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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 트로츠키와 신(新)트로츠키 본문

-미국 언론-/중국 언론

구(舊) 트로츠키와 신(新)트로츠키

CIA bear 허관(許灌) 2017. 7. 24. 15:52

1940년 8월 22일 세계 주요 언론들의 1면 머릿기사는 당시 숨가쁘게 전개되던 2차대전 전황이 아니었다.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한 러시아 혁명가의 사망 소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일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로부터 피습을 당한 이 혁명가는 절명은 면했으나 25시간 뒤 21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Leib Davidovich Bronstein).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있어 레닌 다음의 공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ii) 바로 그 사람이었다.

혁명 23년 만이었으며 타의에 의해 망명길에 오른 지 11년 뒤였다. 향년 61세.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 11월(러시아 구력으로는 10월) 혁명의 주역이었으며 적군(赤軍)의 창설자였다. 1917년 38세의 이 혁명가는 차르 체제를 붕괴시키고 성립한 임시정부를 유혈 전복, 볼세비키 혁명을 성취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케렌스키 정권의 숨통을 끊기위해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공격을 지휘한 인물이 다름 아닌 트로츠키였다.

레닌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그는 1924년 레닌 사후 동갑인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 1927년 당에서 제명됐고 2년 뒤인 1929년 국외추방됐다.

트로츠키는 뛰어난 조직가이자 실천가일뿐더러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다. 레닌과도 맞서 이론투쟁을 벌였던 그는 마르크스 주의 이론에 충실한 영구혁명론을 주창했다. 동시혁명론으로도 부르는 이 이론은 범세계적인 동시 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적어도 유럽에서만이라도 사회주의 혁명이 계속되야 러시아 혁명이 존속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스탈린은 일국혁명론을 제창했다. 1개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며 이를 기반으로 소련이 혁명의 모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마르크스 이론과는 달리 후진국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취하고 이를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임기응변으로 채택한 현실노선을 체계화한 것이다.

스탈린이 레닌의 현실주의를 쫓았다면 트로츠키는 레닌의 이상주의를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인 트로츠키는 민족과 동일시할 조국이 없었기에 국제주의자가 되었다면 러시아 제국이 병탄한 그루지야 출신 러시아인인 스탈린은 러시아 민족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노선은 훗날 ‘붉은 제국주의’를 잉태하고 있었다.

암살자는 철통 같은 경계망을 뚫고 트로츠키에 접근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가 신뢰한 여비서의 여동생에게 미남계를 쓴 것이다.

암살범은 경계심을 풀고 그가 건넨 문서를 읽는 트로츠키의 정수리를 등산용 아이스 피켈 내리칠 수 있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주도면밀한 트로츠키는 달려 온 측근들에게 범인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배후를 캐기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그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암살범은 멕시코 감옥에서 20년을 복역한 뒤 출옥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7년 뒤이고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이미 있었던 터러 KGB는 그의 입을 막기위해 암살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는 아무 것도 밝히지 않은 채 자연사했다고 한다.

잊혀져 있던 트로츠키와 그의 최후를 더듬어 보게 된 것은 10월 10일 황장엽 북한 노동당 전 비서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모두들 “혹시 암살 ?"하는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1997년 남으로 망명한 뒤 끊임없는 암살 위협이 시달렸으며 최근에도 암살 지령을 받고 위장 탈북한 북한 요원이 당국에 체포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10일은 후계세습의 이벤트가 예고된 북한 노동당 창건일이었다. 황장엽은 권력세습에 대해 비판을 넘어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트로츠키와는 달리 황장엽은 자연사하였다. 올해 만 87세이니 집나이로 치면 88세이다. 건강했다고는 하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나이임이 분명했고 정황으로 보아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연사와 암살이라는 점만 다를 뿐 여러모로 황장엽은 트로츠키를 연상시킨다.

트로츠키가 소련 혁명의 2인자였다고 한다면 황장엽은 북한 김일성 체제의 이념인 주체사상의 수립자이다. 소련 혁명에서 트로츠키의 공적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황장엽이 남으로 망명한 뒤에도 북한은 주체사상을 버릴 수 없었다.

황장엽이 외교업무를 총괄하는 국제담당 비서였던 것처럼 트로츠키는 혁명 직후 외무 인민위원을 역임했다.

트로츠키는 레닌 사후 3년 뒤 당에서 제명됐으며 황장엽은 김일성 사후 3년 뒤 남으로의 망명을 택해 북한 노동당과 결별했다. 트로츠키는 제명 13년 뒤 황장엽은 망명 13년 뒤 사망했다.

트로츠키 제명은 스탈린과의 노선 투쟁의 결과였으며 황장엽의 망명은 김정일과의 노선 갈등이 촉발했다.

1995년 김정일은 선군정치노선을 발표했다. 당이 아닌 군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으로 이 새 이념에 따라 국방위원회가 권력의 중추가 되었고 핵 무기와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가 개발됐다. 선군노선은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는 주체사상과는 얼음과 숯과의 관계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 총구는 핏줄이 통제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황장엽의 주체사상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황장엽은 그 기괴한 동거를 감내할 수 없었다.

황장엽 망명 이후 부인은 자살하고 자식들과 친척, 그리고 측근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숙청을 당했다. 트로츠키는 망명 뒤 4명의 자녀를 앞세웟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딸 1명을 제외한 3명(딸 1명, 아들 2명)의 죽음은 모두 암살로 추정되는 의문사였다. 두 명의 사위와 외손자들도 행방불명됐다. 그리고 그의 측근들 역시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암살 당시 그의 곁에는 부인과 손자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망명지를 전전하는 트로츠키를 암살하기 위해 집요한 시도를 했으며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김정일은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역시 집요하게 황장엽을 암살하려 했다.

스탈린과 김정일의 권력투쟁 승리는 소련과 북한에 혹독한 대가를 가져다 주었다. 스탈린의 강압적 사회주의 추진은 대기근을 유발, 수백만을 아사시켰다. 김정일의 선군정치 노선은 수십 만을 굶어죽이고 탈북사태를 일으켰다. 김정일 체제는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는 군사용어를 붙였다.

트로츠키가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자이고 혁명가였다. 그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혁명론을 체계화했고 스탈린 체제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국외추방 한해 뒤인 1930년 《영구혁명론》을 썼으며 암살당하기 3년 전인 1937년에는 《배반당한 혁명》을 내놓았다.

레닌이 영국에 망명하며 차르체제의 대안을 자임했듯이 트로츠키는 스탈린 체제의 대안적 존재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스탈린은 그런 트로츠키가 살아 있는 한 ‘차르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장엽도 망명 뒤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며 북한 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군노선을 추구하는 김정일 체제를 비판했다. 그 비판의 혹독함은 남한의 그 어떤 극우세력 보다도 매서웠다. 하지만 황장엽은 자신의 기존노선과 사회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황장엽의 망명 동지였던 김덕봉은 황장엽이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바로 한 해 전인 2009년의 일이다. 그는 세습론을 정당화 한 수령론은 주체사상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론적 도치에서 선군노선과 세습승계가 정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황장엽은 공교롭게도 김정일이 자신의 셋째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음을 대외에서 선포하는 이벤트가 있던 당 창건일에 사망했다.

트로츠키의 암살이 2차대전 전황 보도를 밀어냈듯이 황장엽의 죽음은 김정은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켰다. 잊혀져 있던 주체사상 창시자는 그의 부음기사를 통해 주체사상의 기괴한 사생아인 세습을 통렬하게 비판한 셈이다.

북한은 세습 이벤트의 배경에 주체사상 원조의 그림자가 어른 거린 데 대해 당황했던 것 같다. 사망 4일 뒤까지 침묵을 지켰다. 줄기차게 시도했던 암살 의 성공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사임을 확인한 북한은 선전매체를 통해 악담을 퍼부었다. 에스컬레이트되는 욕설은 안도감의 표현일게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구(舊) 트로츠키’ 황장엽은 갔지만 ‘신(新) 트로츠키’가 부상하고 있다.

후계경쟁에서 밀려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당 창건일 하루 전, 황장엽이 숨을 거두 기 하루 전인 10월 9일 일본 아사히 TV와 회견을 갖고 3대세습에 반대한다고 공언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였다.

그리고 동생 김정은이 인민을 잘 살게 해주기를 바란다고도 말했다.

김정남은 수령론을 거부했고 선군노선을 배격했다. 부한판 트로츠키 노선의 새 버전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최고의 이데올로그’에서 ‘수령의 핏줄'로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뒤이어 15일 김정남 측근임을 자처하는 이는 KBS-TV와의 인터뷰에서 김정남이 8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을 찾아가 김정은을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이 무리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천안함 사태를 주도했다며 왜 이를 묵인했느냐고 따졌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김정은이 김정남을 암살하려 기도한 사실을 알고 후진타오에게 김정남의 신병보호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일축했지만 진위와는 별도로 김정남이 북한의 ‘포스트 김정일 체제’를 그냥 지켜보지만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한다.

세습 2대째의 두 이복형제는 평화공존했다.이복 아우 김평일은 해외에서 대사로 전전하는 유랑을 감내했고 김정일 체제에 도전하는 시늉조차 취하지 않았다. 김정일도 ‘방랑하는 화란인’ 이상의 형벌을 이복아우에게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3대 세습은 출발부터 살기가 감돈다. 후계자에 낙점된 이복아우는 평양에서, 또 마카오에서 이복형을 제거하려 시도했다고 하고 이복형은 공개적으로 이복아우에게 도전하고 있다.

김정일 체제의 퇴장에 앞서 그 체제를 위협해 온 ‘구 트로츠키’는 갔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위협적인 ‘신 트로츠키’가 쑥쑥 커나가는 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