소련 붕괴 7개월 전인 1991년 5월 16일에 강동육십사둔을 소련의 영토로 인정하고 전바오섬 등 우수리강의 하중도 대부분을 중국 영토로 확정하는 동부국경협정(東部國境協定)을 체결하였다. 이어 1994년에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관한 국경 협정 서부국경협정(西部國境協定)이 체결되었다.
2000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남은 유일한 국경 문제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수지점에 위치한 헤이샤쯔 삼각주(러시아 명: 볼쇼이우수리스키섬)였다. 양국은 2004년 10월 14일 이 곳을 양국이 동·서로 2등분하는 국경협정을 체결했고 2005년 6월 2일, 이 협정의 비준서(批准書)가 교환되는 자리에서 두 나라의 외무장관인 라브로프와 리자오싱은 두 나라 사이의 국경 분쟁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발표하였다. 2008년 10월 14일 경계비를 세우는 작업을 완료함으로써 국경 분쟁을 종결하였다.
4.영향
중소 국경 분쟁의 여파로 중국은 미국과의 국교(國交) 회복에 나서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1979년 1월 1일에 미국과 수교했다. 이는 소련군의 취약함도 원인이 되었다. 당시 조잡한 품질로 악명이 높았던 중공군을 소련군이 서류상 전력처럼 이기지 못하고 일시적으론 패퇴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오오무라 다이지로는 이 분쟁에 대해선 중국을 소련보다 높이 평가하며 일본도 무력으로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소련은 중국을 핵으로 위협하여 다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데 간신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인해 소련 군부는 결국 중국과의 전면전 계획을 철회한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파키스탄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인도는 중화인민공화국 견제를 위해 소련과 군사적 협력에 나서게 된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사이가 악화되는 것을 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때부터 주체사상을 강조하면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어느 한 쪽에 편승하지 않는 대신에 독자적인 노선을 밟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친미혐소 정책, 소련은 친미반중 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1)미중접촉과 중소의 계속된 대립
중국은 이 분쟁의 결과로 전바오 섬과 그 주변을 점령했으나 굉장히 충격[10]을 받았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969년의 위기는 소련이 중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중국 역시 소련의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점령해서 당시에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조약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제국주의 미국'과 '수정주의 소련'의 두 적대적인 초강대국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마오쩌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고립을 인정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내밀던 유화의 손길을 잡게 되었다. 중국의 생각에 의하면 소련군이 미군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1971년, 미국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인 1979년에는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일본 + 인도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소련은 소련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단 소련의 전술, 전략적 우위가 확보되었고 고질적이었던 중소국경의 불안정한 상태는 해소되었으나 브레즈네프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서유럽을 향한 유화정책이 강화되었고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선으로 1969년 9월 서독 총리로 당선된 빌리 브란트와 회담, 1970년 8월 12일, 서독-소련 불가침 협정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서독이 폴란드의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하게 하였다. 1971년 9월, 서방도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SALT 협정, ABM 조약이 체결되는 등 한동안 순풍이 불었으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틀어졌고 브레즈네프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빌리 브란트가 귄터 기욤 사건과 성추문으로 사임함에 따라 난황에 부닥쳤다. 결국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소 관계는 끝내 틀어지고 데탕트는 종식되었다.
(2) 린뱌오의 몰락
한편 이 사건으로 가장 피해자가 된 것은 국방장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 공인받는 과정에서 군의 영향력을 과시함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이 중국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외교에 관한 문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소 위기가 중국에 엄청난 피해와 민중의 불만을 야기하자 마오쩌둥은 모든 원인이 린뱌오가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린뱌오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1970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에서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한 린뱌오와 천보다는 장칭과 장춘차오에게 난타당했으며 마오쩌둥이 군부 지도자와 당내 이론가의 연합이라는 보나파르티즘의 징조를 보고 크게 경계하여 장칭과 장춘차오를 지지하고 천보다를 숙청해버림으로써 린뱌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971년 미중접촉이 시작되자 린뱌오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고립주의자, 대국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 대열에서 사실상 탈락했고 마오쩌둥은 계속 천보다 비판대회를 여는 한편 린뱌오의 측근들이 분파주의자라고 질타하고 린뱌오의 권력기반인 베이징 군구를 개편하여 린뱌오의 권력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군내에서도 당내에서도 입지가 심각하게 축소된 린뱌오가 비군사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가뜩이나 삐돌이 심약한 기질이 있던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자아비판 요구를 묵살하고 북대하의 요양소에 칩거하여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준비하게 되고 결국 끔살당하게 된다.[친소주의자 린뱌오의 몰락이다]
(3)북한 경제 몰락의 시작
한편 이 중소국경분쟁의 여파가 엉뚱한 결과를 낳았으니, 바로 북한 경제가 몰락하는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들어서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개발 계획이 잘 풀렸다. 이미 1960년 북한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 액수)는 137달러로 남한의 94달러에 비해 1.5배였다. 다른 추계방식으론 북한의 GNP는 325달러로 남한의 3.5배였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는 기치 아래 벌인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 등 농촌 4화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북한은 당시 경작지가 남한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에서는 남한을 훨씬 앞서 있었다. 이토록 경제 상황이 좋자,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머지않아 모든 인민들이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 이유로 1960년대 초반 박정희는 북한의 이런 경제 성장을 경계하면서, 북한 경제를 따라잡을 것을 국가 목표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저런 북한 경제에 1960년대 중반부터 큰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1964년부터 중국과 소련이 서로 사회주의 노선 변경 문제로 인해 시비를 벌이면서 국경 분쟁에 돌입했는데, 북한은 기술은 소련에서 식량은 중국에서 얻어오는등 이런식으로 중립 외교를 했다. 그리고 혹시 둘 중 하나가 북한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일까봐 두려워하여 군사비를 크게 늘렸다. 여기에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편들 수 없다는 약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북한의 국방비가 19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북한은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당초보다 3개년 연장하는 수정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팝,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영원히 날아간 것이다.
5.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면?
외내몽골은 소련의 자치주로 승격 되고 중국의 내몽골, 동투르키스탄, 만주까지 소련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소련과의 갈등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홍위병들의 공격에 크게 위축되었던 상황이며 많은 장교진들이 숙청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59식 전차도 충분한 수량이 배치되어있지 않아 기계화가 덜 되었다. 반면, 소련군은 전부대가 기계화 부대였으며 장비의 질도 중국을 앞서고 있었다. 이전 분쟁에서 이미 선보였듯이 중국군을 압도하는 화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덤. 즉, 전면전이 발생했다면 중국은 내몽골 자치구와 만주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으로 소련군 기계화 부대의 공세 앞에 크게 밀릴 가능성이 큰데다가 중국은 문화혁명이 절정에 이르던때라 홍위병들의 분탕으로 군사, 경제, 과학적으로도 국력이 거의 파산직전에 놓여있었다. 반면, 소련은 역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만 봐도 미군의 95%의 군사력을 지녔을 정도다. 당시로만 보면 기술적으로도 소련이 미국에게 밀릴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육군은 소련이 1위고 해군은 2위 공군은 미국과 소련이 1,2위를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핵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중국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소련에게 경고한 바 있다. 전면전 발생 즉시 미국은 핵무기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의 소련 주요 대도시들과 산업시설을 타격했을 것이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미국에게 핵보복을 가했을텐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만 해도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에 비해 크게 밀렸던 상황이었지만 1969년 기준에선 충분한 수량의 SS-11과 SS-9 ICBM이 배치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미국도 이에 못지 않은 큰 피해를 입고 상호확증파괴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제3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것이다.
중국을 구한다고 핵전쟁까지 불사할 의지가 없었더라도 중국에게 미국이 수많은 지원을 감행하며 소련을 전쟁의 수렁에 빠트리려 했을 것이고 소련군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든 차단하려고 대만을 후원하여 움직이는 등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며 동북아 일대가 전란으로 휩쓸려 일본, 베트남, 북한, 그리고 한국까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극동 연방관구는 러시아를 구성하는 8개 연방관구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의 극동 구역을 관할하며, 본부는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8,371,257명(2010년 기준)이다.
2018년 11월을 기해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속해 있던 부랴트 공화국, 자바이칼 지방이 극동 연방관구로 편입되었다. 2018년 12월에는 본부를 하바롭스크 지방의 하바롭스크에서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했다.
1.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
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의 주이다. 아무르 강과 제야 강에 면해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 공화국, 동쪽으로는 하바롭스크 지방, 서쪽으로는 치타 주와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북동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스타노보이 산맥이 아무르 주와 사하 공화국에 걸쳐 있다. 면적은 36만3,700 km², 인구는 90만2,844명(2002년).
2.부랴트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수도는 울란우데이다. 국기에도 몽골 국기처럼 소욤보 문장이 들어있다.
3.유대인 자치주 (猶太人自治州)
유대인 자치주 (猶太人自治州)는 러시아의 극동에 위치한 자치주이다. 이 지역은 "예브레이(Yiddish)“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칭된다. 유대인을 위해 설치한 자치주이나, 현재는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인이며 그 다음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다. 주청(州廳) 소재지는 비로비잔이다. 면적은 36,266km²이며, 인구는 17만 6558명이다.(2010년)
4.자바이칼 변경주
자바이칼 변경주는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극동 연방관구에 위치해 있다. 중심지는 치타 주의 주도였던 치타이다.
아무르주와 이르쿠츠크주, 부랴트 공화국과 사하 공화국, 남쪽은 몽골에 , 남동쪽으로는 중국의 내몽골자치구에 접해 있다. 2008년 3월 1일에 치타 주와 아긴스크부랴트 자치구가 통합해서 생겨났다.
5.캄차카 변경주
캄차카 변경주은 캄차카 주와 코랴크 자치구가 통합되면서 신설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2005년 10월 23일에 주민투표로 통합이 결정되었고, 2007년 7월 1일에 통합되었다. 주도는 캄차카 주의 주도였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이다.
6.마가단주(Магада́нская о́бласть)
마가단주(Магада́н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의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 주이다. 주도는 마가단이다.
면적은 461,400 km²이고, 인구는 18만2,726명이다.
7.프리모르스키 변경주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², 인구는 207만 1,210명(2005년 기준)이다.
8.사하 공화국
사하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극동 연방관구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러시아 극동이 아닌 시베리아에 속한다. 러시아의 여러 행정 구역 중 가장 넓고,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행정 구역 중에서도 면적이 가장 넓은 행정 구역이기도 하다. 중심 도시는 야쿠츠크다.
9.사할린주
사할린주는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관할하는 러시아의 주로, 면적은 87,100km2이며 인구는 546,695명(2002년 인구 조사 기준)이다. 주도는 유즈노사할린스크이다.
10.하바롭스크 변경주
하바롭스크 변경주는 러시아의 변경주로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다. 중심지는 하바롭스크이다. 면적은 788,600km²이다.
11.축치 자치구
축치 자치구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자치구이다. 북동부의 최동단에 위치해 있으며, 베링 해가 위치해 있다. 면적은 737,700 km² 이고 53,00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행정 중심지는 아나디리이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르스키 변경주(沿海州)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², 인구는 207만 1,210명(2005년 기준)이다.
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로 꼽힌다. 이 만의 후미인 졸로토이로크('황금뿔'이라는 뜻) 만 연안의 반도에는 이 지구의 행정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권 러시아의 주요항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이다.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몹시 춥고, 4계절 내내 북풍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는 비가 많고 따뜻하다. 남쪽의 우수리 강과 한카 호(중국에도 걸쳐 있음) 주변의 비옥한 저지대에서는 콩·수수·벼 재배가 이루어지고, 채소재배와 낙농도 활발하다.
탄광산업이 여러 도시의 다양한 제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레티호프카와 노보샤흐틴스크에는 노천석탄 광상이 있다. 주석·납·아연·형석도 채굴된다. 북부의 보스토크에 있는 텅스텐 광산은 1970년대에 개발되었다. 해안에는 어업기지와 포경기지가 있고, 시호테알린 산맥에서는 목재가 생산되며, 작은 모피동물이 서식한다.
2015년 기준 인구는 193만 3,308명으로 프리모르스키 지구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85.6%)이었으며, 우크라이나인(2.5%)과 고려인·타타르인·우즈벡인·벨로루스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주요 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토크(60.5만 명) 이외에 우수리스크, 나호트카, 아르티옴및 파르티잔스크등이 있다. 주민의 62.5%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2015).
1.지리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서북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한반도, 동쪽과 남쪽으로 동해와 접한다.
국경의 길이 - 3,000 km 이상, 해상국경 1350 km 포함.
최고점 - 아닉 산 (1,933 m - ).
큰도시 - 블라디보스토크 (613,400명), 나홋카 (174,600명), 우수리스크 (156,000명), 아르툠 (111,500명).
호수 - 한카 호(о́зеро Ха́нка, 興凱湖)가 중국과 러시아 양국에 걸쳐 있다.
2.역사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 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나이, 우데게,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중세봉건국가로, 농업, 목축 등의 산업과 함께 고유의 전통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주족(금나라 여진족의 후신)이 17세기 초 중국 대륙을 정벌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 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였다.(청-러시아 국경 분쟁)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하고, 연해주는 계속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1858년 하바롭스크를 건설하였다.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일, 녹용, 목재, 게,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백군을 전멸시켰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부터 이 지역의 발전은 러시아를 새로 차지하게 된 볼셰비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철도와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3.주민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한국인(주로 고려인,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출신), 일본인, 중국인, 우데게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폴란드인, 타타르족, 독일인, 유대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거주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도시이다. 러시아 극동의 중심지이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행정중심지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인 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제 심포지움과 학술 회의가 자주 열리고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 함대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고래·게 등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선박수리, 목재 가공, 식료품 공업도 있다. 남동쪽의 나홋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개방된 상업항, 어항으로 러시아의 극동을 향하는 제2의 문호이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부가 있는 군항(軍港) 도시이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폐쇄도시였다
1.명칭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60년까지는 외만주가 중국의 영토였고, 해삼위(海參崴)로 불렸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 중국어 발음인 '하이선와이'(Hǎishēnwǎi)라고 부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음차한 푸라디워스퉈커(중국어: 符拉迪沃斯托克, Fúlādíwòsītuōkè)라는 이름도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우라지오스토쿠'(일본어: ウラジオストク)라고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줄여 우라지오(浦鹽)또는포항(浦港) 라고 쓰기도 했다.
2.역사
1858년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와 강제로 아이훈 조약을 체결한 후 항구와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872년에 군항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다. 1918년 봄부터 1922년까지 이 지방은 외국의 간섭군대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원조물자를 이곳에 양륙하였다.
만주를 가로질러 치타에 중동철도(中東鐵道:중국 동부 철도, 1903 완공)가 건설되어 러시아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철도로 직접 연결되자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에서 보낸 군수품과 철도장비를 들여오는 태평양의 주요항구였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여러 혁명집단의 활동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나 1918년에 외국(주로 일본)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20년에 이 도시를 떠났으나 일본은 1922년 10월 25일에 마지막 부대가 철수했다. 외국 군대가 떠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반혁명세력은 바로 무너졌고,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일 뿐만 아니라 무역항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무역항의 기능이 시의 동쪽 약 90km 지점에 신설된 나홋카항으로 옮겨졌다.
2012년 9월 8일부터 이틀간 제 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루스키 섬에서 개최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 회의를 위해 길이 3.1km의 4차선 다리인 루스키 교를 건설했다. 시내와 루스키 섬을 잇는 세계 최장 사장교(斜張橋)이다.
러시아 정부는 2020년까지 2조 루블을 투입해 첨단산업 기지와 경제특구를 조성, 100만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3.지리
연해주 남부에 위치한 표트르대제 만을 아무르스키 만과 우수리스키 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인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길이 30km, 너비 12km)의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위치한 군항 도시이다. 반도 선단의 금각만 연안에 시가지가 있다.
4.기후
블라디보스토크의 기후 구분은 현행 쾨펜의 기후 구분 상에서는 Dwb에 속한다.
한 해 평균 기온 : 4.3 °C
1월 평균 기온 : -13.7 °C
8월 평균 기온 : 20.2 °C
한 해 평균 강우량 : 722 밀리미터
5.계절
(1)봄
봄 동안에는 기온의 변화가 매우 심하다. 하루 기온 변화로 10 ~ 15 °C로 왔다갔다 변한다.
(2)여름
가장 긴 여름은 1967년에 174일, 가장 짧은 여름은 1969년에 116일이었다. 여름에는 봄과 마찬가지로 일기(日氣)의 변화가 심하다.
(3)가을
가을 기온은 건조하고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4)겨울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며 매우 날씨가 춥다. 센 바람 때문에 실제 온도보다 체감 온도가 더 낮은 편이다.
6.주민
이 도시의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민족이다.
1958년에서 1991년까지는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폐쇄된 도시가 되기 이전에 이 도시에는 고려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부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위치해 있다.
7.행정구역
레닌스키 구 (Ленинский)
페르보마이스키 구 (Первомайский)
페르보레첸스키 구 (Первореченский)
소베츠키 구 (Советский)
프룬젠스키 구 (Фрунзенский)
8.교통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은 도시 한복판에서 북쪽으로 50km쯤에 있는 아르툠에 위치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하는 2012년 개통한 아에로 익스프레스라는 철도 노선으로 연결된다.
시내 가운데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점이다.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평양역까지 가는 국제열차가 멈추기도 한다. 또한 동청철도(東淸鐵道)였던 지금의 만주횡단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그리고 포그라니치니를 거쳐 중국의 쑤이펀허를 지나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을 묶는다.
역 바로 앞에는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항이 별도로 위치하게 된다. 흔히 부동항으로 알려진 이 항구는 겨울에 얼기 때문에 쇄빙선(碎氷船)의 도움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잠수함이 전시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여객터미널을 통해 페리로 한국의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 과 연결되어있다.
2012년에 완공된 졸로토이 교가 시내로 길게 뻗은 졸로토이로크만을 가로지른다.
9.관광
우스리스크만(영어판)에는 소련 시절 폐유리병 공장에서 흘러와 쌓인 잔해물들이 침식 작용으로 인해 둥글게 다듬어져 만들어진 유리자갈로 이루어진 유리해변이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현지에서는 부흐따 스떼끌라냐야(Бухта Стеклянная)라 불리는데 직역하자면 유리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유리자갈을 공짜 기념품 삼아 싹쓸이해가는 행태가 지속되었고, 추세대로라면 2040년에는 유리해변이 사라질 지경이다.
10.교육
블라디보스토크는 4개의 대학교를 포함하여 많은 교육 시설이 있다.
극동연방대학교 (북한에서는 "원동 국립 대학교"라고 일컬음) - (줄여서 데베페우,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едераль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ДВФУ)
네벨스코이 명칭 국립 해양 대학교 (Морско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адмирала Г.И. Невельского, МГУ им. адмирала Г.Н. Невельского)
국립 블라디보스토크 경제 서비스 대학교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экономики и сервиса, ВГУЭС)
국립 태평양 의과 대학교 (Тихоокеан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едицин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ГЭ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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