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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분성허공지묘(大菴盆城許公之墓)에서 분성(盆城)은 옛 김해(金海) 명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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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분성허공지묘(大菴盆城許公之墓)에서 분성(盆城)은 옛 김해(金海) 명칭

CIA bear 허관(許灌) 2008. 5. 4. 14:20

대암분성허공지묘(大菴盆城許公之墓)에서 분성(盆城)은 옛 김해(金海) 명칭입니다 분성(盆城)은 경남 위치한 김해의 고려 때 지명으로 본래 가락국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때 금관국이 되었다가 경덕왕때 김해로 고쳤습니다. 고려때 임해현, 금주,  김녕도호부가 되었다가 다시 김해로 고쳤습니다

조선 유학자들은 김해(金海)를 분성(盆城)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대암(大菴) 허길중(許吉中) 선생(先生) 비석에도 김해(金海) 명칭보다는 분성(盆城)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大菴 許吉中 先生

1.부친(父親)--허정연(許正燕). .자(字):사규(士奎,선비의 별).

2.모친(母親)--김능순(金能淳-경주 김씨).

3. 자(字)--인거(仁擧).

4.호(號)--대암(大菴--지략가 또는 책사, 큰 쑥 또는 봄의 쑥 떡).

5.출생(出生)--고종 무술 11월 1일(高宗 戊戌 十一月 一日).

6. 배필(配匹)--성산 이씨  부 보현 충순당후 고종 을해 5월 18일 일생(星山 李氏 父 寶鉉 忠順堂后 高宗 乙亥 五月 十八日 日生).이위남(李胃南) 모친은 광산 김씨이다

7.생애(生涯)--"생안분수고불수중부앙사삼,오십..(生安分守古不隨衆俯仰四三,五十.) "일생 동안 조국은 조상이 있어야 존재하며 나는 조상이 있기 때문에 조국이 있다는 친중 유학자로서 살았습니다"

 

*"평양,황해도 해주와 경기도 지역 중심으로 형성된 서인계열- 암<巖=岩.菴>자 호를 많이 사용했다"

1.주기파(기호학파)
김시습.서경덕---->이이-->서인----조헌, 성혼. 김장생----->한원진.임성주--->최한기--->개화파(이승만.김구등)
-농암(聾菴)이나 연암(燕巖-燕岩)등 암(菴)자 호를 사용했다 황해도 해주지역 중심의 중상주의 실학자로 개화세력
쌍투를 자르고 신분제를 타도하는데 노력 그리고 신문학운동에 참여(大菴, 眞菴등)
-혜암(惠菴) 황도연: 의학연구
 철종---고종 때의 명의로 "병약합편"을 비롯해 "동의보감"의 축소판인 "부방편람(附方便覽)" "의종손익(醫宗損益)" 및 "의방활투"를 지어 의술을 대중화 했다
-여암 신경준
영조 때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하여 한글의 음운을 역학적으로 도애. 설명한 것으로 초. 중. 종성의 연원 및 설두음(舌頭音), 설상음(舌上音), 치음(齒音)등의 발음법을 제시 하였다 
-포암 박성원
영조 때 학자로 정음통성을 남겼다
 
2.중국 손문이나 장개석처럼 친일 개화세력이나 서방세력으로 활동한 분이 많았으며 친중국인사로 분류
 
3.한말 민족 사학자 분류
-위암 장지연
황성신문의 주필로 애국적 논설이 유명하며 "백두산 정계비고" "대한강역고" "조선유교연원"등을 써서 자주정신을 고취시켰다
-백암 박은식
최남선과 함께 광문회를 조직하여 활약했으며 "대한매일신문" 주필을 역임했다
그는 "단조사고"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저서와 "이순신전" "안중근전" "연개소문전"등 전기도 썼다 그는 사관에서 특 국혼을 강조하였다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대암 허길중과 진암 허영
해주지역에서 이주하여 서부 경남에서 정착하면서 기호학파 사상과 남명 조식 사상을 흡수하여 한말 개화세력으로 교육사업등에 참여(이승만과 김구, 김창숙 계열)

 

 

 

 

 

 

 

*분성(盆城)은 경상남도 남동부 낙동강(洛東江)의  서안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고려 때 지명으로 본래 가락국(駕洛國)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가 문무왕(文武王)이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김해(金海)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부(府)로 강등시켜 뒤에 임해현(臨海縣)이 되었으나 성종(成宗) 때 금주(金州)로 개칭되고  원종조(元宗朝)에 와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김해로 고쳐  부(府)로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이 이곳에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기도 했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으로 승격, 1906년 양산군의 2개면을 병합하고, 1981년 시(市)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