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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구속됐던 홋카이도교육대학 전 교수 석방 본문

7년 전에 중국에 일시 귀국 중 스파이 혐의로 구속돼 현지 법원에서 징역 6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던 홋카이도교육대학의 전 교수가 석방된 것이 관계자 취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홋카이도교육대학의 전 교수인 중국인 위안커친(袁克勤) 씨는 2019년에 중국에 일시 귀국 중 구속돼 "장기간에 걸쳐 일본의 정보기관의 요구로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기소돼 2024년, 중국 동북부의 지린성 창춘의 법원으로부터 징역 6년의 실형 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 후, 위안 전 교수의 소식은 끊겼으나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는 석방돼 창춘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홋카이도의 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위안커친 교수를 구하는 모임'은 "위안 교수가 '스파이 혐의' 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경위를 감안해 지금도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상황을 계속 지켜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 출신인 위안 교수는 지린대 역사학과를 나와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외교사, 제2차 세계대전사, 동아시아국제관계가 전문이었다. 지난 9월에는 중국을 방문한 홋카이도대 이와타니 노부(岩谷將) 교수가 베이징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가 한·중·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지난달 석방됐다. 이와타니 교수의 전공 분야는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국민당 연구로 방위성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일본 외무성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2015년 이래 일본인 14명이 국가기밀절취 등 국가안전에 위해를 준 혐의로 체포됐으며 이 중 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중국은 2014년 반간첩법, 2015년 국가안전법을 제정해 당국이 스파이 행위로 규정한 외국 조직과 개인의 활동에 대해 강력히 처벌하고 있다.
-동북아 역사(동아시아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발굴돼야 하며 서술돼야 합니다
중국은 약 92%의 한족(漢族)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중화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56개 민족을 공식 인정한다. 한족이 대부분의 인구와 경제를 주도하며, 장족, 만주족, 회족, 위구르족, 몽골족, 티베트족 등 55개 소수민족은 주로 국경 및 변방 지역에 분포하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漢字姓氏,兄弟國
한족(중국인)이나 조선족(한국인), 야마토족(일본인), 만주족 등은 한자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입니다
한자 성씨를 사용하는 형제국이지만 각 민족끼리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각 민족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면 중국인,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면 한국인, 일본어를 사용하면 일본인, 만주어를 사용하면 만주인이다
각 민족은 언어를 기반으로 독자적 문화를 인정하면서 경제통합에 노력해야 한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야마토족(일본인)에 대하여 과대평가나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족이나 한국인(조선족)과 상의 없이 러시아(소련)이나 미국, 영국등과 연합으로 동아시아 안보질서를 개편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1. 아르메니아 2. 아제르바이잔 3. 벨로루시 4. 에스토니아 5. 그루지야 (조지아) 6. 카자흐 7. 키르기스 8. 라트비아 9. 리투아니아 10. 몰도바 11. 러시아 12. 타지크 13. 투르크멘 14. 우크라이나 15. 우즈베크..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년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노농평의회(지역평의회)]
1.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a.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b.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2.인민 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소련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명목상 국가원수 소비에트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고 실권자는 소련공산당 지도자 당 서기장과 내각 수장 총리(수상)이다 소련헌법은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를 인정함으로 소련 연방 최고회의(최고 의회)는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고 내각도 소련 공산당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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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일본 중립 조약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러시아어: Пакт о нейтралитете между СССР и Японией) 또는 일소중립조약(일본어: 日ソ中立条約)은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일본 제국이 조인한 중립 조약이다. 일본 제국이 미국의 하와이를 공격할 때에 소련이 중립을 지키자는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소련이 1945년 8월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함으로써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소련과 일본 간의 중요한 외교 조약. 정책 조정과 정보 교환의 실패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추축국과 연합국들 사이에서 특징적인 것이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독일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을 때,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의 외무 대신 마쓰오카 요스케가 1941년 3월에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 알려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도쿄로의 귀국길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을 성립시켰다. 이 조약은 상대국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각국이 제3국과 적대 관계에 돌입할 경우에 중립을 보장했다. 이같은 합의는 심오한 결과를 초래했고,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의 중립을 가져왔던 것이다. 조약은 5년 동안 유효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5년 후 추가로 5년 동안 자동연장될 것이었다.
1939년 이래, 일본은 소련과의 타협을 추진해 왔고, 이는 중국 정복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측이 먼저 1940년 5월, 6월에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고, 당시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로의 진출을 고민하던 때였고, 이를 위해서 소련의 중립이 중요했다.
일본과 소련의 협상은 1940년 8월에 시작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소련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고, 불가침 조약 대신에 중립 협정을 제안했고, 이는 서양 열강과의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면, 일본은 남방 진출이라는 자신의 공공연한 야망을 드러내면서,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모델로 삼은 보다 구속력 있는 조약을 제안했던 것이다. 일본 측 안은 독소 불가침 조약의 비밀의 정서의 내용과 유사했고, 소련이 내몽골과 만주국을 포함하는 중국의 동북 3성에서 일본의 전통적 이해 관계를 인정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답례로, 일본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이란)으로의 소련의 진출을 지지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 4월의 일소중립조약은 남동 태평양으로의 일본의 진출과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 스탈린의 대일정책은 1941년 6월 이전의 그의 독일에 대한 입장과 유사했다. 그는 극동의 소련군 장군들에게 만주와 몽골 국경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공격을 한다면, 소련의 태평양 함대는 북쪽으로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41년 가을 소련 침공을 심사숙고 했다. 특히 만주의 관동군 지휘부는 이를 지지했지만,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유럽 열강의 일시적 쇠약이라는 권력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는, 남방 진출을 선호했다. 일본은 노몬한 사건이라는 소련과의 과거의 충돌 결과, 시베리아의 험악한 날씨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석유와 고무라는 당시 일본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로 한 자원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941년의 일소중립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만약 독일과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협력했다면, 소련이 패배했을지도 모르고, 추축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중립 덕분에, 소련의 극동지역은 소련의 서부전선에 1941년과 1944년 사이에 2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약은 또한 소련이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일본도 이 조약을 통해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과의 전쟁 동안,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4천만 톤의 석탄, 1억 4천만 톤의 목재, 5천만 톤의 철, 천만 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 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과의 무역이 미국과의 일본의 전쟁을 도왔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1945년, 일본과의 중립 조약을 파기했다.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그의 서양 동맹국들에게 극동에서의 영토적 양보의 대가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2-3개월 안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동참할 것이라 약속했다. 유럽에서 승리를 거둔지 3달 후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기습이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이날 총 354대의 함재기를 동원, 2차례의 파상공습을 감행했다. 제1차 공습비행대 183대는 새벽 5시 30분(이하 하와이 현지 시간)에 , 제2차 171대는 30분 뒤인 6시에 각각 일본군 함대로부터 출격했다.
당시 하와에는 임무를 수행중인 3척의 항공모함을 제외한 94척의 각종 함정이 정박 중이었고 장병들은 일요일을 맞아 대부분 외출 하였다.
또한 섬 내의 387대의 각종 군용 비행기도 비행장에 정렬되어 있었으며 조종사들 역시 대부분 외출 중이었다. 방공포대에도 일부 병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7시 30분에 미국 레이다 병이 여러 차례 대규모 비행단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 하였으나 아군의 비행기로 오인하는 바람에 방어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7시 45분에 공습을 시작한 1차 공습대는 8시 40분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했으며 2차 공습은 8시 55분부터 시작됐다. 2차 공습과 함께 하와이에 접근해 있던 일본군의 잠수정들이 미군 함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2차에 걸친 공격은 9시 55분 모두 끝났다.
이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는 8척의 전함, 10척의 기타 대형함정, 20여척의 소형함정이 격침됐다. 비행기도 180대가 파괴됐다.
미군 사상자는 3,500명에 달했다. 이중 사망자는 2,000여 명이었다. 반면 일본 측 사망자는 100 여명으로 집계됐다.
항내와 섬내의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어 진주만은 6개월 동안 기능을 상실했다.
미국은 일본이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힘입어 프랑스 비시 정권을 압박,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의 해, 공군 기지를 확보하여 동남아로의 군사 진출을 도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석유 수출 중단의 보복 조치를 가해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지만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함대에서 전폭기를 출동시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 함대의 핵심 전력인 항공모함들을 곧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 작전 운항시켜 아무런 손상 없이 보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불과 6개월 뒤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5일 ~ 6월 7일)에서 일본이 보다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미국은 함대 전력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 일본 연합 함대를 대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해전 뒤 정찰에 나섰던 진주만 기습의 입안자 야마모토 이소루쿠연합함대 사령관의 탑승 정찰기를 격추, 그를 사망케 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청일전쟁, 러일 전쟁의 패턴을 쫓아 기습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에서는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평양 전쟁에서는 패배로 끝이 났다.

*쿠릴열도의 군사적 가치
쿠릴열도는 일본과 사할린 그리고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적 교통완충지대이다
대륙 극동지역에서 일본 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사할린과 쿠릴열도 북방 4섬을 점령해야 하고 일본이 극동과 만주지역 그리고 알래스카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쿠릴열도 북방 4섬과 사할린을 점령해야 한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중국과 한반도 완충지대 만주와 극동지역을 누가 지배하는냐에 따라 그 지역의 지배자도 결정되어왔다
-쿠릴열도는 사할린, 극동과 만주지역 진출 군사적, 상업무역적 항구기지
-쿠릴열도는 사할린과 함께 아메리카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데 전초기지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북태평양지역으로 알래스카나 캐나다 북미등을 군사적이나 상업 무역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진주만기습(眞珠灣奇襲) 총지휘부 군사기지
진주만기습은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 기동부대가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기지를 기습공격한 사건이다
이때 일본은 교섭을 중단한다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하지도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일본의 속임수 공격이었다
미국의회는 그날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대일선전포고를 가결하였다
일본은 1941년 초부터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 기습계획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연합함대 사령관 지휘로 수립하였으며 1941년 11월 26일 쿠릴열도 에토로후섬(擇捉島) 하토가쓰부만(單冠灣)에서 출발, 일본 해군의 항공기와 특수잠항정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출항 중에 있던 항공모함을 제외한 미국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열도의 혼란기에는 쿠릴열도는 중국의 지배세력이 지배자였고 일본열도의 통일국가 등장때는 일본정부 통치를 받아왔다 사할린, 쿠릴열도와 몽고,만주족의 친근감으로 중국내전의 유발되어왔다
한반도 북방지역은 해군력 강화와 해상권 장악으로 쿠릴열도와 사할린 상업 무역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북태평양과 알래스카. 카나다. 북미로 이어지는 무역항 개척에도 주력해야 하며 해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수혜국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주요 수혜국(연합국)은 영국, 소련, 중화민국 등입니다. 미국은 1941년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을 통해 이들 국가에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와 식량을 지원하며 전쟁 승리와 세계 경제 패권 확보라는 실리를 챙겼습니다.
주요 지원 대상 (수혜국):
영국: 유럽 전선에서 독일에 맞서는 가장 큰 지원 대상이었습니다.
소련: 독소전쟁 중 미국의 물자 지원이 동부 전선 유지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중화민국: 일본과 싸우는 중국에 물자를 공급했습니다.
미국의 실리: 무기 수출과 전쟁 특수로 인해 대공황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 최대의 공업국 및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민주주의의 병기창'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경제적·군사적 이득을 얻었습니다.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 또는 Lend-Lease)

법안에 서명하는 FDR 대통령.
We must be the great arsenal of democracy.
우리는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어야 합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 Lend-Lease) 혹은 법적인 명칭인 미합중국 방위 촉진을 위한 조례(영어: An Act to Promote the Defense of the United States)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에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든 법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달리 이 법을 적용받는 전쟁 물자는 미국이 해당국에 무료로 운송하였다. 이 법은 미국이 1941년 12월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하기 약 9개월 전인 1941년 3월에 발효했다. 무기대여법은 전쟁 물자 구매할 때 해당국이 선지급하고 직접 운송하도록 요구한 캐시 앤 캐리 법안을 무효화했다. 그 이유는 영국이 전쟁과 공습으로 말미암아 경제가 피폐해져 더는 무기를 사들이고 운송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대일 승전일인 1945년 9월 2일에 만료되었다. 이 법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지속해온 고립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국제 정세에 개입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무기대여법에 의해 루즈벨트는 자신이 미국의 방어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특정 국가에 군수품을 판매하거나 이양, 교환,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되었다. 독일과 전쟁을 치루는 연합국에게 군수 물자의 물품비만이 아니라 그 운송비까지 무료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전체 전쟁 지출의 11%인 총 501억 달러(2018기준 5650억 달러)가 개입되어 영국에 314억 달러(3540억 달러), 소련에 113억 달러(1274억 달러), 프랑스에 32억 달러(361억 달러), 중국에 16억 달러(180억 달러), 나머지 연합군에 26억 달러(180억 달러)가 투입됐다. 우선 영국이 수혜를 입었으며 4월에는 중국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소련에도 적용하여 군수물자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미소 양국은 모스크바에서 군수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한 끝에 1941년 10월 1일 ‘제1차 소비에트의정서(First Soviet Protocol, 혹은 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제1차 소비에트의정서의 유효기간은 1942년 6월 30일까지로 정하였다. 그때까지 루스벨트는 총 10억 불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루스벨트는 연합국에 대한 군수지원을 원활히 하 기 위해 백악관이 직접 관리하는 무기대여청을 만들었다. 모스크바에는 미국인이 상주하는 지부를 두어 업무를 전담시켰다. 미국과 소련은 파시스트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군수분야에서 더욱 긴밀히 협조하였다. 소련으로 최초로 보내질 특별 분량의 군수물자 약 2,972톤이 1941년 12월 이란의 ‘페르시아경로(трансиранский маршрут)’을 경유하여 제공되었다. 제1차 소비에트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지급된 군수물자는 127억 3,600만 톤이었다. 이때 제공된 물자를 보면 군수용 비행기 22,150여 대, 탱크 12,700대, 화물차 975,883대, 모터사이클 35,170대, 트랙터 8,071대에 자동화기 131,633대, 폭발물 345,735톤 그리고 민수용 신발, 가죽, 광물, 주류 등 다양하였다.[5] 1945년까지 이 법률에 의해 연합국 측에 공급된 군수 물자는 약 500여억 달러에 이르렀다. 연합국 중 영국은 전체의 약 60%에 해당하는 300억 달러를, 소련은 약 22%에 해당하는 11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1.지원한 국가
(1)영국
무기대여법에 따른 지원을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다.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영연방 전체)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다. 영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지상 병기뿐만 아니라 군함을 많이 얻어갔는데, 세계 곳곳에 있는 식민지로부터 자원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군함의 가격은 다른 무기 체계와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비싸서 돈은 더 나간 건 덤이었다.
당시 영국의 육군의 상태는 전황과 개발 모두 말이 아니어서 영국 육군은 무기대여법의 영향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전차가 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전황에선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가뜩이나 경제가 빌빌거렸는데 프랑스에 장비, 병력 대부분을 지원하며 전선을 프랑스까지로만 한정시키려고 했지만, 프랑스가 일찍 망하는 바람에 물자와 병기들을 죄다 프랑스에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겨우 몸만 성히 빠져나왔다. 이 결과로 영국 본토 내에서 제대로 무장시킬 수 있는 사단 수가 2개 사단이었다. 조잡한 스텐 기관단총이 나온 이유가 이렇게 무기가 더욱 더 급하게 필요해진 영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개발 면에선 보병전차와 순항전차로 이원화된 전차 개발 구조의 문제에다가 및 그 결과물도 상황에 쫓겨서 급조하는 등 신통치 않아서 자원을 허투루 낭비한 일이 많았다. 단단한 보병전차는 장갑 면에선 그나마 쓸 만했으나, 전쟁 초기 주력 대전차포인 2파운더는 초기에 고폭탄을 만들지 않아서 대보병 능력이 개판이었고 있던 철갑탄에는 작약이 없어서 살상력이 크게 떨어졌다. 6파운더는 그나마 상황이 양호했으나 전황의 악화와 처칠의 명령으로 배치가 지연되었고[4] 결국엔 미국의 75mm M3 전차포를 가지고 새로 주포를 만들었다. 기동전으로 승부해야 할 순항전차는 개발에 삽질에 삽질을 연속으로 해서[5] 노르망디 상륙작전 즈음에 투입된 8번째 순항전차인 센토어 전차, 크롬웰 전차부터 그나마 전차 구실을 할 정도로 쓸만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셔먼과 울버린보다는 이 센토어 전차와 크롬웰 전차도 어디까지나 쓸 만하다는 수준이라 미국과 달리 수송 용량을 확대해 더 무겁고 두껍다는 건 아니었다.[6] 물론 영국의 기술력도 출중하였으므로 셔먼 전차나 M10 GMC 대전차 자주포를 자국에 맞게 개조한 셔먼 파이어플라이나 M10 아킬레스도 많이 개조해서 전쟁에 보탰다. 이렇게 자국 전차 개발 중 결함과 독일군 폭격으로 줄어든 자국 생산량 때문에 방해없이 꾸역꾸역 생산하는 미국제[7] 전차를 쓰기가 더 나아서 무지막지하게 구입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그 증거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전차의 이름은 스튜어트 전차부터 시작으로 영국군이 많이 지어 줬다.
이 외에 전차 개발에선 미국과 콜라보를 많이 하여 T14나 엑셀시어 같이 궤도를 공유하는 것을 개발하지만 중전차라는 체계가 이 두 나라에선 운송에 불합리해 결국엔 나가리가 되었고 추가로 순항전차 외 개발에 주력한거라곤 T28을 모티브한 A39 토터스지만 범용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초중전차라서 결국 전황에 하등 쓸모가 없었다.
대전차 주포라면 몰라도 자주포 면에선 부진한 전차 개발보다 더 삽질의 연속이라서 25파운더 곡사포를 역시나 결함 있던 보병전차 밸런타인 전차 차대에 얹은 비숍 자주포 같은 망작만 만들다가 영연방의 캐나다가 만든 미국의 M3 리 전차를 기반으로 만든 M4A5 램 전차를 개조해서 만든 섹스턴 자주포만이 영연방의 성공작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그 느린 보병전차 발렌타인 전차를 개조한 비숍 자주포를 쓰다가 미국으로부터 명품 M7 프리스트를 받자마자 전부 다 갈아치우고 전쟁 내내 M7을 썼다. 물론 105mm를 쓰는 M7의 탄환이 영연방과 호환되지 않으므로 더욱 더 돈이 나갔다. 여기에 영국은 미국이 155mm 이상을 쓰는 자주포들을 실전배치한 것에 비해 자국 곡사포 중에서 25파운더를 넘는 구경의 대구경 자주포를 개발, 배치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
화포에선 전차에 쓰이는 포의 고폭탄이 타국보다 위력이 심각할 정도로 낮았는데, 이는 영국제 화포들이 타국보다 고관통에만 올인하다보니 작약량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대전기 주력인 17파운더는 같은 구경인 3인치 주포에 비해서 관통력은 월등하나 포탄이 포압을 견디기 위해 작약량이 그 절반이라서 대보병 능력이 떨어졌으며 이게 문제가 된 사례로는 한국 전쟁 때 캐나다 제25보병여단이 대보병을 위해 M10 아킬레스를 버리고 M4A3(76)W HVSS를 재수령한 것도 그 이유가 작용했다. 이것 때문에 미국의 3인치 포를 수령 및 개조하여 처칠, 크롬웰에 장착하여서 대보병 화력을 키울 수 밖에 없었다.
영국 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척의 호위 항공모함 및 호위 구축함을 지원받았다.[9] 게다가 주력함인 전함과 항공모함도 영국 본국의 수리 및 건조시설이 부족해 대규모 개장이나 수리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면 미국까지 가서 수리 및 개조를 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또 식량 자원을 엄청나게 많이 공급받았는데 바닷바람이 불고 날 좀 풀렸다 싶으면 비가 오는 영국 본토 사정 상 자국 내 생산량으로는 밀, 보리, 감자 등 주곡 농업 외에는 식량 자급이 거의 쉽지 않았고, 영국도 전쟁 피해를 봤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 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 덕분에 영국 요리는 말 그대로 스팸처럼 쏟아지는 스팸이 지배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영국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조림이나 전투식량도 상당수가 미제 완제품,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영국에서 가공처리한 것일 정도였다. 오늘날 불필요한 메일을 일컫는 '스팸메일'이 이런 스팸만 먹던 영국의 사정에서 유래한 말이고 그 유명한 피시 앤 칩스를 생선 대신 스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러한 무기, 식량 지원의 대가로 영국은 마그네트론 기술, VT 신관, 전투기 엔진 설계도 등의 최신 기술들과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 카리브 해 제해권을 미국에 넘겨줬다. 미국의 국력으로 첨단 장비들을 대량생산하여 수상기, 폭격기 등에 붙여서 대잠초계기를 만들었고 U보트로부터 제해권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하긴 했다. 전후 영국의 자존심 때문에 2000년대까지 프리깃 한두 척을 상시 마약 등의 밀수 단속 임무차 카리브 해에 초계함으로 배치해 두고 있었지만 현재는 철수시키고 미국 해안경비대에 넘겨 버렸다.
물론 영국이 받아먹기만 하지는 않아서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물자도 무시할 수준은 못 된다. 영국은 소련에게 전차 5,000대 이상과 대전차포 5,000문 이상, 호커 허리케인 3,000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1,100대를 포함하여 항공기 7,000대 이상을 지원해 주었다. 여기에는 대전기 그 어떤 독일기와도 대등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IX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군화 1,500만 켤레와 전함 1척을 포함한 해군 함정, 소나와 레이더 2,000세트 등을 총 3억 800만 파운드에 식량과 재료로 1억 2,000만 파운드로 약 4억 3,000만 파운드를 제공하였다. 당시 환율을 이용하여 달러로 환산하면 17억 2,000만 달러로 적지만, 본인들도 얻어먹는 처지에 미국이 준 양의 16%를 준 것이다. 게다가 항공기의 경우는 질적으로도 우수했다. 물론 독소전의 환경은 저공에서 싸우는 일이 많기도 했고 소련의 지형에서 굴리기는 불편했던지라 미국의 P-39 에어라코브라가 활약하는데 그쳤다.
(2)소련

미국이 소련에 제공한 주요 군사장비 목록
A.군사지원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주요 군사장비 목록
군화 약 1,400만 켤레
군복 2,100만 벌
동계 군복 500만 벌
항공조종사 조종복 100만 벌
야전용 전화기 422,000개
최신형 휴대용 무전기 245,000개
트럭과 지프 409,526대
M1 포병용 중트랙터 8,276대
야포 및 박격포 96,000문
기관차 1,860량
화차와 객차 11,181량
M3 스튜어트 계열 경전차 1,676대
M5A1 스튜어트 경전차 5대
M3 리/그랜트 계열 다포탑 중형전차 1,386대
M4A2 계열 중형전차 4,102대
M4A4 중형전차 2대
M2 하프트랙 342대
M3 하프트랙 2대
M5 하프트랙 421대
M9 하프트랙 413대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 4,719대
P-40 워호크 전투기 2,178대
P-47 썬더볼트 전투기 200대
P-63 킹코브라 전투기 2,397대
B-25 폭격기 866대
A-20 공격기 3,075대
C-47 수송기 707대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주요 군사장비 목록
군화 1,500만 켤레
야전용 라디오 4,338대
대전차포 5,000문
트럭 4,020대
오토바이 1,721대
브렌건 캐리어 1,212대
테트라크 경전차 20대
밸런타인 전차 1,380대
처칠 전차 301대
마틸다 II 전차 918대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 3,000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전투기 1,000대
핸들리 페이지 햄든 폭격기 23대
랜드리스 이전에도 소련은 영 · 미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후부터 협력 관계를 구축한 영국은 1941년 9월부터 연말까지 트럭 1,400대와 전차 약 600대, 항공기 약 800대, 수만 톤의 물자 등을 소련으로 보급했으며 미국은 Pre Protocol이라 하여 1941년 6월부터 10월까지 고옥탄 항공유 14만톤이 포함된 연료와 원자재 등 9200만 달러 규모의 물자를 지원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렸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방의 우방들이 보내준 지원 물자들은 가뭄의 단비 같은 도움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무기 대여법을 통과시킨 뒤, 소련은 소련은 1941년 2천만 달러, 42년 13억 7,600만 달러, 43년 27억 6,400만 달러, 44년 40억 7,400만 달러, 45년 24억 3600만 달러, 총 106억 7천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며 이는 전체 지원 규모의 21%로 영국이 받은 지원의 약 1/3에 해당한다. 그러나 무기 대여법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영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물자 운송을 위해 소련과 미국은 가장 가까운 북극 항로를 이용해 대서양을 따라 북극해로 진입한 후, 최종 목적지인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 몰로토프스크에 물자를 하역하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전체 무기대여법 물자의 22.6%를 이 항로로 수송했으나, 독일 해군의 공격을 받기 쉬운 하절기에는 수송을 중단해야 했고 평소에도 독일 잠수함들이 호시탐탐 선박을 노린 탓에 전체 수송 물자의 7%를 잃어 버렸다. 이 수치는 전쟁 기간 전체의 손실을 합친 것이며 독일 해군의 유보트와 폭격기가 건재하던 전쟁 초기에는 이보다 소모율이 훨씬 높았다. 특히나 1942년 7월에 발생한 PQ 17 호송단 참사 이후부터 미국은 북극 항로 운송을 잠정 중단해 버렸고 독일 해군과 공군이 약화된 대전 후반기가 되서야 겨우 수송을 재개할 수 있었다.
북극 항로를 포기한 연합군은 태평양 항로로 선회했으나, 42년부터 태평양 전쟁이 터져 미국 선박의 운송이 불가능해진 탓에 미국은 자국 상선에 소련 국기를 걸고 선박의 국적을 소련으로 변경하는 편법을 써서 물자를 운송했다. 명목상 소련을 상대로는 중립을 유지하던 일본이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해 미 · 소 간의 물자 운송을 막지 않았던 덕에 미 · 소 양국은 다소 안정적으로 태평양 항로를 운영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일본이 비전투 물자의 수송만 허락했기에 태평양 항로로 전체 물자의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양을 수송하긴 했어도 군수품은 하나도 수송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부분적인 사실이다. 미국이 일본의 개입을 우려해 태평양 항로에서 군수 물자 운송을 중단한 건 43년 중순까지고, 그 뒤로는 군수 물자도 수송했다. 전투기의 경우에는 그냥 소련 파일럿들이 비행기 타고 미국에 넘어갔다가 활주로에서 전투기를 타고 다시 시베리아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운송'했다.
태평양 항로만으로는 물자 공급 부족을 타개하기 힘들단 공산이 든 소련은 영국과 함께 이란을 점령한 뒤부터 인도양의 이란에 보급품을 하역해 육로로 소련에 수송하는 항로를 이용했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너무 멀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미국은 이 항로로 400만 톤 이상의 물자를 보내 주었다.
지중해 - 수에즈 항로는 지중해에 도사리고 있는 추축군, 특히 독일 공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방해 때문에 북아프리카 전선에 보급하는 일도 부담이 심했기 때문에 선택하기 어려웠고, 태평양을 지나 베링해와 추크치해를 통과하는 항로는 기후와 환경 때문에 지나치게 위험했다. 1943년 중반부터 북아프리카 전선과 시칠리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탈리아 전선을 열어 지중해에서 추축국 세력을 정리하고 나서야 지중해 - 수에즈 항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2개 항로로는 수백만 톤을 수송한 태평양 · 이란 · 대서양 항로에 비해 운송량이 매우 적었다. 지중해 항로는 약 68만 톤, 추크치해 항로는 약 45만 톤을 운송했다.
소련에 지원된 물자 목록 끝이 없는 글씨에 정신이 멍해진다. 해당 통계에서 집계된 총액은 군수물자 46억 달러, 민간 물자 48억 달러이고 나머지 10억 달러는 인건비이다. 이마저도 공식 목록이 아니라 담당 장교가 훗날 본인이나 소련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므로실제 양은 더 많았을 것이다.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알았다. 원래 영어와 러시아어는 읽고 쓰는 법도 다르며[14] 그나마 프랑스어와 알파벳을 쓰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대숙청으로 쓸려 나간데다 소련의 외국어 교육이 잘 정착한 상황도 아니었다.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주면서 포장 박스와 매뉴얼까지 러시아어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당대 소련인들은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 폭탄 설명서를 못 읽는다고 해서 잘못 작동된 폭발물이 피아를 가리진 않을 테니.
B. 민간 지원
미국이 소련에 제공한 식량 자원 목록
각종 고기 통조림 120만 톤
소시지 26.3만 톤
돼지고기류 23.8만 톤
돼지고기 통조림류 14.8만 톤
베이컨 3.5만 톤
계란 (동결건조) 10.9만 톤
건조우유 7.2만 톤
버터 9.8만 톤
치즈 3.6만 톤
유지류 35.7만 톤
식용유 10만 톤
밀가루 38.3만 톤
콩류 25만 톤
쌀류 5.7만톤
야채류 3.8만톤
설탕 45만톤
기타 식량류 40만 톤 이상
총합 428만 1,910톤
농경과 식량 분야도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로 전체 식량 생산량의 27% 이상을 차지했으며 1, 2차 5개년 계획 동안 주요 산업 기지로 육성한 우크라이나를 상실했기 때문에 물자 생산에 애를 먹고 있었다. 공장이야 우랄과 시베리아로 소개해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41 ~ 42년의 영토 상실로 인한 농경지 상실은 연방에 큰 부담이 되었다. 40년에 9천만 톤 이상을 생산하던 곡물은 42년에 3천만 톤으로 곤두박질쳤다. 수백 만이 넘는 장정들을 군대로 보낸 탓에 인력이 부족해져 다수의 농촌에서 여성과 장년층 이상의 남성들만 남아 경작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되었으며 연방 전체에서 식량 공급량이 감소하고 있었다. 물론, 소련은 사수하고 있는 지역에서 생산하는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환경에서 매일 일일 칼로리 소모량이 4,000 kcal는 기본이고 심하면 6,000kcal를 넘어가는 수백 만의 군인들에게 충분한 급양을 해주고 식량을 비축하는 일은 점점 더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보낸 식량들은 소련에 부족하던 유지류와 유제품, 설탕과 기호품, 가공육과 육류 통조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는 혹독한 기후과 극한 상황에서 붉은 군대와 소련 인민들이 버티는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이 보내준 식량 원조도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가치가 있는 지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공급할 식량이 죄다 떨어진 최악의 상황에서 소련 공무원와 장교들이 인민과 군인들에게 내준 마지막 식량이 미제 초콜릿일 정도였다. 미국에서 보내준 약 428만 톤의 식량 원조가 없었더라면 레닌그라드를 위시한 여러 지역에서 더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또한 전시 총력전 상황에 돌입해 인력과 자재, 농기계가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이 보내준 트랙터와 콤바인, 곡물 · 채소 · 사료 작물 종자와 비료는 연방의 농업 생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이 무기 대여법으로 제공받은 식량들을 상세히 분류해 보자면, 미국은 모든 소련군이 4개월 이상 먹을 수 있는 전투 식량, 스팸 통조림, 초콜릿, 콜라 같은 기호품, 육류, 밀가루, 쌀, 콩, 버터와 식용유, 치즈, 동결 건조 계란, 설탕, 건조 채소와 같은 주식 외에도 주스, 건조 우유/분유, 바나나, 사과, 배, 파인애플, 양파, 꿀, 견과류, 향신료, 샐러드 드레싱, 당밀, 커피, 사탕 등[20] 전쟁 당시 소련의 능력으로는 조달이 어려웠으나 소련인들에게는 절실히 필요로 했던 모든 종류의 식량을 지원하였다.
피복 분야를 살펴보면, 미국이 준 전투화 약 1,400만 켤레는 모든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좋았다. 그 외에도 군복 2,100만 벌, 혹한지용 동계 군복 500만 벌, 항공 조종사 조종복 100만 벌, 양모 40,000톤, 각종 가죽 270만 제곱미터 등을 제공했다. 식량처럼 여성복[21] 및 부츠, 아동복 및 아동용 장화, 방수복, 간호복, 바람막이 자켓, 작업용 장갑, 가죽 벨트 등 잡다한 종류를 볼 수 있다. 소량이긴 하지만 재봉틀도 보내는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의약품 분야에서는 수술 도구 700만 달러어치, 처방 의약품 700만 달러어치, X - 선 기기 등을 보내주었다. 사진 및 영화 촬영 분야에서는 촬영용 카메라와 필름, 감광제와 편집용 기구를 보내주었다.
경공업 뿐 아니라 중공업 분야에서도 선반, 밀링 머신, 드릴, 제련 설비, 압연 설비, 항공 가솔린 생산용 석유 플랜트 등을 제공했다.
전력 분야에서는 발전소용 발전기 6,214대, 변압기 26,000개, 소형 디젤 발전기 6,285대를 제공했다. 이들 발전기와 변압기는 군수품 공장을 가동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핵심 부품이다. 공작 기기의 모터에 인가되는 교류 전기의 주파수나 전압이 튀면 오작동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생산품의 품질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기관차 1,860량, 화차와 객차 11,181량, 62만 톤의 철로를 공급해줬다. 이러한 지원 덕분에 소련은 철로와 기차 공장들을 우랄객차공장처럼 전부 T-34 등의 전차 공장으로 전용할 수 있었다. 철도 차량은 그 특성상 대차에 쓰이는 서스펜션 등이 전차에 쓰이는 무한궤도의 시스템과 생산 공정이 비슷하다 보니 유사시에 철도 차량 공장을 전차 공장으로 전환하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전시 동안 기관차 92대, 객차 1087대, 철로는 42년부터 44년까지 연평균 10만 톤만 생산하고 나머지 추가 필요분은 미제 기관차와 객차, 철로로 충당했다. 거기에 미군의 구형 M1 포병용 중트랙터 8276대는 소련군의 야전 포병 수송을 담당했다.
생존에 필요한 물자 뿐 아니라 인형, 영사기(무성, 유성), 축음기[25]와 레코드판, 놀이 기구, 아동 서적, 피아노와 각종 악기, 손목 시계, 화장품과 보석, 장신구 등의 사치품까지 보내 주었다. 해당 품목들은 현재의 국방에 관련된 물품만 보낸다는 무기 대여법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었으므로 미국은 이런 물품도 보냈다는 사실을 함구했으며 공식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기에 이를 누가 보냈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정부의 공식 발주 과정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품목들이므로 민간인들이 물자를 옮길 때 적당히 끼워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에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오락용품과 기호품, 특히 어린이를 위한 완구와 교재가 많은 것을 볼 때, 알려지지 않은 배송자들이 전후 소련이 복구되고 민간인과 아이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기를 바라며 기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C.군수 지원
무기 대여법은 식량과 원자재, 통신과 철도, 트럭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 장비를 대량 공급하여 독소전 초반에 공업 능력의 30%, 식량 생산량의 4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버틸 힘을 주고 1944년의 대공세를 개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은 붉은 군대가 필요로 하는 항공유의 57%, 전체 폭약 보유고의 53%, 구리 · 알루미늄 · 고무는 공급량의 거의 절반을 충당해줬다. 그 덕에 붉은 군대는 미제 금속으로 생산한 항공기를 미국산 항공유로 띄워, 미국이 제공한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 준 폭약으로 만든 항공 폭탄으로 독일군을 격퇴했다.
군과 민간인의 생활을 동시에 지탱해 준 수송 분야는 완전히 미국제 트럭들이 꽉 잡았다. 당장 소련군은 미국이 준 트럭 35만 대, 지프 77,900대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한다. 이미지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트럭 숫자는 병력 수에 비해 정말 적었으며 동부 전선에서는 보급을 트럭이 아닌 말로 했다. 특히 스튜드베이커 트럭은 디트로이트 공업 단지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툭하면 험지에서 퍼졌던 소련의 GAZ 트럭보다 좋았고 소련군 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또 야포 수송이 신속해져 빠른 공세 전환, 기동 방어, 긴급 화력 지원 능력이 개선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보내준 24만 톤의 차량 연료유는 거의 천만 톤에 육박하는 소련의 전시 총 차량 연료유 생산고와 비교하면 고작 2.4% 정도 밖에 안 될 정도 비중이 미미했으나, 옥탄가가 매우 높은 고급유였기 때문에 그 가치가 아주 높았다.
미제 통신 장비 역시 핵심적인 지원 중 하나였다. 붉은 군대는 미국이 보내준 348개의 레이더, 야전용 전화기 422,000개, 최신 휴대용 무전기 24,500개, 153만 km의 통신선, 3300km의 해저 케이블, 을 활용해 분대 · 소대 단위 전술 운용 능력을 개선하고 기갑 부대에 무전기를 장착해 전투 역량을 높였다. 공군은 전선에서 무선 관제소를 구축해 항공기들을 인도했으며 사령부에서는 각종 통신 · 감청 장비들을 활용해 독일군의 통신을 감청하고 소련군의 정보를 은폐했다.
소련 보병의 제식 화기들을 미국에서 생산해 보내주기도 했는데, 이는 총기 제작 및 소유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국 특성상, 미국의 다양한 총기 공장들이 1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전세계 각국으로부터 제식 화기 생산 계약을 맺고 납품하거나 그냥 복제해서 민간에 판매하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생산한 모신나강 소총은 우랄과 시베리아에서 급조해 품질이 나빴던 소련제 모신나강들 보다 상당히 쓰기 편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된 물자 중에는 본국에서 성능이 떨어진다며 크게 저평가된 병기가 의외로 호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전차를 비롯한 기갑 차량은 1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다. 야포 및 박격포 또한 96,000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했다. 기관총 13만 1,600정과 포탄 32만 5,784톤도 함께 왔다. 기존 소련 포탄은 규격이 다르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기 대여법으로 받은 전차 역시 전반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밸런타인 전차의 경우 소련 요청으로 추가 생산을 했을 정도이고, 일부 영국산 전차를 제외하면 자국산 전차에 비해 거주성이 좋고 화력 역시 소련제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애지중지했다. 그리고 처칠도 장갑이 튼튼하다는 점, KV-1과 대등한 위력의 주포를 갖추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나쁘지 않은 평을 했다.
M4 셔먼 전차도 소련군은 '장갑 괜찮고 속도도 나름대로 빨라 추격전에 좋고 고장도 잘 안 나고 화력도 좋다.'고 후한 평가를 했다. 덤으로 의자에 쓰인 인조가죽의 재질이 훌륭하여 셔먼 전차병들은 전차가 격파되면 의자 가죽부터 뜯어냈다고 한다. 반면 차체 높이가 너무 높아 넓은 평지에서 적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 궤도 폭이 협소해 험지 돌파 능력이 모자랐단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소련 병사들이 서방 전차를 매우 좋아했던 이유는 기계적 신뢰성이 높았고, 소련 전차와 달리 편의성을 신경쓰느라 주포 구경이 작았기 때문에 덜 중요한, 덜 위험한 임무를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셔먼 전차를 대전 말기까지 베를린 포위전, 빈 포위전 등 독일 본토 공략에 요긴하게 써 먹었다. 그냥 셔먼 쓰던 부대에 계속 보급해준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소련군 기준으로 성능이 좋았기에 계속 지원을 요청했다. 서부 전선의 미군은 셔먼 전차로 독일군의 6호 전차 티거와 5호 전차 판터에도 맞서야 했으니 퍼싱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동부 전선의 소련군은 티거와 판터 등에 맞설 전차로 IS-2 같은 중전차나 ISU-152 등의 고화력 자주포들이 있었기에 셔먼의 장갑과 화력에 만족했다.
해군 쪽으로는 오마하급 경순양함, 타코마급 호위함, PT 보트와 각종 상륙정과 상륙함을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만주 작전 과정에서 북한 지역의 나진과 청진은 물론이고 쿠릴 열도에 상륙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공군은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만 8700대를 지원받았으며 이는 소련 공군이 전시 동안 보유한 항공기의 13%를 차지했다. 이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기습당해 치명타를 입은 소련 공군의 재건에 도움이 되었다. 이밖에도 미국은 항공기를 생산, 수리할 수 있는 많은 부품과 항공기 엔진 14,902개도 지원했다.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 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영미가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했던 P-39 에어라코브라가 정예 부대인 방공군 소속이었으며, 실제 알려진 전과도 엄청난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미제 전투기로 올린 최다 격추수 보유자들도 소련 파일럿들이다.
소련은 스탈린의 급격한 중공업 정책 덕분에 전쟁 직전 중공업 부분에선 나치 독일과 2~3위를 앞다투던 국가였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료 이전까지 싸우던 소련군의 전차들은 모두 소련 내 생산품이었다. 주력 전투기 엔진은 소련 엔진을 가져다 썼고 렌드리스로 받은 항공기에 소련 엔진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전차는 소음이 상대적으로 크고, 기계적 신뢰성이 부족해서 렌드리스 받은 전차들을 무고장이라면서 좋아했다. 미국제 전차에는 소련제 전차에 없는 사용자를 배려하는 세심함이 있었으므로,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전차의 일부 구성품이나 콘셉트를 참고하거나 그대로 베껴서 자기네들 전차에 적용하기도 했다. 항공기의 경우도 엔진의 부족한 고고도 성능과 짧은 수명, 빈약한 기체 강도로 질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사용자에 대한 배려도 심하게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영국과 미국이 전투기로는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한 P-39를 전투기로 열심히 굴려먹었을 정도[30].
소련은 대전 내내 물자 더 보내라고 미국에 요청했고 심지어는 미국도 소련이 원하는 물량을 보내지 못한 것도 많았는데, 소련이 요구한 것 중에는 핵무기 개발용 우라늄과 수소폭탄 개발용 중수까지 있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법으로 온 원조품들, 미국의 과학 기술 원조를 통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군사, 산업 부분에 써먹었다. 소련 관리와 기술자들 15,000명이 미국의 공장과 군사 시설을 견학했으며 이들은 조국의 전시 생산 체제를 개선하는데 일조했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영토를 탈환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독일 영토 내로 진입해 1945년 5월에 베를린을 함락하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세웠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미국의 원조는 소련 육군의 기동과 보급을 해결해 줬고 소련군 전체의 고질적인 문제인 야전 통신망의 낙후성까지 해결해 대규모 기동이 가능한 군대로의 환골탈태를 가능케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천연 자원과 희귀 금속을 지원해주었으며 소련에게 지원한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 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상당히 높았다.
또한 미국의 지원은 무기보다는 소련이 중공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21만 5,000톤[31], 구리 27만 톤[32], 황동 및 청동 31만 8,000톤, 니켈, 몰리브데넘, 크로뮴 등 각종 금속[33]과 같은 자원 및 객차 및 화물을 실는 화차를 끄는 기관차 같은 기계와 설비들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항공유 하나만 예를 들어도 전쟁 전 소련은 석유는 많이 뽑았어도 기술 부족으로 78옥탄가 밖에 안 되는 저등급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것도 전쟁이 발발하자 생산을 못해 미국이 100 옥탄가의 고급 항공유를 100만 배럴 넘게 지원하다가 나중엔 아예 플랜트 시설을 4개, 그것도 철로나 연료 탱크 같은 설비까지 통째로 같이 넘겨주었다.
D.무기대여법의 역할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독일군은 목표로 삼았던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 일명 A-A 선까지 진격하고 우랄 산맥 서쪽의 유럽 러시아 지역을 점령하고자 했다. 만약 독일군이 연방의 양대 수도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함락시켰다면 소련은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은 혼자 힘만으로 힘겹게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을 것이고 43년 이후에 이뤄졌을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은 그 동력이 약화되거나 늦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무기 대여법이 없었더라도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반격과 승전은 심대한 지장을 겪었을 것이고 훨씬 더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미국의 지원 덕분에 소련은 군수 산업 분야에 여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석탄, 철광석, 알루미늄 등 주요 자원 분야에서 독일에 비해 열세인 상황에서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군수품과 무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서방의 동맹들이 제공해준 고품질의 무기와 장비, 항공기와 선박, 차량, 통신 장비와 레이더는 붉은 군대의 역량을 증진시키고 육군의 차량화와 군 전체의 통신 기술을 개선하는데 심대한 역할을 했다. 43년 4월부터 봇물 터지듯 들어온 지원 물자는 소련이 42년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상처를 회복해 45년 5월 9일에 궁극적인 승리를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부터 늦게나마 총력전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에 무기 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1년 입은 치명상에서 회복하고 독일군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설 가능성은 의문이란 주장이 있다. 독일은 전쟁 중반까지 시민들의 기호품을 생산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전쟁 내내 생산한 4호 전차보다도 나중에 생산을 시작했지만 총력전 태세로 전환된 시점에 생산된 5호 전차 판터의 평균 연간 생산량이 더 많다. 게다가 독일 군수 공업 특유의 문제였던 부정부패도 매우 심각했으며 생산 과정도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44년에 들어서야 알베르트 슈페어의 주도하에 뜯어고치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미국과 소련이 온 국력을 전쟁을 위해 투입하는 시스템을 완비한 후였으며 독일에 대한 공격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허나, 대부분의 전문가와 역사학자들이 독일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는 것까지 모두 감안하더라도 소련의 승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위 주장은 패자의 변명일 뿐, 설득력이 없다. 42년까지 나치는 소련 산업 생산의 30%, 철강 · 석탄 · 알루미늄 생산의 50%, 식량 생산의 40%를 차지하는 지역을 죄다 빼앗았다. 41년 말의 소련은 중공업 및 기초재료 산업 생산량이 전쟁 직전의 20% 밖에 안되는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련은 빠르게 공업 단지들을 후방으로 소개해 생산력을 늘렸고, 가장 절망적이었던 42년 하반기에는 모스크바의 전시 군수 물자 생산 능력을 회복시켰다.
항공기와 전차, 야포 등 주요 무기 생산 분야에서 독일은 44년이 되어서야 소련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독일이 소련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41년과 42년에조차 소련은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41년, 독일의 항공기 - 전차 - 야포 생산량은 각각 소련이 생산한 양의 약 74.8% - 78.9% - 16.5%였고, 42년에는 그 격차가 더 벌어져서 약 60.5% - 38% - 9.4%였다.
소련은 이미 42년에 온 국력을 전쟁을 위해 투입하는 시스템을 완비한 뒤였다. 무기 대여법이 있든 없든, 국가의 핵심인 유럽 러시아 지역의 태반을 빼앗기든 말든 간에 소련은 주요 무기 생산 지표에서 독일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미국의 대규모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무기 대여법이 없었더라면, 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의 규모가 작아지고 그 시기도 늦춰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전을 못할 이유는 없다.
스탈린이 전후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측근에게 무기 대여법이 없었다면 1941년 ~ 1942년의 인력, 장비, 산업 손실이 엄청나서 독일과의 전면전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고 위의 주장에 근거를 덧붙이기도 하는데, 이것도 부분적인 사실에 기인한 것이기에 근거로 삼기에 부적절하다.
스탈린은 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과 루즈벨트 앞에서 무기 대여법이 없었더라면 전쟁에서 졌을 것이라 발언했고 얄타에서도 그들 앞에서 무기 대여법이 전쟁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 직후, 주코프 앞에서 서방이 44년에 프랑스에서 군사적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소련은 히틀러를 상대로 승리할 힘이 있다고 발언했다. 무기 대여법에 대한 스탈린의 헌사는 서방의 지원을 원활히 받으려는 외교적인 목적을 띤 것이었으며 "독일과의 전면전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란 발언은 스탈린을 격하한 흐루쇼프의 증언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신뢰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미국도 소련이 나치를 상대로 항전을 이어가고 일본에게 선전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기 대여법은 소련의 승리에 부차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지, 핵심은 붉은 군대의 영웅적 항전이었다며 소련의 희생에 헌사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의 지원이 부재하는 상황에선 소련은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만 장기적으로는 최대 독일에게 점령당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독소 전쟁 개전 이전의 소련 영토 권역 진입에 머무르는 데 그쳤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이 오직 소련만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라 현실성을 상실한 주장이고, 미국의 연간 물자 지원 내역과 그 영향을 상세하게 연구한 데니스 하블랫(Denis Havlat)은 렌드리스가 없었을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까지는 실제와 큰 차이 없이 흘러간 후 서부 전선에 상륙한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는 동안 버티다가 독일군이 서부 전선으로 대규모로 재배치되는 틈을 타 조금씩 전진하는 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즉, 무기 대여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양면 전선의 압박을 받게 된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밀려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중화민국
중화민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내부에 만연한 심각한 부정부패, 이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불만과 불신 등으로 지원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일단 중일전쟁 개전 초의 국부군 정예병력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아직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은 나치 독일이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고문단까지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단이 철수하고, 30개 사단 중 8개만 무장이 완료되었고 나머지는 편제에 맞게 구식 무기들로 채웠는데, 그나마 이 8개도 포병, 공병, 화학 장비와 군마, 차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들조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그 이후로 미국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아직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기껏 가능한 게 당시의 영국령 인도에서 티베트 상공을 통한 수송이었다. B-29의 초기 작전의 상당수 소티가 폭격임무가 아닌 중국을 향한 무기 수송에 할당되었다. 폭탄 적재창에 폭탄 대신 구호품/군수품을 적재한 것. 또한 중국에 배치된 미군부대(주로 공군)에 대한 군수품 수송에도 할당했다.
이러한 항공 수송으로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기술적으로 수십 톤짜리의 주력 전차를 공군의 전략 수송기로 실어나를 수 있게 된 것도 베트남 전쟁 이후이고, 그것도 1회에 고작 1-2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총기나 야포류나 조금 줄 수 있었고 그나마도 사고가 많아서 다 주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에베레스트 산으로 인식되는 티베트 고원의 첩첩산중의 험악했던 수천 m의 산들과 악명 높은 계절환경에서 많은 추락이나 불시착이 발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은 전후에 버뮤다 삼각지대에 버금가는 미스테리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이집트 방위를 위해 낼름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기껏 지원 온 무기들도 조지프 스틸웰이나 클레어 셰놀트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독점했지 정작 장제스는 총 한 자루 받아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 중 셰놀트는 장제스와 매우 원만한 관계였고 중국군에 협조적이었지만, 스틸웰이 문제였다. 그는 중국군 전체에 대한 통수권을 넘기라는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고 심지어 중국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며 시종일관 장제스에게 잔소리나 하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스틸웰과 그의 군사고문단은 중일전쟁의 양상이나 중국군의 전술[38] 및 적인 일본군의 능력은 무조건 폄하하면서 보급받은 것을 자기 휘하 부대에 꿍쳐놓고 버마 탈환 준비에나 힘썼다. 이 때문에 열받은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이 적은 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스틸웰 때문이라고 잡아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던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진다.
그나마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꽤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약간의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 100대로 무장할 수 있었지만 수백만의 일본군이 주둔한 중국 본토의 사정은 가히 절망적으로,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틸웰의 버마 공략 지원을 위해서 없는 물자와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계에선 감리교도인 장제스 부부와 쑹메이링의 로비 때문에 친중파가 꽤 생겨난 반면에 미군 안에서는 국부군을 싸우지도 않는 군대로 얕보고 경멸하는 시각이 퍼져 있어서 국민당을 왜 지원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스틸웰 등의 미국 장교들은 "국민당은 왜 방어전, 소모전에만 일관하고 왜 대규모 야전을 하지 않는가, 국민당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벌였다는 분투는 국민당의 거짓말이다"라고 중국을 깔보았는데 이들의 편견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우선순위는 자꾸 밀리게 된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장제스와 미국/영국은 자꾸 충돌을 거듭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나마 중국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미국 정치계에서조차 반중 감정이 퍼지면서 상태는 심각해졌다. 게다가 스틸웰의 대표적 실책인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니미츠의 대만 공격론이 힘을 잃어 중국을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버마가 탈환되고 무능하고 오만방자한 스틸웰을 대신하여 성격이 부드럽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부임한 이후로 상태가 꽤 나아져서 중국군은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전열을 회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셔먼 전차를 비롯해서 미국식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정예부대들은 중국 남부를 겨냥한 일본군 10만 대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군 3만 명을 물리쳤다. 이후 미국은 나치를 패망시키고 나서 조지 패튼을 비롯한 미국의 장군들과 지상군 파견을 비롯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39] 그 전에 일본이 만주 작전과 핵폭격을 겪고 항복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한편 공산당에 대한 지원 떡밥도 나온 바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장제스 대신에 자신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싶어했고 미국 특사들을 옌안에 초청하여 그들을 구워삶아 미국이 중국에서의 대화 파트너를 장제스에서 자신으로 교체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마오쩌둥은 항일에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면서 정작 장제스는 항일을 도외시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렸고, 국민당은 부패하고 무기력하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옌안은 민주적이고 활기차다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국인들을 꾀려 했다. 스틸웰도 자기 말 안 듣는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공산당에게도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약올렸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와 스틸웰의 사이는 더욱 틀어졌고 결국 해임당할 처지가 된 스틸웰은 공산당 지원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장제스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임인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공산당이 중국의 유일한 정권인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흔드는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취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완전히 물건너갔다.
정작 국민당이 엄청난 양의 지원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이 끝난 후로,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40~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국민당에게 해주지만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은데다 장제스가 파멸적인 만주 진공 작전을 수립하면서 국공내전의 패배의 단초를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에게 쥐어졌던 상당량의 미제 무기들은 국공내전에 좀 사용되다가 국민당의 전열이 붕괴되면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이들 물자의 일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미군을 향해 불을 뿜기도 했다.
심지어 베트민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베트민의 바주카, 박격포, 무반동총을 상대해야 했다.
(4자유 프랑스군

자유프랑스군 제 2 기갑사단에 지원된 M4 셔먼 중형전차들
미국은 자유 프랑스군에게 32억 달러(361억 달러)를 제공했다
2.전후 상환 문제
미국의 지원은 무상이 아니었다. 무기 대여법은 말 그대로 "대여"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소모하지 않은 물자는 반환해야 했고 그 동안 소모한 물자도 그 가치를 헤아려 갚아야 했다. 전후에 도착한 물자들은 의회의 인가를 받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공짜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전 이후에 물자가 부족해진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물자를 계속 지원받길 원했고 미국도 상당량의 재고를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약 10% 가격에 대량의 물자를 넘겨 주었다. 영국의 경우 전체 물자의 약 30%를 이런 식으로 수령했다.
전시 물자 수출로 막대한 이익을 올린 1차 대전 때와는 달리, 무기 대여법으로 제공한 물자들은 제값으로 받은 게 거의 없어서 손해보는 장사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전쟁 피해 복구도 벅찼기에 제값을 받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반환 대상인 무기의 경우, 전쟁이 끝나서 새로 생산한 무기도 창고에 넘치는 판에 연합군이 쓰던 중고 무기는 돌려받을 필요가 없어서 거의 헐값으로 처리했다. 당장 영국부터 군수 물자들을 10% 가격으로 받았다. 이 정도면 미국 입장에선 원가는커녕 인건비도 못 받은 셈이다.
루스벨트는 의회를 설득할 때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이 번지기 전에 호스를 빌려줘야 한다.', '무기를 빌려준 다음 다시 그 무기를 돌려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그의 반대 세력들은 무기 대여법을 '호스가 아니라 껌을 빌려주는 것'에 비유해 '씹던 껌을 돌려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42]며 비난했다. 사실 유럽 국가들이 전후 피폐해질 거라는 걸 감안하면 겨우 원금만 돌려받아도 다행이었다.
1945년 9월 2일, 전후 피폐한 영국은 갑자기 원조가 끊기자 미국에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물건을 미국이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 '10분의 1'로 떨이 판매를 했다. 이것과 1941년 이전의 지원대금, 그리고 1946년 종전 이후 추가로 빌린 돈을 합쳐 당시 파운드화로 대략 11억 가까이 됐다. 영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전쟁 이후 긴축에 힘써야 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프랑스처럼 전쟁터가 되지 않았음에도 피폐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50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부족하게라도 다 받아냈다. 영국에게는 이자율 2%에 5개월 유예기간 후 50년 상환 기한을 주었다. 심지어 적대국 소련조차도 결국 갚긴 갚았다. 무기 대여법의 수혜를 입은 나머지 30여 개국은 돈 대신 미군에게 기지 사용권을 제공하거나 미국의 정책에 협조하는 등 적절한 대가를 치르는 식으로 상환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비밀 창고에 있던 금괴로 땡처리하고 입을 씻었다고 알려졌다. 허나, 이는 루머이며 극히 부분적인 사실이 섞인 소문이다. 1942년 4.5톤의 금괴를 수송하던 영국의 HMS 에딘버러 함이 독일 잠수함에 침몰당해서 1981년, 1986년에 금괴를 인양한 사건을 갖고 만든 낭설이다. 소련이 보낸 4.5 톤의 금괴는 41년에 제공한 물자에 대한 대가였지, 무기 대여법으로 공급받을 물자 전체를 상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낸 게 아니었다.
전후에 미국은 감가상각을 거쳐 총 상환금을 26억 달러를 상정했다가 13억 달러로 인하했다. 하지만 1948년, 소련의 협상 실무진들은 1.7억 달러만 상환할 수 있다고 전했다. 49년, 미국은 30년 만기 10억 달러, 소련은 50년 만기 2억 달러를 제시했고 1951년, 미국은 8억 달러, 소련은 3억 달러를 변제하겠다고 선언해 협상은 3차에 걸쳐 결렬되었다. 결국 미 · 소 양국은 1972년이 되어서야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소련은 최종적으로 7억 2천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73년까지 4800만 달러를 상환했으나, 74년에 미국 의회가 소련의 대외 무역을 공격하는 잭슨 - 바닉 수정안을 통과시키자, 이에 격분해 상환을 중단했다. 고르바초프 시기에 다시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미 · 소 양국은 또 다시 모두가 합의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91년에 소련이 붕괴하는 바람에 변제 주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러시아가 잔액의 61.34%를 담당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구성 공화국들이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으나 발트 3국,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서명하지 않았다.[43] 그러다 1993년 4월 2일 러시아 연방이 관련 채무를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서명해 상환 주체가 명확해졌다. 러시아는 2000년에 6억 달러를 변제하고 경제가 나아진 2006년 8월 21일에 전액을 변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파리 클럽을 통해서 소련 시절 서방에 졌던 빚을 전부 갚은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945년 기준 113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소련에 유상 대여
1947년 미국은 소련에 영국의 가격 조건 (원래 가격의 10%)을 적용, 13억 달러 상환 요구.
3차에 걸친 협상 끝에 미국은 8억 달러로 인하하고 소련은 3억 달러로 인상했으나, 양자가 내놓은 금액 차이는 천문학적인 수준.
미 · 소 양국은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수십 년 간 갈등을 빚다 데탕트 시기에 "7.2억 달러를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소련은 1973년까지 3회에 걸쳐 4800만 달러 상환. 허나, 잭슨 - 바닉 수정안에 대한 대응으로 상환 중단.
고르비 시기에 재논의했으나, 합의 도출 실패.
연방 해체 이후, CIS 소속 국가들이 서로 분담해 납부하기로 결정
발트 3국,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상환 거부
93년에 러시아 연방이 채무를 모두 떠안기로 결정
2006년에 파리클럽 채무협상을 통해 완납 처리.
'물가 상승율을 감안한 계산'
1945년까지 113억 달러 규모의 물자 지원
1973년 기준 269.8억 달러에서 총 4800만 달러를 상환한 후 잔금 약 269억 달러.
2006년 기준 $1222.4억 달러의 잔금 중 2.4억 달러를 상환하여 1,220억 달러가 남음.
(물가상승률 환산 기준. 순수 원금만 적용한 것이니 단순히 참고만 할 것)
이렇게만 보면 소련이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고 몰염치해 보일 수 있으나, 소련은 군인 약 870만, 민간인 최소 2,000만 명의 엄청난 인적 손실을 보았다. 서방 연합군을 대신해 독일군의 80%를 상대하고 수천만의 희생을 대가로 독일 국회의사당에 깃발을 꽂은 게 소련이었다. 미국도 이런 희생을 인정해 처음 상환 협상을 벌일 때도 소련의 피해와 헌신을 고려하여 상환금을 13억 달러로 대폭 인하했지만, 소련은 자국의 희생을 강조하며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여기에는 종전 직후부터 태동한 냉전과 미 · 소 간의 입장 차이가 영향을 미쳤다. 기실, 미 · 소 양국은 전쟁 중에도 물자 지원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소련은 43년 4월 이전까지 근근히 들어오는 물자의 양에 자주 짜증을 냈고, 영국보다 우선 순위가 떨어지는 것에도 불만을 품었다. 반대로 미국은 최선을 다해 물자를 운송하고 있음에도 계속 물자를 독촉하는 소련 때문에 인내심이 점점 한계에 이르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물자 지원에 대한 회의론이 컸다. 여기서 스탈린이 스탈린그라드 승전 연설에서 자국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나치에 맞서고 있다는 표현을 입에 담자, 주소련 미국 대사였던 스탠들리가 여기에 맞대응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미국이 스탠들리를 소환하고, 소련도 미국의 원조를 강조하는 기사를 늘리기로 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서로에게 가진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종전 이후, 소련은 5월 9일 전승일부터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고 소련을 지원해주기 위해 오고 있던 선박들까지 죄다 회항시킨 일에 이를 갈았고 반대로 미국은 소련의 유럽 공산화 시도에 격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은 무기 대여법을 과대 평가하고, 소련은 과소 평가하면서 입장 차이는 더 커져 갔다.
애초에 전쟁 중에도 미국인들은 소련이 무기 대여법 덕분에 나치 독일에 맞설 수 있다고 인식했고 붉은 군대가 이용하는 기갑 전력과 야포, 항공기와 각종 장비의 대다수가 미국산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냉전이 터지니 미국인들과 미국의 보수파들은 무기 대여법이 없었으면 아예 이기지도 못했을 주제에 나치를 해치웠다며 거들먹거린다고 소련을 비난했다.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소련이 수십 척의 상선과 수백 척이 넘는 함선을 가져갔으면서 고작 호위함 27척과 상선 몇 척만 돌려줬다며 소련을 비판하고 정부에 강경한 조치를 요구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고립되어 아사하던 소련인들을 가련히 여겨 자발적으로 물자와 식량을 기부해 생명의 길을 여는데 일조했으며 소련인들의 희생을 인정해 소련의 채무를 완전히 탕감해주자는 의견에도 공감을 보내던 미국인들이 냉전부터 소련인들을 엄청난 양의 지원을 공짜로 받아먹고도 감사하단 표현 한 번 할 줄 모르는 몰염치하고 뻔뻔한 거렁뱅이 도둑놈으로 취급했다.
반대로 소련인들은 미국인들이 소련이 치른 희생을 인정할 줄 모르고, 자기들이 보내준 하찮은 통조림과 트럭 덕분에 소련이 승전할 수 있었다며 미국이 소련의 전공을 훔치려 든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미국인들이 기부해 준 장난감과 동화책, 악기와 축음기를 보고 즐거워하던 이들, 아이들의 손에 인형과 초콜릿을 쥐어주고 먼지 투성이인 넝마 대신에 미국인 아이가 입었던 새 옷을 입혀 동화책을 읽어주며 잠시나마 전쟁 전의 일상을 느끼던 소련인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들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주며 미국이 보내준 물자에 항상 깊은 감사를 표하던 소련이 냉전부터 미국인들을 수천만이 죽고 전국토가 잿더미가 된 나라에 찾아와 채권을 들이밀며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반동 자본가로 취급했다.
47년에 고스플란 의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가 무기 대여법으로 제공받은 물자가 소련의 전시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4%라는 연구를 발표하자, 미국에서는 최소 10% 이상은 된다며 맞받아쳤다. 소련이 나치에 대한 자국의 승리를 강조하면 미국은 무기 대여법 덕분이라고 응수하고, 미국이 무기 대여법의 영향을 강조하면 소련은 미국의 원조는 소련의 승전에 오로지 부차적인 역할만 했을 뿐이라며 폄하했다. 이런 판국이니 협상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이런 전차로 무기 대여법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냉전이 종식된 뒤에나 가능했고, 미 · 러 양국의 학계는 점차 객관적인 관점으로 무기 대여법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화민국은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서 갚을 여력은 커녕 추가적인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에 미국이 빚 독촉을 사실상 포기했다. 중화민국도 소련처럼 군인 400만 여명에 민간인 1,800만 여명의 희생자를 내며 일본 제국을 몰아냈기에 미국 입장에서도 빚을 갚은 것으로 치고 중화민국을 파렴치한 취급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 하수인인 국민당이 진 빚 따위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했다.
3.의의
당시 강대국이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무기대여법으로 들여온 미국의 무기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산 무기에 익숙해진 유럽의 조병창들과 군인들의 경험은 훗날 북대서양 조약 기구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무기를 오래 쓰다 보니 길들여져서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미국식 규격이 새로 도입되었지만 별 문제 없이 미국식 규격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런저런 마찰이 있어서 7.62×51mm NATO 탄과 관련된 문제 등이 있기는 했다.
전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피폐해진 유럽에 부흥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까지 실시했으며, 무기 대여법과 마셜 플랜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미국 거시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연합국의 윈윈게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기술 교류도 이루어졌다.
가장 큰 의의에 대해서는,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는 가정 하의 대체역사 시나리오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나치가 워낙 꽉 막힌 집단이기는 하지만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공업력으로도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추축국의 실제 기본 공업력은 소련에게 전혀 밀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추축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유럽 영토 일부를 제외하면 정복과 동맹, 우호적인 중립 등을 통해 전 유럽의 자원과 공업력을 거의 다 흡수한 상황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공장 설비를 포함해서 뜯어갈 수 있는 건 모조리 뜯어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모든 설비를 뜯어갈 수 있던 것도 아니고 공장은 뜯어간다고 하더라도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는 소련의 공업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석탄은 탄전에 불을 붙여버리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 탄전이 수백 년간 지속해서 타기 때문에 인근 지역은 수백 년간 못 쓰는 땅이 된다. 물론 독소전쟁에서의 독일은 그런 걸 신경쓸 리가 없었다. 다만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이 얻은 이익은 다른 점령지보다는 적은 건 사실인데 설비를 뜯어간 것 뿐 아니라 인종청소를 한다고 주민들을 마구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비숙련공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닥치는대로 찍어내다 보니, 규모의 경제에 의한 숙련에 의해 갈수록 더 나은 것이 찍혀 나오는 소련에 비해 독일의 생산효율성은 심하게 떨어졌다. 일본도 비숙련공을 동원했는데, 문제는 소련과는 달리 규모의 경제가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숙련공의 노하우에 기대해야 하는 정도가 소련보다 더 큰 데다가 결정적으로 숙련공은 전쟁에 밀어넣고 비숙련공은 공장에 밀어넣는 맛이 간 방법을 써서 갈수록 질이 좋아지기는커녕 오각형 너트가 나올 정도로 질이 더 형편없어졌다.
독일은 독소전쟁 이전에 이미 총력전에 준하는 태세로 들어갔고, 소련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여 많은 자원과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부패 및 기업들의 알력 다툼 등으로 지극히 비효율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히틀러의 명령으로 프리츠 토트와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이 개입해서 생산체제를 혁신하면서 무기생산량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미 연합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뺏긴 1944년에 접어든 시점이라서 큰 효과가 없었다. 독일이 완전한 총력전 체제에 들어간 1944년이면 이미 점령지는 다 뺏겨서 지하자원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물자의 운송과 생산이 방해받던 시점인데도 오히려 무기생산량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슈페어 군수장관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 독일의 군수경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보면 쉰들러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들이 모조리 불합격 판정을 받는데도 계속 생산해서 독일군에 납품하는 것처럼 나오는데,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실제 당시 독일은 품질에 상관없이 모든 군수기업에 일괄적으로 10%의 이윤을 보장하는 병맛같은 시스템이라서 그런 해괴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건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 당시 독일 경제를 주무르던 재벌들의 환심을 사고 현실적으로 빠른 재무장을 위해선 품질 이전에 일단 대량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입한 시스템인데 이걸 총력전 상황에서도 계속 끌고 가다가 엉망이 된 것이다.
이미 연합군은 추축국 점령지를 탈환했고, 추축국 내부에서도 동맹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소련의 자원줄을 끊어대던 유보트 전력도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오히려 연합군 해공군에 의해 독일의 자원줄은 계속 끊기고 있었다. 공장에는 폭탄이 줄줄이 떨어지고, 장인들 역시 자원이 부족해서 예전 같은 고품질 병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력전에 동원된 비숙련공들이 만든 병기들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고스란히 가져가면서도 비숙련공의 숙련화를 통한 공업효율 증가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없었다. 결국 전쟁 후반에는 개선된 품질의 소련제 병기와 전장에서 끝없이 숙련된 소련 병사들의 힘으로 비효율적인 독일을 앞지를 수 있었다.
결국 소련의 물량에 밀린 독일이 패하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 호스를 제때 빌려주어서 우리집까지 불이 옮겨붙지 않게 된 셈이다.
중화민국 공식 사망자는 약 1,310,000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실제로는 군민 포함해 최대 22,00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전전 중국 인구의 약 4 ~ 5%에 해당한다.
일본에서는 최대 3,10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Huma liberty is democracy.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The economy is capitalism, and politics is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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