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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행복의 비결은 ‘신뢰 자유 목적’ 본문

북유럽 지역/덴마크

덴마크 행복의 비결은 ‘신뢰 자유 목적’

CIA bear 허관(許灌) 2015. 10. 25. 14:40

 

“1인당 국민소득 37,000달러(세계 6위) 덴마크 국민의 70%는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무엇인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작은 행복의 씨앗을 마음속에 심어 보십시오. 그 씨앗이 자라나서 여러분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웃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 그곳의 행복 비결을 담은 책 『덴마크 사람들처럼』이 출간됐다. 덴마크 출신의 저자 말레네 뤼달이 쓴 이 책은 2014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되어 ‘올해의 가장 행복한 책’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저자는 덴마크 국민들이 행복한 이유를 사회 시스템이 아닌 공동체의 가치관과 태도에서 찾는다. 신뢰, 자유, 평등, 겸손과 같은 토대 위에서 행복감이 싹 튼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덴마크 사람들처럼 살기 위해서 꼭 덴마크에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덴마크 사람들처럼』이 알려주는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누구든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레네 뤼달과 국내 독자의 만남은 지난 10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이루어졌다. ‘2015 서울국제도서전’이 마련한 ‘해외작가 10인의 강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날의 강연은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가 전하는 축하의 인사로 시작됐다. 말레네 뤼달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사회의 열쇠를 찾기 위해 덴마크에 주목했던 오연호 대표는 자신이 찾은 해답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 담아 전하기도 했다.

 

오연호 : (덴마크 사람들은) 우리와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나라인 것 같고요. 덴마크는 사회적 연대,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의 저자로 강연을 하면서 놀라운 걸 발견했는데요. 우리 사회의 곳곳에도 덴마크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오늘 강연이 우리 안의 덴마크를 발견하고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연호 대표의 뒤를 이어 강단에 선 말레네 뤼달은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나누고 싶다”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덴마크 사람들처럼』에 담긴 10가지의 비결 중 3가지의 토대에 대해 공개했다. 그녀는 “이것은 단순히 덴마크 사람들의 가치가 아니고 전 인류적인 가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강조하며, 행복의 첫 번째 토대로 ‘신뢰’를 이야기했다.

 

말레네 뤼달 : 행복이 가능한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토대 중에 하나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믿고 자신을 믿을 수 있다는 건 인생에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덴마크 사람들의 신뢰도는 세계적으로 높은 편인데, 사람들 사이의 신뢰도는 78%로 책정되었습니다. 정부나 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84%에 이릅니다. 신뢰가 높다는 건 부패가 없다는 것과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부패가 신뢰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하고요. 물론 덴마크에도 부패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은 있지만, 덴마크는 세상에서 가장 덜 부패된 나라로 손꼽힙니다.

 

그녀가 들려준 덴마크의 일상은 놀라웠다. 아이가 탄 유모차를 거리에 세워둔 채 식당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이웃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으며, 신뢰할 만한 이웃이 되어주고 있느냐고.

 

“덴마크 국민의 70%는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뒤이어 저자는 행복의 두 번째 키워드로 ‘자유’를 제시했다. 의미 있는 삶, 더 잘 사는 삶은 자유에서 시작된다는 것.

 

말레네 뤼달 : 60%에 해당하는 덴마크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덴마크의 학교들은 교육의 목적을 인성 개발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믿고, 모든 재능은 똑같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덴마크에서는 대부분 18살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살아가게 되고, 정부에서는 매달 760유로씩 지원해줍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인생에 개입해서 자녀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지 못하게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정부의 지원은 부모의 수입과는 관계없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더 많은 혜택이나 자유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때때로 부모들이 자신의 꿈을 자녀에게 투영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꿈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날 수도 있고, 부모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경제적 자립이다. 덴마크가 정부 차원에서 지원금을 지급하는 이유다.

 

말레네 뤼달 : 세 번째 토대는 목적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 10명 중 7명은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려 12%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세금을 충분히 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가지게 된다면, 세금을 냄으로써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금을 내는 것 역시 신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신뢰할 수 없다면 세금 내는 걸 즐거워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요. 세금을 낼 때마다 사회적인 혜택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신뢰, 자유, 목적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말레네 뤼달. 그녀는 이러한 가치들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단언했다.

 

말레네 뤼달 : 매일 아침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지, 내가 누군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가 더 충만한 사회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부터 시작하십시오. 물론 사회적으로 신뢰도가 낮은 나라에서 이런 것들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뢰 사회는 정부나 정치인이 하루아침에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변화 자체가 되기로 선택하신다면 실행을 하셔야 합니다.

 

사회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거창하다. 평범한 시민일 뿐인 한 사람이 이루이기에는 너무 큰 꿈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저자는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라고 주문한다. 한 사람에게라도 영감을 주겠다고 결심해 보라는 것. “여러분만의 작은 신뢰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작은 개인들의 신뢰 사회가 모여서 더 큰 신뢰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는 그녀의 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말레네 뤼달 :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이야기하거나 하고 싶은 걸 모두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작은 일들부터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누군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더라도, 그 의견에 찬성할 수 없다고 해도, 판단하려 하지 마세요. 그런 분들을 지지해주세요. 누군가에게 원하는 바를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면, 여러분도 언젠가 똑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말레네 뤼달은 자유로워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다른 이의 자유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곧 내가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강연회를 마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우리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말레네 뤼달 : 우리가 사회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무엇인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작은 행복의 씨앗을 마음속에 심어 보십시오. 그 씨앗이 자라나서 여러분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말레네 뤼달 저/강현주 역 |

말레네 뤼달은 그 토대를 만드는 열 가지 비결이 신뢰, 자유, 평등, 공동체의식, 휘게 문화 등 덴마크 사람들의 독특한 가치관과 태도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저에 바로 ‘겸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덴마크 사람들은 공부를 할 때도 돈을 벌 때도 심지어 A매치를 할 때도 남을 이기고 더 잘 하는 것보다 ‘함께 같이’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의 뿌리 깊은 겸손이 세계 1위 행복국가를 만든 비결이다

 

 

 

 

 

 

 

 

덴마크 왕국(덴마크王國, 덴마크어: Kongeriget Danmark 콩에리에트 댄마아크), 줄여서 덴마크(덴마크어: Danmark), 단국(丹國) 또는 정말(丁抹)은 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는 코펜하겐이다.

1.역사

(1)고대와 중세

고대부터 윌란 반도(유틀란트 반도)에는 데인족이 살고 있었다. 카를 대제의 북진정책의 결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해상원정은 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구드프레드 왕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10세기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11세기 초 크누트 대왕(재위 1014∼1035) 때에 덴마크-노르웨이-잉글랜드(동군연합)의 왕위를 겸하는 대왕국을 창건하였다.

크누트가 죽자 곧 그 대왕국은 분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1074~1134년까지 스벤 2세의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그 동안에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크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때 슬라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섬에 구축한 성채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발데마르 2세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교회·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스웨덴·노르웨이·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왕이자 스웨덴 왕위계승자인 노르웨이의 호콘 6세의 아들인 덴마크의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인 1387년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군연합 형태의 3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 동맹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로 바뀌었으나 칼마르 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2)근세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독립을 요구하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보게순 전투에서 스웨덴의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분리주의자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독립을 이룩하여, 결국 1523년 칼마르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개혁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크리스티안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의 발전 및 학자의 배출 등 국가번영의 기운을 보였으나, 그 후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 때 발트해의 주도권을 놓고 덴마크·스웨덴·폴란드·뤼벡 사이에 ‘북방 7년전쟁’이 일어났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덴마크의 프레데릭 3세는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1788년 농노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의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릭의 절대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덴마크의 프레데릭 7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자유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홀스텐(홀슈타인)과 슬레스비(슐레스비히)를 상실했으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0년 북슐레스비히를 수복하였다

(3)근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1944년까지 고초를 겪었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 중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끌려갔으나 중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비율이 미미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독일군들이 빼앗았다. 1945년 5월에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4년에는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다

 

2.지리

덴마크는 윌란 반도와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빙하 침식에 의해 산이 별로 없으며, 평야가 많다. 예전에는 황무지가 많았으나 개간되었다

3.기후

덴마크의 기후는 북대서양해류(멕시코만류) 및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위도에 비해 온난하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기온의 연교차가 적다. 이렇게 온난한 기후는 북유럽과 중앙유럽의 중간지대로서의 특색이다. 그러나 연중 바람이 많고 겨울에는 기후 변화가 심하다. 편서풍으로 인해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차를 이용하여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유틀란트 반도 서부에는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새로이 개척한 농지 주변이나 독립가옥 주위에 방풍림(防風林)을 조성한다.

가장 추운 1월의 전국 각지의 평균기온은 -1.5℃이고, 가장 더운 7월의 전국 평균기온은 17℃이다. 5월부터 8월은 낮시간이 거의 18시간 지속된다. 전국 각지의 연강수량은 650mm이며 강수분포는 연간 대체로 균등하나 7∼12월, 특히 8월에 비가 많이 온다. 지역적으로는 서부가 강수량이 많고 동부로 갈수록 적어진다. 강우일수(降水日數)는 연간 약 160일, 강설일수(降雪日數)는 연간 20∼40일 정도이다.

 

4.정치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 군주국이다. 현재의 국가 원수는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의원 내각제 및 단일 공화국 및 권한은 총리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총리가 하고 있었다.

 

5.언어

덴마크어공용어이다. 덴마크인과 스웨덴인, 그리고 노르웨이인은 서로 자국어로 이야기해도 무리 없이 서로 통한다. 영어독일어, 프랑스어도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덴마크의 문자 해독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6.종교

루터교국교로 인정받으며 그 외에 감리교, 모라비안, 구세군 등의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동방정교회가 존재한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덴마크인의 79.1%가 루터교 종파인 덴마크 교회(Den danske folkekirke)에 소속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0.55% 존재한다.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다른 종교는 아주 적게 존재하며, 특히 이슬람은 아랍 세계이란에서 온 이민들이 믿는다

 

7.교육

이 나라는 문맹률이 매우 낮은 나라이며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그린란드 역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8.군대

이 나라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한다

 

9.경제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그린란드2005년부터 지리는 물론이고 경제·외교적으로도 자치를 얻었다. 덴마크 본토 또한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자랑한다. 협동조합을 이루어 농업을 발달시켰다. 젖소를 많이 사육하는 손꼽히는 낙농 국가이며, 낙농 제품이 큰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돼지의 사육도 활발하여, 베이컨이 비싼 가격으로 수출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린이들의 장난감 회사 레고의 본사가 있다

 

10.문화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같은 군주 밑에서 연합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식이 강하다.

 

11.대한민국과 대외관계

1902년 7월 대한제국 전권대신 유기환(兪箕煥)과 덴마크 전권대신 파블로우(巴禹路厚) 사이에 한정수호통상조약(韓丁修好通商條約) 및 부속통상장정이 조인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마지막 수호조약이었고,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한·일간에 맺어지면서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교했으나, 이때 덴마크 정부의 기술 지원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가설이 이루어지는 등 경제교류에 이바지한 바 있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 2월 덴마크는 유엔으로 참전하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Jutlandia號)를 부산항에 정박시켜 의료사업을 지원하였다.

이후 양국은 1959년 3월 31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고 공사급 외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1일 덴마크 주일 공사 닐센(Nielsen, T. B.)이 겸임공사로 한국 정부에 신임장을 제정하였고, 같은 날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관을 개설하고 전택보(全澤珤)를 명예영사로 추대하였다. 우리나라는 같은 해 5월 8일 주영 대사가 겸임공사로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양국간의 국교관계가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양국은 다음해인 1960년 10월 21일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키기로 합의하고 같은 해 12월 9일 겸임대사를 교환하였다.

1966년 9월 2일 코펜하겐 주재 명예총영사관을 개설하였고, 1972년 4월 덴마크 주재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덴마크는 1978년 6월 14일 주한 덴마크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초대 주한 상주대사로 필립슨(Philipson, O.)을 임명하였다.

경제·기술 협력면에서 양국은 자본 합작 및 기술 제휴를 하였는데, 우선 덴마크의 완구제조업체인 레고사(Lego社)와 한국 우정해운이 1983년 153만 달러를 투자하여 레고코리아(Lego Korea)를 설립하고 1985년 6월부터 공장 가동에 들어갔으며, 덴마크의 BNW엔진사(BNWEngine社)가 1983년 현대중공업과, 1984년 쌍용중공업과 조선 및 선박용 엔진의 현지 생산에 들어가, 1986년에는 국내 건조선박용 엔진의 80%를 공급하였다.

또한, 덴마크의 KVM사와 한국의 코단주식회사도 1982년부터 기술 협력하여 압축보도블로 생산공장을 세워 대량 생산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유니언시멘트사도 덴마크의 FL스미스사와의 기술 협력으로 공장을 세웠다.

이와 같은 기술 협력은 농산물 가공 분야에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국내 최대 규모의 우유 가공공장인 서울우유 파주공장 및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한정유가공주식회사 등이 1985년에 준공을 보았다.

한편, 덴마크 외무성은 1959년 이래 한국 산업분야의 지도자들을 매년 10명씩 전액 장학금으로 초청하여 농업·목축·수의·의료·조립식 주택·기계공업·핵과학·화학공업·식물병리 등 67개 분야에 걸쳐 교육훈련을 시켜 왔다.

이와는 별도로 덴마크해외기술원조처는 1969년 한국 5개 도립병원의 의료기자재 구입을 위한 재정차관을 제공하였고, 선박용 전자제품과 조립식 주택 부문 등에 기술 협력을 제공하였다. 두 나라간의 활발한 교류는 사회·문화면에서도 긴밀히 유지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스칸디나비안 서울의 메디컬센터(국립의료원)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 근무했던 관계자 250여 명이 한·덴마크협회를 결성하고 라우센(Laursen, B.)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해마다 3, 4회 실시하고 있으며, 덴마크 병원선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1981년 5월 별도로 유틀란디아동지회(Jutlandia-Veterans)를 만들어 ‘한국영화의 밤’이라는 행사를 주최해서 6·25전쟁 참가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또한 덴마크에서는 1980년 5월 덴마크 태권도협회가 조직되어 500여 명의 연수생을 배출했으며, 협회 산하에는 1985년 2월 태권도 클럽이 100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유틀란디아 병원선이 들어오던 1952년 2월 한·덴마크협회가 조직되어 덴마크와의 친선사업을 펴왔는데, 회원은 덴마크를 다녀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이 가운데서 덴마크에 유학했던 학생들로 조직된 정우회(丁友會)가 1965년 2월에 창립되어 친목학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덴마크협회는 1975년 5월부터 ‘덴마크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과 덴마크 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정기적으로 덴마크 사진전도 개최하고 있다.

교민단체로는 1973년 한인회가 창설되어 생활 정보를 나누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덴마크에는 6·25전쟁 고아 6000여 명이 입양되어 갔고, 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며 ‘한·덴마크우정의 모임’을 만들어 친선 도모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와 덴마크는 1961년 3월 상속 상호등록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69년 10월 사증면제 협정, 1969년 12월 개발차관 협정, 1977년 10월에 국제운수소득상호면제 협정, 1977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0년 1월에 해운 협정, 1982년 10월에 상사중재 협정, 1988년 6월에 투자보장 협정, 1995년 9월에 항공 협정을 체결하였고, 2006년 11월에는 교육인적개발 양해각서를 교환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대 덴마크 수출액은 2007년 현재 4억 6262 달러로 주종목은 선박·자동차·타이어 등이고, 수입액은 7억 252만 달러로 화학기계·의약품·발전기계 등이 주종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4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록하여 대한항공·한국선급협회·두산엔진 등이 진출해 있으며, 한국민 교민 192명과 77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73년 7월 17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덴마크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으나 1976년 10월 15일 북한대사관원의 마약 및 술·담배 밀수 혐의를 들어 북한 공관원 전원을 추방시킨 바 있다. 그후 1978년 3월 후임 대사의 신임장 제정이 있었으며, 2008년 현재 주 스웨덴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의 대 덴마크 수출액은 2007년 현재 142만 달러로 주종목은 플라스틱·섬유·기계·전기기기이며, 수입액은 611만 달러로 주종목은 화학제품·묵재·금속제품 등이다.

덴마크에는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로 조직된 친북한단체인 조정협회(朝丁協會)가 있으며, 『뉴코리아 New Korea』라는 협회지를 내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통일 지지 덴마크위원회(DUK)가 있다.

 

-덴마크 안의 한국 문화

덴마크에서의 한국 연구는 1968년 코펜하겐대학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면서부터 시작되고, 그곳이 중심을 이룬다. 처음은 단지 동아시아학이나 기타 다른 학문 전공 학생들의 개별적인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2년 뒤 한국어학으로 학사에 준하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고, 1975년부터는 동아시아연구소에 한국학과가 설치되면서 석사학위 취득도 가능해졌다. 한편, 코펜하겐의 한 문법학교에서는 한국 지리와 역사에 관한 강좌를 두고 있고, 로스킬데대학에는 1974년 몇 명의 학생들이 한국연구팀을 구성하여 연구하였다.

저술활동으로는 1976년에는 『사회주의국가 조선의 경제개발계획의 사례연구 Socialist Korea:A Case Study in the Strategy of Economic Development』라는 책이 코펜하겐대학에서 출판되었으며, 사회과학연구소에서 「1961년 이후의 대한민국의 경제개발」, 사회학연구소에서 「확대되는 한국의 경제산업체계에서 전통적 가족의 서구형가족으로의 이행」이라는 연구작업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연구소에 한국의 언어·역사·문학 관계의 도서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으나, 코펜하겐에 있는 왕립도서관의 동양학부는 1960년대 이래 한국학 도서를 꾸준히 구입하여 1980년 역사·철학·종교·예술·문학·정치·경제·민속 등의 분야에 걸쳐 약 3,000권의 장서와 150종의 학술지를 갖추었다.

한국 유물을 소장하여 이름난 곳은 국립박물관인데, 칼바크(Kalbach) 수집품으로 알려진 도자기를 비롯하여 서화와 다수의 민속품을 소장하고 있다. 1966년 박물관 전시실에 우리나라의 가옥이 세워지고 그 안에 도자기와 서화류를 배치하여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1974년 「인간과 신령」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일부로 우리나라의 마을 모습과 4개의 굿장면이 전시되었다. 이 박물관은 또한 왕립도서관과 공동으로 「한국의 인쇄술」을 비롯하여 한국 미술·문학·도자기·가구·공예·복식 등의 전시회를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개최하여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편,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남 강진군에서 80여일간 덴마크를 비롯한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덴마크 등대

 

                                          스웨덴와 덴마크 이어주는 다리, 4차원 가교[]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건너가는 바다에는 해양 도로가 가로질러 놓여 있음.도로 끝에서 해저 터널로 통하여 대륙을 건너간다

외레순드 다리 (덴마크어 : Øresundsbroen , 스웨덴어 : Öresundsbron , 공동 하이브리드 이름 : Øresundsbron 가 )는 스카니아 ( 최남단 스웨덴)와 덴마크 사이의 외레순드 해협 에 걸쳐 복선 철도 및 이중 차도 교량 터널 이다. 외레순드  다리는 유럽 에서 가장 긴 도로와 철도가 결합된 형태의 총 연장 7천845m의 다리이며,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스웨덴의  말뫼를 연결한다.

 

 

▲ 외레순드다리의 중간지점인 인공섬, 해저터널진입로의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 외레순드 다리(현수교)가 보이는 곳은 스웨덴이다. 

 

 

 

                                ▲위성사진

이 다리의 건설을 위해서 중간지점에 인공섬을 건설한 후,  스웨덴까지 다리(현수교)로 연결하고, 인공섬에서 해저터널을 만들어 덴마크 육지까지 연결하여 완성하였다

 

 

말뫼 쪽에서 본 다리(현수교):인공섬에서 스웨덴까지는 연결하는 다리(현수교)

 

▲해저터널내부의 모습(wikimedia.org):인공섬에서 덴마크 연결하는 해저터널

 

외레손드 다리는 덴마크의 엔지니어링 회사인 COWI에 의해 설계 되었다. 이 다리의 영향으로 두 나라는 더욱 긴밀해 졌고 그 효과는 프랑스와 영국사이의 터널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외레손드 다리 는 2002년 IABSE의 Outstanding Structure Award를 수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