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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의 16년… 전문가들이 평가한 리더십과 유산 본문
오는 26일 독일에선 총선이 열린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시대가 궁극적으로 막을 내리는 날이기도 하다.
16년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는 메르켈 총리를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
BBC가 전문가 4명에게 물었다.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 스타일과 지난 발걸음을 되짚어 봤다.
정치적 유산
매트 포트러프 영국 코벤트리 대학교 정치과학과 교수는 메르켈 총리가 독일 정치판을 '정치'보단 '정책'에 대한 토론장으로 바꿔 놓았다고 봤다.
포트러프 교수는 '앙겔라 메르켈: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저자다.
포트러프: 과거 독일 정치계는 '테스토스테론으로 가득찬 남자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 아래에선 분위기가 한층 정책 중심으로 흘러갔다.
문제는 정치가 상당히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형태가 됐다는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물리학자였고, 양자 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에 대한 접근법 역시 굉장히 사실 기반적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닥 활기 넘치는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일 정치는 물론 세계 정치판에도 혁명을 선보였다.
정치가 양극단으로 흘러갈 때도 그는 문제에서 '정치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샬롯 갈핀, 영국 버밍엄 대학교 독일 및 유럽 정치학 강사: 포브스는 지난 10년 내내 메르켈 총리를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성으로 꼽았다. 덕분에 독일에선 여성 지도자만 보고 자란 세대도 있다.
메르켈 총리의 입지는 여성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여성들을 요직으로 이끌고 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최초의 여성 독일 국방부 장관이자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을 지지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상징적인 인물들이 광범위한 변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비백인 여성들이나 성 소수자 집단에겐 더더욱 그렇다.
독일에선 무슬림 여성들을 겨냥한 공격이 늘고 있고, 성 평등주의에 대한 반발 여론도 거세다. 일부의 의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우 세력인 독일을위한대안당(AfD)만의 목소리도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젠더 관련 언어 문제는 정치적 사안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메르켈 총리는 입을 닫고 있다.
뤼디거 슈미트-벡, 독일 만하임 대학교 정치과학 및 정치사회학 교수: 메르켈 총리의 정치저 유산은 현대화와 퇴보의 기괴한 혼합체에 가깝다.
동성 결혼 법제화나 탈원전, 이민자 수용 정책 등 현대적인 부분들은 사실 보수 우파인 기독민주당 출신 총리에게 기대되던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은 디지털화, 기후 변화 정책, 인구 구성 변화 같은 긴급하고 중대한 문제들엔 크게 뒤처져 있다.
메르켈 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남에 따라 독일의 정치 지형은 한층 더 요동치게 됐다. 이런 상황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는 독일의 정당 체계와 반이민 정서에 기대 세력을 넓히고 있는 AfD 등과 관련이 있다.
물론 메르켈 총리가 이 나라의 첫 여성 총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누가 다음 총리가 되든, 메르켈 총리의 실리주의적인 면과 대통령스러운 통치 스타일이 차기 지도자의 롤모델이 될 거라고 믿는다.
카트린 슈라이터,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 대학교 독일 및 유럽 연구 강사: 메르켈의 정치적 유산은 단호하고 조용하다.
그의 리더십은 명확하고 냉철한 평가와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를 투영하는 데 기반한다. 메르켈 총리는 늘 '미래를 그리는 타입'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메르켈 총리는 상대나 유권자들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데 능하다. 그런 방식으로 국제사회에서 많은 신뢰를 얻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유산은 기독민주당의 정치적 논제들을 한층 중도스럽게 바꿔놨다는 것이다. 그는 이 보수 정치인들을 중도 진영으로 끌고 왔고, 일부 논제는 좌파 녹색당의 성향에 가깝게 만들어 놨다.
총리 재임기의 주요 순간
포트러프: 유로화를 위기에서 건져 내고 2008년 경제 위기에 대처하던 때를 꼽겠다.
당시 벨기에 브뤼셀에서 메르켈 총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경제 위기에 대해 그는 시장 경제에 최대한 힘을 실어주되 필요하다면 정부 개입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1960년대 구호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에게 이같이 말하자 그는 "난 역사학자가 아니라 실용주의자"라고 답했다.
두 번째 순간은 '트럼프 시대' 때다.
메르켈 총리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유지해 왔다.
사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4선 도전을 권했었다. 트럼프 당선 직후 오바마 전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를 만나러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당시 만남 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봤다고 회상했다.
메르켈 총리는 철저히 혼자였다.
독일이라는 배의 항해를 이끌어 왔고, 임무를 마쳤다. 이제 배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갈핀: 메르켈 총리 시대는 '위기의 시대'로 종종 묘사된다.
주요 순간은 난민 문제가 터졌을 때였다. 발칸 반도에 인도적 위기가 들이닥쳤던 그때,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국경을 열었다.
그는 2015년 '우리는 할 수 있다(Wir schaffen das)'는 구호를 내걸고 10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독일은 내전을 피해 고국을 탈출한 시리아인들을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15년엔 AfD가 유로화에 반대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정당에서 극우, 이슬람포비아 집단으로 변모하는 것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AfD는 지난 하원 선거에서 약진하며 1960년대 이래 처음으로 극우 의원들을 탄생시켰다.
슈미트-벡: 세 가지 순간이 떠오른다.
먼저 세계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 메르켈 총리와 당시 재무장관이 시민들에게 '여러분의 예금은 안전할 것'이라며 뱅크런(은행의 예금 지급 불능 상태를 우려해 예금자들이 앞 다퉈 예금을 인출하는 사태)을 막으려 애쓰던 때가 있었다.
다음은 이른바 '유로화 사태' 당시 그리스의 채무 탕감 문제를 두고 유럽 국가들이 협상을 벌였던 순간이다.
마지막으로는 2015년 메르켈 총리가 헝가리에 발이 묶인 난민들을 향해 '독일은 국경을 닫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다.
물론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이 있다. 종종 메르켈 총리가 이민자들을 향해 국경을 활짝 열어줬던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 그는 국경을 연 게 아니라 '닫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슈라이터: 한 가지 순간은 2017년이었다. 메르켈 총리가 동성결혼 법제화를 위한 길을 열었을 때다.
총선 직전 그는 한 여성 잡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때 메르켈 총리는 이 같은 문제들을 위해 표를 던지는 게 '개인 양심의 문제'라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당론에 어긋나는 발언이었다. 몇 년째 계류돼 있었던 법안을 통과시키는 계기가 된 발언이기도 했다. 그의 큰 성취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의 발언은 집권 초기 때 나왔다. 독일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냐는 질문에 메르켈 총리는 이렇게 답했다.
"잘 닫힌 창문을 생각합니다. 그 어떤 나라도 독일처럼 견고하게 닫힌 '훌륭한' 창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겸손함과 실리주의, 굉장히 실용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내겐 그런 것들을 내포한 말로 들렸다.
메르켈의 16년… 전문가들이 평가한 리더십과 유산 - BBC News 코리아
메르켈은 "당에서 민주적으로 결정된 대표를 받아들이겠다"며 차기 당 지도자를 자신이 직접 고르지 않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독일어: Angela Dorothea Merkel, 혼전 성씨: 카스너(Kasner), 1954년 7월 17일 ~ )은 독일의 정치가로 2005년부터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를 역임하고 있다. 독일 제국 성립 이후 최초로 연방총리직에 오른 여성이기도 하다. 동독에서 물리학자로 활동한 후 통일 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헬무트 콜 내각에서 환경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 독일의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의 의장직에 취임한 이후 2005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지만 어느 세력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헝 의회가 발생하자, 메르켈은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2009년 총선에서는 더 보수적인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했지만, 2013년 총선에서는 다시 헝 의회가 발생하여 대연정을 구성하였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그리스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사태 등 국제적 현안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메르켈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2010년을 제외하고, 포브스는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선정하였으며, 2015년 '타임'은 '자유 세계의 총리(Chancellor of the Free World)'이라는 이름으로 '올해의 인물'에 선정하였다
앙겔라는 1954년 7월 17일 함부르크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 어머니는 헤어린트 카스너이며 태어날 때 이름은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였다. 아버지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해, 함부르크 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 라틴어와 영어 교사인 어머니는 사민당 당원이었다.
1954년에 태어나서 몇 주가 지난 메르켈은 부모님과 함께 동독으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당시 동독에 속한 브란덴부르크주 지방의 개신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목사관에서 살았으며, 독일의 재통일 이전에는 공산국가였던 동독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목회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957년부터 동생 마쿠스, 이레네와 브란덴부르크 지방의 작은 도시인 템플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71년 기술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1970년대 초반에 자유독일청년회(FDJ)에 가입한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수학과 어학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러시아어 경시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부터 1978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여 디플롬학위(석사학위에 해당)를 받는다. 1978년 동독 국가보안부(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에서 일자리를 제안 받지만 거절한다. 슈타지는 그녀의 동독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와 정부통제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의사에 따라 운영되는 자유노조를 주장한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 대한 동조적 성향을 기록하고 있다.
1986년 루츠 췰리케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간단한 탄화수소의 반응속도 상수 계산에 대한 내용이며, 제목은 〈양자화학적, 통계적 방법에 기반한 단순결합 붕괴와 그 반응상수 계산 메커니즘에 대한 조사〉 (Untersuchung des Mechanismus von Zerfallsreaktionen mit einfachem Bindungsbruch und Berechnung ihrer Geschwindigkeitskonstanten auf der Grundlage quantenchemischer und statistischer Methoden)이다.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양자화학분야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 동안 그녀는 자유독일청년회 과학 아카데미에서 지구선도위원, 선전부 의장을 지낸다.
그러나 동독의 정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1989년 독일 통일 이전까지는 구 동독 반대 그룹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989년의 격동 중 결성된 민주 개혁(Demokratischer Aufbruch, DA)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후에 대변인이 되었다. 1990년 민주 선거로 성립된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 정권에서 정부 대변인을 맡았으며 1990년 8월 DA와 기민당(CDU)의 합당으로 기민당원이 되었다. 12월에 하원 의원 후보로 뽑힌 그녀는 1991년 1월 헬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 청소년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1993년 6월부터 2000년까지는 기민당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94년 11월 17일 클라우스 툅퍼의 후임으로 환경부 장관이 되었다.
1998년 11월 볼프강 쇼이블레로부터 기민당의 당수 자리를 물려받아 2000년 4월부터 보수 정당인 기민당의 대표로 활동했다. 1999년 겨울 기민당의 암거래 헌금이 발각되자 메르켈은 재빨리 헬무트 콜 전 총리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당원에게 호소했다.(현재는 콜 전 총리와 화해했다.) 2000년 비밀 헌금 문제로 기민당 볼프강 쇼이블레 대표가 물러나자, 후임 대표로 취임했다. 2000년의 시점에서는 기민당 대표 겸 CDU/CSU 연방 의회 의원 단장이라고 하는 쇼이블레의 직위가 대표가 메르켈에, 의원 단장이 메르트 CDU 재무 담당에 따로 인계된 것은 구 동독 출신의 반발이었다. 여성이며, 게다가 이혼 경력이 있는 메르켈은 CDU에서는 비주류 보수인 자유주의자로 간주되었고 보수 주류에서는 회의적인 눈길을 받았다. 톱의 암거래 헌금 의혹에 쇼크를 받은 CDU의 지방 당원·일반 당원이, 보수의 비주류인 메르켈을 보수 주류 및 중도보수층의 대표로 만들었다.
총리 재직
제1기(2005년~2009년)
그녀는 결국 독일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했다.
제2기(2009년~2013년)
2009년에 실시된 독일 하원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하여 성향이 유사한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했으나 금융위기로 인해 그녀의 독일 내 인기가 점점 줄어들고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연정 세력 중 일부가 반란표를 던지는 등 그녀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남유럽 경제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독일의 대유럽 영향력을 한껏 끌어올려 사회민주당보다 앞선 지지도를 유지하였다.
제3기(2013년~2017년)
2013년 9월 22일에 치른 선거에서 기민당은 41.5%의 득표율로 전체 의석 630석 중 311석을 얻었다. 과반 316석에서 5석이 부족하긴 하지만 압승이라 표현해도 무리 없을 성과다. 다만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이 5% 득표율을 달성하지 못하면서 의회 입성에 실패해 기민당은 사민당과 대연정을 했다.
제4기(2017년~현재)
2018년 12월 기독교민주연합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 물리학자인 울리히 메르켈(Ulrich Merkel)과 결혼했으나 1982년에 이혼했고, 1998년 베를린 출신 화학과 교수인 요아힘 자우어와 재혼했다. 재혼 후에도 전 남편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은 러시아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앙겔라 메르켈: 사진으로 본 메르켈의 정치 커리어
오는 26일 독일에선 총선이 열린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16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내려오는 날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가 정치계에 몸담았던 시간은 30년이 넘는다.
선거 유세차 어부들을 만나러 갔던 옛날 어느 날부터 백악관에서 회담을 하던 날까지, '메르켈 정치사'의 매 순간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독일을 이끌어 온 이 여성을 담은 수천 장의 사진 중 몇 장을 추려봤다.
'중부 유럽 지역 > 독일[獨逸,德意志國=德國]'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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