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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푸미폰(普密蓬) 국왕과 시리낏(詩麗吉) 황후 본문

Guide Ear&Bird's Eye/태국(타이)

태국 푸미폰(普密蓬) 국왕과 시리낏(詩麗吉) 황후

CIA bear 허관(許灌) 2012. 1. 28. 17:31

 

                                                                태국 푸미폰(보밀봉,普密蓬) 국왕과 시리낏(시려길, 詩麗吉) 황후 모습(사진)

1.라마 9세-태국 푸미폰(普密蓬)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타이어: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Phumiphon Adunyadet 1927년 12월 5일 ~ )은 태국(타이)의 현 군주이다. 짜끄리 왕조의 라마 9세이며, 공식적으로는 "대왕"으로 불리는 태국국왕이다. 1927년 12월 5일 출생, 1946년에 즉위 후 65년간 집권하여, 현존하는 국가 원수 중 가장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태국 왕실의 종교는 상좌부 불교이다

 

(1)초기 생애

푸미폰 국왕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1927년 12월 5일 태어났다. 그는 마히돈 아둔야뎃 왕자와 몸상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타이에서 프라워라웡트 프라옹짜오 푸미폰아둔야뎃(타이어: พระวรวงศ์เธอ พระองค์เจ้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이라고 알려졌으며, 모친이 평민이라는 사실이 반영되었다. 그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그의 삼촌이었던 프라차티뽁 왕이 왕실과 평민 사이의 자식을 '프라옹짜오'라고 부르도록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몸짜우'로 불렸을 것이다. 그의 이름 푸미폰 아둔야뎃은 '땅의 강함, 비교할 수 있는 힘'이라는 의미이다.

 

                                                                      푸미폰(중앙)과 모친, 아난타 마히돈(좌측), 갈야니 바다나(우측)

푸미폰은 1928년 부친이었던 마히돈 왕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후 타이에 돌아왔다. 그는 즉시 방콕에 있는 메터 데이 학교에 들어갔지만, 1933년 그의 모친이 그들의 가족을 스위스로 데려갔다. 그는 그곳 로잔에서 학교를 다녔다. 1935년 형인 아난타 마히돈이 타이의 왕이 되자, 그와 그의 여동생은 타이 왕가의 가장 상위급인 '짜우파'로 승격되었다. 가족들은 1938년 아난다 형의 대관식을 위해 모두 돌아왔지만, 대관식이 끝난 후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1945년에는 로잔 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들 가족은 귀국을 했다.

 

 

(2)왕위계승과 결혼

라마 8세에 즉위했던 형이 1945년 귀국한 후 1년 만에 석연찮은 죽음을 당하자, 1946년 푸미폰은 왕좌를 계승했다. 아난타의 죽음은 왕궁의 침대 맡에서 머리에 총상을 당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미해결로 남아있다.

왕위를 계승한 다음 푸미폰은 삼촌인 차이낫의 아들 랑싯을 섭정에 임명하고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전공을 법학에서 정치 과학을 바꿔 통치자로서의 준비를 했다.

스위스에서 학위를 마치자 곧 파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대사의 딸인 사촌 몸라차웡 시리낏 끼띠야꼰을 만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세였고, 그녀는 15세였다.

1948년 10월 4일 푸미폰은 제네바 - 로잔 도로를 운전하다가 로잔 시외 10km 지점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척추를 다치고, 찰과상을 입었으며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시리낏이 자주 방문을 하여 두 사람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푸미폰 곁에서 공부를 하게 해 달라고 졸랐으며, 푸미폰은 주변의 학교를 주선해 주었다. 1949년 7월 19일 조용한 약혼식을 올리고, 1950년 4월 28일 즉위식 일주일 전에 결혼을 하였다.

푸미폰 왕과 시리낏 왕비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a)우본라따나 공주, 1951년 4월 5일 스위스 로잔에서 출생

(b)와치라롱꼰 황태자, 1952년 7월 28일

(c)짜끄리 시린톤 공주, 1955년 4월 2일

(d)쭐라폰 왈라일락 공주, 1957년 7월 4일

 

푸미폰의 손자 중 한 명은 2004년 인도양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사망하였으며, 우본라따나 공주의 아들이었다

 

(3)업적

푸미폰 왕은 입헌 군주이지만, 가장 최근 정치적인 위기를 포함하여 수차례 태국 정치에서 결정적인 중재를 했다. 초창기에는 군부 정권을 옹호하기도 했지만 1990년태국민주화를 촉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직접 타이의 여러 곳을 시찰하며 민정을 살폈고, 왕실의 많은 재산을 시골 지방의 발전을 위한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태국에서 국왕은 인기는 매우 높아서, 거의 신적인 인물로 존경받으며 타이 곳곳에서는 그와 왕비의 초상화가 수 없이 걸려 있다

 

 

                                                                        태국 푸미폰(普密逢) 국왕이 82세 생일 황가 경축행사에 참석(사진)

 

 

 

2.시리낏(詩麗吉) 황후

시리낏 왕비(타이어: สมเด็จพระนางเจ้าสิริกิติ์ พระบรมราชินีนาถ, Queen Sirikit, 1932년 8월 12일)는 태국 황후이다. 정식 명칭은 솜뎃프라낭짜오 시리낏 프라보롬라치니낫(สมเด็จพระนางเจ้าสิริกิติ์ พระบรมราชินีนาถ)이며, 간단히 '시리낏 왕비'라고 한다. 태국의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왕의 왕비이자, 태국의 두 번째 섭정 황후이다. (최초의 섭정 황후는 시암의 사오와파 웡시 왕비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치권을 유지하는 국왕의 반려로서 그녀는 가장 오래된 국왕의 왕비이기도 하다

 

(1)초기 생애

시리낏 왕비는 1932년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웡사누쁘라판의 집에서 셋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짠타부리의 왕자인 끼띠야꼰 보라룩사나 왕자와 몸루앙 부아사니웡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프라차티뽁 왕에 의해 하사를 받았으며, "끼띠야꼰의 위대함"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녀의 가족으로는 두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다.

(a)몸라차웡 깐야나낏 끼띠야꼰 박사(교수) (1929년 9월 20일 ~1987년 5월 15일)

(b)몸라차웡 아둔야낏 끼띠야꼰 (1930년 11월 2일 ~ 2004년 5월 5일)

(c)몸라차웡 붓바 끼띠야꼰 (1934년 8월 2일~)

시리낏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외할아버지에게 보내 1년간 기르게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 워싱턴 DC로 가서 왕실 대사관 대사로 일을 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시리낏을 낳은 후 3개월 후에 남편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1933년에 그녀는 몸짜오 압손사만 테와꾼과 왕의 송클라 행차를 따라 여행을 했다.

1년 후 그녀의 부모는 태국으로 돌아왔고, 시리낏은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짜오프라야 강 근처의 데베스 궁에 살게 되었다

(2)교육

4세 때, 시리낏은 라치니 스쿨의 유치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초등 1학년까지 다녔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방콕이 폭격당하자 교통이 불안해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궁에서 가까운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 컨벤트 스쿨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2년을 더 다녔다.

1946년 전쟁이 끝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의 대사로 가게 되었는데, 가족을 데리고 갔다. 그 당시 시리낏은 13세였고, 중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피아노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녀의 가족은 유럽에서 덴마크와 프랑스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파리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다.

프랑스에서 그녀는 푸미폰 아둔야뎃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왕위를 계승한 상태에서 스위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리낏은 왕을 환영하며, 여러 관광지를 동반하여 여행을 다녔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몇몇의 학생들과 함께 빠리의 대사관에서 우연히 머물게 되었다. 왕과 시리낏 왕비 모두 공통점을 발견하고 교제를 시작하였다.

(3)결혼

1948년 10월 4일 푸미폰 국왕은 제네바로잔에 있는 도로를 운전하다가 로잔의 외곽 10km 지점에서 트럭의 뒤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는 척추를 다치고, 얼굴을 깍였으며, 오른쪽 시력을 잃고, 결국 의안을 하게 된다. 그가 로잔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시리낏은 자주 방문을 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만나 왕의 부근에서 공부를 하게 달라고 졸랐고, 왕은 그래서 그녀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푸미폰 국왕은 그녀를 로잔에 있는 승무원 학교에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1949년 7월 19일 조용한 약혼식이 치러졌고, 다음해 1950년 4월 28일 즉위식을 1주일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Queen Sirikit during a parade in New York City, July 1960

                                                                                      1960년 독일을 방문한 왕비

(4)자녀

라마 9세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고, 3명의 공주와 아들 하나가 있다.

(a)우본라따나 라차깐야 공주 (1951년 생)

(b)마하 와치라롱꼰 황태자 (1952년 생)

(c)마하 짜끄리 시린톤 공주 (1955년 생)

(d)쭐라폰 왈라일락 공주 (1957년 생)

(5)저서

1964년 《유럽 여행 회상》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그녀가 왕과 함께 유럽에 체류할 때 쓴 비망록이다. 이 책으로 그녀의 문학적 재능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녀는 왕궁의 수많은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녀가 작곡한 곡은 다음과 같다.

(a)짜오쫌콴(เจ้าจอมขวัญ)

(b)탓트(ทาสเธอ)

(c)사이윳(สายหยุด)

(d)낭얌(นางแย้ม)

(6)자선사업

시리낏 왕비는 자선 사업으로도 유명하며, 그녀 자신이 1956년부터 적십자 총재로 재직을 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2004년 12월의 쓰나미 이후에도 지대한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타이로 망명한 캄보디아미얀마의 수많은 난민 구호보호소의 구제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태국(타이)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들이 많다.

(a)시리낏 왕비 의학센터 빌딩 (라마티보디 병원)

(b)시리낏 왕비 유방암 센터 (방콕)

(c)시리낏 왕비 국립 컨벤션 센 (방콕)

(d)시리낏 왕비 공원 (방콕)

(e)시리낏 댐 (우따라딧 주의 난 강)

(f)시리낏 왕비 식물원, 치앙마이 주

(g)시리낏 왕비 수목원, 빠툼타니 주

(h)시리낏 왕비 컵, 매년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 골프 팀 이벤트

(i)시리낏 왕비 게 (타이푸사 시리낏)

(j)시리낏 왕비 장미

(k)왕비 컵 축구 대회

시리낏 황후는 대내외적 활동과 학문 연구로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의 UNICEF Special Recognition Award(1992년), World Health Organization의 Food Safety Award(2005년) 등 각종 수상과 Centro Escolar University (필리핀)의 Humanities(1963년), 조지타운 대학 (미국)의 Humane Letters(1993년),Tokai University (일본)의 Philosophy(1997년), University of Saint Petersburg (러시아)의 Eastern Languages and Cultures(2007년) 등 다수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2007년 크레믈린 궁에서 푸틴 대통령과 시리낏(詩麗吉) 황후

 

 

 

 

*상좌부 불교

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敎)는 대중부 불교와 함께 인도 소승 불교의 2대 부문(部門)의 하나이다.

테라바다(Theravada)라는 말은 "장로(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한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부처가 사용하던 팔리어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여,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대승 경전과 대비된다. 이 팔리어 경전(《아함경》)은 기원전 1세기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쓰인 것으로 기독교 시대가 열린 이후에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대승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나 다른 경전보다도 부처의 가르침이 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1.역사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선종 · 정토종 · 일련종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 상좌부 불교 전통   = 대승 불교 전통   = 밀교·금강승 전통

불멸 후 100년의 근본분열로 교단은 두 부파로 나뉘었는데 그 중 보수파인 상좌의 사람들에 의한 일파가 상좌부이다.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의하면 불멸(佛滅) 후 100년 아쇼카왕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 大天)라고 하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5개조의 신설(新說)을 제창하고 그 승인을 교단에 구했을 때에, 또는 남방불교의 자료인 실론의 《도사(島史)》나 《대왕통사(大王統史)》에 따르면, 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십사(十事)의 신설(十事非法)을 주창했기 때문에(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후자가 승인되고 있다) 불교교단이 신설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 이것이 근본분열(根本分裂)이며, 이를 계기로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 상좌부는 불멸 후 300년 초에 본상좌부(本上座部)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로 나뉘고 본상좌부히말라야 지방으로 옮겨 설산부(雪山部)라고 불리었으며, 캐시미르 지방을 본거(本據)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그 후의 분파에 의한 8부의 성립은 모두 설일체유부의 것으로 된 것이며, 따라서 유부는 상좌부계(上座部系) 중에서도 여러 부파 중 최대의 것이 되었고, 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소승불교에 대한 비판 · 논란(論難)은 거의 모두 이 유부에게 돌려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상좌부불교라고 하면 당연히 설일체유부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2.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

원래 본상좌부(本上座部: 설산부)와 설일체유부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상좌부에서는 을 중시한 데 대하여 유부에서는 (論)을 중시하였다. 은 교법에 대한 연구로서의 아비달마이며, 유부가 전거(典據)로 삼은 것은 기원전 2세기 카티야야니푸트라(Katyayanputra: 迦多衍尼子)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이었다.

그후 6종의 논이 만들어져 합하여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행하여졌으며, 기원 2세기 쿠샨 왕조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 연구 성과에 대한 집대성(集大成)이 이루어져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의 대저(大著)로 발전하여 유부의 교의가 완성되었다. 비바사(毘婆沙)란 분석 또는 주석이라는 뜻으로, 《발지론》을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여러 부파의 교설을 백과전서(百科全書)처럼 인용하고 이를 유부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대비바사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의 강요서(綱要書)가 만들어지고, 특히 4세기에 세친(世親)이 저술한 《구사론(俱舍論)》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중시되었다. 세친유부(有部)에서 최후로 분파하여 경전만을 의지(依支)하는 경량부(經量部)에 속하며, 《구사론》을 통해 유부의 교리를 비판적으로 해설하였다. 예를 들면, 《구사론》 〈수면품〉에서 세친삼세실유설경량부적 입장, 즉 과미무체설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유부로 대표되는 상좌부불교는 교리적인 연구면에서 크게 진전하여 학문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했으며, 불교의 가장 정통적(正統的)인 사상을 이어받는 부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3.태국 불교

태국 불교 또한 종파가 있기는 하나 기본 교의를 달리 하지는 않는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똑같은 경전을 암송하고 같은 계율을 지키며, 같은 교의를 숭상하고 똑같은 황의(黃衣)를 걸친 승려들이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태국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는 ‘마하니카이(Mahanikai)’파와 ‘담마유트(Dharmayut)’파이다. 마하니카이파가 다수파이고 소수파인 담마유트파가 특히 계율의 엄수를 강조할 뿐 교의상의 차이는 전혀 없다. 굳이 차이를 논한다면 가사의 착용법이나 독경의 억양과 발음법 정도이다.

오늘의 담마유트파를 있게 한 이는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이다. 그는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가 담마유트파이다. 그래서 담마유트파는 소수파이지만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태국 불교의 한 특질은 승려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출가란 본래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것으로 아무런 외부적 제약을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출가나 환속이 어느 정도 엄격한 편이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상가에 들어가려면 상가의 일원으로서 오래도록 사원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그만큼의 각오와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그런 각오와 자각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가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는 것도 애초부터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 않다. 자기의 자유의사로 상가로 들어가는 것처럼 세속생활로 돌아가는 일도 자유이다.

또한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려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국은 ‘상가통치법’에 의해 승단이 관리되는데, 이 법에 승려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태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태국 왕실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왕실이 불교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태국 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인구의 95%가 상좌부 불교도인이며 3만에 가까운 사원에서 비구와 사미승려를 합쳐 40만 명에 이르는 승려 구성원이 있다. 1994년 태국 정부의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종교 인구율, 사원의 수, 종파별 비구 및 사미승려, 출가 여성의 수는 다음과 같다.

종교 분포도로 볼 때는 불교가 94.8%, 이슬람교 4.05%, 기독교 0.55%, 힌두교 0.01%, 기타 종교 0.12%, 무종교 0.47%의 비율이다. 사원의 숫자는 마하니카이파의 사원이 56,694개이며 담마유트파의 사원이 2,902개에 이른다. 비구와 사미승려들의 수행자는 전체 합계가 378,260명이며, 출가 여성들은 전체 16,033명에 이른다.

승려들의 전통적인 교육기관으로는 ‘팔리학교’와 ‘교리학교’가 있다. 팔리학교는 비구와 사미승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며, 교리학교는 비구와 사미승려들의 불교교리시험을 위한 학교이다. 팔리학교와 교리학교가 국가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을 위한 일요일 불교학교(Sunday School-Dhamma School)가 있다. 그 외에 두 개의 불교대학이 있다. 마하니카이파의 ‘마하출라 롱콘’ 불교대학교와 담마유트파의 ‘마하마쿠트’ 불교대학이다. 이 두 대학을 방콕 시내에 설립하고 비구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고 불교학 외에 일반대학의 교과목도 채택해서 비구의 교양과 자질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대다수의 태국 승려들은 거의 새벽에 절을 나와 탁발을 한다. 탁발 나온 승려들에게 공양 보시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것은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탁발은 재가자가 공덕을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승려를 집으로 초청해 점심식사를 공양하기도 한다. 이 공양보시는 상좌부 불교 나라들이 거의 비슷하다. 식사뿐만 아니라 옷을 물들이는 물감, 수건, 비누, 보온병, 칫솔, 치약 등 승려들의 일용품도 공양한다. 또 책이나 기타의 생활용품도 공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