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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后山) 허유(許愈) 선생 본문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吾道里). 마을 입구의 ‘오도지향(吾道之鄕)’이란 돌 표지석이 유풍(儒風)이 흐르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일찍이 공자가 증자에게 ‘충(忠)’과 ‘서(恕)’를 일러 우리 도(吾道) 가 한 곳으로 통한다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오도마을은 한말 강우유맥의 큰 선비라고 할 수 있는 후산(后山) 허유(許愈)가 태어난곳이다. 기자는 오도마을을 가면서, 지금으로부터 약 20년전 진주의 유림들에게 들은 말을 생각했다. 이때 유림들은 “후산선생 같이 후덕(厚德)한 분은 마땅히 ‘국유(國儒)’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도유(道儒)로 대접하는 것도 소홀한 것 같다”며“면우 선생이 벼슬도 하고, 광복 운동도 하고, 너무 큰 선비로 인식이 돼 후산 선생이 상대적으로 알려질 기회가 적어 안타깝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한결같이 “그래도 면우선생이 평생 형같이 여긴 분”이라며 그 후덕함을 칭송했다. 어떤 선비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그의 숨결을 찾으러 황매산 자락 오도마을로 향했다.
후산은 1833년 4월 5일에 삼가현 서쪽 오도리 집에서 소소생(笑笑生) 허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고성에 정착했다가 조선 중종조 군수를 지낸 11대조 죽계(竹溪) 허순(許珣)이 그의 외조부 제사를 받들기 위해 삼가로 옮겨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8세 때 부친이 여러 아들들에게 운자(韻字)를 내어 시를 짓게 했는데, 말이 떨어지자 말자 곧바로 “소나무 끝의 흰학은 구름과 어울려 서 있고 울타리 아래 노란 닭은 해를 향해서 우네(松端白鶴和雲立 籬下黃鷄向日啼)”라는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0세 부친의 상을 당했다. 후산은 상을 당해 법도에 벗어나지 않게 절도있게 처신을 했으며, 맏형은 항상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대단하게 만들 사람은 우리 아우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르치기를 더욱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세 때 소학을 읽고 기쁘하면서 “이 책 속에 실린 내용과 같이 하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반드시 그 내용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34세 때(1866년) 김해 부사 성재 허전이 의령 미연서원(嵋淵書院)을 방문했다. 미연서원은 현재 의령 대의면 중촌리에 있는데,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을 모신 곳이다.
후산은 이때 성재를 찾아 뵈었는데, 성재는 후산을 보고 바로 당시 큰 선비로 인정을 했다고 한다.
38세때 봄에 처음으로 성주의 한주정사(寒洲精舍)로 한주 이진상을 찾아가 주리설(主理說)의 요지를 들었는데, 후산이 평소 공부해서 얻은 바와 같았으므로 듣는 즉시 이해가 되었다고 한다. 3일 동안 ‘태극(太極)’ ‘동정(動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등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면서 두 사람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한주는 일생동안 연구해 얻어낸 심즉리설(心則理說)을 이때 후산에게 처음 이야기 한 것이다.
39세 때 만성 박치복, 자동 이정모 등과 함께 개성을 유람했는데 선죽교 위에서 포은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때 지은 시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갔다.
40세 여름, 면우 곽종석, 자동 이정모와 함께 한주를 다시 찾아 뵈었다. 45세때는 한주가 오도마을로 후산을 방문하였다. 이때 이 지역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었으니 만성 박치복, 단계 김인섭, 노백헌 정재규, 물천 김진호, 면우 곽종석, 약헌 하용제 등이 그들이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산청 남사촌에서 향음주례를 행하고 덕천서원에도 참배를 하고 두류산을 유람했다. 다시 남해 금산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촉석루에서 놀았다.
50세때 모부인의 명으로 향시를 보아 합격을 했다. 서울로 올라가 문과를 보려고 했으나 당시 군란이 있어 응시하지 않고 나라일을 탄식하면서 돌아왔다. 이해 가을에 동계 정온의 유적이 있는 거창 모리를 방문했다.
52세때 현감 신두선(申斗善)이 유교의 교화를 일으키고자 하여 고을의 젊은 선비 20명을 선발하여 향교에서 학업을 익히게 할 계획을 가지고서 후산을 스승으로 초빙했다. 이때 후산은 노백헌 정재규를 추천하여 함께 대학(大學)을 강의 했다. 이때 강의한 내용을 ‘강록(講錄)’ 1권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해 가을에 간신들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대궐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밤중에 급히 현감 신두선에게 서신을 보내 국왕에게 분문(奔問)하라고 요청했다. 후산은 비록 초야에 묻혀 있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철저하였으며 후산의 이런 정신 자세를 보고서 현감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53세 겨울에 현감과 함께 향교에서 강학하다가 퇴계 선생이 지은 쌍명헌시(雙明軒詩)를 외우고 판각하여 쌍명헌에 걸도록 요청했다. 쌍명헌은 삼가 객사였다. 그리고 그날 여러학생을 데리고 쌍명헌을 둘러보고 나서 다시 뇌룡정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서 “구슬퍼한지 오래 되었나니/ 옛 소나무는 주인없고 새만 공연히 우는구나(回首雷龍초창久 古松無主鳥空啼)”라는 시를 지어 남명을 생각했다. 뇌룡정은 남명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집인데 이때는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었다.
현감 신두선이 후산의 시에 감탄을 하고 뇌룡정을 중건하기로 논의를 결정하였다. 집이 다 완성되자 학자(學資)를 마련하고 강규를 정하였다. 후산은 노백헌과 더불어 번갈아 가면서 강장(講長)을 맡아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54세 되던해 10월 스승 한주 이진상의 상을 당했다. 달려가 치상하였고 또 심상(心喪)을 입었으며 스승의 심즉리설을 규명하여 그 학통을 계승해 나가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고령현에 회보계(會輔契)가 옛날부터 있었다. 한주가 있을 때는 강장을 맡아 왔는데 한주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이 뒤를 이어 강장을 맡아 강학을 하고 행례를 하였다. 이때 회보계 강장으로 초빙한 것은 후산이 한주의 학문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6세 모친 해주 정씨의 상을 당했다. 이때 후산은 나이가 많다 하여 상을 치르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60세 겨울에 뇌룡정에서 ‘남명집’을 교정하였다. 곧 중간하려고 했으나 여러사람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못해 곧 중지했다.
62세 봄에는 교우 윤주하와 함께 한주가 편집한 ‘이학종요(理學綜要)’를 삼가현의 병목서당(幷木書堂)에서 교정하였다. 한주가 남긴 시문을 성주의 대포서원(大浦書院)에서 교정하여 5개월의 노력 끝에 문집의 체제로 편집했다. 교정하는 틈을 타서 인동현의 각산(角山)으로 사미헌 장복추를 찾아 뵈었고, 방산 허훈이 사는 선산(善山) 임은(林隱)도 방문했다. 사미헌과 방산은 당시 강좌지역 퇴계학맥의 대표적 선비들이었다.
63세 봄에 단성현 법물촌에 있는 이택당에서 후산을 초빙해 강장으로 삼았다. 이후로는 해마다 후산을 강장으로 초빙했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었다. 이해 여름에 거창의 원천정(原泉亭)에서 스승의 문집인 한주집을 간행하였는데, 후산은 직접 그곳에 머물면서 간행하는 일을 감독했다.
65세때 성주 대포의 삼봉서당(三峯書堂)이 완성되었다. 이 서당은 스승 한주를 위해 지은 것이다. 낙성할 때 후산은 강장이 되어서 향음주례를 거행했다. 67세 진주 청곡사에서 다시 남명집을 교정했다.
70세 때 경상남도 관찰부 안에 낙육재(樂育齋)를 처음으로 설립하여 도내 선비들을 양성했다. 향음주례를 거행했는데 후산을 훈장으로 초빙했다. 예를 마치고 여러 학생들을 위해 강독을 했으며 이때 강학절목을 만들었다.
71세때 조정에서 선비를 우대하는 취지에서 숨은 선비를 찾아 벼슬을 내렸는데 후산에게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했다. 벼슬이 세차례나 제수되었지만 후산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72세 되던해 4월 7일에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였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도 대계 이승희, 물천 김진호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고 제자들에가 마지막 당부하는 말도 학업에 정진하라는 내용이었다.
원근의 사람들이 후산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덕성(德星)이 떨어졌도다” 라고 말했다.
후산이 세상을 떠난 지 22년이 지난 1926년에 문인들이 후산서당(后山書堂)을 지어 매년 봄 채례(菜禮)를 지내면서 학덕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리(主理)의 학이다. 선생은 한주(寒洲) 이선생을 사사하여 학문의 요결을 듣고 평생 동안 이를 따랐다.” 후산의 제자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이 지은 후산서당(后山書堂) 기문의 내용이다.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 가는 길목에 후산서당이 있다. 후산이 생전에 주리학(主理學)에 정진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던 곳이다. 지금은 퇴락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지경이지만 한때는 강우학파의 요람이기도 했다.
후산은 38세 때 성주에 있는 한주정사로 한주 이진상을 찾아갔다. 한주는 퇴계 학맥의 적전(嫡傳)인 유치명(柳致明)의 제자로 퇴계의 주리설을 발전 심화시킨 학자였다. 한주는 평생동안 공부한 학설인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이때 후산에게 처음으로 전수해 주었다.
이때 후산은 한주가 지은 ‘만록(漫錄)’을 빌려 와서 읽고 “극도로 크고 극도로 정밀하다. 주자 퇴계 이후로 전해지지 않던 비결(秘訣)이 여기에 다 있다”라고 하면서 이후로 18년동안 한주를 따라 배우면서 그의 주리설(主理說)을 전수받아 적극 전파했다. 당시 한주의 주리설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후산이 앞장서서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토론을 벌이며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한주도 후산의 기질이 온화(溫醇)하고 언사(言辭)가 전아(典雅)하고 뜻이 원대하고 식견이 민묘(敏妙)한 것을 깊이 인정했으며, 한주의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는 “후산의 마음이 곧 우리 선친의 마음이었다”라고 하면서 후산이 한주의 학문을 누구보다도 심화 발전시켰다는 것을 인정했다.
후산은 한주 문하에 나가기 1년전에 성재 허전을 찾아갔다. 이때 성재는 후산을 큰 선비로 인정했다. 하지만 후산은 성재를 스승으로 삼지는 않았다. 후산이 성재를 “문장과 도덕이 지금 세상의 유종(儒宗)”이라고 극찬을 했지만, 주리설만이 심학(心學)을 밝히는 근본적인 공부로 인식하고 평생 한주를 스승으로 삼고 그의 학설을 따랐던 것이다.
후산은“학문을 궁구한다는 것은 고원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일상생활 속에서 익숙해지는데 있다. 거경(居敬)하여 그 뜻을 간직하고 궁리(窮理)하여 아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자신을 이겨서 사욕을 없애고 정성을 간직하여 충실함에 이르는 것, 이 네가지는 여러 선현들의 이학(理學)의 종지이다”라고 했다. 학문은 높고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있는 것이니 마음을 가다듬어 가까운 것에서 착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학문하는 방법으로는 거경(居敬) 궁리(窮理) 극기(克己) 존성(存誠) 등 네가지를 들었다.
후산은 공부하는 학자의 자세도 결연해야만 세속의 명리(名利)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면서 자기의 학문을 온축(蘊蓄)해 나갈 수 있다며, 학자의 용기는 남과 싸워서 이기는 용기가 아니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배우는 사람이 자기 일생의 뜻을 이루려면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하루의 대부분은 흐릿한 채로 보내고 그 나머지 시간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무렇게나 해서 날을 보낸다. 이렇게 어정어정 시간을 보낸다면 비록 백년을 살아도 태어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애석하지 않은가”라고 하며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마음을 잘 간직하고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후산은 “무릇 독서를 할 때는 단정히 팔짱을 끼고 바로 앉아서 글을 외우는 듯 생각하는 듯 하면서 옛날 성현들의 기상을 상상하면서 성현의 생각에 푹 젖어들어야 한다. 마치 입으로 아름다운 맛의 음식을 씹듯이 코로 향기로운 냄새를 마시는 듯 하여 책과 내 마음의 한 뭉치가 되어야만 장족의 발전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독서하는 자세와 마음 가짐을 제시했다.
후산의 학문적 기반은 ‘퇴계학(退溪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가학(家學)은 남명학에 가깝다.
그의 10대조 만헌(晩軒) 허팽령(許彭齡)은 남명의 문인이고, 두 아들인 덕암(德菴) 허홍재(許洪材)와 둔재(遯齋) 허홍기(許洪器)는 남명의 문인인 외숙 입재(立齋) 노흠(盧欽)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덕암의 아들인 8대조 창주 허돈은 입재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뒤에는 노파 이흘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21세 때 덕천서원에서 남명의 제자인 한강 정구를 뵙고 제자가 되었다. 창주는 남명의 사숙인이라고 할 수 있다. 6대조 와룡(臥龍) 허호(許鎬)는 갈암 이현일의 문인으로 도량이 아주 넓고 기개가 있었다고 한다. 면우 곽종석은 이런‘와룡’을 ‘허생전’의 모델로 여기기도 했다.
남명학을 가학으로 익혀온 후산은 남명을 매우 존경했다. “우리 삼가는 남명이 살던 고을이다. 우리 고을은 비록 남쪽 아래 지방에 있지만 남명 선생이 60년동안 도를 강론한 곳으로 다른 고을과 비교하면 특별한 것이 있다” 는 말을 자주할만큼 남명이 살던 고을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명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이를 널리 알리려고 했다. 특히 남명의 학문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사명(神明舍銘)’과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대해 “이것은 남명선생의 심학(心學)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의 거짓스럽고 각박함이 날로 심해진다” 라고 하면서 남명의 학문에 천착을 했다. 또한 남명의 심학이 세상에 크게 밝혀지는 것은 “곧 유학의 행복”이라며 남명학의 계승을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후산은 남명의 학문을 널리 펴기 위해서는 먼저 문집이 바로 정리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명집’을 교정하여 중간하려고 했다. 또 서원 훼철로 인하여 남명을 봉사(奉祀)하는 곳이 없어지자 본래 회산서원(晦山書院)이 있던 땅에다 정사를 지어 학덕을 기리고자 계획을 세워 면우와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남명을 향사하던 삼가의 용암서원이 훼철된 뒤로 남명을 추모하는 뜻을 붙이고자 하여 뇌룡정을 복원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뇌룡정 상량문’을 지어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널리 알렸다.
후산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광물 자원을 잘 개발해서 국가를 부강하게 해야 하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속은 인의(仁義)만을 숭상하고 산업은 천시하기 때문에 자원을 버려두고서 백성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 유학자로서는 보기드물게 현실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조선말기 서구문물과 종교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올때 후산은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 앞으로 그 세력들이 불길처럼 크게 번져나갈 것을 예견했다. 그리고 안이하게 유교의 공론만 가지고 그것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진단하고서 결연한 정신자세로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후산은 출처대절(出處大節)을 중시했지만 나라가 어지러운 일이 있을 때 물러나 자기 한몸만 보전하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당시 일부 선비들의 견해를 비판했다.“근래 사대부들은 국가에 일이 없어 안락 태평하면 벼슬길에 나서기에 급하여 혹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 하지만, 나라에 일이 있게 되면 산림에 물러나 피해 있으면서 비록 임금의 명령이 있어도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선비로서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염두에 두고 처신을 해야지 자기 자신만 깨끗하게 간직하려고 해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후산은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학문하는 사람도 모름지기 생계를 돌보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후산은 덕성스런 선비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덕성(德星)이 떨어졌다”고 애통해 하던 선비들의 말에서 그의 인간성을 알 수 있다.
후산과 가까이 지냈던 면우 곽종석은 “산은 금강산을 제일로 치고 계율(戒律)을 잘지키는 중은 금계(金溪)를 제일로 치고 이학(理學)은 한주를 제일로 치고 덕량(德量)은 退而翁(퇴이옹)을 제일로 친다“고 했다. 퇴이는 후산의 자이다. 교우 윤주하도 “옛날 용기있는 사람은 온 몸이 모두 다 담(膽)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보건대 퇴이선생은 온 몸이 다 덕(德)으로 되어 있다.”라고 했다. 한결같이 후산의 덕성스런 품성을 칭찬하고 있다.
후산이 남긴 글들을 그 문인들이 수습하여 1910년에 목판 19권 10책을 간행했으며 그로부터 54년뒤인 1964년 문집에 들지 못했던 시문 원고를 정리하여 8권 2책의 속집을 연활자본으로 간행했다.
경상대 허권수 교수는 “선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른 학문을 진작시키고 이설(異說)을 물리쳐 세상의 풍기를 바른데로 돌리려고 노력하였다.”며“올바른 학문으로써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특히 경상우도 지역의 학문은 선생으로 인하여 크게 부흥되었고 곽면우 등이 그 뒤를 이어 크게 번성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 가는 길목에 후산서당이 있다. 후산이 생전에 주리학(主理學)에 정진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던 곳이다.]
*일찍이 삼가현은 참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고향으로 그 저항정신이 면면히 이어온 고장입니다. 삼가현이었던 가회에는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의병장 구산 윤탁(龜山 尹鐸)과 광해군 때 정2품 우참찬을 지낸 추담 윤선(秋潭 尹銑)의 후손들이 구평마을에, 거유(巨儒) 창주 허돈(滄洲 許燉, 1586~1632)의 후손들이 덕촌리에 거주하는 등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등 남명 조식의 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고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623년 소위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인 내암이 억울하게 처형되고, 그 여파 등으로 집권세력인 노론으로부터 심대한 차별을 받고 있던 합천 등 경상우도에서 무력(武力)으로 저항한 1728년 3월 정희량의 난으로 남명학파가 몰락하고, 중앙정부로부터 반역향으로 매도되어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으나, 불의를 용납 못하는 경의사상(敬義思想)은 실천철학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성학십도 부록 서(聖學十圖附錄序)
내가 스승1)에게 들으니, “우리 퇴도(退陶) 이(李) 선생께서 평생 동안 공부하신 실적이 《성학십도》에 갖추어져 있어서, 도리의 핵심을 드러내고 성학(聖學) 공부의 표준을 제시하였다. 태극(太極) 즉 하나의 이치의 근원에서 단서를 구하여 상황과 시간에 맞추어 배열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심통성정(心統性情)에 관한 두 도(圖)2)는 종횡에 걸쳐 폭넓게 설명하였고 나누거나 합함에 있어서 빠짐없이 상고하였으니,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진실로 여기서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장차 어떤 이치라도 궁구하지 못하겠는가?”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실로 주자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주자를 배움은 더욱 퇴도(退陶)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니, 퇴도를 배우지 아니하고 공자와 주자의 도를 배운다는 것은 문을 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셨다.
내가 일찍이 이 말을 가슴에 새겼으나 게으름에 빠져 있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노년이 닥쳤다. 금년 겨울에 병이 들어 후산(后山)의 재실3)에 머무를 때 한 두 사람의 학자들과 더불어 《심경부주(心經附註)》의 예에 따라 도설(圖說) 뒤에 몇 가지 조목의 부록을 덧붙이고 이름하여 《성학십도부록(聖學十圖附錄)》이라 하였으니, 감히 도설 외에 더 많은 것을 구하여서가 아니고 그 대의(大意)가 어떠한가를 가만히 엿보고자 했을 뿐이다.
〈태극도(太極圖)〉·〈서명도(西銘圖)〉는 다만 도해에 본래 있던 설을 그대로 썼고, 〈소학도(小學圖)〉·〈대학도(大學圖)〉는 본래의 글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극진하여 다시 췌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에는 본문의 출처를 기록하였고,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는 심(心)·성(性)·정(情)의 본래 의미를 대략 논하였고, 아울러 중·하도의 혼륜(渾淪)과 분개(分開)의 뜻에 관해 언급하였으며 호발(互發)의 취지를 발명하였다. 〈인설도(仁說圖)〉에서는 정자와 주자가 인(仁)을 논한 대의를 취하여 덧붙였다. 〈심학도(心學圖)〉에는 본문의 출처를 차례로 기록하였고, 〈경재잠도(敬齋箴圖)〉는 선유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더 보태서 기록할 필요는 없다.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에서는 선천도(先天圖)4)에 나오는 12피괘(辟卦)5)의 대상(大象)6)을 가지고 배우는 사람들에게 때에 따른 공부 방법을 보여 주었으며, 그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퇴도의 설을 간략히 인용하고 또한 스승의 설을 끌어와 절충하였고 다른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감히 여러 주장들 가운데서 취사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한 가지로 통일시키고자 하는 뜻으로 동지들과 더불어 힘쓸 뿐이다.
광무(光武) 계묘년7) 겨울 11월 일
김해(金海) 허유(許愈)8)가 서문을 쓰다
1) 스승: 저자 후산(后山) 허유(許愈)의 스승인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을 말한다. 이진상의 자(字)는 여뢰(汝雷)이고, 호는 한주(寒洲)이다. 한주 문하에서는 허유(許愈, 1833~1904) 외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1856~1918)·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1848~1915)·교우(膠宇) 윤주하(尹冑夏; 1846~1906)·물천(勿川) 김진우(金鎭祐; 1845~?)·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9) 등 걸출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2) 심통성정에 관한 두 도(圖): 《성학십도》 가운데 제6도인 〈심통성정도〉에 포함된 중도(中圖)·하도(下圖)를 말한다. 본래 〈심통성정도〉는 중국의 정복심(程復心)이 그렸는데, 퇴계가 이를 수용하여 상도(上圖)로 하고, 직접 중·하도를 그려 추가하였던 것이다.
3) 후산(后山)의 재실: 허유(許愈)는 만년에 자신이 살던 산 아래에 작은 집을 마련하여 편액을 후산서당(后山書堂)이라고 달았는데, 이로 인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후산(后山) 선생으로 불렀다. 행장 참조.
4) 선천도(先天圖): 송(宋)의 소옹(邵雍)이 진단(陳摶)의 학설을 받아들여 작성한 괘위도(卦位圖)인 선천팔괘도(先天八卦圖)의 줄임말이다. 이 도에는 건(乾; 天)은 남(南), 곤(坤; 地)은 북(北), 리(离; 火)는 동(東), 감(坎; 水)은 서(西), 진(震; 雷)는 동복(東北), 태(兌; 澤)는 동남(東南), 손(巽; 風)은 서남(西南), 간(艮; 山)은 서북(西北)에 배당되어 있다.
5) 12피괘(辟卦): 복(復), 임(臨), 태(泰), 대장(大壯), 쾌(夬), 건(乾), 구(姤), 둔(遯), 비(否), 관(觀), 박(剝), 곤(坤)괘를 가리킨다.
6) 대상(大象): 역(易)에 있어서 한 괘(卦)의 전체 상(象)에 대해 설명한 말.
7) 광무(光武) 계묘년: 대한제국 고종(高宗) 7년으로 서기로는 1903년이다.
8) 허유(許愈) : 자(字)는 퇴이(退而), 호는 후산(后山), 본관은 김해(金海)로 성학십도부록(聖學十圖附錄)의 저자이다. 순조(純祖) 33년(1833)에 경상도 삼가(三嘉)에서 태어나서 고종(高宗) 9년(1904)에 죽었다. (행장) 38세가 되던 경오(1870)년 봄에 신안(新安)으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찾아 뵙고 그 문하에 입문하였다. 허유는 자신의 학문을 주자―퇴계―한주를 계승한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우리 나라 학자들이 당파심에 사로잡혀 의리를 해쳤음을 개탄하고, 남명(南冥)의 문집을 교정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성학십도부록을 통하여 옛 현인들이 발명하지 못하였던 심법(心法)을 발명하고자 하였으나 늙도록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임종을 앞두고 스승의 아들이자 동문인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에게 편지를 보내 이 책을 완성하여 간행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승희는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였고, 원고는 다시 중재(重齋) 김황(金榥)의 손으로 넘어가서 정리 완성되었다.
聖學十圖附錄序
愚聞之師, 吾退陶李先生平生用功之實, 備載於聖學十圖, 而闡道理之頭腦, 揭聖功之標準, 求端於太極理一之原, 用力於地頭時分之間, 就其中, 心統性情兩圖, 橫竪普說, 分合俱勘, 有志於學者, 苟能玩味於斯則, 將何理之不可窮乎. 又曰, 世之學孔子者, 固當自朱子始, 而學朱子, 尤當自退陶始, 不學退陶而學孔朱之道者, 不由戶而入室者也. 愚嘗佩服乎斯言, 而因循頹墮, 不知不覺而耄已及之. 今年冬, 病臥后山之室, 與一二學者, 依心經附註例, 附錄若干條於圖說之後, 名之曰聖學十圖附錄, 非敢求多於圖說之外也, 竊要窺見其大意之如何耳. 太極圖․西銘圖, 只用圖解本說, 小․大學圖, 本書至矣盡矣, 無容更贅. 白鹿洞規圖, 錄本文出處, 心統性情圖, 畧論心性情本義, 而並及於中下圖渾淪分開之意, 發明互發之旨. 仁說圖, 取程朱論仁大意, 以附之. 心學圖, 歷錄本文出處. 敬齋箴圖, 先儒敬齋箴集說詳之, 不必更加收錄. 夙興夜寐箴圖, 用先天圖十二辟卦大象, 以示學者時分工夫, 其中肯綮處, 畧用退陶說, 又引師說以折衷之, 餘無及焉. 非敢取舍於羣言, 竊自附於致一之意, 以與同志勉焉云爾. 光武癸卯冬十一月日, 金海許愈序.
선조 재위 기간(1567-1608)을 지나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내암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학파가 정권의 주축으로 활동하다가,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남명학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다시 100여 년이 지난 1728년에 무신란이 일어났고, 이 뒤로는 남명학파가 더욱더 흩어짐으로써 명맥을 잇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전에 이미 남명학파로 활동하던 학자들은 17세기 말엽까지 반정 이후의 남명학파를 영도하고 유지해 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1593-1666)라고 할 수 있다. 겸재는 세칭(世稱) ‘남명후 일인(南冥後一人)’이라 일컬어지던 인물로, 인조반정 이후의 남명학파를 남인으로 소속케 하면서 남명의 정신을 잇고 남명을 숭모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겸재가 죽은 뒤로는 강우 지역에서 남명학파의 구심점 역할을 맡을 만한 비중 있는 학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배출된 학자들은 자연히 右道 전체를 통괄하지 못하고 고을 단위 정도로 국한되어 나타났다. 가끔씩 더 큰 학문을 이루기 위하여 남인 계열의 학자들은 퇴계 학맥을 이은 안동 쪽의 학자를 찾아 배움을 청하고, 노론 계열의 학자들은 율곡학맥을 이은 기호지역의 학자를 찾아 배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강우지역에서는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학문이 크게 진작되었다. 경상도 성주 출신의 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서 빼어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경기도 포천 출신의 학자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전라도 장성 출신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학통을 전수 받는 제자가 이 강우지역에서 나왔다.
한주 이진상은 19세기에 안동지역에서 퇴계 이황의 학맥을 충실히 계승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그는 성리학설에 있어서 스승 유치명과 의견을 달리했지만, 유치명이 ‘강우대유(江右大儒)’를 꼽을 때는 반드시 이진상을 일컬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50년대에 학문적 명성을 크게 얻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진상은 그의 8대 조부 이정현(李廷賢)이 정구(鄭逑)의 문인이어서, 정구를 퇴계의 정맥으로 생각한 선비이다.
이진상이 강우학계에 그 이름을 크게 드러내는 시기는 후산(后山)허유(許愈)와 면우 곽종석(郭鍾錫)이 그 문하에 입문하는 1870년대이다.
이진상이 1860년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한 10년 뒤인 1870년 봄에 허유가, 그리고 그 해 겨울에 곽종석이 이진상의 문하에 나아갔다. 이어 1872년 이정모(李正模), 1874년 이두훈(李斗勳) 1876년 윤주하(尹胄夏) 1878년 장석영(張錫英) 김진호(金鎭祜)가 이진상의 문하에 나아감으로써 1870년대 강우지역의 학맥은 이진상의 문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재 허전은 1864년 3월부터 1867년 7월까지 김해부사로 재임하고 있는 동안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강우지역의 학풍을 크게 진작하였다.
허전의 학맥은 퇴계 이황 이후 정구(鄭逑) 허목(許穆)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황덕길(黃德吉)의 학통을 잇고 있다.
허전은 1864년 3월에 김해 경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미양서원(薇陽書院) 구천서원(龜川書院) 송담서원(松潭書院) 등을 찾아 예를 올렸으며, 가을에 학생들을 데리고 향교에 나아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이때부터 허전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학을 하였다.
1865년 허전은 공여당(公餘堂)을 열어 강학하였다. 이해 봄에도 향음주례를 행하였고, 가을에는 함허정(涵虛亭)에서 학생들과 강학하였다. 1866년 2월에는 산해정(山海亭)에서 학생들과 강학하였다. 산해정은 신산서원(新山書院) 옆에 있었는데 이 무렵 허전은 남명을 모신 신산서원의 원장으로 있었다. 허전이 남명을 모신 신산서원의 원장을 맡으면서 남명의 정자에서 학생들과 강학을 했다는 것은 남명의 학풍을 느끼면서 학문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재 학맥은 허전 사후에도 만성 박치복을 중심으로 산청 이택당(麗澤堂)에서 강학활동을 19세기말까지 지속하였다.
노사 기정진은 전라도 장성에서 주리설(主理說)을 제창하였다. 기정진의 학통은 강우지역의 학자 조성가(趙性家)와 정재규(鄭載圭)로 전해졌다.
정재규는 1864년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도 장성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그는 기정진이 1879년 작고하기 전까지 15년간 기정진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기정진은 조성가에게 그의 주리설을 전하였다. 조성가는 1878년 기정진이 81세 때 그 문하에서 ‘외필(猥筆)’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기정진이 작고하기 일년전에 조성가에게 자신의 성리설을 전수한 것이다.
19세기 강우학자들은 그 학맥의 연원이 이진상, 허전, 기정진 등 다양하였으나 학파를 초월하여 남명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고 계승해 나갔다.
강우지역 학자들이 남명을 기리면서 결속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는 1877년 산천재에서의 학술모임과 지리산 산행이었다. 1877년 8월에 강우지역 학자들은 두 차례 지리산을 등반하였다. 첫 번째 등반은 8월 5일부터 14일까지 허유 곽종석 김진호 조원순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남명이 거닐던 자취를 지날 때마다 감회에 젖었고 가끔 학문적 토론도 가졌다. 지리산 등반을 마친 몇 일 뒤인 8월 20일에 이진상이 허유와 곽종석을 방문하여 강우지역 학자들은 다시 지리산을 오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강우 지역 학자들은 19세기말에 남명사상을 올바르게 선양하기 위하여 ‘남명집’의 간행을 다시 추진하였다. 특히 박치복 허유 곽종석 조원순 정재규 등은 남명의 학문을 널리 펴기 위해서는 먼저 ‘남명집’이 바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강우지역에서는 19세기말이 되면 남명사상을 연구하고 선양하는데 지역, 학파, 당론을 떠나 남명의 참모습을 이해하고 선양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그러한 역할을 허유 곽종석 정재규 등이 주도하였고, 이들의 학문활동을 통해 강우학계는 남명의 경의사상과 출처대의에 대하여 점차 공감대를 형성하여 나갔다.
19세기에 강우지역에서 일어난 이러한 여러 학맥의 학문적 결속과 학문활동은 그 뒤 20세기에 들어가 곽종석 등을 중심으로 한 강우학자들이 1919년 전국 유림을 최초로 통합하여 유림의 독립운동으로 결과를 맺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사진설명]성재 허전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물산 영당(오른쪽). 산청군 신등면에 있다. 전남 장성군에 있는 노사 기정진의 신도비 (왼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