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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월경과 평양점령 입장(유엔군)이냐 북중연합군 창설과 38선 월경, 서울점령 입장(중국과 북한군)이냐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월경과 평양점령 입장(유엔군)이냐 북중연합군 창설과 38선 월경, 서울점령 입장(중국과 북한군)이냐

CIA bear 허관(許灌) 2018. 5. 1. 14:59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월경과 평양점령 입장(유엔군)이냐


                                                                                  인천상륙작전(사진)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유엔군사령부 자료]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38선을 돌파한 유엔군


                                                                                    대동강을 도하하여 평양을 진입하는 모습



                                                                                              유엔군을 환영하는 평양시민들 모습


유엔군의 평양 탈환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고 있는 평양시민들



                                                                         10만명의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 미주리 전함이 단천, 청진, 성진, 원산, 함흥, 흥남등 동해안 북한지역을 점령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북중연합군 창설과 38선 월경, 서울점령 입장(중국과 북한군)이냐







                                                                서울을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 모습(사진)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 날은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을 침범한 미국을 분쇄하고 중국안전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은 한국 전쟁 참전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55주년을 기념하여 인터넷상에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을 개설하고 24일부터 정식 운용에 들어갔다.

 

중국은 1025일을 한국전 참전기념일로 삼고 있는데 이는 19501019일 압록강을 도하한 중국 정규군이 국군과 처음 교전한 날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소개(戰爭簡介)’ 14개 코너에 중국 인민지원군과 관련된 문자자료와 사진 및 영상자료들을 올려놓았다.

 

중국은 피로 주조한 중화(血鑄中華) ’라는 이름의 인터넷 '혁명기념관'을 개설하고 그 산하에 공산중국 성립 전후의 전쟁기념 사이트를 잇달아 개설하고 있는 데 이 인터넷 기념관도 그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 ‘9.18사변(만주사변)기념관(九一八事變紀念館)’. ‘항일영웅열사기념관(抗日英烈紀念館)’ 130개의 기념관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다.

 

이 항미원조 기념관 사이트는 공청단(共靑團) 중앙, 중국사회과학원의 주관아래 공청단 중앙 산하의 정보팀(團中央信息辦),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와 중국청소년컴퓨터정보서비스망(中靑網 : 中國靑小年計算機信息服務網)이 협력하여 개설, 운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사이트는 전쟁소개(戰爭簡介) ’코너에서 한국전의 발발에서 종결까지의 진행과정을 약술하고 있다.

 

그 첫머리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정당화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요청에 의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범한 것을 분쇄하고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지원군을 19506월부터 19537월까지 파견하여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다.”

 

또한 누가 전쟁을 발발했는 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했다"고 기술했으며 "신중국(新中國) 성립(중국 공산화) 이후 미국이 장제스(蔣介石)정권에 대해 군사원조를 계속하고 한국과 베트남의 반동세력을 부추겨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였다"고 적고 있다.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중공군 14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요청에 의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범한 것을 분쇄하고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지원군을 19506월부터 19537월까지 파견하여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금강산 서쪽기슭에 있다. 1959년에 건설하였다. 1984년에 중앙 의 비준을 거쳐 확건하였다. 1991년에 착공하여 19937월에 준공하였다. 인민대중들에 대해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교양을 진행하는 장소로 되고 있다. 부지면적은 18m2, 건축면적은 1m2이다.

 

주요한 건축으로는 기념탑, 진렬관이 있다. 기념탑은 금강산 서쪽기슭에 위치. 탑 높이는 53m로서 1953년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등소평동지가 탑명을 썼다.

 

진렬관은 3층으로 되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부각군상을 배경으로 정 중앙에는 모택동과 팽덕회의 거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관내에는 12개 전시청이 있다. “항미원조전쟁관”, “영웅모범렬사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위대한 전쟁의 력사적 화폭을 전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이밖에 또 대형무기진렬구에는 항미원조에 나갔던 비행기와 대포 땅크, 자동차 등 무기장비들이 진렬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가 모여 지원병 파병에 대해 의론하는 장면


                                                             항미원조 전쟁에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모택동과 엄정경고문을 발표하는 주은래


                                                                                  팽덕회(彭德懷)사령원이 전선을 둘러보는 장면


                                                                                        모택동의 지원에 감사해 하는 김일성








                                                                                            조중우의를 다짐하는 깃발들

남노당 등 남한 각지에서 중공군의 지원을 열렬히 환영하는 내용의 깃발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 그리고 북한 노동당 내부 자국 사회주의(민족 사회주의) 연합전선 구축은 남한이나 일본등지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에 잠입작전입니다. 당 정치국 요원이 잠입하여 공산주의나 자국사회주의(민족사회주의) 정치부대를 결성하고 내전이 발발할때 인민전쟁을 추진해왔습니다. 대표적인 단체가 일본 적군파와 남한 한국민족민주전선(반미단체 자주대오)등입니다[북한이나 중국 인적자원 구성(붉은 깃발이나 자주대오)-->지역 내전 추진--->군사적 조치와 점령]"


한국전쟁 북한 공산세력 참가국 군인

북한(1950625일): 80만 명

소련(1950625일): 26000

중화인민공화국(19501025일): 135만 명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7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국전쟁은 소련군 저격여단 주도로 추진했고 유엔군 개입과 중공군 개입으로 중국의용대 주도로 전개 되었다


   抗美援朝戰爭簡介


  新中國成立後,美國繼續在軍事上援助蔣介石,同時扶持朝鮮、越南等國的反動勢力,建立針對中國的包圍圈。 1950年6月25日,朝鮮內戰爆發。美國即採取武裝干涉政策。 6月27日,美國總統杜魯門聲明,宣佈出兵朝鮮,並命令美國海軍第七艦隊侵入台灣海峽。同日,聯合國安理會在美、英等國的操縱下通過決議,聯合國會員國要派兵隨從美國軍隊入朝。 6月28日,毛澤東發表講話,號召“全國和全世界的人民團結起來,進行充分的準備,打敗美帝國主義的任何挑釁。”同日,周恩來代表中國政府發表聲明,強烈遣責美國侵略朝鮮、台灣及乾涉亞洲事務的罪行。號召“全世界一切愛好和平正義和自由的人類,尤其是東方各被壓迫民族和人民,一致奮起,制止美國帝國主義在東方的新侵略。”

1950年7月10日,中國人民反對美國侵略台灣朝鮮運動委員會在北京成立,並在14日發出《關於舉行'反對美國侵略台灣朝鮮運動週”的通知》。抗美援朝運動開始播及全國,形成第一個高潮。

  1950年9月15日,以美國為首的“聯合國軍”75000人在朝鮮西海岸的仁川港登陸。此後,朝鮮人民軍腹背受敵,損失嚴重,轉入戰略退卻。 10月1日,美偽軍越過三八線,隨後侵占平壤,並繼續向中朝邊境的鴨綠江進犯。

  從8月27日起,美國飛機多次侵入中國領空進行偵察和轟炸掃射。面對這種形勢,中共中央根據朝鮮黨和政府的請求,作出了抗美援朝、保家衛國的決策。 1950年10月8日,毛澤東代表中央軍委命令中國人民志願軍赴朝參戰。 10月19日,以彭德懷為司令員兼政治委員的中國人民志願軍開始分別從安東(今丹東)、長甸河口、輯安等渡過鴨綠江,進入朝鮮參戰。從10月25日至12月24日,志願軍同朝鮮人民軍一起,連續進行了兩次戰役,殲敵5萬餘人,於12月6日收復平壤,並把敵人趕回到三八線附近,初步扭轉了朝鮮的戰局。

1950年10月26日,中國人民保衛世界和平反對美國侵略委員會(簡稱中國人民抗美援朝總會)成立。各行政區、省市先後成立分會或將原有的保衛世界和平委員會、反對美國侵略委員會合併改組為抗美援朝分會。 11月4日,中國共產黨和各民主黨派聯合發表宣言,“誓以全力擁護全國人民的正義要求,擁護全國人民在志願基礎上為著抗美援朝保家衛國的神聖任務而奮鬥。”4日至11日,全國自然科學聯合會、全國科普協會、社會科學研究會、全國婦聯、全國青聯等人民團體分別發表宣言,擁護中共中央和各民主黨派的聯合宣言,號召廣大群眾積極參加抗美援朝、保家衛國運動。 11月27日,全國政協與各民主黨派舉行聯席會議,於12月1日發出《關於各民主黨派、人民團體對慰勞中國人民志願軍和朝鮮人民軍運動的協議的通知》。 12月22日,中央人民政府內務部、人民革命軍事委員會總政治部聯合發出《關於開展新年擁政愛民擁軍優屬運動的指示》。 1951年2月16日,全國政協發出電文,號召把抗美援朝運動“進一步地普及和深入到每一農村、每一機關、每一學校、每一工廠、每一商店、每一街道和每一民族聚居的區域。”3月14日,抗美援朝總會發出通告,“努力普及深入抗美援朝的實際工作和宣傳教育工作,務使全國每一處每一人都受到這個愛國教育,都能積極參加這個愛國行動。”此後,抗美援朝運動進入了更加普及和深入發展的階段。

1951年1月14日,抗美援朝總會發出《關於慰勞中國人民志願軍朝鮮人民軍並救濟朝鮮難民的通知》。 15日,《人民日報》發表社論,號召全國人民踴躍參加愛國募捐運動。到5月30日,全國人民就捐款1186億餘元,捐獻慰問袋77萬多個,慰問品126萬多件。 4月初到5月中旬,由各民主黨派、各人民團體和各界群眾代表組成的中國人民赴朝慰問團分赴朝鮮各地,慰問了中國人民志願軍和朝鮮人民軍及群眾。

  1951年6月1日,抗美援朝總會發出通告,號召全國各界同胞捐獻飛機、大砲。此後中華全國總工會、全國婦聯、青年團中央、全國青年聯合會、中國紅十字會等人民團體紛紛發表宣言、通告,號召各界同胞積極捐獻。到9月25日為止,共捐獻飛機2481架,捐款入庫的達9970億元。

  1950年12月31日至1951年1月7日,志願軍發動了第三次戰役,殲敵1.9萬多人。 1月25日至4月21日,志願軍又發動第四次戰役,殲敵7.8萬人。 4月11日,“聯合國軍總司令”麥克阿瑟被撤職,由侵朝美軍第八軍軍長李奇微接任。 4月22日至6月10日,志願軍又取得第五次戰役的勝利,共殲敵8.2萬餘人。

1951年7月10日,聯合國軍方面和中朝方面在朝鮮開城首次舉行談判。美國在談判桌上進行政治訛詐,要求將軍事分界線劃在中朝軍隊控制的三八線以北地區。以後朝鮮戰場出現了談談打打的複雜局面。 8月18日,美軍集中8個師的兵力,發動了“夏季攻勢”,接著又於9月29日發動了秋季攻勢。與此同時,美國空軍實行所謂“絞殺戰”,對中朝人民軍隊後方和後方運輸線實行大規模的日夜輪番狂轟濫炸,企圖切斷中朝人民軍隊前線糧食彈藥的供給,迫使中朝方面接受其談判條件。經過中朝人民軍隊的英勇戰鬥,到10月下旬便粉碎了敵人的攻勢,共殲敵25萬人。

1952年初,美國侵略軍公然違背國際公約,在朝鮮北部和中國東北地區撒佈大量帶有鼠疫、霍亂、傷寒和其他傳染病的動物和昆蟲,企圖以所謂的“細菌戰”從根本上削弱中朝軍民的戰鬥力。 2月24日,抗美援朝總會主席郭沫若發表聲明,號召全國人民動員起來,堅決聲討並製止美軍撒佈細菌罪行。 3月8日,周恩來發表聲明,抗議美國政府使用細菌武器和侵犯中國領空。為了戰勝美國的細菌武器,中朝兩國人民緊急動員起來,開展防疫衛生運動,採取種種措施,動員一切可能的人力、物力、藥力撲滅帶菌毒蟲。美國的細菌戰激起了全世界人民的極大公憤,使美國完全陷於世界人民的聲討、審判的被告地位。 4月28日,“細菌將軍”李奇微下台,由美軍上將克拉克接任“聯合國軍總司令”。美國的“細菌戰”遭到失敗。

1952年6月23日,美國侵朝空軍大規模轟炸了中國境內的鴨綠江水電廠。 7月11日,美國空軍對北朝鮮和平城市平壤進行轟炸掃射。中國各地掀起了抗議聲討活動,揭露和抗議美國這一暴行。美國企圖阻撓中朝戰俘全部遣返,並對其俘獲的中朝人員施行極其野蠻的摧殘和迫害,引起了中朝人民的極大憤慨。 1952年2月至10月,《人民日報》多次發表社論和聲明,揭露和譴責美軍迫害戰俘的罪行。全國人民也積極掀起了抗議活動,要求全部釋放戰俘。

  為了挽回敗局和迫使中朝方面接受美國的談判條件,克拉克於1952年10月14日發動了上甘嶺戰役。美軍先後投入6萬多人的兵力,出動3千架飛機和170多輛坦克,動用18個砲兵營,進攻不到3.7平方公里的上甘嶺陣地。在44天的激戰中,美軍向上甘嶺發射了200萬發砲彈和5千枚炸彈,發動了900多次沖鋒。但是,志願軍戰士,守住了陣地。此戰役志願軍殲敵2.7萬人。 1953年5月中旬到6月中旬,中國人民志願軍配合停戰談判,先後發動兩次進攻性作戰,殲敵4萬餘人。 7月13日,中朝人民軍隊發起金城戰役,殲敵5萬餘人,收復土地178平方公里。

  美國在形勢更加不利的情況下,於1953年7月27日在板門店同中朝代表簽訂了《關於朝鮮軍事停戰的協定》。歷時3年零32天的朝鮮戰爭結束。中朝軍隊共殲敵百餘萬人,其中美軍39萬人,擊落擊傷敵機12200餘架,擊沉擊傷敵艦艇257艘,擊毀和繳獲敵軍各種作戰物資無數。至此,中國人民抗美援朝運動也勝利結束。

  朝鮮停戰後,中國人民志願軍又幫助朝鮮人民為戰後的恢復和建設作了大量的工作。 1958年10月,中國人民志願軍全部撤離朝鮮,返回祖國。[중공군 자료]


                                                              동북아시아 중국 동북3성과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 일본(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