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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중공군 1952년 추계 대공세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중공군 1952년 추계 대공세

CIA bear 허관(許灌) 2018. 9. 30. 15:48


1952년 9월 18일 한국전쟁에 참전중인 중공군이 전전선에 걸쳐 전술적 반격을 실시하였다.

중공군은 미군과 한국군의 전선 취약부분을 선정, 단단히 준비를 갖춘 뒤 압도적 병력수 우위를 앞세워 공격하였다. 연대급이 고립되어 방어하는 지역을 군단병력이 공격하는 식이었다. 중공군은 미군 및 한국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통해 상당한 병력 손실을 보았으나 아군에게도 적지 않은 인적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중공군은 확보한 진지를 고수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후퇴하여 전력을 보강한 뒤 다시 공격을 하였다.

10월 31일까지 44일간 계속된 이 공격에서 중공군은 57개 목표물에 대해 74차례의 공격을 감행하고 400여 차례의 반격을 물리쳤다고 중국측 기록은 밝히고 있다. 중공군의 피해를 밝히지 않은 채 2만 5,000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공군의 이러한 대공세의 성공은 협상에 의해 한국전이 종식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중국측 자료는 주장하고 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중국처럼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엔군의 평양 탈환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고 있는 평양시민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전쟁 북한 공산세력 참가국 군인

북한(1950625일): 80만 명

소련(1950625일): 26000

중화인민공화국(19501025일): 135만 명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7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국전쟁은 소련군 저격여단 주도로 추진했고 유엔군 개입과 중공군 개입으로 중국의용대 주도로 전개 되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한국전쟁과 평화협정]


                                              1950년 6월 28일 서울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의 소련제 T-34 전차/조선일보 DB


1.남침(남한)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6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개성 , 동두천,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다. 미 공군의 개입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이었으며 국군의 지연작전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물론 국군의 지연작전에서 국군의 처절한 살신성인, 초인적인 희생정신이 있었지만 미 공군의 화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것도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물론 오폭으로 인해 국군의 기동력이나 화력을 상실시킨 사건도 있었고, 민간인 학살사건 등의 문제점도 있었으나 미 공군의 업적은 너무나도 많아 여백이 부족할 지경으로 엄청나게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북한군의 주간 기동을 봉쇄했다는 점일 것이다. 막강한 소련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습을 열악한 화력을 가진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방어하기가 어려웠는데, 미 공군의 주간 폭격으로 인해서 북한군의 전차와 북한군의 주간공습이 봉쇄되자 전차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려 국군이 북한군에게 기습을 가해 승전보를 울리기도 하였다. , 북한군과 한국군의 가장 큰 전력차인 전차의 주 활동시간을 봉쇄해 버림으로써 한국군의 지연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만약 미 공군의 화력지원이 없었다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변변치 않은 무기로 막아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2.북침(북한)

(1)해주공격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 전쟁이 평화롭다가 갑자기 1950625일에 불현듯 일어난 사건이라는 기존의 통설에 이견을 제시하면서, 1945년 해방 이후 수많은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통설처럼 북한만이 전면전의 원인이라고민 단정할 수는 없고, 남한과 미국도 전면전까지 일어난 데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 한 것이지, 북한은 평화롭게 조용히 살았는데 갑자기 남한 군대가 북침을 했다는 식의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연표

1950626- 오전 11시 국방부 보도과가 '해주 점령'을 공식 발표했다.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군 17연대 2개 중대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주한영국대사관 무관은 17연대의 2개 대대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본국으로 전문을 보냈다.

1950626- 북한 로동신문은 "반격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한군이 해주 방향 서쪽 금천, 철원, 양양 등지에서 북한을 전면 공격 2~3 km 영토를 침범했지만 38경비대가 저지했고 인민군과 경비대가 반격에 나서 오히려 3~5km씩 남한을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1950627- 동아일보 1면 톱기사로 육군이 해주시를 점령했다고 국방부 발표문을 인용 보도했다.



(2)옹진반도 전투[1950625~630일]


옹진반도 전투(甕津半島戰鬪)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독립 제 17연대(연대장 대령 백인엽)가 전차 1개 중대로 증강된 조선인민군 제 6사단 14연대와 38경비 제 3여단과 맞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독립 제 17연대는 45km에 달하는 광정면에 2개 대대를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한 전형적인 방어형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1]

 

조선인민군은 62504:00부터 30분 동안 전에 없던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국군 방어지대에 집중한 후, 기마대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은 태탄군~옹진군 접근로를 따라 공격하고, 전차를 선두로 한 주공은 취야~양원~강령 축선을 따라 공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기습으로 악전고투하던 국군은 좌전방의 제 1대대장이 전사한 지 얼마 후에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국군은 지체하지 않고 예비대를 투입,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우전방부대 또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듯 승세를 이용한 인민군은 국군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양원과 강령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군의 작전지역은 동서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옹진반도를 지탱할 수 없게 된 독립 제 17연대는 연대본부와 직할대원부대 포함) 및 제 3대대는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포항으로 철수하여 626일 오전에 해군함정편으로 해상철수를 개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옹진반도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던 국군 제2대대는 역습에 성공하였지만 전황이 급변함에 따라 제1대대와 직할대 및 지원부대의 낙오병력을 수습하면서 사곶항으로 철수하여 민간 선박을 이용, 군산으로 이동하였다.

ㄱ.작전지역의 특징

북위 38도 분계선 서쪽 끝에 위치한 옹진반도는 멸악산맥의 여맥으로 이어진 반도이다. 이 지역은 동··남쪽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38선과 해주만으로 육로가 차단되어 있었다.

 

지역 중앙부에 국사봉이 우뚝 솟아 그 지맥이 사방으로 뻗어 지역 내를 감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락산과 까치산(일명 작오산) 주변에서는 1949년에 북한군의 38도선 침범으로 비롯된 치열한 전투가 세 차례나 반복되기도 했었다.

 

지역 내의 취야와 태탄에는 인민군의 보급시설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특히 취야는 강령~양원 도로의 분기점인 동시에 해주~옹진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옹진반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부포항은 국군의 유일한 후방지원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부포항은 간만의 차가 심하여 대형 선박은 하루에 두 번밖에 접안할 수 없었다.

 

ㄴ.조선인민군 상황

조선인민군은 19477월 이후부터 옹진반도 서쪽 끝에서 배천까지를 38경비 제 3여단(여단장 소장 최현)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여단은 4개 대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죽천에 집결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여단은 621일에 3개 대대를 옥동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다음날 밤에는 제 203전차연대로부터 1개 전차중대를 배속 받은 북한군 제 6사단 14연대가 취야로 이동하여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보다 앞서 618일에는 38선에 전개한 각 사단과 38경비여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북한군 총참모장 정찰명령 제1호가 하달되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정찰명령 제 1

수신 : 38경비 제 3여단 참모장

제목 :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정찰명령 제 1(1950. 6. 18)

1.증강된 적 제 17연대는 옹진반도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다. 또한 연안방면에는 제 12연대 예하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으며, 방어지역 전단은 38도선상의 고지군을 연결한 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요새화된 방어진지의 위치와 주저항선의 위치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2. 공격준비기간과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는 동안 관측활동을 강화하여 다음 사항들을 탐지하라.

. 적 주저항선의 화기 및 탄약보급상태와 화력운용체계, 병력규모와 배치상태.

. 적 장갑차의 집결지역과 예상되는 공격방향.

. 공격개시와 동시에 관측활동을 강화하여 다음 사항들을 탐지하라.

적은 언제, 어디서, 어떤 부대를 예비대로 투입하거나 또는 투입할 준비를 하는가?

적의 철수시기와 방향, 진지의 이동, 역습준비를 위한 철수부대의 집결지의 위치

적을 철수시키거나 해상지원을 위하여 예상되는 적 함대의 출현

 

3. 일일 정보요약 보고는 매일 17:00까지 전보, 무전 또는 전화로 최고사령부 정찰국 에 보고하라. 또한 각종 보고서, 노획문서 및 포로 심문 보고서 등은 매일 08:0020:00에 우편으로 송달되어야 한다.

인민군 총참모장

인민군 최고사령부 정찰국장

 

ㄷ.독립 제17연대의 방어태세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1949년에 발생했던 옹진반도의 분쟁 상황과 지역적 특징을 감안하여 장차 예상되는 국부적 분쟁과 전면적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방어지침을 시달하였다.

옹진반도의 작전형태별 방어지침

-1호 작전 : 38도선상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분쟁이 발생되었을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내게 하면서 분계선을 고수한다.

-2호 작전 : 적이 국부적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침범할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면서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주저항선을 지탱한다.

-3호 작전 : 적이 전면적인 남침을 전개할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 다음, 해군의 지원을 받아 해상으로 철수한다.


이에 따라 제 17연대는 19502~ 4월간에 지역 내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연인원 6만여 명을 동원하여 주진지의 유개화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종심 깊은 방어진지의 편성은 불가능하였다. 38도선 남쪽의 감제고지군을 따라 구축된 방어선이 주저항선인 동시에 최후 저항선이었다.또한 제 7야전포병대대와 공병대, 병참보급소, 야전병원, 헌병대 등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냉정리에는 경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독립 제 17연대의 배치상황

연대본부 : 탄지말(옹진 북쪽 2km 지점)

좌전방, 1대대 : 두락산~호동 간 13.5km

우전방, 3대대 : 호동~초동 간 17.8km

연대예비, 2대대 : 탄지말에 집결 주둔

지원부대 : 탄지말 옹진 냉정리에 분산 주둔

이처럼 제 17연대의 방어배치는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침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국부적 분쟁에 대비, 태탄~옹진 접근로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대국적 견지에서 볼 때 전술적으로 중요한 취야~강령, 양원~부포 축선의 방어태세는 약화되어 북한군의 일격으로 방어지역이 양단될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624일 제 17연대는 육군본부로부터 휴가, 외출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태세를 강화시켰다.

 

이는 곧 2~3일 전부터 조선인민군의 공격 태세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연대장은 제 3대대에 105mm 곡사포 1개 중대와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를 24일부로 배속하고 예하 각급 부대와 옹진경찰서에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도록 지시하였다.


ㄹ.옹진지구 전투

624일 방어태세 강화를 진행하던 국군 병사들은 이날따라 한밤중까지 계속된 조선인민군의 대남방송에 장시간 경계를 지속한다.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625일 옹진반도 일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04:00쯤 돌연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피어올랐다.

 

이를 신호로 조선인민군은 38선 북쪽에서 각종 포의 포문을 열고 국군 방어지역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이었고 30분 후에는 사격이 연신되면서 약 1개 대대 규모로 추산되는 인민군이 제1대대의 주저항선으로 밀어닥쳤다.

 

이때 최전방에 배치된 국군 소속 2개 중대는 백병전을 치르면서 싸웠으나 우세한 조선인민군에게 압도당한 데다가 기선을 장악한 북한군이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하여 철수하게 된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으로 모든 유선망이 절단되고 무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 철수병력으로부터 상황을 확인한 제 1대대장은 즉시 예비대를 투입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무렵 우전방의 제 3대대 또한 주저항선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치마산 ~ 석계리 선에서 방어진지를 급편중에 있어 강령과 양원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장은 하나밖에 없는 연대 예비대로 하여금 좌전방대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도록 조치하였다.

 

연대장의 역습명령을 받은 제 2대대장(소령 송호림)은 말제 일대에 2개 중대를 전개하여 상황추이를 살피던 중 전술행군대형으로 유유히 남하하는 북한군 1개 대대 규모를 기습사격으로 섬멸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연대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옹진반도의 조선인민군 상황에 대해 알 길이 없던 제 2대대장은 철수를 거부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으나 연대본부와 지원부대들이 강령으로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직후 제 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냉정리 부근의 불당산으로 철수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양원과 강령이 북한군의 수중으로 떨어진 후여서 대대장은 부포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사곶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우일선의 제 3대대 지역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주공인 제 14연대가 05:30까지 포사격만 계속할 뿐 공격제대는 기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군 포병은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응사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미 고문관이 105mm 포의 사격을 통제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이윽고 조선인민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주저항선을 돌파하였다. 대대장(소령 오익경)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당혹감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연대의 증원이 불가능함을 직시하고 치마산~석계리로 철수, 9·10중대로 지연진지를 급편하게 되었다.

 

치마산 기슭에 배치된 제 10중대는 병사들이 전차 출현에 당황하여 조급하게 선제사격을 가한 탓으로 조선인민군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되어 강령으로 분산 철수한다.

 

반면 석계리의 제 9중대는 저수지 옆에 있는 애로에 종심 깊은 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얼마 후 북한군의 전차장들이 상반신을 노출시키고, 후속하는 보병부대들은 전술행군대형을 유지한 채 국군의 살상지대로 들어섰다. 9중대 장병들은 북한군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여 기습사격으로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북한군의 반격으로 국군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제 9중대는 강령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국군 제 17 연대본부와 직할대는 주저항선이 돌파될 무렵에 이미 강령을 경유 부포항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강령을 점령한 후 남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강령강 제방에 배치된 대전차포중대는 근거리 사격을 퍼부어 북한군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한다.

 

한편 강령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제 3대대는 죽교리~중기동 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공병대는 북한군 전차가 우회하기 어려운 조촌교를 폭파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아군이 지연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북한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후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때 북한군 제 14연대는 강령을 점령한 후 38경비 제 3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25일 오후에 해주를 경유, 영정포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25) 23:30에 해군 LST-801함이 부포항에 접안하였다. 독립 제 17연대는 제 3대대와 지원부대를 축차적으로 철수, 승선시켰으나 탑재 불가능한 모든 장비와 물자는 소각하거나 바다 속에 밀어 넣었다. 이때 105mm 곡사포 1문만은 남겨놓았다.

 

연대장은 북한군이 부포항 부근까지 접근하였을 때 병력 승선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LST-801함을 출항시키고 자신은 제 7야전포병대대장과 더불어 북한군에게 포격을 계속하다가 조각배를 타고 부포항을 떠났다.

 

그 후 독립 제 17연대 연대장과 포병대대장은 연평도에서 해군함정을 만나 628일 아침에는 인천에 상륙하여 수원으로 이동하였으며,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군예비가 된 독립 17연대는 대전 선화국민학교로 이동하여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한편 제 2대대는 낙오병력을 수습하여 400여 명의 병력으로 불당산에서 재편성하였으나, 옹진에 이미 북한군의 선견대가 진출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곶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대대장이 연근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연대 정훈관인 한서한 중위로부터 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사곶항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철수명령을 받았다.

 

연근산에서 다시 300여 명의 낙오병력을 수습한 제 2대대는 25일 저녁에 철수를 개시하여 2시간 후에 사곶항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는 낙오병이 계속 몰려들어 1,300여 명이 되었고 경찰과 일반주민을 합쳐 해상철수 대상인원이 2,000여 명이나 되었으나 선박을 구할 수가 없었다.

 

북한군의 추격이 예상되는 그야말로 진퇴유곡의 긴박한 상황 하에서 동분서주하던 제 2대대장은 사곶항 맞은편에 있는 용호도의 지서주임 김두의 경사의 주선으로 대성호(20톤급 기관선, 정원 90)를 지원받아 다음날 아침까지 군인과 경찰을 실어 나르고 민간인 수송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사곶항 부근에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수송작전을 중단하게 되었다.

 

용호도에서 다시 20톤급 동력선을 비롯한 대형 화물선 6척을 획득한 제 2대대는 연평도를 경유 29일에는 군산항에 상륙하여 대전에서 본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ㅁ.옹진지구 전투의 결과

17연대는 1개 대대규모의 병력을 628일 대전 선화초등학교에 집결해 정부(충청남도 도청소재)의 경호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29~ 30일에는 신병 5,000명을 모집하여 흩어진 부대의 재건을 도모하기에 이르렀으나, 이 무렵에 제 1,2대대의 병력이 집결완료됨으로써 630일 연대의 총 병력은 2,180명으로 81%선을 유지하고, 장비는 전사자의 장비까지 수집하였기 때문에 큰 부족함이 없었다.

 

그 후 전세는 계속 악화되어 73일에는 한강 저지선이 무너지자, 연대는 신임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의 명을 받아 1개 대대는 송호림 소령 지휘하에 정부를 계속 경호케 하고, 나머지 부대로 74일 서정리로 진출하여 저지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옹진반도(甕津半島)
옹진반도는 황해남도 남서부에서 황해로 돌출한 반도이다
동쪽은 해주만, 서쪽은 대동만을 건너 백령도와 접하고 있다
옹진반도는 동쪽의 강령반도, 서쪽의 용천반도, 중앙의 동남반도로 나뉘어져 있다
리아스식해안으로 주변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고 강령만. 대동만등의 연안을 따라 옹진평야에 펼쳐져 있어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벽성군의 일부와 옹진군 전역으로 되어 있다 황해해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며 조기. 멸치. 넙치. 숭어. 가자미. 김. 조개.대합등이 많이 잡힌다 금. 석탄등이 산출되고 옹진온천이 있어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옹진반도는 한국전쟁때 북한군이 맨 먼저 장악한 곳으로 황해도 지역 전략요충지이다
남과 북에서 옹진반도를 누가 장악하는냐에 따라 38도선 이북 황해 바다를 누가 장악하는냐에 달려 있다 한국전쟁 종결기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해군력의 강화로 황해(黃海)지역은 장악할 수 있었지만 중국 인민군의 저항으로 옹진반도 즉 개성등은 북한 땅이 되고 말았다
-개성공단 개발이 진척되고 발전되면 옹진반도 지역으로 확대되어 황해 연안 항구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甕--독 옹
*津--나무 진


(3)한국전쟁 남침 지휘부 "군사위원회"

 

                                                                 북한 수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북한 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 (사진)

한국전쟁 다음 날 6월 26일  남침 지휘부 7인 군사위원회(군사정부)를 구성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수상, 인민군 총사령관-조선공산청년회,중국 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6인 위원은 박헌영(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 총정치국장-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출신), 홍명희(부수상-근로인민당 당수 출신), 김책(부수상 겸 산업상, 전선총사령관-화요파,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출신 ), 최용건(민족보위상=국방상,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과 중국 공산당, 조선민주당 당수, 인민군 총사령관 출신), 박일우(내무상,전선사령부 부사령관-조선의용군 부사령관 출신) ,정준택(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과 일제시기 화학공장 기사(技師) 출신) 등이다

 

전쟁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시 체제에 부합되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군사위원회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비상한 정세와 관련하여 그리고 전쟁에서 전체 인민의 역량을 급속히 동원할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모두 7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6명은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부, 정준택으로, 이 군사위원회는 일체의 주권을 장악하고 모든 기관, 정당, 사회단체, 군사기관들은 군사위원회의 결정과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다음날인 6월 27일 상임위원회는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시상태가 선포된 지역에서는 지방정권기관을 대신하여 지방군정부(지방군정, 지역 군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국가보위와 사회질서 및 국가안전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전시상태가 선포됨으로 인해 지방군정부(지방군정)도 도,시에 설치 되었는데, 지방군정부(지방군정)는 지방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군 대표 및 내무기관 대표 각각 1명씩으로 구성하여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지방군정부(지방군정)의 임무는 지방인민위원회의 권한을 대부분 대행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주요 시설 및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을 의무노동에 동원하고 군부대 및 군사기관을 위한 건물 제공의무를 지며, 군사상 필요에 의해 자동차와 우마차의 동원의무를 선포하며, 각 기업소와 단체 주민들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수용하며, 전시지역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등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치로 말미암아 북한의 모든 권한은 김일성을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한 군사위원회에 집중 되었다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0년 7월 1일 북한 전지역에 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은 위급한 정세에 대하여 원수들을 소탕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는데, 동원 대상은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남녀가 해당 되었다 그리고 남한 점령을 위한 전면전을 선포했다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김일성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정령을 채택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일원을 점령하자 남한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발포했다


1950년 6월 26일부터 북한정부의 모든 권력이 군사위원회(중앙군사위원회와 지방군사위원회)에 감독, 통제되기 시작했다[군사위원회가 국방위원회이다]


19504월 초 조선노동당 중정치위원회에서 전쟁에 의한 통일노선..

 

김일성이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한 건"에 관하여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보고 가운데서 현단계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하고, 현단계에 있어서는 무력통일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망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 다음 가는 석차이기 때문에 토론을 하기 위하여 최초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약간의 보충을 하겠습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자기 토론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보고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뒤 김일성의 보고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이것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남한에는 현재 20만명의 남로당원이 지하에 있어 만일 인민군이 남하한다면, 20만의 남로당원들이 내응해서 군사작전을 원호할 것으로 믿습니다"고 끝을 맺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19493월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홍명희 등 부수상등 북한 대표단 소련방문, 스탈린과 회담

 

-남로당 책임비서 이승엽[박헌영 최측근,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 역임]

 

이승엽은 남한에서 이승만정권과 미제국주의들을 분쇄 타도하기 위하여 일어난 빨치산들을 영웅적이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투사라고 강조했으며 이들을 전심전력 원호하는 것이 참으로 가장 중요한 거족적 파업이라고 주장했다(남조선 정치정세와 인민들의 구국투쟁)

 

-19505월 김일성, 박헌영등 북경방문, 모택동과 회담

 

-최용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 하였다.

 

6월 한국전쟁 직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가을 그는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950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7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2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과 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를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소련군 극동지역 군인들이다. 냉전시대 군사개념상 북한과 만주일부 지역이 소련군 극동사령부 통제를 받았다

 

실제로 개전당시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군 장교는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고문에서 '작전지휘'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바 있다


북한 부수상 겸 외상 그리고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박헌영 재판  "미제국주의와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


소련 조사단이 돌아간 직후 '박헌영 사건 조사를 속히 끝내 공개 재판에 회부하라'는 김일성 수상의 지시가 떨어져 내무성 예심처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 시일 내에 끝낼 수 없는 어려움이 여러 군데 도사리고 있엇다. 1년여 동안 수사를 계속하면서 온갖 고문과 협박,회유를 동원해 자백을 얻어냈지만 번복되기 일쑤여서 재판을 열 경우 자칫 큰 낭패를 당할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었다.

설사 자백이 번복되지 않는다 치더라도 자백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사정으로 인해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수상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1년 반이 계속됐다. 그러니까 만 2년 반 이상을 조사해 재판에 부친 셈이다.

 

1955년 12월 15일 오전 10시 검사의 논고, 박헌영의 최후진술 그리고 오후 8시 판결진행이 되었다

판결에서 미제의 고용간첩이라는 명목으로 박헌영에 대해 사형 밎 전재산 몰수가 언도 되었다


1955년 12월 15일날, 평양 시내 내무성 구락부.
최고 재판소 군사 재판부 주관으로 역사적인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빨치산 출신으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배심원은 소련 정보 기관 출신 내무상 방학세와 김일성 유격대 출신인 최고 검찰 소장 이송운이 각각 맡았다.
노동당 중앙 위원, 중앙당 부장 이상 간부, 내각 부상 이상, 시,도당위원장, 각 사회 단체 핵심 간부들은 모두 재판을 방청토록 하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1천여명이 참관했다.
군사 재판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사건의 조사,예심 주관부처 내무성 부상인 나(강상호)는 맨 앞줄 왼쪽에 앉아 예심처 간부들의 재판 진행 업무를 진두 지휘했다. 재판장과 배심원들의 책상에는 그동안 조사했던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조사서 등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심처는 이 재판에 대비해 간밤에 박 부수상을 내무성내 간부용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목욕으로 면도를 시키고 검거 당시 입고 있었던 검은 양복을 챙겨두었다.

호송원들이 박 부수상의 팔장을 끼고 재판장에 입정했다.
재판장에 들어선 박 부수상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지정석에 앉아 태연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검찰측이 범죄 사실을 낭독하고 사형을 구형하는 논고장을 모두 읽어 내릴 때까지도 안경 속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일절 표정을 노출하지 않았다. 이어 재판장의 질문이 시작되자 두 눈을 뜬 후 시선을 재판장에게 고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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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검사의 논고를 들었는가.

박헌영: 잘 들었다.

최용건: 이 논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헌영: 논고장이 길어 재판장이 어떤 부분을 묻는지 잘 모르겠다. (재판장 최용건이 곧바로 질문을 잇지 못하고 멈칫하자, 배심원 방학세가 재판장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넘기면서 몇마디 귓속말을 건넸다.)

최용건: 검사는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다고 선언했지 않은가.

박헌영: 재판장이 보는 미제 간첩이라는 개념이 나와는 큰 차이가 있다.

최용건: 스파이면 스파이지 개념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박헌영은 내무성 예심처 조사과정에서 미국놈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는가.

박헌영: 그렇다. 멀리는 상해에서, 가깝게는 남조선에서 혁명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례 미군정 고위 인사들과 만났다.

최용건: 그것이 스파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인민들은 미제 스파이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엄숙한 재판을 모면하려는 수작을 부리지 마라. 왜 스파이를 했는지 말하라.

박헌영: 남조선에서 미군정 인사들에게 이승만 세력과 감싸고 돌지 말고 민전(1946년 남한內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 좌익단체들이 결성한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 한다.) 인사들의 활동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속히 남조선에서 미국이 물러가고 조선의 통일은 조선인 손으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최용건이 학식과 법률 지식이 모자라 박헌영의 이론과 논리에 밀리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배심원 방학세가 말을 가로챘다.)

방학세: 민전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미제와 손잡고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박헌영: 미군정이 민전활동을 감시하고 공산당 당원들만 잡아가는 것을 항의한 것이지 그들과 손잡고 혁명 사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세: 무슨소린가. 예심처에서 미제들과 주고받은 담화 내용과 그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래도 부인할 작정인가. (목청을 높이며) 우리 공화국 원수 미제의 간첩이 인민 앞에 솔직히 죄과를 털어놔도 용서받을지 모르는 판에 어디서 주둥아리를 까발리고 있는가.


(순간 박헌영 부수상은 '그래! 너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며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 던졌다. 안경알이 박살났다.)


(느닷없이 박헌영이 안경을 던지는 바람에 재판정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호송병들이 시멘트바닥에서 박살난 안경알을 줍는 사이 방청석의 일부 고위간부들이 '저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저런 새끼는 재판할 필요가 없어'라며 웅성거렸다. 그들은 모두 김일성 수상 직계의 빨치산파 또는 갑산파 간부들이었다. 그러나 당과 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은 굳은 포정으로 묵묵히 재판과정만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배심원 방학세(내무상)가 일부 간부들의 웅성거림에 고무된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방학세: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 따위 행패를 부리는가. 동무(박헌영이 부수상 시절에 경칭인 동지로 호칭)는 아직도 왜 이 자리에 서있는지를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는가?

박헌영: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잘 알고 있다.

방학세:(손가락으로 박헌영을 가리키며) 동무는 반당종파분자들의 두목으로 공화국의 특급비밀을 미제들에게 까발린 스파이 왕초였다. 동무를 믿고 공화국에 따라 올라 온 이강국(전 외무성부상), 권오직(전주중대사), 구재수(전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등이 그 증인으로 이자리에 와 있지 않은가? 지금 저자들은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무에게 실망과 조소를 보내고 있다. 종파분자 두목답지 않은 행동을 벗어 던지고 솔직히 동무의 죄과를 시인하고 용서받는 것이 이 도리 아닌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재판장 최용건(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 준엄하게 입을 열었다.)

최용건: 동무는 미제 간첩임을 시인하는가?

(박헌영은 증인석에 나와있는 이강국,권오직 등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신들의 보수였던 박헌영의 첫 시선을 받는 이강국등의 표정은 조금전 방학세 내무상의 힐난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그들이 면면에서는 원망하는 표정은 전혀 읽을 수 없었고 오히려 '억지로 끌려온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더이상 시선을 마주칠 면목이 없다는듯 고개를 시멘트바닥으로 처박은채 한참동안 일으킬 줄 몰랐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시선이 상대방을 잃자 초점없이 고개를 재판정 천장으로 올려놓았다. 재판정의 분위기도 잠시 숙연해졌다. 지금도 나(강상호)는 불운의 한 혁명가와 그 부하들이 '운명'의 재판정에서 최후 시선을 맞부닥치고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박헌영이 2~3분간 계속된 침묵을 깨고 다시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헌영: 너희들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 진술 기회인가?

최용건: 그렇다.

박헌영: 알겠다. 얘기가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 줄 수 있는가?

방학세: 이미 예심처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지 않은가. 그 얘기를 시인하는지 여부만 간단히 하면 되지 않은가.

박헌영: 그렇다면 예심처에서 조사한 사실만 가지고 당신들끼리 모여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고 왜 나를 재판정에까지 데리고 나왔는가. 이렇게 많은 간부들에게 이 박헌영의 몰골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함인가. 자, 박헌영을 똑바로 봐라!


(그는 전후 좌우로 돌리면서 매서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최용건: 그래, 동무의 말이 옳소. 이 자리는 동무가 예심처에서 못했던말을 다할 수 있는 곳이오. 지루하지만 들어주겠오.

(박헌영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최용건이 갑자기 경어를 써가며 충분한 최후의 진술을 허락했다.)


박헌영: 나는 이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판은 말 그대로 요식일뿐, 어떠한 최후 진술도 너희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때, 아니 그 훨씬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엇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내가 약속한 그 협의는 현재 소련과 미국의 두 지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국제문제를 협의하고 있는것과 가은 맥락의 뜻이다.

(최후 진술이 본론부분에 접어들면서 더욱 카랑카랑해진 박헌영의 목소리는 재판정을 압도했다. 최후진술을 듣고 있던 재판장 최용건이 박헌영과 일문일답을 시작했다.)


최용건: 동무는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대체로 시인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서 누구와 연락을 했고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가.

박헌영: 재판장은 말귀를 그렇게 못알아 듣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무성 예심처에서 진술한 기록이 재판장 책상위에 있을테니 그것으로 대신하시오.

최용건:(말귀도 못알아 듣는다는 비아냥거린 답변에 최용건은 약간 열을 받은듯 목소리를 높이면서) 동무는 예심처의 진술과 재판정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양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굳이 답변을 거부한다면 예심처의 진술을 참고하겠다.

박헌영: 아직도 재판장은 말귀가 열리지 않은 것 같다. 예심처의 진술과이곳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차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다보니 형사법에 관한한 나도 '반풍수'는 됐다고 자부한다.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예심처의 진술로 대체하라는 말은 그 이상 새로운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최용건: 이론가(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붙인 별명), 이곳은 법이론을 토론하는 토론장이 아니다. 다 떨어진 일본놈들의 법이론을 들고나와 어쩌겠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재판장의 질문에만 충실히 답변하라. 공화국의 비밀자료를 누구에게 넘겨주었는가.

박헌영: 미군정 지도자들을 만나 약속한 것은 내가 장차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 국제협력관계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직 내가 최고책임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약속은 하나도 이루어진게 없다.

최용건: 그런 헛소리를 듣기 위해 이 재판을 연 것이 아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소리인가.

박헌영: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다. 그대들 말대로 나는 미국의 스파이었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 달라. 거듭 부탁한다.

(박헌영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재판관들은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당의 지시와 미리 준비한 판결문 원고를 선고에 앞서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20여분 후 최용건을 선두로 재판관들이 준엄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재판장 최용건은 준비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최용건: (중략, 예심처 기소장과 중복)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재판장 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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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은 긴 판결문을 낭독한 후 배심원들과 함께 퇴정했다.

정확히 밤 10시였다. 5시간동안 진행된 마라톤 재판이 막을 내렸다. 일부 수상직계 간부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이엇으나 대부분의 참관간부들은 굳게 입을 다문채 사형선고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각자 귀가했다. 이렇게 하여 1953년 3월 검거 후 2년여동안 끌고 온 박헌영 재판은 막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9시 정각, 내무성 간부회의실.
제1부상겸 정치국장인 필자(강상호)와 예심처장 주광무등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방학세 내무상 주재로 박헌영재판에 따른 대책회의가 있었다. 예심처장 주광무가 재판때까지 박헌영이 미제간첩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수사과정의 이런 저런 어려움을 장황하게 보고했다. 시종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광무의 보고를 듣고 있던 방학세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변명만 갖고 수상실에 올라가 보고 할 수 없으니 그 대책을 제시하라!'며 화를 냈다. 주광무가 '내무상동지, 현 상태에서 박헌영의 사형언도를 집행할 경우 소련을 비롯한 형제국들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사형집행을 보류하고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방학세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어투로 '알았소, 수상동지께서 우리의 변명을 받아주실지 모르지만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나와 동무의 목은 이론가의 스파이 증거에 달려 있소'라고 강조한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수상실로 직행했다. 전 간부들은 방학세 내무상이 김일성수상에게 보고를 끝내고 돌아 올 때까지 그대로 회의실에서 기다렸다. 한시간여 후 방학세가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에 나타났다.

김일성 수상에게 박헌영의 사형선고에 따른 대책을 보고하고 돌아온 내무상 방학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진행했다.

 

방학세: 수상동지께서도 재판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하셨소. 그러나 박헌영이 미제간첩이었음을 증명할 증거를 확보해야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무성 책임으로 남아있소. 국제동향을 보아가며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무성안이 받아들여졌으니 공은 다시 내무성으로 넘어온 점을 명심해야하오. 예심처장은 전 요원들을 다그쳐 빠른 시일내에 미제간첩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하오. 그리고 강상호 부상도 수상동지와 당의 명령이 하루속히 관철되도록 예심처를 철저히 감독해 주어야겠소.

 

이날회의에서 방학세의 지시(곧 김일성의 지시)를 종합하면 박헌영에 대한 사후처리문제가 보다 명확해졌다. 즉, 미제간첩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는대로 국제여론에 관계없이 곧바로 사형을 집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심처에선 어느때보다도 강도있게 '미제간첩' 증거확보에 나섰다. 전 예심처 조사요원들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8개월여 동안 박헌영과 남로당 간부들을 불러 원점에서부터 재심문하는 등 증거확보에 나섰다. 특히 이번에는 내무성 특수요원들까지 동원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미제간첩' 흔적을 찾는데 안간힘을 썻다.

그러나 결과는 당초 예측했던대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주광무를 비롯한 예심처 요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새로운 각도에서 증거수집을 진행하고 있던 1956년 2월 중순께였다.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지시로 소련 외무성에서는 평양주재 이와노프 소련대사를 통해 공화국에 '박헌영 문제'에 대한 압력을 내려보냈다.


이와노프 대사는 김일성을 여러차례 방문, '우리는 박헌영에 대한 재판소식을 듣고 있다.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소련 외무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때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의견을 참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와노프 대사는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모스크바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례적인 것이었고 이와노프 대사가 돌아가고나면 간부들 앞에서 '모스크바에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은 수상의 이같은 태도로 미루어 박헌영의 사형집행은 증거확보여부에 관계없이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이냐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화국의 역사상 김일성 정권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1956년 8월 하순이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형제국 순방을 나선틈을 이용, 연안파 핵심간부들을 중심으로 일부 소련파 간부들까지 합세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김일성이 급거 귀국했다.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이 스탈린 사망후 거세게 불고 있는 개인숭배와 1인 독재배격운동과 박헌영, 정치노선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했다.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방학세 내무상에게 느닷없이 '방동무, 그 리론가(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됬어?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의 질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방학세는 '예심처에서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수상동지께서 만족하실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김일성은 답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증거고 뭐고 다 필요없다. 오늘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엄명했다. 시기가 시기이고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김일성의 엄명에 감히 이론을 제기한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


방학세는 그 길로 내무성에 돌아가 예심처장 주광무를 불러 '오늘밤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영철 내무성 중앙부장이 이날밤 박헌영을 지프에 싣고 평양시내 변방 야산기슭으로 가 방학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총살)을 집행했다.


사형집행 직전 박헌영은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1993년 중앙일보. 기고자는 소련파 출신 북한 내무성을 지낸 강상호

 

                                                           1946년 서울의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중)과 허헌(왼쪽)

 

박헌영 판결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써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차수 최용건을 재판장으로 하고 김익선, 림해, 방학세, 조성모를 성원으로 하여 구성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특별재판은 서기 박경호의 입회로써 심리를 공개하고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의 관여밑에 형법 제78조, 동 제 68조, 동 제 76조 2항, 동 제65조 1항에 해당한 범죄로 기소된 피소자 박헌영에 대한 사건을 심리하였다.

피소자 박헌영
생년월일 1900년 5월 28일생 남자
본적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주소 평안남도 대동군 화성리
직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 부위원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전 부수상 겸 외무상

당 재판소는 예심 및 공판 심리에서 나타난 자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미 장구한 기간에 걸쳐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하고 나아가서는 중국과 쏘련을 반대하는 극동침략의 군사기지로 할 계획에 근거하여 악랄한 음모를 집요하게 계속하여 왔다. 위대한 쏘련군대에 의하여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으로부터 해방된 후 미제국주의자들은 1945년 9월 자국군대의 남반부상륙을 계기로 조선에 관한 국제공약들을 난폭하게 유린하면서 이 침략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골적으로 발광하였다.
 
즉 미제국주의자들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독립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을 반대하여 리승만 매국역도들로 괴뢰정권을 조작한 후 공화국남반부에 팟쇼적 군사 경찰제도를 확립하고 민주주의적인 일체의 요소에 대하여 갖은 테로 살육을 자행하다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이미 계획 준비하여 온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함으로써 공화국북반부에 창건된 인민민주주의제도를 말살하고 전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화하기 위한 동족상쟁의 전쟁을 도발하였으나 조선인민의 영웅적 항거에 봉착하여 수치스러운 참패를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에 조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기간에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직접적 발광과 병행하여 간첩 리승엽, 리강국, 조일명. 림화 도당을 고용하여 남반부에서의 조선인민의 정의로운 반항 투쟁을 진압하고 당과 민주역량을 와해 궤멸하였으며 다시 그들을 공화국북반부에 파송하여 당과 정부 내에 깊이 잠입시켜 군사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중요 기밀을 탐색 첩보하는 간첩범행을 수행하게 하였고 조선인민의 애국적 단결을 약화 소멸시킬 목적으로 이간, 대립, 불신을 조성시키는 갖은 모략을 계통적으로 감행케 하였으며 내종에는 적군의 진격에 호응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무장폭동을 결행하기로 음모하는 데 이르기까지 내부로부터의 파괴를 기도한 일련의 범죄를 조직하였다.

1953년 8월 6일 평양시에서 피소자 리승엽 등 12명에 대하여 선고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이상과 같은 간첩행위, 반혁명적 모략행위, 무장폭등음모행위들은 이미 1939년부터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 복무할 것을 원쑤 앞에 맹약한 간첩 박헌영을 두목으로 하여 조직 수행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였다.


1.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 시론?(女子詩論)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미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학교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하여 숭미사상(崇米思想)을 품게 되였고 1925년 2월 초순 일제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평안북도 경찰부에 조선공산당과 조건공산청년동맹의 서울, 신의주, 평양, 강화, 대구, 마산, 광양, 안동을 비롯한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댓가로 「정신적 착란」이라는 구실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였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39년 10월 5일경 서울 종로 3정목 요리점 백합원에서 연희전문학교교장이고 기독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정보기관의 탐정인 언더우드를 상면하고 그의 요청을 응락하고 동인에게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 간첩으로서 충실히 복무할 것을 서약한 후 동년 12월 언더우드로부터 지하에 깊이 침투하여 조선혁명운동 내부에서 자기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지도적 지위를 탈취함으로써 장차 미제의 조선침략에 이바지하도록 할 것과 비밀 정보를 수집하여 연락할 데 대한 지령을 접수하고 그것의 실천으로서 곧 서울 「콤크릅」에 접근하여 지도권을 탈취한 후 조선혁명운동에서의 종파적 조직인 이 「콤크릅」을 언더우드의 지령에 근거한 자기 활동의 기반으로 만들 것을 기도하다가 1941년 12월 일미 간의 침략 전쟁이 개시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1945년 8월 I5일 해방 당시까지 전라남도 광주에 가서 있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8월 I5일 조선이 위대한 쏘련 군대의 무력에 의하여 일제식민지기반으로부터 해방되자 미국 정탐기관의 지령을 계속 실천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를 최후까지 반대하여 빨찌산투쟁을 하여 온 것같이 꾸미기 위하여 산중에 식량을 매몰하는 등 교활한 간계로써 자신을 「애국자」로 가장한 후 최후까지 고수한 것이 자기가 지도하던 「콤크릅」인 것같이 날조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미제국주의자들의 남반부상륙을 대기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9월 미군이 남반부지역에 상륙하자 동원 말경 서울 전반도호텔 건물내에서 남조선 주둔 사령관 하지와 밀회하여 앞으로 조선공산당을 미군정책에 순응케 하며 미군정의 포고 및 제반법규를 준수할 것 등을 밀약함으로써 미제에 대한 자기의 충성을 맹약하였고 1945년 2월 초순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내에서 하지 및 언더우드와의 밀회에서 피소자 박헌영은 전부터 간첩연계를 맺고 있는 언더우드로부터 하지에게 정식으로 인계되었으며 동 석상에서 하지로부터 앞으로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공산당내에서의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노력할 것, 중요한 공산당활동에 대하여는 사전에 통보할 것, 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사상을 조성할 것, 공산당을 합법적 타협적 방법으로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 미군정 앞에서 폭동 파업 등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 간첩 비밀을 엄수할 것 등 새로운 지령을 받고 그의 실천에 충실할 것을 하지에게 맹약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상술한 하지의 지령에 근거하여 조선공산당내에서 차지한 지위를 이용하여 당의 전투적 역량을 약화 마비시키고 남조선전역에 걸친 조선인민의 애국적 민주역량을 교살하기 위한 미제의 정책에 합치되게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간첩범행과 민주역량 파괴를 위한 각종 모략과 해독적 활동을 감행하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2월 초순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에게 조선공산당의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는 전반적 조직 체제와 그의 활동정형, 당의 지도하에 있는 대중단체의 조직체제를 비롯하여 간부명단과 민전정책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1946년 3월과 동년 5월 하지에게 조선공산당의 장성정형과 쏘 미 공동위원회에 대한 당의 태도와 협의대상문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1946년 3월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 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리승엽과 조일명을 당의 중요위치에 배치하고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 지도할 데 대한 지령을 받은 후 리승엽을 경기도당위원장으로부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등용하고 그에게 「우익 정당 프락치야」 사업을 맡겼고 조일명을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등용함으로써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이 미국 간첩 리승엽과 조일명으로 하여금 1946년 3월부터 1947년 6월까지의 기간에 전후 6차에 걸쳐 당의 활동에 관한 중요 기밀을 미군 정탐기관에 제공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서울 전 반도호텔 건물내에서 하지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입북하여 북조선로동당과 북조선정원을 틀어쥐기 위한 활동을 하라는 지령과 함께 간첩 리강국에게 중대한 임무를 주어 북조선에 파견할 터이니 그를 중요 직위에 등용시키고 그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지령을 받고 실천을 맹세한 후 하지와 밀약한 대로 리강국과 공모하여 미군정을 반대하는 민전 명의의 성명을 발표시키고 그에 근거하여 꾸며진 「체포령」을 구실로 하여 1946년 10월 초순 북반부에 잠입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우선 1947년 2월 초순 자기의 심복자인 입북 당시 안내자였던 서득은을 서울에 보내여 무사히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하지에게 알리게 하고 점자 당의 대남연락선을 장악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리승엽과의 간첩 범행 연락에 이용하였는바 1947년 2월 남조선로동당 대남연락책임자 김소목을 통하여 리승엽에게 간첩 범행의 연계를 취할 데 대한 밀서와 함께 북조선 인민경제 기획에 관한 통계자료를 보내여 줌으로써 리승엽 하지에 이르는 연락선을 완성하고 1947년 4월에는 앞으로 재개될 제2차 쏘 미 공동위원회에서의 쏘련측 방침에 관한 자료롤 보내였으며 1948년 6월에는 서득은을 서울에 보내여 북조선로동당의 중요결정과 당 내부기밀자료 및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사업준비 정형을 하지에게 전달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이러한 간첩활동을 감행하는 한편 하지의 지령대로 자기와 때를 같이 하여 「체포령」을 구실로 잠입한 남조선 주둔 미국 제24사단 헌병 사령관 미군대좌 뻬트의 고용간첩인 리강국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 등용케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를 자기의 신변인 혹은 해주 제1인쇄소 지도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의 간첩활동을 적극 보장한 결과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로써 확증된 바와 같이 리강국으로 하여금 1946년 5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기간에 외무국장의 직위를 이용하면서 평양학원에 관한 자료, 강계·개천 등지의 인민군 및 경비대의 병력관계와 배치정형, 평양 주둔 쏘련군사령부의 동태, 북조선 주둔 쏘련군대에 관한 기밀 및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와 외교정책, 화폐 개혁 실시 정형, 1947년도 북조선인민경제계획에 관한 통계자료, 1948년도 국가예산에 관한 종합자료 등 중요 기밀을 전후 5회에 걸쳐 미군에게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47년 2월과 동년 12월 직접 리강국에게 당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을 알려줌으로써 그것을 미군에게 첩보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하지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계획을 알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간첩활동을 강화할 필요성에서부터 간첩 리승엽을 파송하여 줄 것을 밀서로써 요청하여 리승엽을 입북케 한 후 1948년 9월 중순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리승엽과 앞으로 간첩활동에 대한 토의를 한 결과 ?...... 공화국 창건과 관련하여 박헌영의 존재가 미국인에게는 더욱 귀중하게 되였으니 앞으로 간첩활동을 직접 하지 말고 리승엽에게 맡기라......?는 하지의 지시에 근거하여 피소자 박헌영은 종래의 간첩활동을 리승엽에게 인계하고 자신은 당과 정부의 중요지시를 이응하여 리승엽, 리강국을 위시한 미제의 고용간첩들의 범죄활동 조건과 신변을 보장하여 줄 것을 합의하였고 얼마 후 그들은 하지의 귀국과 관하여 ?...... 금후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 정치고문 노블의 지시 밑에서 활동하라?는 하지의 명령을 접수하고 노블 XXXX XXXXX XXXX XXX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XXXXXXX XXXXXXXX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공화국 정부 부수상 겸 외무상의 탈을 쓴 미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인 피소자 박헌영의 보장과 지도에 의하여 당과 정부를 비롯한 중요기관 내부에 깊이 기여 들어 가지고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은 간첩활동과 갖은 반혁명적 모략범행을 계속하였으며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러는 한편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서득은의 편을 통하여 ?현애리스를 비롯한 미국정보원을 구라파를 통하여 북조선에 파견하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하지의 지령을 접수하고 있다가 1949년 봄 정치적 망명자로 가장하고 미국으로부터 구라파를 걸쳐 잠입한 간첩 현애리스와 리사민에게 입국사증을 발급케 한 후 현애리스를 중앙통신사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간첩활동은 1950년에 이르면서 소위 「북벌」 계획의 진척에 따라 일층 활발하여 갔다. 즉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같이 노블과 그 밑에서 활동하던 미극동사령부 항공정보관 미군대좌 니콜스는 일제고등경찰이었고 리승만 괴뢰정부 내무부 치안국 사찰과 중앙 분실장이던 극악한 민족 반역자 백형복과 미군간첩 안영달과 조용복을 일행으로 하여 1950년 4월 의거 입북을 가장하는 방법으로 북조선에 잠입시켰고 간첩 리승엽은 노블의 지령에 의하여 백형복을 공화국 내무성내에 안영달을 새로 조직할 당 서울 지도부에 각각 침투시키려고 시도하였고 조용복을 내각 인민 검열위원회에 잠입시키고 그들에게 인민군 항공부대에 관한 군사기밀을 비롯하여 당 내부의 중요기밀을 제공하는 등 간첩 범행을 감행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5월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안영달과 백형복을 만나 보고 리승엽에게 백형복의 신변상의 보호를 지시하여 그 자들의 범죄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12월에 아군이 재진공하게 되자 공화국의 군사 정치 경제적 위력을 약화시켜 종국적인 패전에로 유도할 목적에서 미제국주의 고용간첩들인 리승엽, 리강국 도당들을 더욱 높은 직위에 잠입시키려고 백방으로 암약하였는바 이러한 범죄활동은 1953년 2월 간첩 리승엽 도당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피소자 박헌영은 1945년 9월 이후 하지와의 연계로써 상술한 간첩활동을 수행함과 동시에 남조선로동당과 애국적 민주역량에 대한 파괴와 범행을 감행하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간첩 리승엽, 조일명, 리강국 도당을 일찌기 당의 중요 직위에 배치하고 그들을 통하여 미군정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것은 당의 정치적 활동에 불리하다는 구실을 붙이여 동맹파업과 일체행동을 제지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남반부 근로계급의 애국투쟁을 약화시킴에 전력하였고 한편으로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 공모자들로 하여금 충직한 당 일꾼들을 「변절자」「간첩 혐의자」「당 비밀 누설자」라는 무근한 누명을 씌워 살해케 하였는 바 1948년 5월부터 동년 8월까지의 기간 13차에 걸져 황해도 장풍군에서 42명의 남조선로동당원과 민주인사들이 살해당하였고 1949년 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현인초 외 2명이 동일한 누명으로 살해당하였으며, 1948년 8월 개성시 당 위원장이였던 김재관을, 동년 10월에는 장풍군 부위원장이었던 서구돈을 같은 누명으로 살해하려고 체포하였다가 공화국경비대에 발각됨으로써 목적을 달성치 못한 사실들이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판결로써 확증되였다.
뿐만 아니라 피소자 박헌영은 적들과의 모험적 충돌을 야기시키는 방법으로 수다한 애국투사들을 원쑤의 학살에로 유도하였고 당과 민주역량을 적의 파괴 앞에 내여 맡기였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이래 미제가 남조선로동당을 전면적으로 파괴하기 위하여 소위 「보도연맹」 을 조직하고 유혈적 탄압을 야수적으로 감행하는 사실에 대하여 당으로부터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기받고도 고의로 그것을 거부하여 원쑤들의 파괴공작을 완전히 허용 보장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의 비호에 의하여 범죄활동을 보장받은 안영달 등은 1949년 6월 18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조국 통일전선호소문이 발표되자 이것을 계기로 무원칙하게 폭동준비와 총궐기 태세를 갖출 데 대한 지시를 전 남조선로동당 조직에 통고함으로써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구실을 설정하여 주었고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 앞에 당조직을 노출시켜 주어 남조선 전역에서 대중적 투옥학살을 손쉽게 감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50년 3월 27일에는 피소자 박헌영에 의하여 범죄활동을 비호 보장받은 안영달, 조용복 등과 백형복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김삼룡이 체포 학살됨으로써 남반부 민주역량의 핵심인 지하당조직이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다.

또한 피소자 박헌영의 공모와 리승엽의 직접적 지도와 조직에 의하여 안영달, 리중업, 맹종호 등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시 해방을 계기로 하여 「토지조사 위원회」 또는 「조선의용군 본부 특수부」라는 비밀살인단체를 조직하고 자기들의 반혁명적 범행을 감촉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무고한 인민 70여 명에 대하여 비법 감금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거듭하고 그 중 7명의 남조선 로동당원을 총살하였으며, 1950년 7월 안영달 등의 김삼룡 체포범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피소자 박헌영은 자기들 죄악의 발로를 방지하기 위하여 리승엽에게 명령하여 안영달을 남하하는 유격대에 배속한 후 비밀리에 살해하여 버리게 하였다.

3. 피소자 박헌영은 1939년 10월 언더우드와의 결탁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는 반역의 길에 들어섰는바 그것은 원쑤의 앞잡이로서 조선의 혁명적 근로계급을 완전히 무장해제함으로써 미제의 조선침략야망을 보장 실현케 하는 죄악의 길이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위대한 쏘련군대의 무력에 의한 8.15 해방 직후 조선의 혁명역량이 완전히 통일 단결되지 못하고 혁명적 당의 기본적 정치 및 조직 노선이 아직 제시되지 못한 틈을 타서 미제국주의 간첩 친미분자, 변절자 등을 자기의 주위에 집합하고 그들을 조선공산당내의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미제에 복무할 자기의 반동적 기반을 구축하였고 해방된 조선에 자본주의제도를 확립할 목적에서 매국역적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친미친일 반역분자들을 대표적 세력으로 하는 친미정권 「조선 인민공학국」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민족전선으로 하여금 이를 지지케 하는 범죄활동을 함으로써 모든 권력을 조선인민들 자신이 장악할 인민정권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하지로부터 공화국북반부에 잠입하여 당과 인민정권내에 확고한 기반을 축조하고 당과 정권기관을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범죄할동을 감행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북한 후 해주 제1인쇄소와 강동 정치학원내에 리강국, 조일명, 리원조, 박승원, 림화, 한병옥 등을 위시한 반혁명분자들을 잠입시켜 그들을 조종하면서 그곳을 범죄수행에 이용함으로써 하지로부터 받은 과업의 실천에 착수하였고 1948년 9월 하지의 지령에 근거하여 직접적인 간첩활동을 리승엽에게 인계한 후는 오로지 당과 정권기관을 내부로부터 XXX파괴하기 위한 범죄 활동에 전력을 경주하고 점차 범죄활동의 범위를 확대하여 왔다. 즉 피소자 박헌영은 1946년 10월 이후는 당과 정권기관과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중요기관 내부에 간첩암해분자들을 잠입시키고 그들의 범죄활동을 비호하고 지도함으로써 자기 범행의 종국적 목적달성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결과 리승엽을 사법상 당중앙위원회 비서 정치위원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에, 조일명을 문화선전성 부상에, 김점권을 경공업성 부상에, 김광수를 상업성 부강에, 한병옥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후방총국장에, 리강국을 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에, 장시우를 무역상에, 배철을 당중앙위원회 연락부장에, 박승원 윤순달을 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에, 리원조롤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김응빈을 금강학원 원장에, 서득은을 당중앙위원회 조직부 부부장에, 안영달을 남조선로동당 지도부 연락책임에, 림화를 조쏘 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남천을 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에, 리재우를 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 조직부장에 잠입시켜 이간 알륵 대립 불신 조성시키는 갖은 정치적 모략과 암해활동을 감행케 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0년 6월 25일 조국 해방전쟁이 발발되자 남반부당과 민주역량을 파괴한 죄악을 숨기고 남반부 전지역의 당 및 정권기관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그를 토대로 하여 공화국 정권전복의 종국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기도에서 자기의 영향하에 있던 자 200여명을 안주에 집결시켜 조선인민군의 반격에 의하여 해방된 남반부지역의 도, 시, 군당 및 정권기관 책임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고 공모자 리승엽은 해방된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동일한 범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로동당 경기도당위원장에 김점권을, 경기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안영달, 그 후에 박승원을 배치하고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안기성 김요한 등 반혁명범죄자를 포치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1951년 4월 림화에게 문화 예술 분야에서 반혁명 분자들이 지도권을 장악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주어 그들에 의하여 문학예술총동맹 내부에서 사상적 대립과 불신과 알륵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1951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연락부가 신설됨을 계기로 대남공작강화를 구실로 리승엽에게 지시하여 동 부서를 자기의 심복자들로 조직케 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반당적 반정부 음모를 격화 확대케 하였으며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과 공모하석 1951년 2월부터 개성 지구를 중심으로 한 경기도를 조직하고 그곳을 반혁명 범죄활동의 근거지로 할 데 대한 범죄적 음모를 획책하였고---

피소자 박헌영에 의하여 지도되는 리승엽, 배철, 박승원, 림화, 조일명 등은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로써 확정된 바와 같이 조선인민이 원쑤 격멸에 총궐기한 간고한 전쟁기간인 1951년 9월 초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리승엽 사무실에서 예상되는 적군의 군사공세에 호응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할 무장폭동을 단행할 것을 토의하고 리승엽을 무장폭동총사령으로 하고 박승원을 참모장으로, 배철을 군사조직책임으로, 김응빈을 폭동지휘책임으로, 림화와 조일명을 선전선동의 책임으로 하는 무장 폭동 지휘부를 결정하였으며 그 후 거듭된 밀의에서 무장폭동의 주력으로 예견한 유격 제10지대를 근 4천명에 달하게까지 증강하고 평양 부근에 이동 주둔시킬 것을 기도하는 한편 그들과 금강학원학생들에게 공화국에 적대하는 반혁명적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모의를 강화하여 왔으며 1952년 9월 이 악당들은 다시 피소자 박헌영의 주택에서 밀회하여 무장 폭동으로써 당과 정부를 전복한 이후에는 조선 근로 계급을 기만하여 미제의 조선침략을 완강케 하기 위한 합법적 「좌익 정당」으로서의 「새당」을 결성하고 미국에 예속되여 자본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장차 리승만 괴뢰정부에 연합될 운명을 예견한 「신정부」를 조직할 데 대한 음모를 감행하였는바 이들은 박헌영을 수상으로 하고, 장시우, 주녕하를 부수상으로, 박승윈을 내무상으로 리강국을 외무상으로, 김응빈을 무역상으로, 조일명을 선전상으로, 림화를 교육상으로, 윤순달을 상사업상으로, 배철을 로동상으로 하고 리승엽을 「새당」 의 총비서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피소자 박헌영은 본건 범행착수와 동시에 부단한 정치적 모략을 감행하여 왔는 바 그것은 특히 1946년 10월 북반부에 잠입한 이후의 기간에 우심한 바 있었다.
피소자 박헌영은 남반부로부터 입북한 당원들을 기만 회유하며 당과 공화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성시키고 불순분자에 대하여는 그들의 과거죄상을 은폐하여 주는 등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들을 자기의 주위에 집결시키는 데 전심 전력하였고 당과 국가의 직무에 충직한 열성자에 대하여는 「변절자」 「배신자」 라고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도를 비관하고 직무에서 이탈하게끔 꾀하였으며 이전부더 심복자 장시우를 교묘히 사주 선동하여 반국가적 범행을 적극적으로 하게 하였으며 서득은, 리강국 등을 시켜 당자금조달을 구실로 동방상사 영민공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일꾼들을 원조를 가장하여 매수 접근시켰으며, 자기의 영향하에 있는 심복자들에게 거액의 경제적 지출을 하여 부화방탕한 생활과 동시에 반혁명적 범죄에 인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소자 박헌영 자신도 탐욕적인 부화한 생활을 영위하여 왔는바 체포 당시 87만원의 공화국 화폐와 1,600그람의 순금을 횡취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피소자 박헌영은 1948년 9월 외무상으로 취임한 이후 「국제주의자」로 가장하고 외무성내에 자기의 심복자들을 다수끌어 들여 요직에 배치하고 쏘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형제적 국가들과의 우호적 친선관계를 파탄시키려는 음흉한 범죄활동을 계속하였는바 그것은 전 주쏘 특명전권대사 주녕하, 전 주중 특명전권대사 권오직과 동 대사관 참사 송성철을 자기의 반혁명적 범죄에 인입하거나 또는 접근시키고 그들에게 쏘련과 중국을 비방하고 멸시하는 선전선동을 거듭 감행하여 왔다.

이상 사실을 피소자 박헌영의 예심 및 공판심리에서의 진술과 증인 한철, 김소목, 권오직 등의 증언 및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피소자 리승엽 등 12명에 대한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 동 형사 사건기록(13권 총 4,000페지)에 의하여 확증된다. 피소자 박헌영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고 공화국의 인민주권을 전복할 목적으로 조국에 반역하고 미제국주의에 복무한 간첩행위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감행한 반혁명적 모략, 선전선동 행위 및 리승엽 등 반혁명 도당들의 무장 폭동음모의 실현을 비호 보장하여 준 행위는 형법 제78조, 동 제68조, 동 제76조 2항, 동 제65조 1항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당 재판소는 형사소송법 제 223조, 동 제228조 1호, 동 제237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소자 박헌영에 대하여 형법 제78조, 제68조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형법 제65조 1항에 의하여 사형 및 전부의 재산몰수를 양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동인을 형법 제78조, 제68조의 사형에 처하고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본건에 첨부된 증거물은 권리자에게 반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재판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차수 최용건, 김익선, 림해,
방학세, 조성모.
평양시에서 

                                                                                               광복 직후 서재에서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대표단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북한 전문가인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해방후 65년에 걸친 북한권력을 집중 분석한 책 ’북한 권력의 역사’에서 공개한 ’8월 종파사건’후 미코얀과 마오쩌둥의 대화, 마오쩌둥과 북한 부총리 최용건의 대화에 의하면 모택동도 그가 미국간첩은 아니라고 인식했다 한다

1956년 9월 18일 베이징에서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마오쩌둥이 만난다. 연안파와 소련파가 '반 김일성 연합'을 만들어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궁정쿠데타인 ’8월 종파사건’으로 주모자들이 철저하게 숙청당한 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 김일성에게 어떤 이유로든 박헌영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박헌영이 남로당의 영수임을 고려해야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베리야(러시아의 정치가 겸 비밀경찰국장)가 아니며 일개 문인일뿐이다.

” [마오쩌둥]

“ 박헌영은 지식인이며 사람을 위협한 적이 없고 조선로동당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처형을 반대하는 소련공산당의 의견을 평양 주재 KGB 고문을 통해 건의 형식으로 전달했는데 잘못됐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명의로 정식 통보를 했어야 했다.

” [미코얀]

마오쩌둥은 미코얀을 만난 뒤 1시간 20분 뒤에는 중국공산당 제8차 대회 축하사절로 와 있던 북한 부총리 최용건 등 조선로동당 대표단도 만났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박헌영과 김일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전날인 1948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일성, 세번째가 박헌영이다

 

1946년 3월 27일 UP통신 호이트 기자의 질의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하다

(문)미군정하의 공산당원 수 여하? 또 북조선에는?

(답)약 3만명이며 북조선의 것은 북조선공산당에 문의할 것

 

(문)조선공산당은 일본 공산당과 직접 연락이 있는가? 또 소련 공산당과 무슨 연락이 있는가?

(답)조선당이나 일본당이나 모두 해방 후 합법정당으로써 나오게 되었으니, 상호연락관계를 맺을 만한 처지와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소련공산당은 반세기간이나 자나란 위대한 당이다 우리 당은 아직 발전이 적고 경험도 적어 연락할 정도에 달하지 못한 형평이다 

 

(문)중국 공산당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답)관계를 가질 만한 정도로 자라지 못하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박헌영의 동거녀였던 이순금의 진술 역시 박헌영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순금은 그가 남한에 있을 때 실제로 미국을 도왔다는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1941년 경성콤그룹이 일제 총독부에 발각되어 검거령이 내려졌을때, 41년 1월 경성콤그룹의 회원인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박헌영은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행상인도 되어보고…약사나 심지어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검거를 피해 계속 도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하여 전남 광주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는 종연방직공장 변소 청소부로 활동하다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벽돌과 기와를 굽는 공장의 인부로 위장 취직한 채 활동하였으며, 김삼룡의 처 이순금 등 전남 지역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하활동에도 가담하여 「해방자」와 같은 책자 발간활동을 비밀리에 간행하기도 했다. 

전남 일원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 했고 그들을 통해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과도 비밀교신을 주고받았다. 박헌영을 만나 그를 본격적으로 도운 것은 박헌영이 노동활동을 전전할 때 이순금은 박헌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순금은 박헌영의 아들을 맡아 키웠다. 1940년 이후 일본의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창씨개명은 매국행위이며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바꾸는 잘못이라는 내용의 삐라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뿌렸고, 1941년 일본군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미일전쟁으로 일본의 멸망이 눈앞에 닥쳤다는 속설을 확산시켰다.

박헌영이 지하 활동을 하는 동안 이순금은 활동이 어려웠던 박헌영을 대신하여 활동하며 지시를 조직에 전달하는 충실한 역할을 했다. 이순금과의 동거 관계는 박헌영이 윤레나와 재혼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55년 북조선에서 박헌영이 미국 간첩으로 몰렸을때 이순금이 박헌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박헌영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였다. 그는 지하총책을 통해 1942년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밀청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지하조직원을 통해 일본이 항복을 준비, 미국측과 교섭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박헌영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떠난다'는 짤막한 사직서를 공장장에게 제출하고 경성으로 상경했다. [박헌영은 일제말기 미국의 소리 이승만 박사 의견에 따라 미소연합전선(좌우익연합전선) 항일운동을 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숙청되기 얼마전에 찍은 사진

1956년(57세) 7월 19일, 총살당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은 1990년 러시아 여행 중에 전직 북한 고위관리 박길룡에게 박헌영의 사망 경위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 중이던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여 그날 저녁 방학세에게 박헌영의 처형을 지시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까닭은 아마도 "8월 종파"와 박헌영 세력이 제휴할까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처형자들은 내무성 지하감옥에 수감 중이던 박헌영을 끌어내 어느 산중으로 데려갔다 밤중에 허리까지 오는 잡풀 속을 헤치고 가면서 박헌영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 차렸다 그는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처형 직전에 박헌영은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방학세는 박헌영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두 번 방아쇠를 당겼다

시체는 그 자리에 묻혓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박헌영의 사망 일시는 1956년 7월 19일 밤이다 왜냐하면 동유럽, 소련 순방 중이던 김일성 일행이 평양에 되돌아온 날짜가 바로 그 날이기 때문이다

 

                                   1949년 윤레나와 재혼 (좌로부터 스티코프, 김일성, 윤레나, 박헌영, 허정숙)


 지금도 남한내부 자주파 계열은 박헌영과 같은 입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남한정부와 전쟁으로 승리하고 북미교섭으로 평화협정 체결로 권력장악에 승리할 것으로 소련과 중공 입장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모택동 부대(중공)처럼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1.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스탈린부대[민주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 그룹]

 

제2전선 구축을 위해서 미영정부의 원조로 창설한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88독립 저격여단)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1943년의 金日成(김일성) 첫 공개된 金日成(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사진. 이 사진은 지난 1943년 초여름, 하바로프스크부근 브야츠크촌에 있는 88여단본부앞에서 여단장 周保中(주보중)중좌와 조선인 대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 88여단은 42년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 중국, 조선인등으로 구성, 對日戰(대일전)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당국은 지금까지  金日成(김일성)이 88여단에 소속됐던 사실을 부인해 왔다. 앞줄  한가운데가 周保中(주보중), 그 오른쪽이 金日成(김일성), 세번째줄 왼쪽부터 徐哲(서철)(前(전)북한검열위원장), 姜健(강건)(前(전)인민군총참모장), 金光俠(김광협)(前(전)북한민족보위상), 네번째줄 왼쪽부터 金一(김일)(前(전)북한제1부수상), 崔勇進(최용진)(前(전)북한제1부수상), 한사람건너 金京錫(김경석)(前(전)북한노동당조직부장)]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第88独立狙撃旅団(ロシア語: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略称88 осбр )は、ソビエト連邦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創設した民族旅団の1つ。極東戦線情報科に直属し、満州・朝鮮半島における偵察・破壊工作を使命とした。

旅団は、元東北抗日聯軍将兵が中核となり、主として中国人と朝鮮人から編成された。後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国家主席、金日成は、同旅団の第1大隊長を務めていた。ただし、朝鮮労働党の公式見解では、金日成は朝鮮人民革命軍を組織して東北抗日連軍本体とは共闘しつつも別行動であったとしており、その後の入ソの事実は無視されている。中国共産党は、この部隊を東北抗日連軍教導旅団(抗連教導旅)と称している。

後に旅団の中核となる東北抗日聯軍は、1939年頃から関東軍と満州国軍の大規模な掃討作戦により、多数の戦死者を出した外、日本当局に帰順する者も出始めた。周保中、崔庸健、金策、金日成等、残った者達も物資の不足により、活動の続行が困難となった。そのため、彼らはソ連に脱出することを決定した。

1940年12月末、聯軍はアムール川を渡って、ソ連領内に入った。ソ連領内では、聯軍の活動支援のため、沿海地方のヴォロシーロフ・ウスリースク郊外に北(A)野営(Север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А)、トルクメニスタンのケルキ郊外に南(B)野営(Юж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Б)を設営した。当初、約100人がここで訓練を受けたが、後に200~300人にまで増加した

独ソ戦勃発後の1941年7月中旬、ソビエト政府は、日本の北進に備えて、これらの野営地に基づき、第88独立狙撃旅団を編成することを決定した。旅団は、ハバロフスク市のヴャツコエ・ナ・アムーレ(Вятское-на-Амуре)に配置することが決定された。1942年7月21日付極東戦線司令官ヨシフ・アパナセンコ上級大将の命令第00132号に基づき、旅団の編成の期間は、 同年7月28日から9月15日までの間と定められた。

部隊の充足は、東北抗日聯軍の中国兵と朝鮮兵の外、中国系・朝鮮系ソ連人、その他の少数民族(ナナイ人、エヴェンキ人等)から行われた。旅団隊員の大部分は中国人で、朝鮮人は10%に過ぎなかった。その後、後続してソ連領内に入った部隊も合流し、第88旅団の兵員数は、1,500人を超えた。

聯軍から来た多くの者は、ソ連の軍事学校の促成指揮課程か、管区少尉課程を受け、赤軍の階級を授与された(旅団長周保中は中佐、金日成は大尉)。通常、旅団の指揮官職には中国人が、副指揮官職には赤軍の将校が任命された。兵員は、赤軍の軍服を身に着けた。

1944年4月現在の編制。

旅団本部 - 旅団長:周保中中佐、参謀長:V.サマルチェンコ少佐

政治科 - 政治委員:V.セレギン少佐

防諜科 - スメルシ

第1独立狙撃大隊 - 大隊長:金日成大尉

第2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效明大尉

第3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明貴大尉

第4独立狙撃大隊 - 大隊長:姜健大尉

自動小銃大隊

無線大隊

独立迫撃砲中隊

独立工兵中隊

独立対戦車銃(PTR)中隊

独立経済中隊

独立機関銃小隊

軍事通訳課程特殊分隊

各独立狙撃大隊は3個中隊から成り、各中隊は3個小隊から成った。

装備(1942年9月~1943年7月現在)は、小銃x4,312挺、自動小銃x370挺、重機関銃x48挺、軽機関銃x63挺、火砲x21門、対戦車銃x16挺、自動車x23両。

第88旅団の兵士は、満州・朝鮮半島地域において偵察・破壊工作活動に従事した。その詳細は不明だが、旅団長の周保中は、1940年~1943年の間に計89人の減員(損害)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ている。その内訳は以下の通り。

第2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9人

第1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26人

未帰還 - 24人

スメルシに引渡し - 6人

傷病のため後送 - 15人

死亡 - 2人

旅団復帰 - 7人

1945年7月、ソ連対日参戦に備えて、旅団から無線機を装備した100人を投入する戦闘行動計画が立案された。しかしながら、ソ連軍の急速な進撃と日本の降伏のため、この計画は実行されなかった。かくして、第88旅団、その大隊長である金日成が朝鮮半島の解放に参加する機会は訪れなかった。

1945年8月29日、第2極東戦線司令官マクシム・プルカエフ上級大将の命令第010号/nに従い、「日本の侵略者との戦いの前線における戦闘指揮任務の模範的遂行と、この際に発揮された勇敢さと勇気」に対して、金日成に赤旗勲章が授与された。同命令により、第88旅団の将兵216人に、各種勲章とメダルが授与された(9月10日に更に58人追加)。

第88旅団は、1945年10月12日付極東軍管区司令官令第042号により解散された.]

 

김일성은 88여단 창설로 1942년 7월에 남야영에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하여[3]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營長)이 되어 8.15 해방 때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4]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 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조선인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은 다음과 같다

(1)김일성(1912년생, 평안남도 평양)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사령관한국전쟁 당시 북한 수상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총사령관

(2)최용건(1900년생, 평안북도 태천군)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부참모장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정치위원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민족보위성상

(3)김책(1903년생, 함경북도 학성군)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부수상, 전선총사령관[한국전쟁 당시 가스중독으로 평양 사망]

(4)강건(1918년생, 경상북도 상주)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한국전쟁 당시 경북 안동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전사]

(5)김일[1910년생,본명 박덕산(朴德山)]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전선사령부 군사위원

1972년12월에 정무원 총리 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6)최광 (1918년생,라선시)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1950년 6월 인민군 제13사단장





1995년 10월 8일, 인민무력부장과 인민군 원수 칭호

(7)임춘추(1912년생, 만지린성)


문인, 작가출신

88독립 저격여단 상조

1983년 1월 7일 국가 부주석

(8)안길(1907년생, 함경북도 경원군)

88독립 저격여단 대위



1947년 12월 13일 사망

(9)서철(1907년생, 함경북도 온성군)

88독립 저격여단 중위

1947년 9월에 대남공작 및 게릴라 양성소로 세워진 강동정치학원의 군사부원장

1977년 인민군 총정치국장

(10)김광협(1915년생, 함경북도 회령)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한국 전쟁 당시 동부전선 2군단장

 




남침은 노동당(공산당과 신민당, 인민당 합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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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은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다.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金元鳳)]·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金星淑)]·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柳子明)]·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崔昌益)]등 중국본토에서 활약하던 좌파 4당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이다

(1)연원 및 변천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다. 처음에는 제1구대(朴孝三)와 제2구대(李益星)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0년 5월 3개 지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조선의용대 본부는 구이린[桂林]·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옮겨 1940년 11월 4일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에 남고 모두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으로 집결해 1941년 3월황하의 맹진(孟津)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0일린현[林縣]에서 신악(申岳)·윤세주(尹世胄)·박효삼(朴孝三)·김창만(金昌滿)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지대장에 박효삼,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金世光), 제3대장에 왕자인(王子仁)이 임명되었다.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산[太行山]일대에서후자좡[胡家庄]전투(1941.12.12.)·싱타이[邢台]전투(1941.12.26.)·편성(偏城)전투(1942.5.28.)를 치렀다. 편성전투 무렵인 1942년 5월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자 화북지대는 본부없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2년 7월 10일허베이성(河北省)타이항산 끝자락에 자리한 셰현(涉縣)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회가 개최되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있던 무정(武亭)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1942년 7월 10일 때마침 충칭에 있던 김두봉(金枓奉)이 옌안[延安]을 거쳐 타이항산으로 왔으므로 그를 맞아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군은 그의 당군이 되었다.

1943년 6월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제8로군과 함께 이른바 ‘반소탕전’을 전개하며 타이항산 속 곳곳에서 항전하며 용명을 떨쳤다.

그때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의용군의 옌안 이동을 결정하였다. 많지도 않은 인력을 타이항산전투에서 소모하기 보다는 전쟁 후에 조선 통치의 요인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에 유익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 이동을 완료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옌안 교외의 뤄자핑[羅家坪] 마을에 주둔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무정이었지만 그는 제8로군의 포병사령부의 책임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뤄자핑에 있는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의 구실을 하였다. 군정학교는 김두봉이 교장이었고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 학도대장은 박효삼이었다. 그 밑에 4개 구대가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뤄자핑에 있는 병력 외에 산둥성(山東省)에 이익성, 산시성(山西省)에 김세광, 동북(만주)지방에 이상조(李相朝)가 이끄는 선견대(先遣隊)가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병력 150명 정도 외에 제8로군에 종군한 10명 내외, 1940년 최창익·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조선의용대가 구이린에 있을 때 미리 온 18명, 그리고 김태준(金台俊)·김사량(金史良)처럼 망명해온 인사, 그리고 각처에서 새로 초모한 인원을 300명 정도로 보면 모두 합쳐 약 500명을 헤아린다


(2)기능과 역할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지공작이었다. 전지공작은 일본군

점령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활동하는 초모활동·선전활동·정보활동 등을 말한다. 옌안에 있을 때는 전방에 파견된 선견대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는 교육활동이었다. 교육은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으로 나뉜다. 뤄자핑에 있던 조선항일군정학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셋째는 생산활동이었다. 제8로군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생활물자가 궁핍했으므로 ‘자력동수 풍의족식(自力動手 豊衣足食)’이라는 모택동(毛澤東)의 구호 아래 군인들이 밭을 일구어 농산물을 자급 자족하였다. 조선의용군도 그에 발맞추어 밭을 갈아 일을 하였다.

옌안지방의 주민은 야오둥[窯洞]이라는 토굴 속에서 생활하는데, 뤄자핑에 가면 지금도 조선의용군이 살던 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의 옛터와 의용군이 일군 밭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제8로군의 동북(東北) 정진군이 편성되어 만주로 갈 때 그 해 9월 15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 뒤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 가다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였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韓斌)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이 북한정계의 연안파라는 정치그룹이다. 그들은 김창만·허정숙 등 몇명 외는 모두 숙청당하였다.

만주에 남아 있던 병력은 그 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공산혁명전쟁에 참가했고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중국 산시성과 옌안(延安, 연안), 타이항산

 

                                                                       김두봉선생등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자리(중국 연안 근교 모습 사진)

1942년 7월 10일 김두봉은 사회주의자로 국민당 지원을 받고 활동하는 김원봉 조선의용대(의열단)에서 탈퇴하여 중국 공산당 모택동부대 연안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행군과 도착하여 김무정(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포병지휘관. 임표, 팽덕회 지원으로 화북조선쳥년회 조직 ), 최창익등과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이때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김두봉을 보고 신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 혁명 노선 모택동 부대라고 지칭했다

독립동맹에는 김두봉(주석), 최창익(부주석), 김무정, 허정숙등이 참여했다

무장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는 김무정, 부사령관 박효삼등이었다

 

"나가자 동무야 함께 뭉치여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血戰)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야

혁명의 기(旗,깃발)는 우리 앞에 날린다

(후렴)앞으로 동무들아

무거운 쇠줄을 둘러 메치고

뼈속에 사무친 원을 풀자

삼천만 대중(對衆)아 모두 다 나가자

승리는 우리를 재촉(催促)한다[의용군 소탕(掃蕩)의 노래]"

*소탕의 노래는 이국 땅에서 일제를 소탕하고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다

 

                                                                                                   조선의용군 모습

조선의용군 영웅적인 투쟁과 희생을 보고 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은 이렇게 추모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치하할 정도였다

 

23.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44년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김두봉은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두봉은 주은래와 친했다

 

["우리의 영도자 김두봉주석 만세"

동무들! 오늘은 기쁨의 날임에 틀림 없습니다. 삼십육년 동안 우리 동포들의 피와 땀을 아서 먹든 왜적이 넘어졌다고 합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조선의 아들 딸은 피눈물을 머금고 이역에서 헤메이게까지 되었든 것입니다.

동무들! 오늘 같은 기쁜 소식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온몸 온정신으로 이것을 마지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마도 우리들을 그렇게 착취하고 압박하고 우리 동지들을 학살한 우리들의 원수를 우리 손으로 무찔으지 못하고 외국의 힘을 빌어 타도 되었다는 것, 우리들이 가진 힘을 다하여 배려온 총과 칼로써 최후의 일전을 할 기회를 노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우리들이 가지는 바 섭섭함일 겝니다.

그러나 동무들!

싸움이 이제부터입니다. 그 싸움이 비록 총과 칼로써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의 참된 행복을 위한 지리하고도 힘찬 싸움이 시작됩니다

밖으로는 새로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싸움, 안으로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싸움.

왜적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느낀 감회와 앞으로 싸워야 할 내 자신의 각오와 말을 여러 동지들께 몇 마듸 였주는 바입니다.

 

"우리의 지도자 주석 동지의  옳은 영도를 힘차게 접수하자!"

"접수하자!"

"최고 지도자 주석 동지 만세!"

"만세!"

 

동무들 우리 의용군의 손으로 왜군을 쳐부수지 못한 것은 분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무기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 조국이 왜놈 손에서 해방 되었다. 이째뜬 해방일세 분명하다.

(연안에서 김두봉 조선의용군 최고지도자의 연설문)]"

 

 

"중국의 광할한 대지 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을 마처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두운 밤이 지나고

빛나는 새 아침이 닥처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

의용군 기빨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수의 철조망

양자와 황하를 뛰여 넘고

피무든 만주벌 결전에

원수를 동해로 내여 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압길로[조선의용군 행진곡]"

 

"조선의 완전 독립이 없이 중국의 독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의 동지들의 목적달성은 우리보다 앞설 것이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건투해 주기를 바란다[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주최로 환송회때 모택동前주석의 송별사]"

 

1945년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 봉천(奉天) 시가행진 때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김일성등  조선인 참여), 의용군(광복군=조선의용군- 김두봉,최창익, 김무정등), 중국군(팔로군-주덕,임표, 팽덕회등 중국 공산당군), 몽고군 그리고 일반 시민이 참여했다 의용군은 중국 만주지역 조선족 주력군으로 1만명의 완전무장으로 참여했다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 도움으로 몽고,극동(러시아 극동자치정부)과 사할린(러시아 사할린 자치정부), 만주(만주국과 만주군, 동북3성 임표 팔로군), 이북(관동군사령부, 북한-대소참전과 소련군 귀순)등을 점령했다

영국군과 미국군 도움으로 인도군(영국군)과 중국 국민당군(영.미군) 그리고 광복군(중국군-김구, 김규식, 이범석등) 등이 중국 남방(중국군-장개석부대)과 동남아(인도군과 중국군),일본(일본군사령부, 친미 일본인과 미국군-항복과 미국군 귀순)과 남한(조선군사령부, 이승만등 미국군-이승만등 조선인 참여.대미참전과 미국군 귀순)지역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조선의용군 출신은 다음과 같다

(1)김무정(본명:김병희.1904년생,함경북도 경성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병사령관, 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지구방위사령관


1952년 10월 병사

(2)박일우(1903년생,함경북도 회령 출생)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1955년 숙청

(3)김웅(1912년생,경상북도 김천)

조선의용군 제1지대(남만지대) 지대장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제1군단 사령관

1978년 11월 남예멘 대사

(4)방호산(1916년생,함경북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

1949년 7월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로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을 이끌고 호남 일대와 진주, 마산까지 진출하는 등 전공으로 제6사단은 근위사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950년 10월에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5)이상조(1915년생,경상남도 동래군)

동북(만주) 지방 조선의용군 선견대(先遣隊)


1945년에 입북하여 북로당 인민군에 들어갔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중장의 계급으로 정찰국장, 부참모총장을 역임했고, 1953년에는 휴전협상에 김일성 얼굴마담역으로 나왔다. 이때, UN군측 대표로 나왔던 백선엽 장군에게 "미제의 개"라고 지껄이며, 근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얼굴에 똥파리가 한시간 넘게 앉아 있어도 험악한 표정을 유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56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소련에 망명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한국에 와서 반김일성, 6.25남침 주장등을 적극 증언하였다






 

 

3.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

                                                                                  한국 전쟁 전 형성된 유격지구

 

                                                                            남부군 결성 전후 이현상 부대의 이동경로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영역에서 유격전을 수행한 북한정부의 파르티잔 부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부르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이현상은 1949년부터 지리산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6.25전쟁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작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년 11월에는 후평리에서 남반부인민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현상은 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1951년 7월 중순부터 남한일대의 유격부대들을 총지휘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전투사령부 등의 토벌작전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1)설립목적

이현상은 1950년 11월 중순 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이승엽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은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로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이때 편성된 인민유격대는 유리사단(4백명), 혁명지대(60명), 인민여단(1백50명)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백50명) 등 약 8백 명의 병력이었다

(2)연원 및 변천

남반부인민유격대는 중공군 참전으로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 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제천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 이 남부군단은 1951년 2월초에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1951년 7월 중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제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북부지방 빨치산 7백 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직속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천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51년 7월부터 노동당은 남한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유격대 체제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기능과 역할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차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한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4)현황

한국군은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을 명령하였다. 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였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5)의의와 평가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은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남부군  주도세력은 일제시대부터 국내에서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활동을 해온 조선공산당 (박헌영)계열로 알려지고 있다 남부군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각 지역에서 폭동과 반정부 투쟁을 주도했고 인민전쟁론을 주도했다 인민전쟁론은 주민들의 민심과 함께 지하정부(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인민군이 남침을 할때 무장투쟁으로 각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이론이다

일부에서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군 주도세력을 북한 인민군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본래 남부군은 조선공산당 주축 남로당의 지하정부(인민위원회)이다 지하정부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폭동과 반정부 투쟁 그리고 남침이후에는 합법화 각 지역 인민위원회 구성,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남부군으로 빨치산 투쟁과 월북으로 어어졌다

박헌영의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간첩으로 처형됨으로서 남로당계열 내부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 되었다

남로당 이후 당(黨) 수준 조직으로는 1960년대 박정희 군부의 5.16 쿠데타이후 김일성주의 노선 통일혁명당이 등장했고 199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가 등장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남부군(조선 공산당) 출신은 다음과 같다

ㄱ.박헌영(1900년생, 충남 예산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총비서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 간첩 총살형(1958년)

ㄴ.이승엽(1905년생, 경기도 부평군)

조선공산당 활동과 남조선노동당 경기도 책임자

한국전쟁 당시 서울시장, 인민유격대 총사령관(강동정치학원 운영. 강동정치학원은 유격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다)

반당종파분자와 미국 간첩 총살형(1954년)

ㄷ.배철(1912년생,경기도 개성)


남로당 경상북도 위원장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유격지도처장

 미국 간첩 및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재산 몰수형과 함께 사형 선고

ㄹ.방순표(1906년생, 경상남도 거제군)

남로당 활동, 대구 10월 1일 사건 가담

한국전쟁 당시 전라북도 도당 위원장(전북 도당 유격대장)

1954년에 덕유산에서 토벌대와 전투 중에 생포될 위기에 놓이자 자폭하여 사망했다

ㅁ.박영발(1913년생,경상북도 봉화군)

남로당 활동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전남 유격대장)

1953년 5월 사망

ㅂ.이현상(1905년생, 충청남도 금산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활동

한국전쟁 당시 강동정치학원 유격대 출신으로 남부군 사령관


남부군은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명을 석방시켰다.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를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부군 결성에 합의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가 가회전투도중 사망하자 이현상의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1월 말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된 이현상 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었다.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천 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고, 독립4지대도 한 달 만에 4백명이던 대원이 백오십 명으로 줄어들었다.

1953년에는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1953년 7월 27일에 6.25 동란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토벌대가 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9월 17일에 토벌대는 빗점골을 포위했고, 이튿날인 9월 18일 오전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도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와 김종원의 국군 부대가 다툼을 벌였고, 이태 등은 북한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사망 날짜는 국군이 시신 발견 전날인 9월 17일로 추정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 임영신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여일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토벌군 측의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ㅅ.김선우

전남 보성군 출생인 김선우는 일제 강점기 공무원으로 일제에 부역하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직책상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오갔으나 군사 조직에서는 전남 지역 유격대 사령관으로서 유격전을 전담하였다. 이는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과거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다리를 절었기 때문이다. 박영발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한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군사 작전을 김선우가 주로 맡게 되었다. 김선우는 구빨치 출신으로서 풍부한 유격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과 박영발의 연이은 죽음 이후 조선인민유격대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이끌던 중, 백운산 아지트에서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김선우가 사망한 1954년 4월 5일을 조선인민유격대가 붕괴한 날로 보기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ㅇ.김달삼

대구 출신인 김달삼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로 유명했던 강문석의 사위로, 제주도에서 교사로 재직한 지식인이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책임자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 총선으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며 봉기한 제주 4·3 사건을 총지휘했다. 태백산에서 유격대를 이끌다가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사살되었다고 알려졌다.

ㅈ.남도부

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이며, 1921년에 경남 함양군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에 재학 중 태평양 전쟁 학병 징집을 거부하며 지리산에 은거며 보광당을 결성하였으며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준비 위원회에 가담하였다. 보광당은 조선인민유격대로 이어졌고 남도부는 이현상과 쌍벽을 이룬 빨치산 지도자가 되었다. 1954년 대구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이다.

ㅊ.김지회·조경순 부부

김지회는 여수·순천 사건 당시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서 반란을 주도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김지회 부대로 불리는 유격 부대를 이끌었다. 제1공화국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전남 동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당황하게 했고, 주변 지형에 익숙한 향토 게릴라가 정규군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국면으로 들어섰다. 김지회는 홍순석과 함께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지휘하던 중, 1949년 4월 뱀사골 전투 후 사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간호사 출신인 김지회의 부인 조경순은 여성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그해 9월 사형에 처해졌다.

ㅋ.리인모

1917년 함경북도 풍산군에서 태어난 리인모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낙오하여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합류하면서 신빨치가 되었다가 1952년 체포되었다. 이후 총 34년 동안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고 비전향 장기수로 남았다. 리인모는 인민군 출신이며 전쟁 중 붙잡혔다는 점 때문에 전쟁 포로로 대우하여 북송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장기 방북 형식을 빌려 송환했다. 북한은 리인모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며 살아남아 끝까지 투쟁한 유격대원의 모범으로 높이 칭송하고 있다.

 

                                                                                           지리산의 주요 아지트 위치

 

                                                                                                     지리산




중국  "한국전쟁 참전 정의(正義)의 전쟁"





                                                                서울을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 모습(사진)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 날은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을 침범한 미국을 분쇄하고 중국안전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은 한국 전쟁 참전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55주년을 기념하여 인터넷상에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을 개설하고 24일부터 정식 운용에 들어갔다.

 

중국은 1025일을 한국전 참전기념일로 삼고 있는데 이는 19501019일 압록강을 도하한 중국 정규군이 국군과 처음 교전한 날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소개(戰爭簡介)’ 14개 코너에 중국 인민지원군과 관련된 문자자료와 사진 및 영상자료들을 올려놓았다.

 

중국은 피로 주조한 중화(血鑄中華) ’라는 이름의 인터넷 '혁명기념관'을 개설하고 그 산하에 공산중국 성립 전후의 전쟁기념 사이트를 잇달아 개설하고 있는 데 이 인터넷 기념관도 그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 ‘9.18사변(만주사변)기념관(九一八事變紀念館)’. ‘항일영웅열사기념관(抗日英烈紀念館)’ 130개의 기념관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다.

 

이 항미원조 기념관 사이트는 공청단(共靑團) 중앙, 중국사회과학원의 주관아래 공청단 중앙 산하의 정보팀(團中央信息辦),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와 중국청소년컴퓨터정보서비스망(中靑網 : 中國靑小年計算機信息服務網)이 협력하여 개설, 운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사이트는 전쟁소개(戰爭簡介) ’코너에서 한국전의 발발에서 종결까지의 진행과정을 약술하고 있다.

 

그 첫머리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정당화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요청에 의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범한 것을 분쇄하고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지원군을 19506월부터 19537월까지 파견하여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다.”

 

또한 누가 전쟁을 발발했는 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했다"고 기술했으며 "신중국(新中國) 성립(중국 공산화) 이후 미국이 장제스(蔣介石)정권에 대해 군사원조를 계속하고 한국과 베트남의 반동세력을 부추겨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였다"고 적고 있다.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중공군 14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요청에 의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범한 것을 분쇄하고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지원군을 19506월부터 19537월까지 파견하여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금강산 서쪽기슭에 있다. 1959년에 건설하였다. 1984년에 중앙 의 비준을 거쳐 확건하였다. 1991년에 착공하여 19937월에 준공하였다. 인민대중들에 대해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교양을 진행하는 장소로 되고 있다. 부지면적은 18m2, 건축면적은 1m2이다.

 

주요한 건축으로는 기념탑, 진렬관이 있다. 기념탑은 금강산 서쪽기슭에 위치. 탑 높이는 53m로서 1953년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등소평동지가 탑명을 썼다.

 

진렬관은 3층으로 되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부각군상을 배경으로 정 중앙에는 모택동과 팽덕회의 거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관내에는 12개 전시청이 있다. “항미원조전쟁관”, “영웅모범렬사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위대한 전쟁의 력사적 화폭을 전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이밖에 또 대형무기진렬구에는 항미원조에 나갔던 비행기와 대포 땅크, 자동차 등 무기장비들이 진렬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가 모여 지원병 파병에 대해 의론하는 장면


                                                             항미원조 전쟁에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모택동과 엄정경고문을 발표하는 주은래


                                                                                  팽덕회(彭德懷)사령원이 전선을 둘러보는 장면


                                                                                        모택동의 지원에 감사해 하는 김일성








                                                                                            조중우의를 다짐하는 깃발들

남노당 등 남한 각지에서 중공군의 지원을 열렬히 환영하는 내용의 깃발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 그리고 북한 노동당 내부 자국 사회주의(민족 사회주의) 연합전선 구축은 남한이나 일본등지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에 잠입작전입니다. 당 정치국 요원이 잠입하여 공산주의나 자국사회주의(민족사회주의) 정치부대를 결성하고 내전이 발발할때 인민전쟁을 추진해왔습니다. 대표적인 단체가 일본 적군파와 남한 한국민족민주전선(반미단체 자주대오)등입니다[북한이나 중국 인적자원 구성(붉은 깃발이나 자주대오)-->지역 내전 추진--->군사적 조치와 점령]"


   抗美援朝戰爭簡介


  新中國成立後,美國繼續在軍事上援助蔣介石,同時扶持朝鮮、越南等國的反動勢力,建立針對中國的包圍圈。 1950年6月25日,朝鮮內戰爆發。美國即採取武裝干涉政策。 6月27日,美國總統杜魯門聲明,宣佈出兵朝鮮,並命令美國海軍第七艦隊侵入台灣海峽。同日,聯合國安理會在美、英等國的操縱下通過決議,聯合國會員國要派兵隨從美國軍隊入朝。 6月28日,毛澤東發表講話,號召“全國和全世界的人民團結起來,進行充分的準備,打敗美帝國主義的任何挑釁。”同日,周恩來代表中國政府發表聲明,強烈遣責美國侵略朝鮮、台灣及乾涉亞洲事務的罪行。號召“全世界一切愛好和平正義和自由的人類,尤其是東方各被壓迫民族和人民,一致奮起,制止美國帝國主義在東方的新侵略。”

1950年7月10日,中國人民反對美國侵略台灣朝鮮運動委員會在北京成立,並在14日發出《關於舉行'反對美國侵略台灣朝鮮運動週”的通知》。抗美援朝運動開始播及全國,形成第一個高潮。

  1950年9月15日,以美國為首的“聯合國軍”75000人在朝鮮西海岸的仁川港登陸。此後,朝鮮人民軍腹背受敵,損失嚴重,轉入戰略退卻。 10月1日,美偽軍越過三八線,隨後侵占平壤,並繼續向中朝邊境的鴨綠江進犯。

  從8月27日起,美國飛機多次侵入中國領空進行偵察和轟炸掃射。面對這種形勢,中共中央根據朝鮮黨和政府的請求,作出了抗美援朝、保家衛國的決策。 1950年10月8日,毛澤東代表中央軍委命令中國人民志願軍赴朝參戰。 10月19日,以彭德懷為司令員兼政治委員的中國人民志願軍開始分別從安東(今丹東)、長甸河口、輯安等渡過鴨綠江,進入朝鮮參戰。從10月25日至12月24日,志願軍同朝鮮人民軍一起,連續進行了兩次戰役,殲敵5萬餘人,於12月6日收復平壤,並把敵人趕回到三八線附近,初步扭轉了朝鮮的戰局。

1950年10月26日,中國人民保衛世界和平反對美國侵略委員會(簡稱中國人民抗美援朝總會)成立。各行政區、省市先後成立分會或將原有的保衛世界和平委員會、反對美國侵略委員會合併改組為抗美援朝分會。 11月4日,中國共產黨和各民主黨派聯合發表宣言,“誓以全力擁護全國人民的正義要求,擁護全國人民在志願基礎上為著抗美援朝保家衛國的神聖任務而奮鬥。”4日至11日,全國自然科學聯合會、全國科普協會、社會科學研究會、全國婦聯、全國青聯等人民團體分別發表宣言,擁護中共中央和各民主黨派的聯合宣言,號召廣大群眾積極參加抗美援朝、保家衛國運動。 11月27日,全國政協與各民主黨派舉行聯席會議,於12月1日發出《關於各民主黨派、人民團體對慰勞中國人民志願軍和朝鮮人民軍運動的協議的通知》。 12月22日,中央人民政府內務部、人民革命軍事委員會總政治部聯合發出《關於開展新年擁政愛民擁軍優屬運動的指示》。 1951年2月16日,全國政協發出電文,號召把抗美援朝運動“進一步地普及和深入到每一農村、每一機關、每一學校、每一工廠、每一商店、每一街道和每一民族聚居的區域。”3月14日,抗美援朝總會發出通告,“努力普及深入抗美援朝的實際工作和宣傳教育工作,務使全國每一處每一人都受到這個愛國教育,都能積極參加這個愛國行動。”此後,抗美援朝運動進入了更加普及和深入發展的階段。

1951年1月14日,抗美援朝總會發出《關於慰勞中國人民志願軍朝鮮人民軍並救濟朝鮮難民的通知》。 15日,《人民日報》發表社論,號召全國人民踴躍參加愛國募捐運動。到5月30日,全國人民就捐款1186億餘元,捐獻慰問袋77萬多個,慰問品126萬多件。 4月初到5月中旬,由各民主黨派、各人民團體和各界群眾代表組成的中國人民赴朝慰問團分赴朝鮮各地,慰問了中國人民志願軍和朝鮮人民軍及群眾。

  1951年6月1日,抗美援朝總會發出通告,號召全國各界同胞捐獻飛機、大砲。此後中華全國總工會、全國婦聯、青年團中央、全國青年聯合會、中國紅十字會等人民團體紛紛發表宣言、通告,號召各界同胞積極捐獻。到9月25日為止,共捐獻飛機2481架,捐款入庫的達9970億元。

  1950年12月31日至1951年1月7日,志願軍發動了第三次戰役,殲敵1.9萬多人。 1月25日至4月21日,志願軍又發動第四次戰役,殲敵7.8萬人。 4月11日,“聯合國軍總司令”麥克阿瑟被撤職,由侵朝美軍第八軍軍長李奇微接任。 4月22日至6月10日,志願軍又取得第五次戰役的勝利,共殲敵8.2萬餘人。

1951年7月10日,聯合國軍方面和中朝方面在朝鮮開城首次舉行談判。美國在談判桌上進行政治訛詐,要求將軍事分界線劃在中朝軍隊控制的三八線以北地區。以後朝鮮戰場出現了談談打打的複雜局面。 8月18日,美軍集中8個師的兵力,發動了“夏季攻勢”,接著又於9月29日發動了秋季攻勢。與此同時,美國空軍實行所謂“絞殺戰”,對中朝人民軍隊後方和後方運輸線實行大規模的日夜輪番狂轟濫炸,企圖切斷中朝人民軍隊前線糧食彈藥的供給,迫使中朝方面接受其談判條件。經過中朝人民軍隊的英勇戰鬥,到10月下旬便粉碎了敵人的攻勢,共殲敵25萬人。

1952年初,美國侵略軍公然違背國際公約,在朝鮮北部和中國東北地區撒佈大量帶有鼠疫、霍亂、傷寒和其他傳染病的動物和昆蟲,企圖以所謂的“細菌戰”從根本上削弱中朝軍民的戰鬥力。 2月24日,抗美援朝總會主席郭沫若發表聲明,號召全國人民動員起來,堅決聲討並製止美軍撒佈細菌罪行。 3月8日,周恩來發表聲明,抗議美國政府使用細菌武器和侵犯中國領空。為了戰勝美國的細菌武器,中朝兩國人民緊急動員起來,開展防疫衛生運動,採取種種措施,動員一切可能的人力、物力、藥力撲滅帶菌毒蟲。美國的細菌戰激起了全世界人民的極大公憤,使美國完全陷於世界人民的聲討、審判的被告地位。 4月28日,“細菌將軍”李奇微下台,由美軍上將克拉克接任“聯合國軍總司令”。美國的“細菌戰”遭到失敗。

1952年6月23日,美國侵朝空軍大規模轟炸了中國境內的鴨綠江水電廠。 7月11日,美國空軍對北朝鮮和平城市平壤進行轟炸掃射。中國各地掀起了抗議聲討活動,揭露和抗議美國這一暴行。美國企圖阻撓中朝戰俘全部遣返,並對其俘獲的中朝人員施行極其野蠻的摧殘和迫害,引起了中朝人民的極大憤慨。 1952年2月至10月,《人民日報》多次發表社論和聲明,揭露和譴責美軍迫害戰俘的罪行。全國人民也積極掀起了抗議活動,要求全部釋放戰俘。

  為了挽回敗局和迫使中朝方面接受美國的談判條件,克拉克於1952年10月14日發動了上甘嶺戰役。美軍先後投入6萬多人的兵力,出動3千架飛機和170多輛坦克,動用18個砲兵營,進攻不到3.7平方公里的上甘嶺陣地。在44天的激戰中,美軍向上甘嶺發射了200萬發砲彈和5千枚炸彈,發動了900多次沖鋒。但是,志願軍戰士,守住了陣地。此戰役志願軍殲敵2.7萬人。 1953年5月中旬到6月中旬,中國人民志願軍配合停戰談判,先後發動兩次進攻性作戰,殲敵4萬餘人。 7月13日,中朝人民軍隊發起金城戰役,殲敵5萬餘人,收復土地178平方公里。

  美國在形勢更加不利的情況下,於1953年7月27日在板門店同中朝代表簽訂了《關於朝鮮軍事停戰的協定》。歷時3年零32天的朝鮮戰爭結束。中朝軍隊共殲敵百餘萬人,其中美軍39萬人,擊落擊傷敵機12200餘架,擊沉擊傷敵艦艇257艘,擊毀和繳獲敵軍各種作戰物資無數。至此,中國人民抗美援朝運動也勝利結束。

  朝鮮停戰後,中國人民志願軍又幫助朝鮮人民為戰後的恢復和建設作了大量的工作。 1958年10月,中國人民志願軍全部撤離朝鮮,返回祖國。


                                                              동북아시아 중국 동북3성과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 일본(사진)



한국전쟁과 6개국[남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소련)]입장

한반도 핵문제를 주도하고 있는 6개국 남한(한국), 미국, 일본등 자유진영과 북한(조선), 소련, 중국(중공) 등 공산진영으로 구분되어 한국 전쟁을 수행했다

자유진영-한국과 미국, 일본등

한국 - 590,911명(전쟁 참가 병력)
미합중국 - 302,483명( 전쟁 참가 병력)

일본-전쟁 물자와 재정 지원국[1950년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전쟁 참전 유엔사령부 총사령본부 설치] 


공산진영-북한(조선)과 소련, 중공(중국) 등

북한(1950625일)-80만 명 (전쟁 참가 병력)

소련(1950625일)- 26000명(전쟁 참가 병력)

중화인민공화국(19501025일)-135만 명 (전쟁 참가 병력)




                  자본주의 체제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일본식 사회주의 국가)을 주장하는 일본 마오(모택동)주의자 적군(赤軍, 붉은군) 모습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미국이나 영국, 일본등 선진국 사회]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대통령이나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기본권보장,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 내부 러시아연방공산당은 순수 내각책임제 인민 회의(의회) 정부론 레닌주의로 민주주의 세력으로 볼 수 있지만 러시아공산노동당(러시아 공산주의자 당)은 사회주의 공화국론 스탈린주의 노선 자국사회주의(일국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세력으로 민주주의 세력보다는 패권주의나 군국주의 군정세력(무장단체)으로 보고 있다 .1982년 등소평 헌법은 전체주의 권력이 집중한 마오(모택동) 시대의 반성에서 3선 금지(중임제 도입)를 했다 모택동을 독재자라고 표현하지만 등소평을 독재자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스탈린주의가 자주계열 마오나 김일성주의 단체들이다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추진한 스탈린이나 모택동, 김일성 등을 그들의 나라에서 조차도 전체주의 독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예: 마오단체 일본 적군파나 김일성단체 남한 한국민족민주전선)

전쟁도 정책수단으로 정의라고 표현하지만 2차대전 이후 전쟁은  정책수단으로 평화를 위해서 할 때 정의이다

미국과 일본, 한국등 자유와 민주주의(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 나라에서는 전체주의 독재세력  마오단체 일본 적군파나 김일성단체 남한 한국민족민주전선 등을 제거한 사람이 국가의 영웅이며 애국세력이다[중국에서는 국가주석 임기 3선 금지와 민주주의를 도입한 등소평부터 국제적으로 마오 무장단체를 제거했다 그러나 아직도 김일성 가계 3대 세습 북한에서는 김일성 무장단체를 국제적으로 원조하고 있다 남한에서도 극렬민족주의자들(민족해방계열)이 김일성주의를 애국으로 묘사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보다 민족주의(반일이나 반미투쟁)에 매몰 되었기 때문이다 극렬 민족주의자는 애국자나 민주화 세력이 될 수 없고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사회) 세력이나  자유와 민주주의자를 민주화나 애국세력으로 볼때 선진국 국가관이다]

1단계 자본주의 민주주의 혁명 추진(경제 기반으로 정치)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전체주의(독재주의)!

2단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기반으로 자유사회(복지사회) 구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