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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부통령 후보 새라 페일린 주지사 본문

Guide Ear&Bird's Eye/미합중국[美合衆國]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부통령 후보 새라 페일린 주지사

CIA Bear 허관(許灌) 2008. 2. 6. 16:32

John McCain celebrates results on Super Tuesday

존 시드니 매케인 3세(John Sidney McCain III,1936년 8월 29일 ~)는 미합중국 상원의원이며 2008년 미국 대통령선거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에 도전하고 있는 후보자이다. 매케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미국 해군에서 제독을 지냈으며 매케인 본인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항공모함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7년 작전 도중 격추되어 포로로 잡힌 후 5년반동안 전쟁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1973년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 풀려났다.

1981년에 해군에서 퇴역한 후 아리조나 주로 이주하였으며 거기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2년 아리조나 제1선거구의 미국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거기에서 두번의 임기를 지낸다. 1986년에는 아리조나 주의 미국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992년, 1998년과 2004년의 선거에서 이겼다.

일반적으로 미국 보수주의적 경향으로 알려져 있으나 몇가지 의제에 대해서는 공화당의 주류와는 다른 견해를 가져 정치적 독자노선을 걷기도 하였다.

2000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뛰어들었으나 조지 부시대통령에게 패하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200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는 초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두를 지키고 있으며 줄리아니 후보가 사퇴후 매케인을 지지하면서 한발 더 후보지명에 다가서고 있다.

 

1.초기의 생애

매케인은 1936년 8월 29일 미국령의 파나마 운하를 지키는 코코 솔로 공군기지에서 출생하였다. 스코틀랜드계와 아이리쉬계의 조상을 두었으며 아버지는 해군 제독인 존 S. "잭" 매케인이고 어머니는 로베르사 매케인이다. 매케인의 할아버지인 존 S. "슬루" 매케인 또한 해군 제독으로 항공모함을 이용한 전략을 세운 선구자로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태평양 함대에 복무하였다. 아버지인 "잭" 매케인은 잠수함 함장으로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군인가족이 보통 그러하듯 어린시절에는 뉴런던, 코네티컷, 진주만등 다양한 곳의 아버지 임지를 따라 다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버지는 해군에 남았으며 노던 버지니아에 정책하게 되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을 했으며 경량급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때의 별명은 "펑크" 혹은 "맥내스티"였다. 1954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의 전근 덕분에 거의 20여개가 넘는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Republican John McCain speaks to his supporters

2.해군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매케인은 미합중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문학, 역사등의 과목에 흥미를 보였으나 성적은 밑바닥이여서 졸업당시 그의 등수는 899명중 894위로 뒤에서 5번째였다.

소위로 임관한 매케인은 플로리다와 택사스에서 2년 반동안 공군 조종사로 훈련받았다. 이때 조종하던 기종은 A-1 스카이레이더였다. 1960년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매케인은 항공모함 USS 인트레피드와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에 배속되었으며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에 배속 당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 봉쇄에 참여하였다. 이후 미시시피 주의 메리디안 해군 기지에서 항공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은 그의 할아버지 매케인 제독의 이름을 딴 매케인 활주로가 있는 곳이였다. 1965년 캐롤 쉐프와 결혼 하였다. 1966년 전투임무를 자원하여 항공모함 USS 포레스톨에 배속되어 A-4 스카이호크를 몰았다. 이때 아버지 "잭" 매케인이 제독이 되었으며 1967년에는 4성 제독이 되어 유럽의 해군 사령관을 맡았다.

3.베트남 전쟁 참전

1967년 봄 포레스톨 항공모함이 롤링썬더 작전의 임무를 맡게 되면서 북 베트남에 폭격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몇번 위험한 일을 겪게 된다. 프레스톨 항공모함이 공격을 받아 큰피해를 입었다. 1967년 10월 경에는 도합 22번의 폭격임무를 수행하였다.

1967년 10월 26일 매케인은 하노이시 중심부의 공장지대를 폭격하는 임무를 띄고 A-4 스카이호크를 타고 출동했다가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을 맞아 추락하게 된다. 그는 두팔이 골절되고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하노이 근처 트룩 바흐 호수에 떨어져 거의 익사 할뻔 하였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포로로 잡혀 하노이 시의 호아 로아 감옥에 수용되었다. 일명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으로 미국 전쟁포로사이에서 유명한 곳이였다. 그곳에서 치료도 제대로 못받은 채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 그후 6주를 호아 로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몸무게는 거의 50파운드나 빠졌으며 머리는 하얗게 되버리고 말았다. 1967년 12월 그는 하노이 외곽의 포로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같이 수감된 동료들 덕분에 살아난 그는 1968년 부터는 독방에 수감되었다. 1968년 7월 그의 아버지 "잭" 매케인 제독이 태평양 사령관이 되자 북 베트남은 외부 선전 목적으로 조기 석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매케인은 "먼저 들어온자가 먼자 나간다."는 군인 수칙대로 본인보다 먼저 잡힌 포로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석방 될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한다.

1968년 8월에 매케인은 다양한 고문을 받았으며 강제로 자신들이 "검은 범죄자"이며 "공적"이라는 자백서를 쓰고 서명할것을 요구 받아서 결국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을 쓰는등 강요에 의한 것임을 표현하였다. 이후 그는 "나는 우리 모두가 배운것을 거기서 배웠다: 모든 사람은 부러지는 때가 있고 그때 나는 그 한계에 달했었다." 당시 많은 미국포로들이 비슷한 고문과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때 데이비드 데링거, 톰 헤이던, 레니 데이비스같은 반전평화 단체들이 하노이를 방문해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것을 거절하기도 했다. 제독인 아버지와 연결되어 자신을 이용하고자 하는 북 베트남의 선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였다.

1969년 10월 부터 매케인과 다른 전쟁포로들에 대한 처우가 갑자기 개선되었으며 1969년 12월에는 "하노이 힐튼"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1970년에야 독방 감금이 끝났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 조약에 서명하고 나서야 매케인의 5년 반동안의 포로생활은 끝이 낫으며 3월 15일에 석방되었다.

John McCain at the Rockefeller Center in New York

4. 귀향후

미국으로 귀향한 맥캐인은 아내 캐롤과 다시 합치게 되었지만 1969년 12월에 교통사고를 당한 아내는 다리를 쓸수 없었으며 회복중이였다. 돌아온 전쟁포로로서 매케인은 유명해졌으며 뉴욕타임즈지에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귀한하는 그의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몇번의 귀환행사 중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대통령과 목발을 짚은 채로 악수 하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973년에서 1974년까지 국가 전쟁 대학에 근무하면서 재활 치료를 받았다. 그가 다시 비행할수 있으리라고는 힘들었으나 힘든 재활 훈련끝에 1974년 다시 비행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는 VA-174 헬레이저의 비행사령관이 되었으며 플로리다 주 잭슨빌 근처의 세실 해군 비행장에서 A-7 콜세어 II 비행단을 지휘하였다. 한편 그는 결혼생활 유지에 실패하였으며 이혼하게 되었다.

1976년 정계에 입문할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제임스 홀러웨이 제독의 추천으로 1977년 미국 상원에 파견근무를 하게된다. 이때부터 공화당과 민주당의 여러 정계 인사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특히 택사스 주 공화당 상원의원 존 타워와 절친한 사이가 된다. 1979년 하와이에서 17살 어린 신디 루 헨슬리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부유한 앤하우저-부쉬 맥주의 배급자인 제임스 윌리스 헨슬리의 딸이였으며 교사였다. 이때쯤 그의 해군에서의 미래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으며 할아버지나 아버지같이 제독이 되지는 못할것이라 생각하였다. 1980년 4월 2일 캐롤과 이혼을 하고 버지니아와 플로리다에 있는 집을 주고 향후 치료비를 보조해줄것을 약속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디 헨슬리와 결혼하였는데 윌리엄 코헨 상원의원과 게리 하트가 신랑들러리를 섰다. 1981년 대위로 예편하였다. 그는 군복무동안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 레지온메릿훈장, 퍼플하트 훈장과 우수비행사기장을 수여 받았다.

 

5.정치생활

(1)미국하원의원 시절

피닉스에 살면서 매케인은 장인인 짐 헨슬리의 앤하우저-부쉬 맥주의 배급회사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하였다. 거기서 찰스 키팅, 파이프 시밍톤과 같은 지방 유력 인사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아리조나 제1선거구의 공화당 하원의원 존 제이콥 로즈 주니어가 오랜 의원생활을 마치고 은퇴를 하게 되자 1982년 매케인은 공화당 후보로 선거전에 뛰어들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1983년 신임하원의원 대표로 선출되어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내무부위원회 의원으로 소속되었으며 이후 인디언 문제등에 관여하였다. 1984년에 재선에 성공하엿으며 이 임기중에 인디언 경재 개발 지원 법안이 통과되는 성과를 올렸다.

1984년 매케인과 그의 아내 신디는 첫딸인 멕한을 낳았으며 1986년에는 존 시드니 4세와 1988년에는 아들 제임스를 낳았다. 1991년에는 마더 테레사의 고아원에서 자라던 3개월된 여자아기를 입양하여 브리짓이라고 이름지었다. 1994년 아내 신디가 진통제 중독에 빠진것을 공개하엿는데 그녀는 이러한 고통에 빠진 다른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고백했다고 말했다. 1990년 초부터 그의 가족은 북 피닉스 침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아직 미국 성공회 교인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와 두명의 자식들은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2)미국상원의원 시절

1986년 미국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아리조나 출신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가 은퇴하게 되자 매케인은 아리조나 주의 상원의원에 도전하였다. 예비선거에서 다른 공화당 후보 없이 지명을 받았으며 60퍼센트의 득표율로 리차드 킴볼 후보를 이겼다. 1987년부터 상원에서 일하게 되자 그는 상원군사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일은 이전 그가 해군대표로 파견나와서 지원하던 일이였다. 그후 상원통상위원회와 인디언문제위원회에 가담하였으며 재정적자일 경우 지출을 자동적으로 삭감하는 그램-루드만 법안의 적극적 지원자였다. 1988년 공화당 전당대회의 연설을 통해 전쟁포로로서의 전력과 뛰어난 연설 덕분에 전국적인 관심을 얻게 된다.

(3)키팅 파이브 스캔들

매케인의 승승장구하던 정치적 경력은 1980년대 키팅 파이브 스캔들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아메리칸 컨티넨탈 주식회사의 자회사인 링컨 저축및대출조합의 찰스 키팅이 어떤 잘못된 대출로 인해 문제를 일으켰는데 키팅이 정치적으로 지원하던 다섯명의 상원의원중 한면이 매케인이였다. 1982년에서 1987년 사이 매케인은 키팅과 그의 관계자들로 부터 최소 11만2천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매케인의 아내와 장인은 35만9천달러를 키팅이 만든 쇼핑센터에 투자하였다. 결국 키팅의 부동산 투자는 실패하였으며 많은 이들이 이때문에 파산하였다. 연방규제위원회는 약 11억 달러의 사기및 부정행위 혐의로 키팅을 고소하였으며 그의 지원을 받던 다섯명의 상원의원들도 조사를 받았다. 매케인은 이 스캔들에서 살아남을 수 잇었으며 마침 1991년 걸프 전쟁이 터지자 그의 군경력과 전쟁포로경험은 그를 중요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1992년에 56퍼센트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4) 독자주의 노선

1993년 1월 국제 공화당 연구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외교문제에도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91년에서 1993년사이 역시 참전 군인 출신인 존 케리상원의원이 의장으로 있던 전쟁포로와 실종자 문제를 다루는 특별상원위원회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러는 동안 여러 민주당 상원의원들과도 협력하게 되었으며 베트남을 방문하고 많은 기밀문서를 해제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 실종미군을 찾는 활동과 함께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를 지원하였는데 그는 "이제는 상처를 아물 시간이다. 그것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며 계속 살아가야할 시기이다."라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베트남을 중국과 상대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지역적으로 전략지역으로 보았다. 1994년 존 케리 상원의원과 매케인은 베트남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고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도록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공화당 내부에서 비판을 받았다.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과의 외교정상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부통령 후보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

페일린은 1964년 아이다호(Idaho)에서 출생하여 한 살이 채 안 된 생후 3개월에 부모 품에 안겨 알래스카로 이주하였다. 그녀

는 저널리즘과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고교 재학 시절 농구부의 주장 겸 포인트 가드로 알래스카주 고교 농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녀는 결

승전에서 발목 부상에도 불구, 마지막 순간에 자유투를 성공시켜 승리를 확정짓는 등 뛰어난 집중력과 공격일변도의 플레이로

 "Sarah Barracuda(창꼬치)"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녀의 정적들은 오늘날 이를 이용하고 있다. 그녀는 알래스카의 오지를 탐

험하거나 사냥과 낚시를 즐기고 장거리 마라톤을 한다.

80년대 중반 페일린은 미스 알래스카 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한 경력이 있다. 한 정치 웹 사이트는 얼마 전에 “그녀는 여전히 아

름답고, 영리하기까지 하다.”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런 이유로 알래스카 주민들이 사랑을 받고 있으며 대중적인 인기도는

80%에 달하고 있다.

 

그녀는 92년부터 96년까지 자신의 고향인 와실리아(Wasilla) 시의원을 지냈고 96년 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고배를 마셨지만 99년 재도전하여 당선됐지만 다시 주지사에 도전했다가 패한 적이 있다.

그 후 천연자원의 착취 상황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알래스카 석유·가스보존위원회의 윤리 담당 커미셔너로 활동했는데 페일린은 임명된 지 1

년이 안 돼 위원들의 윤리적 타락에 항의하며 사임했을 만큼 원칙에 철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일로 알래스카 공화당 의장인 랜디 루드리치와 그레그 렌키스 주 법무장관이 고발당했으며 결국 이 두 사람을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페일린은 매케인을 도울 수 있는 여러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를 포함해 모두 5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그녀는 엄격한 보수주의자이며 낙태 반대주의자이고 미국총기협회 NRA의 종신회원이다. 이는 공화당의 지

지를 위해 도움이 된다. 동시에 그녀는 알래스카의 첫 번째 여성 주지사로서 과감한 개혁정책과 부패척결 정책으로 알래스카

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으며 특히 같은 당 동료들의 부정행위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폭로하고 소송까지 제기하는 청렴

성과 개혁성 때문에 공화당 내에서도 그녀를 `무당파'에 가까운 인물로 간주할 정도다. 그녀는 2006년에 알래스카의 주지사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