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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세스쿠가 통치 모델로 삼았던 김일성의 북한으로 망명할 생각 본문
북한의 김일성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만남(사진)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대통령 부부가 혁명군에 의해 체포되었다(1989).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던 차우세스쿠는 하루 전 반정부 시위 확산으로 수도 부쿠레슈티를 부인과 함께 헬기로 탈출했다. 이들부부는 차우세스쿠가 통치 모델로 삼았던 김일성의 북한으로 망명할 생각이었으나 헬기 조종사가 대공포화 위협을 구실 삼아 이들 부부를 중도에 내려놓았다. 할 수 없이 차량 편으로 국외 탈출을 시도했으나역시 운전 기사에 의해 버림 받았다. 민가에 숨어 있던 이들 부부는 주인이 방문을 걸어 잠근 뒤 혁명군에 신고하는 바람에 붙잡힌 것이다.
혁명군은 차우세스쿠 친위 보안대의 반혁명을 우려, 이들 부부를 군사 재판에 회부 사형을 선고한 뒤 크리스마스 날인 12월 25일 총살형으로 처형했다. 처형대에 선 차우세스쿠 부부는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는데 1절이 끝나기 전 총탄 세례를 받고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 처형 장면은 루마니아 전역에 TV로 생중계됐다.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보안군이 반격 시도를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기위한 조치였다. 처형 직후 촬영되어 전세계로 전송된 사진 속에서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엿다. 차우세스쿠 나이는 71세였다.
한 국가의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 부부가 함께 처형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프랑스대혁명 때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뚜와네트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간격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됏으며 러시아 혁명 때 황제 니콜라이 2세 부부가 자녀와 함께 적군에의해 처형됐다. 그러고 보면 공산주의혁명은 최고 지도자 부부의 처형과 함께 시작됐고 그종막도 최고 지도자 부부의처형과 함께 이루어졌다.
1.민중운동의 첫 시작
서방에 지지를 얻으면서 특유한 독재를 강행해 온 차우셰스쿠 일가의 통치는 영원할 듯했지만, 루마니아에서 차우세스쿠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1989년 12월 20일 차우셰스쿠는 인민궁전 앞 광장에서 관제 친정부 집회를 개최한 일변, 공장에서는 열성분자들을 선발해 아침일찍 광장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집회가 돌연 취소됐으니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 정오에 모일 것을 재명령했으나 열성분자들은 퇴근한 뒤였고 어쩔 수 없이 당성이 약한 노동자들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2.티미쇼아라 시위
차우셰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와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과 유혈 진압을 시작으로 몰락했다. 티미쇼아라에서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과 소수 민족 차별에 반대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지도하던 라슬로 퇴케시(László Tőkés, 1952년 - ) 목사(라즐로 토케스 목사라고도 한다)를 체포한 사건에 대항해 1989년 12월 17일 헝가리 개신교 신도가 시작한 시위는 루마니아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더 포괄스러운 정부 시위로 변했다.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해 많은 사상자를 낸 국가폭력으로 인민의 인권을 짓밞았다.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급히 귀국하였다.
3.관제 대회와 루마니아 시민들의 저항
12월 21일 12시 30분, 차우셰스쿠는 시위 사태를 진정하게 하려고 자신을 지지하는 관제 대회를 열어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군중 10만을 모이게 하고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연설의 내용은 경제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을 지지를 해야하는 이유뿐인 내용에 불과했는데 이 관제 대회에서 뒤쪽 끝에 있는 젊은 시위대가 갑자기 야유하자 앞에 있는 군중이 조금씩 야유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모든 군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야유한다. 차우셰스쿠는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라고 말했지만, 이 장면까지 전부 생중계되고 말았다. 얼마 못가 군중은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대로 돌변하였고 차우셰스쿠 내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중앙위원회 건물로 대피하였다.
차우셰스쿠는 경찰만으로는 안 될 듯하다고 판단해 정규군을 출동하게 했으나 그 정규군은 오히려 시위대에 가담한다. 원인은 차우셰스쿠가 평소에 세쿠리타테만 편애했기에 반대파인 군부는 불만이 많이 쌓여있었는데 이 시위를 기회로 차우셰스쿠와 세쿠리타테파를 없앨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군부는 시민이 아닌 차우셰스쿠가에 총부리를 겨눈 데다가 차우셰스쿠의 족벌 정치로 말미암아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루마니아 공산당원들마저 차우셰스쿠를 루마니아공산당에서 제명했고 국민과 군관이 하나가 되어 차우셰스쿠에게 재판받을 것을 통지한다.
차우셰스쿠는 세쿠리타테로 하여금 시위대를 막으라고 지시한 결과 광장의 상황은 처참했다. 군중이 군경과 충돌,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장군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왼쪽 다리에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까지 국방장관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바실리 밀레아가 국민에게 발포하라는 차우셰스쿠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세쿠리타테에게 암살당했고 루마니아 공산당내부의 권력 서열 2위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에게 적극으로 추천받으면서 국방장관이 되고 만다.
4.시가전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는 루마니아 전역으로 번졌다. 극도의 혼란 속에 시위 이튿날인 12월 22일 정부군이 루마니아 인민의 민주화 시위에 가담해 결성된 구국 전선은 방송국과 수도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차우셰스쿠 친위대인 보안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경찰과 세쿠리타테, 보안군은 시위대에 굴복, 중앙위원회 건물의 보호를 포기했다. 당시 국방장관인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돕지 말고 부대에 복귀하라고 군대에 명령했지만, 국방장관인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군인들의 민주화 시위 가담을 묵인했기에 군인들이 시위대에 대거 참여해 시위대 규모는 기하급수로 커졌으며 시위대에 가담한 군인 중에는 대령급 이상 고급장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5.도망
그 누구도 자기 편을 들지 않는다는 형편을 인지한 차우셰스쿠 부부는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슈티를 탈출해 성난 군중을 일단 피했다. 당시 이들 부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차우셰스쿠가 탄 헬기를 조종하던 중령 바실리 마루탄은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 싫어서 대공 사격을 당한다고 거짓말하면서 헬기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기에서 내리고 중령 바실리 마루탄은 원대로 복귀했다. 헬기로 도망할 수 없게 된 차우셰스쿠는 금번엔 운전 담당자에게 도주하라고 지시했지만 운전 담당자는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 싫어 엔진이 타 버렸다고 거짓말해 차우셰스쿠를 내리게 했고 두 번째로 차우셰스쿠를 태워 준 운전사는 차우셰스쿠 부부를 농업박물관으로 몰래 보냈다. 농업박물관 근처에 살던 농부는 차우셰스쿠가 기거하던 방을 밖에서 걸어잠그고서 혁명 군대에 밀고해 차우셰스쿠 부부는 12월 23일 혁명 군대에 붙잡혔으며 군사법원에 넘겨졌다.
6.사형
혁명정부 측은 그 전부터 차우셰스쿠 부부를 상대로 한 재판울 논의하고 있었으나 "잘못되면 차우셰스쿠 지지자들이 역으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2월 25일 구국전선의 군사 법정에서 인민재판으로써 반역과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차우셰스쿠의 변호사 카를로마저 검사로 돌변해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은 예는 처음이오.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라고 차우셰스쿠에게 말할 정도였는데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국민을 배려해 사력을 다했다고 우겨서 재판장에게도 크게 미움을 샀다. 한편 소총수들은 차우셰스쿠를 죽이고자 총을 준비했고 차우셰스쿠의 처형에 동참할 사람들을 뽑기로 했는데, {지원자는 수백명에 이르렀으나 Captain Ionel Boeru, Sergeant-Major Georghin Octavian and Dorin-Marian Cîrlan 이 세명의 군인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다.}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둘은 눈물을 흘리더니 벽을 보고 "반역자들에게 죽음을!"이라 외치더니 사형 집행이 시작되자 좌파 세력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인터내셔널"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일 절이 채 끝나지도 않아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고 총탄 각각 160여 발을 세례받고 처참하게 죽었다.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는 장면은 공개로 이루어졌고 생중계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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