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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주도세력 신민회(新民會) 본문

대북정책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주도세력 신민회(新民會)

CIA bear 허관(許灌) 2012. 3. 18. 13:25

 

신민회(新民會)는 상동교회 부설 공옥학교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평등사상[민주공화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항일 비밀결사단체로서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의 발기에 의하여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감(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김구,김규식,이승만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1. 신민회 창립취지

1907년 4월에 안창호(安昌浩)의 발기에 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당시, 국내의 상황은 일제의 감시와 신문법, 보안법 등의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치활동의 합법성의 한계를 느껴 애국계몽의 틀을 일부 벗어나 투쟁적,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고자 결성한 단체가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표방하였고, 사회각층인사를 망라하여 조직하였는데, 비밀단체임에도 그 활동은 거의 대부분 합법성을 띄고 이루어졌었다.

신민회가 조직된 이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다. 근대 이후의 공화정체를 제창한 대표적 조직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과 공화정체의 근대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즉, 신민회는 실력 양성론+독립 전쟁론에 입각하여 공화정제를 이상향으로 두었다. 이는 근대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이상향으로 지향했다는점에서 의의를 두고있으며, 민족 교육 계몽운동 및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창립과정] 신민회의 창립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존재했던 다섯 개의 비공식집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며, 둘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다. 셋째는 서북지방과 서울 등지에 있어서의 신흥시민세력의 집단이고, 넷째는 무관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집단이며, 다섯째는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이다. 이 다섯 개 집단의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회원들이었던 것이다. 독립협회가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는 그들은 아직 간부로 진출하지 못하고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는데, 1905년 이후에는 각기 자기의 관련분야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위의 다섯 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운동단체였다.

   신민회 창립의 구상과 발기는 안창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안창호·이강·임준기(林俊基) 등은 1906년 말∼1907년 초의 연휴기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L.A.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장정〉을 초안하였다. 그들은 이 결사의 목적에 비추어 미주에서 이 단체를 발기함은 무의미하고 본국에서 이 단체를 발기하여, 조직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본국에 파견할 대표로 안창호를 선정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1월 20일경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동경을 거쳐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후 《대한매일신보》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의 창립의 제의하였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으며, 국내의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에 안창호는 과거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추대하여 양기탁을 중심으로 1907년 4월에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를 전덕기, 집행원을 안창호가 담당하였으며,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은 것이었다. 창건위원들은 신민회 창립 후 즉각 자기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는 인사들을 가입시켰으므로, 회원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910년 경에는 약 8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것이었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단체가 되었다.


2. 신민회 강령과 규약

(1)신민회 4대강령

1.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2.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3.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4.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2)신민회 취지문

신민회의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의 포성이 아직 그치지 않고, 마관(馬關)조약의 먹물이 아직 마르기 전에 외교권이 하루아침에 동쪽으로 넘어가고 정부의 차석(次席)에는 외국이 나란히 앉아서 군경과 법도를 낱낱이 인계하고 광산과 삼림과 토지를 마디마디 할양하여 빼앗기고 있다.
슬프다,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꿈을 깨였는가. 수 평의 초가집도 나의 집이 아니며, 수 무의 산소도 나의 땅이 아니며, 문전의 뽕나무와 석류도 나의 초목이 아니며, 동구 밖의 시냇물도 나의 물이 아니다. 오호라! 이 나라는 내 나라인데 내가 죽고자 하면 이 나라를 어디다 버려두며, 내가 숨고자 할진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어찌 일시적 비분으로써 분연히 자결을 기도하며, 또한 염세적 비판으로써 호연 은거함으로 돌아갈 바이랴.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요?
민습의 완고 부패에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미에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에 신제창이 시급하며, 원기의 쇠퇴에 신수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신윤리가 시급하며, 문화의 쇠퇴에 신학술이 시급하며, 실업의 조췌에 신모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신개혁이 시급이라. 천만 가지 일에 신(新)을 기다리지 않는 바 없도다.
무릇 우리 대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이것이 신민회가 원하는 바이며 신민회가 품어 생각하는 소이이니, 간단히 말하면 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 우리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사랑하며, 우리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보호하겠는가.

과거 4천년 구한국의 말년에 망국혼을 지으려는가. 장래 억만년 신한국의 초년의 흥국민(興國民)을 지으려는가. 오라! 우리 대한신민이여!"

 

[목적.이념]〈대한신민회 통용장정〉제2장 제1절에서 신민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첫째,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었다. 신민회가 그들이 세우려고 한 자유독립국의 정체를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으로 하지 않고 공화국으로 한 것은 사상적으로 큰 진전이었다. 독립협회 때에는 입헌군주국을 협회의 공식목표로 하였으며, 공화국으로의 정체변혁은 만민공동회의 소수 청년들 사이의 이상에 불과하였으나, 신민회에 이르면 입헌군주국은 낡은 것으로 인식되고 처음부터 국권회복 후에는 공화정의 수립이 목표로 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하였으므로, 무엇보다도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의 양성'을 이룩해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민회가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 국가는 국민의 것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 의거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실력양성은 신민(新民)에 의한 민력양성(民力養成)을 의미하였다. 넷째, 신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신민회 취지서〉는 이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이 옛날로부터 자신치 못하여 악수악과(惡樹惡果)를 오늘날 거두게 되었으나, 오늘 진실로 자신할진대 선수선과(善樹善果)를 타일에 거둘지라. 오늘 나라를 위하는 길은 역시 자신 뿐이니라." 다섯째, 자신은 사회·국가·국민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대한신민회 취지서〉에서 민습의 완고에 대해서는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매에 대해서는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에 대해서는 '신제창'이 시급하며, 원기의 소침에 대해서는 '신배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대해서는 '신윤리'가 시급하며, 실업의 부진에 대해서는 '신모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대해서는 '신개혁'이 시급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섯째, '자신'을 위한 방법으로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①신문·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각 곳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정신을 각성시킬 것 ③우수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각 곳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할 것 ⑤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방침을 지도할 것 ⑥신민회 회원의 합자로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⑦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기회가 올 때의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⑧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등이다. 일곱째, 실력을 배양하는 동안에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로서 신민회를 육성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애국성이 있는 동포를 일체 단합시키며, 회원이 산재한 각 구역에는 연락기관을 나누어 세워서 연락과 교통을 긴밀히 하려고 하였다. 여덟째, 실력이 배양되면 신민회가 앞장서고 '자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비폭력 또는 무력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히 궐기해서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문명국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대체로 이상의 것이 신민회의 목적과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체계에서 하위수준의 목적은 차례로 상위수준의 목적의 방법의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직] 신민회의 조직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비밀결사의 조직이었다. 신민회를 공개합법단체로 조직하지 않고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며,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조치에 의하여 해산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의 핵심단체를 조직해두려는 것이며,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하여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며, 다섯째 수구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으로부터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신민회의 조직체계는 중앙에 회장·부회장·총감독·의사원(議事員)·재무원·집행원·감찰원을 두었다. 이것은 최고지도부로서 총감독은 사실상 신민회 전체를 총괄하며, 의사원은 입법기관으로서 각 도별로 그 임원을 선정하였다. 재무원은 재무담당 총책임자였고, 집행원은 신입회원의 자격검사와 조직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였다. 감찰원은 회원의 기강을 감찰하는 직책이었다. 도에는 도총감(道總監)을 두고 각 도별 회원을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의결기관으로 평의원(評議員)을 두었다. 군에는 군감(郡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다. 군감 밑에는 반(班)을 편성하였는데,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을 두었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두었는데, 5명 단위의 '반'조직이 신민회의 기본단위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이면서도 중앙에서 군에 이르기까지 의결기관을 둔 것이 조직의 큰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민회의 조직은 종선으로만 이어지게 해서 당사자 2인 이상은 회원을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고, 횡선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신민회 회원의 입회는 매우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회원은 애국사상이 확고하고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결의를 한 인사에 한하여 엄선하였다. 신민회 입회 때에는 예식이 있고 회원의 책임에 대한 서약이 있었다. 서약의 내용은 회원의 생명과 재산을 신민회의 명령에 의하여 나라에 바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신민회의 회원은 약 800명이었는데, 이것은 신민회가 일제관헌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 밑에서 조직된 지하정당임을 고려하면 많은 회원수였다. 이 숫자는 당시의 저명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의 거의 대부분을 망라할 수 있는 숫자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유지들의 정화는 모두 신민회에 가입하였다고 이 사실을 표현하였다. 신민회조직의 사회적 기반은 105인 사건 때 판결을 받은 122명의 신민회회원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상업이 31.97%, 광공업이 5.74%로서 시민층이 전체의 37.71%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식층은 교사가 22.95%, 학생이 15.57%로서 38.52%를 차지하고 있다. 즉, 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전체의 76.23%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농업이 5.74%, 종교인과 공무·자유업이 각각 4.92%, 노동자가 1.64%이며, 기타 불명이 6.55%이다. 이것은 주로 시민층과 시민층의 지지를 받는 신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가 조직되고 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민회의 조직이 민중 전반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해도 그 성격은 시민적 특성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신민회 활동과 해체

신민회는 민족 교육 추진하고자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의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평양에 자기회사 설립과 대구에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고, 민족문화 양성하고자 대한 매일 신보 발간작업과 조선 광문회 조직하여 고전문학등 간행하였다.

이어서 만주지역에 독립기지를 건설하였는데, 남만주에 삼원보와 밀산부(서간도)에 한흥동,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일 합방이후 1911년, 일제 강점기때 일제는 조선총독부 총독 사내정의를 암살할려는 기도를 했다는 안악 사건을 조작하였고, 이과정에서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등 신민회 주요인사들이 검거되어 105인 사건등 일제에 의한 조작사건으로 인해 민족운동의 탄압을 받아 신민회는 해체된다  그 밖에 이승만, 김규식 등은 체포를 피해 망명한다.

신민회는 비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속에 해체되었지만, 이는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계승하게 된다.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에 주도세력이 되었다

 

[활동]  ⑴ 교육구국운동 국권회복을 위한 민력양성의 방법으로서 가장 정력을 많이 투입한 운동이 신교육구국운동이었다. 신민회 창립 당시 이미 교육구국운동은 시작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열정적으로 불붙고 1908년에는 전국적으로 신교육열이 팽창하여 민중들이 논밭을 팔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신식학교를 설립한 것은 신민회의 교육구국운동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매우 켰다. 이 운동은 세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고취하며, 둘째 민중들이 각 곳에 설립한 학교의 교육방침을 국권회복에 적합하도록 지도하며, 셋째 신민회 자체가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셋째번의 신민회의 학교설립이 특히 주목된다. 신민회가 민중이 설립한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만 하지 않고 그 스스로 학교를 설립한 곳에는 세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 중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하는 학교는 그 대부분이 소규모의 소학교였다. 신민회는 이러한 지역에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출신 청년들에게 고등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의 신지식을 습득한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간부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둘째, 학교의 '모범'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신민회가 전국 각 곳에 중학교를 모두 세울 수는 없으므로 중요지역에 모범이 될만한 정미한 중학교를 다수 설립하여 민중에게 '모형'을 제시해줌으로써, 민중이 이 모형을 보고 동일한 종류의 중학교를 자발적으로 설립하도록 유도하려고 하였다. 셋째, 이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시켜서 교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신민회는 그들이 설립한 중학교에서 사범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교사가 되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의 목적과 이념대로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시키도록 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국적으로 파급시키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①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신안학교(新安學校), ②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③강화 등지의 보창학교(普昌學校) ④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 ⑤납청정(納淸亭)의 가명학교(嘉明學校) ⑥안주의 협성안흥학교(協成安興學校) ⑦선천의 신흥학교(新興學校) ⑧곽산의 흥양학교(興襄學校) ⑨영흥의 명륜학교(明倫學校) ⑩경성의 경성학교(鏡城學校) ⑪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⑫서울의 협성학교(協成學校)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는 유명하였다. 대성학교는 국권회복운동의 간부와 국민교육의 사부(師傅)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중학교로서의 완전한 시설을 갖추고 철저한 애국주의 신교육을 시킴과 동시에 철저한 체육교육과 사관훈련을 시켰다. 한편 보창학교는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두고, 강화군내에 21개의 소학교 분교를 두었으며, 이밖에도 개성·금천·장단·풍덕·안악·충주·함흥 등지에도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각 지역의 보창학교는 대성학교에 비하여 시설은 뒤떨어졌으나, 같은 계열의 학교를 전국적으로 설립하여 나가면서 더욱 전투적인 애국주의 교육을 시킨 데 특징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이동휘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학교설립과 교육구국운동은 그 자체가 상당한 성과를 냈을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애국계몽운동 중의 신교육구국운동에 큰 기둥이 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⑵ 계몽강연·학회운동 신민회의 활동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활발하게 전개된 것의 하나가 계몽강연과 학회활동이었다. 이 운동은 신민회의 취약점의 하나인 재정부족의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고 진전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신민회의 계몽강연과 학회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이 큰 성과를 낸 계몽강연은 주로 각종 학회의 통상회와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그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들이 계몽강연을 통하여 고취한 것은 ①애국주의 ②국권회복 ③민권사상 ④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계몽 ⑤구습타파 ⑥교육구국운동과 학교설립의 고취 ⑦자발적 의무교육의 실시 ⑧학회활동의 고취 ⑨민지(民志)의 단합 고취 ⑩실력양성 호소 등이었다. 이러한 계몽강연에는 모든 신민회 간부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⑶ 잡지·서적 출판운동 신민회는 기관지로서 신문을 새로 창간하지 아니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활용하였다. 신민회의창립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인 양기탁이 신민회의 총감독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과 사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회원으로 가입되었으므로 《대한매일신보》는 쉽게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사는 신민회 총감독 양기탁이 이곳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신민회의 총본부의 기능까지 겸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잡지·출판운동으로서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을 중심으로 하여 1908년 11월에 잡지 《소년·少年》을 창간하였다. 종래 《소년》지는 주로 최남선의 개인잡지로 문학사에서만 다루어왔으나, 일제관헌의 조사자료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신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어 활동하였다. 《소년》지가 105인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민회가 1909년 9월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창립하자, 《소년》지는 청년학우회의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소년》지는 공공연히 신민회의 기관지임을 표방하지 못하였지만, 청년학우회는 신민회의 합법외곽단체였으므로 《소년》지는 공공연히 청년학우회의 기관지임을 표방하였다. 《소년》지는 몇 차례 발행정지의 수난을 겪었으나 청년들의 국권회복의식의 계발에 큰 성과를 내었다. 출판사업은 외곽단체로서 1910년에 조직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단체는 신민회회원 중에서 민족문화와 근대국사학의 창건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의 보존과 간행을 주장하는 회원들의 요청에 의하여 발족된 것이었다. 조선광문회의 조직은 ①고문 ②주간 ③종사(從事)로 편성되었는데, 고문에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을 추대해서 도서의 선택 등 정책결정을 담당하도록 하고, 주간은 최남선이 담당하여 이 회의 사무를 총관하였으며, 종사는 주간 밑에서 편집과 교감(校勘) 등 일체의 회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조선광문회는 창립 후 한국의 귀중한 고전들을 출판하는 데 큰 성과를 내었다. 그밖에 서점 겸 출판소로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안악에 면학서포(勉學書鋪)를 설립하여 도서의 공급을 담당하게 하였다. ⑷ 민족산업진흥운동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침략을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했으며, 민족산업의 진흥이 신교육과 마찬가지로 실력양성의 길임을 특히 강조하여 이 부문의 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민족산업의 진흥을 위하여 우선 신민회회원들이 출자해서 '본보기'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여 실업가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영업방침을 지도함으로써 민족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고자 하였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실업체의 사례로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안악의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연초공장,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산업진흥운동은 민족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독점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하였으므로 교육구국운동과 같은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⑸ 청년운동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를 국민으로 보았지만, 세대별로는 청년층이 그 핵심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청년운동을 독립시켜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의 청년운동은 청년단체로서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하여 1909년 8월에 신민회의 합법외곽단체로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평양연회·의주연회·안주연회 등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밖에 곽산·선천·용천·진남포 등지에서 지방연회의 발기가 있었으나 설립을 보지 못한 채,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청년학우회운동은 민족산업진흥운동과 비슷하게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하여 청년단체의 조직을 너무 늦게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⑹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신민회는 국내에서 실력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내외호응하여 봉기, 일거에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이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고 그 이튿날 해산식이 있자, 해산당한 군인의 일부가 봉기해서 의병운동에 합류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이 의병운동을 지지하였다. 신민회가 의병운동에서 문제삼았던 것은 일본 정규군과 대전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현대적 군사훈련과 무기였다. 신민회는 의병운동의 현대화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의병운동의 문제점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하였고, 둘째 이 시기에 의병운동이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민회가 국외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에 들어가기 시작한 1909년 봄이었다. 이때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건하여 현대전에서 승전할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실천에 들어가기도 전에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伊藤博文)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안중근과의 관련혐의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金羲善)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을 일제 헌병대에 구속하였다가, 그 이듬해인 1910년 2월에야 석방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신민회가 이때 결정한 독립군기지 창건사업과 독립전쟁전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군기지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일대에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의 국내진공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로서 선정하기로 하였다. ②최적지가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일정면적의 토지를 구입하되,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국내에서 신민회의 조직을 통하여 비밀리에 고금하고, 이주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휴대하도록 하였다. ③토지가 매입되면 국내에서 애국적 인사들과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계획적으로 단체이주를 시켜 신영토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④새로이 건설된 신한민촌에는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와 기타 문화시설을 세우는 한편, 무엇보다도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文武雙全敎育)을 실시하고 사관(士官)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⑤무관학교를 근거로 하여 독립군사관이 양성되면, 이들과 이주 애국청년들을 중행으로 하여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하기로 하였다. 이 독립군의 장교는 현대적 장교훈련과 전략전술을 습득한 무관학교출신 사관으로 편성할 뿐 아니라, 병사까지도 모두 무과학교에서 현대 군사교육과 전략전술을 익히는 정병주의(精兵主義)를 채택하고, 독립군은 철저한 현대 군사훈련과 현대 무기로 무장시켜 일본정규군과의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군대를 만들기로 하였다. ⑥독립군이 강력하게 양성되면 최적의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하기로 하였다. 최적의 기회는 일본제국주의의 힘이 더욱 증강되고 침략야욕이 팽배하여 민주지역이나 태평양지역으로 팽창하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 등이 일어날 때라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기민하게 포착해서 그동안 국외에서 양성한 독립군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고, 국내에서는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내외 호응해서 일거에 봉기하여 실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신민회의 무관학교 및 독립군 창건과 독립전쟁전략은, 크게 볼 때는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의 진전에 신민회가 응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갑신정변·동학혁명운동·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실제경험에 의하여 종합 지양하여 한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이었으며, 한국민족의 근대민족운동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결론과 같은 것이었다. 신민회는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기 위하여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金志侃) 등이 출국하였으며,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이 만주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조가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이주를 시작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봄에 대대적인 단체이주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1911년 1월에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같은해 9월에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 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회원을 대량 체포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민회가 해체되어가는 중에도, 신민회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에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무관학교는 만주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이름했다가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바꾸었다. 신흥(新興)이라는 명칭은 '신민회가 흥국(興國)한다.'는 뜻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신흥 무관학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 무관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 외에 6개월·3개월의 속성과를 두어 찾아오는 모든 애국청년들과 의병들에게 철저한 현대적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신흥무관학교는 1917년에는 통화현(通化縣)의 소북대(小北垈)에 분교를 설치할 만큼 크게 발전하여 우수한 독립군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였다. 이밖에 신민회회원들은 1913년에는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왕청현 나자구(汪淸縣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蜂密山子)에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민회는 결국 세 개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신민회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은 국내의 신민회가 해체되는 도중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계ㅣ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세 곳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의 창건은 그 뒤 만주에서의 독립군 창건의 모체가 되었다. 신민회회원들이 세운 무관학교에서는 철저한 애국주의로 정신무장이 되고 현대적 사관교육을 받은 유능한 장교와 병사들이 체계적으로 양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현대적 독립군이 조직되었으며, 의병들도 재훈련되어 현대적 독립군의 대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독립군의 창건은 과거의 의병과는 달리 일본정규군을 현대전에서 능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예독립군의 창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민회가 창건한 독립군은 사병이 부족하여 장교 중심의 소규모 부대였으나, 3·1운동 후에 국내에서 청소년들이 물밀 듯이 찾아오자 이들을 훈련하여 대규모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청산리전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만주 도처에서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대소규모의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해체]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 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명을 검거하고,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高貞華)·김도희(金道熙)·옥관빈 등 17명을 검거하였다. 또한 1911년 9월에는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의 회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나 일제에 의하여 신민회는 해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4.105인 사건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은 1911년에 일어난 일본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1910년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미수 사건을 빌미로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윤치호, 전덕기신민회 간부 및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을 대거 투옥시켰다.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1910년)에 안명근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하는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원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 600여 명을 검거하고 그중 중심인물 105명이 기소되었다.

신민회의 지도급 인사였던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등과 교육자 김구, 해서 지역의 유지 김홍량 등이 피소되었고, 체포·기소된 인물이 105명이라 “105인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건 관련자들이 압송되는 것을 경성의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열차 안에서 이를 보던 이승훈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다가 총독부 경찰에 의해 정체가 탄로나 체포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 조직은 와해되고, 1심에서 105명 모두 유죄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는 99명은 무죄, 나머지 6명은 유죄가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 인사이자 반일인사로 지목된 이승만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출국, 체포를 모면하였고, 김규식은 이 사건 이후 일제의 꾸준한 회유와 협박을 피해 1913년 차량편으로 만주에 인삼장사 하러 간다는 핑계로 몽골로 망명하였다.

윤치호는 6년간 수감되었으며 일본의 회유로 인해 독립운동 활동에 소극적으로 변신하였다. 전덕기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폐결핵으로 인한 늑막염으로 2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영면했다. 이동휘는 함경도에서 체포되어 황해도 무의도에 3년간 유배되었다. 이승훈은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05인 사건의 피의자들이 공판정에 끌려가는 모습

 

*신민회(新民會):민주공화정(민주공화국)을 수립 목표로 결성한 단체(新民-민주공화정 국민)

*대한민국(大韓民國):대한민주공화국으로 대한제국 국호와 신민회 민주공화국 국체를 계승한 국가

*신민당(新民黨):전통야당의 맥을 이어받은 신민당의 강령은 인권존중, 반독재민주주의 국가 완성, 민생안정, 사회악 일소, 민주적 평화통일 등이었다

*조선신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로 2차대전때 연합국 소속 광복군에 참여한 중국 공산당계열 김두봉(조선독립동맹)등이 결성한 단체로 중국 국민당 계열 김구, 김규식등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친중국 대내외정책 남북협상을 주도했으며 중국내전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승리함으로 한국독립당 해체와 김두봉계열 제거 그리고 중국 인민해방군(소련군 붉은 군대) 출신 김일성 중심으로 한반도 권력을 장악해왔다[소련군 지도 밑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존재해왔다 2차대전때 연합국 소속 중국 독자군대는 중화민국 군대 중국군이었다]

중국과 북한은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으로 군대가 의회와 당을 장악해왔고 평화체제가 아닌 전시체제 국가었다

중국은 등소평정부 이후에야 당이 의회와 내각을 통제하고 인민해방군이 군(軍)의 지위와 역할로 나아가고 있다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 군대가 아닌 중국 국민(전체 인민)의 군대이다

군(軍)이 정치 중립성을 견지해야 하며 군이 내각과 의회를 지배하는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지도자의 군대)이 되지 말아야 한다

*New Korea Group(新韓團-새로운 한국 창설 단체)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 노선(자유권 존중) 세력 진보파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사회권 즉 생존권 존중) 세력 보수파 연합세력임을 선언합니다 New Korea Group(新韓團-새로운 한국 창설 단체)은 국민 개인의 자유권과 생존권 조화(존중)에 노력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선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