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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글로벌 삼성으로 이끈 이건희 경영 본문

Guide Ear&Bird's Eye/영국 BBC

글로벌 삼성으로 이끈 이건희 경영

CIA Bear 허관(許灌) 2020. 10. 25. 20:15

201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가전박람회(CES) 참석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25일 별세했다.

이건희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삼성 그룹은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삼성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1953년 어린 나이에 부친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이후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학문을 이어갔다.

이건희 회장의 유년시절 모습

196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이후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그는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 경력을 시작했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수장으로서 반도체, 휴대전화 사업 등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삼성전자가 세계적기업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친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끈 이건희 회장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을 맞아 경영 전 부문에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특히 당시 삼성전자 사장과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작심발언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 기술중시, 자율경영, 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신경영`을 추진했다.

기존에 양적 향상에 집중하던 분위기를 버리고 제품, 사람, 경영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한 전략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추진을 위해 제일 먼저 임직원들에게 개혁을 공감시키고 전사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신경영 전파를 위한 교본을 만화책 등으로 만들어 당시 임직원들은 매일 아침 교본을 놓고 1시간씩 토론을 했다고 한다. 신경영은 ‘7·4제’라는 출퇴근 시간 변화로 드러나기도 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는 이건희 회장

‘7·4제’는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변화의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고육책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삼성을 한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1987년 1조원이던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2012년 390조원대로 성장했으며, 삼성전자는 2006년 글로벌 TV 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또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또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 개 품목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국제스포츠 외교

이건희 회장은 스포츠 발전에도 큰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교 시절 레슬링 선수 경력이 있는 이건희 회장은 1982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체육계에서 활동을 시작. 이후 프로야구, 프로축구, 탁구, 육상, 태권도 등 여러 종목의 팀을 창단해 운영을 주도했다.

1996년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회 선출된 후로 세계 스포츠 외교의 전면에 나섰다. 그의 IOC경력 가운데 특히 강원도 평창이 세 번의 도전 끝에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경영권 승계 과제

그는 삼성그룹 총수로서 여러 의혹과 수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 연루돼 첫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그는 이후 1996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당시 재판부는 250억 원의 비자금 제공 혐의를 받은 그가 "기업활동 등으로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점, 공익사업과 기부 등으로 사회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는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후 1997년 개천절에 사면 복권돼 1998년 4월 경영에 복귀했다.

이후 2008년에도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 2009년 파기환송심에서 일부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해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진 뒤 그는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게 사실상의 경영권을 양도했다.

현재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부정한 방식으로 삼성 그룹 계열사를 합병하고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데 관여했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BBC 뉴스 코리아]

Mr Lee, pictured with his parents as a child, was the third son of Lee Byung-chul, who founded Samsung Group

サムスン電子会長、李健煕氏が死去 韓国最大グループの事実上トップ

サムスン電子の李健煕会長(聯合=共同)

韓国最大の財閥、サムスングループの事実上のトップであった李健煕(イ・ゴンヒ)サムスン電子会長が25日、入院先のソウル市内の病院で死去した。78歳だった。

 李氏は三星(現在のサムスングループ)を創業した李秉●(=吉を2つヨコに並べる)(ビョンチョル)氏の三男として、1942年、韓国南東部の大邱(テグ)で生まれた。幼少の一時期を日本で暮らし、61年、ソウル大学師範大付属高校卒業後に再度、日本に渡り、早稲田大学商学部で学んだ。早大卒業の翌66年には、米ジョージ・ワシントン大学経営大学院で学んだ。

 韓国に帰国後、三星物産副会長、サムスングループ副会長などを歴任し、87年に死去した父、秉●(=吉を2つヨコに並べる)氏の後継として同年、グループ会長に就任した。

 93年には「量から質への成長」を目指す「新経営方針」を提唱。電子、電器産業のほか、化学、金融、サービス業などに至るまで、さまざまな事業を展開。以後2008年まで、グループ総帥としてサムスンを韓国トップの財閥に成長させた。

 李健煕氏は韓国財界の“カリスマ”として韓国経済の成長にも大きく貢献した。サムスングループが韓国経済に及ぼす影響は極めて大きく、韓国の国内総生産(GDP)と輸出の約20%は同グループが占めているといわれる。

 また、国際オリンピック委員会(IOC)の委員や韓国五輪委員会名誉委員長などを務めるなど、李健煕氏は内外でスポーツ活動に寄与したことでも知られる。サムスンは五輪の公式スポンサーでもある。

 一方で、政界との癒着によるスキャンダルもあった。1997年に全斗煥(チョン・ドファン)、盧泰愚(ノ・テウ)両元大統領への贈賄容疑で逮捕され、裁判で有罪となった。この事件では恩赦となったが、2008年にも、政界や法曹界への不正資金提供や脱税の疑惑で当局から捜査を受けた。

 在宅起訴された李健煕氏はグループ会長を辞任。同年、脱税の罪でソウル地裁から懲役3年(執行猶予5年)、罰金1100億ウォン(現在のレートで約110億円)の判決を受け、翌09年にもソウル高裁から同様の有罪判決が言い渡された。

 しかし、この時も平昌冬季五輪誘致を理由に、李明博(ミョンバク)大統領(当時)から特別恩赦を受けた。

 10年3月にサムスン電子会長として経営復帰した李健煕氏だったが、14年5月に、急性心筋梗塞で意識不明となった。心肺蘇生(そせい)と緊急手術により、命はとりとめたが、以来、意識は戻らず、寝たきりの状態が続いていた。

각국 언론들, ‘이건희 별세’ 긴급 타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각국 언론들이 78세를 일기로 숨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별세 소식을 긴급 타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4일,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등을 글로벌 거인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회장이 25일 오전 서울에서 별세했다면서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투병해 왔다고 전했습니다. 

신문은 이 회장이 1987년 부친으로 물려받은 기업을 세계적인 인류기업으로 성장시킨 스토리와 함께, 두 차례 받은 유죄와 사면 사연도 소개했습니다. 

‘블룸버그 통신’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숨졌다라는 제목으로 삼성전자를 글로벌 테크 거인으로 만든 이 회장이 지난 2014년 심장마비로 병석에 오랜 기간 누워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이건희 삼성회장이 사망했다고 삼성이 밝혔다면서 1942년 태어난 이 회장은 삼성을 한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일본 ‘교도통신’은 향년 78세로 숨진 이건희 회장은 2014년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베트남 국영방송인 ‘베트남뉴스통신’과 싱가포르 일간 ‘스트레이츠 타임스’도 이 회장의 별세 소식을 뉴스 홈페이지 상단에 올리고, 이 회장은 삼성을 전자와 보험, 건설 등 많은 분야의 계열사를 둔 한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보도했습니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한국 시각 25일 오전 5시, 서울 강남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고 밝혔습니다. 

 VOA 뉴스 

미 언론 "이건희, 삼성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한국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지난 2008년 4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 언론들은 지난 25일 별세한 한국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관련 소식을 주요 뉴스로 다뤘습니다. 한국의 일개 가전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세계적인 일류 기업으로 키운 장본인으로 평가했습니다. 

지난 25일 숙환으로 별세한 한국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과거 남북 경협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직후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따라 북한에 165만 제곱미터 규모의 전자복합단지 조성을 계획했습니다.

10년간 5억 달러를 투자해 컬러TV와 전화기, 오디오 같은 전자제품 생산시설을 세울 계획이었지만, 남북관계 경색과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 등으로 전자복합단지는 결국 무산됐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이건희 회장의 별세 소식을 긴급 타전하고, 생애 업적을 조명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신문은 삼성을 세계적인 기술 대기업으로 만든 이건희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숨졌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신문은 30년간 이어진 이건희 회장의 지도 하에 삼성전자는 작은 TV 제조회사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메모리 칩 회사가 됐다고 전했습니다.

신문은 이건희 회장이 1987년 아버지로부터 기업을 승계 받은 뒤 삼성이 싸구려 모조품 가전기구를 만든다는 평가를 떨쳐내기 위해 품질을 개선시키기 위한 동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건희 회장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면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한 1993년 ‘신경영’ 선언과, 1995년 삼성 직원 2 천 명을 모아놓고 5천만 달러 규모의 휴대전화와 팩스 기기를 불태우며 ‘품질 우선’을 강조한 사건도 소개했습니다.

또 이건희 회장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를 설득하는 움직임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신문도 이건희 회장을 삼성을 글로벌 대기업으로 키운 장본인으로 소개했습니다.

신문은 이 회장이 1987년 부친인 이병철 씨가 별세한 후 삼성그룹의 총수 자리를 물려받았을 당시, 삼성은 서구에서 싸구려 TV와 저품질의 전자레인지를 파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그랬던 삼성을 세계적인 기술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가차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습니다.

1990년대 초 삼성은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과 미국 경쟁사들을 능가하는 선두주자가 됐고, 또 2000년대 들어 휴대전화기가 중요한 통신 수단이 되면서 삼성전자는 중고가 휴대전화 시장을 장악했다는 겁니다.

‘뉴욕타임스’는 오늘날 삼성전자는 한국 경제의 주춧돌이라고 평가하면서, 전 세계에서 연구와 개발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기업 중 하나라고 전했습니다.

신문은 또 이건희 회장이 회사 내 전문직 경영인들의 수와 역할을  늘려 가긴 했지만, 이 회장 본인은 삼성그룹을 끌고 가는 ‘사상가’의 역할을 이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계속해서 삼성그룹의 큰 전략적 방향을 이끌어 왔다는 겁니다.

‘뉴욕타임스’는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 이병철 씨를 닮아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고 전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실적이 좋은 시기에도 끊임없는 위기감을 직원들에게 각인시켰다는 겁니다.

경제 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 신문도 이건희 회장이 지난 30여 년 간 삼성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고 전했습니다.

이 신문은 이건희 회장이 2류 전자부품 제조사였던 삼성을 모든 기대치를 뛰어넘어 TV와 스마트폰, 메모리 칩 분야 전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려놓았다고 평가했습니다.

VOA뉴스 김영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