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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前의원이 부산지역 국회의원 출마하여 차기 국회의장 돼야 한다(머리소리함) 본문
이기택 前의원(74세, 경북 영일출신)이 부산지역 민주통합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 돼 차기 국회의장이 돼야 한다는 것이 온건보수세력 주도 차기정부 수립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손학규 前경기지사도 공감하는 것으로 머리소리함이 전달해왔습니다
이기택 前의원은 김영삼, 김대중선생 계보를 포용할 수 있는 분이며 부산, 경남지역 주민들도 광범위하게 존경해오고 있는 분입니다 이기택 前의원이 손학규 前경기지사와 연합으로 총선을 준비할때 영남지역에서는 온건보수세력이 압승할 것으로 봅니다
민주화 원로그룹로 後廣巨山이라는 큰 인물 중 한 분이 이기택 前의원이라고 합니다
역사는 흘러가는 물처럼 진보입장이며 국가원로들의 생각이 중요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박근혜의원은 박정희前대통령 통치 역사관을 지지함으로 유신정부와 차별화를 주장해 온 이기택前의원은 後廣巨山이라는 정치신념을 견지하고 있는 손학규 前경기지사와 공감할 수 있는 분입니다
남북통일을 준비하고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한국 건설을 주장해 온 後廣巨山이라는 정치이념이 올바른다고 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생존권=사회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로 나아갑시다
아침에 일어날때 독재주의(전체주의) 반대 민주주의로 외치고 밤에 잠을 잘 때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로 외칠때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50주년 4.19혁명 기념사업회가 10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4.19 혁명 사적지 표석' 제막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 이기택 50주년 4.19혁명 기념사업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사진)
*이기택
이기택(李基澤, 1937년 7월 25일 ~ )은 경북 영일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정치인이다. 제3공화국 이후부터 줄곧 야당생활을 해 왔으며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 옛 민주당 총재,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 등을 지냈으며 4.19세대의 대표적 정치인이라 한다. 김영삼, 김대중 등과는 독자적으로 계파를 조직해 활동했고,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였다.
1.초기 생애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현.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나 부산상고를 거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A) 학위를 받았다.
포항에서 태어났으나 학창시절 대부분과 정치경력은 부산에서 보냈다. 1960년 고려대 학생위원장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해 4.19의 도화선을 당겼다. 이후 젊은 나이에 정계입문을 하여 1961년 민주청년회 경남위원장을 역임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2.야당 지도자
(1)3공화국과 유신 시절
1967년 신민당 소속의 전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까지 오르는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김영삼, 김대중의 양김씨와 이철승과 같은 거물 틈새에서 당내에 자신의 계보까지 조직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969년 범청년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으며, 그해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1976년 신민당 사무총장에 선출되었고, 1979년 초 신민당 부총재에 피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대중계열이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순식간에 이철승의 호적수가 되었다. 승부는 2차 투표로 넘어갔다.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기택은 이를 받아들인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로 근소한 차로 김영삼은 역전승을 하여 신민당 총재에 선출될 수 있었다
(2)5공화국과 6공화국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제11대 국회에서는 출마하지 못했지만 도미,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그뒤 구정치인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자 1985년 12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때 정치규제에 묶여 일선에 나설 수 없었던 양김씨를 대신했지만 실권이 별로 없던 이민우 신민당 총재 아래에서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87년 신민당이 내세운 직선제와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내세운 내각제 사이에서 개헌논의에 진척이 없어 정국이 파국으로 치닫자, 민주화 조치가 이루어지면 내각제 개헌도 무방하다던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둘러싸고 야당내에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이민우를 비롯한 신민당 내의 대여타협파와 결별하기 위해 양김씨가 자신의 계파의원들을 모두 신민당에서 탈당시켜 새로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때 이기택은 소속 계보 의원들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하였지만 통일민주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후 전두환이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여 15일간 단식하였다. 신민당 부총재 이후 통일민주당 부총재 등을 지냈다.
1987년 6월 6월 항쟁이후, 여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이기택은 비로소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고 다시 통일민주당 후보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그해 9월과 10월 통일민주당의 대권후보를 놓고 대립하던 김영삼과의 경선을 불참한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차렸으나 이기택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1988년 통일민주당의 부총재에 재선되고, 1989년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겸임했다.
(3)1990년 이후
1990년 3당합당시 결국 참여를 거부, 김영삼 등과 결별하고 함께 삼당합당을 거부한 노무현, 김정길, 무소속 의원인 홍사덕, 이철등과 함께 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어 꼬마민주당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후 평민당과 야권통합협상을 벌였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
1991년 개헌후 처음 벌어졌던 기초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9월 10일 합당에 합의하여 9월 16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서 "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 함께 공동대표가 되어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해운대를 떠나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2년 5월 26일 제14대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경선에서 김대중 대표최고위원에게 석패하였다. 12월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자, 일약 야당총수가 되었다. 1993-1994년에는 제1야당의 총수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당내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동교동계와 번번이 신경전을 벌이며 주도권 다툼을 하였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공천권을 둘러싸고 동교동계와 잦은 충돌 끝에 결국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민주당은 여당을 밀어내고 서울시장을 차지하는등 지방선거에서는 사실상 승리하였지만, 이미 이기택을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김대중은 동교동계 의원 전원을 민주당에서 탈당시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고, 이어 1997년 고향 포항의 보궐선거에서도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서울시장이었던 조순을 대통령후보로 영입하였지만, 소수정당의 한계를 느낀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합하여 한나라당으로 합당하면서 이에 참여하였다. 불운하게도 이회창이 대통령선거에 패하여 이기택은 또다시 야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4)2000년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에 대한 중진급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이회창은 많은 중진들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이때 공천에서 탈락한 김윤환, 김광일, 그리고 재야인사인 장기표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부산 연제구에 다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해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2002년 부산상고 후배이자, 과거 민주당 동지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지지유세에 나서기도 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참여정부 노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피력하며 정치적인 참여를 거부했다. 2007년에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뒤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다.
이후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을 거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 후보로 지명되던 김덕룡이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통합특보에 임명되면서 2008년 9월 정부로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수석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명박 지지에 대한) "보은성 인사"의 논란이 일었다
미국정부에서 이기택 前의원에 대한 평가는 좋은 입장이며 경북지역에서도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거산선생 인맥이 대부분 이기택 前의원 지지세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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