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 소식에 북한대사관 “터무니없는 날조” 발끈…1994년 외교문서 공개
-1990년 1월 1일, 반미청년회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개편. (남한 친북세력 개편)
반미청년회의 NLPDR노선에서 주체사상 노선으로 변경과 함께 김정일주의 표방.
-1990년 1월 20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등 3당 합당.
-1991년 5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 지도부 김영환 등 잠수정(반잠수정)으로 밀입북과 김일성 전주석 면담.
강철서신(반제동맹, NLPDR)->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 NLPDR노선 김일성주의)->새세대(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주체연호와 주체사상 김정일주의)
-남북기본합의 체결
1990년 9월 4일부터 5차에 걸쳐 개최된 남북 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1991년 12월 13일 체결한 합의서.
1991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결과 체결된 합의서.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1992년 12월 18일 김영삼 민자당 후보 대통령 당선과 문민정부 출범
-남북대화와 남북정상회담 추진
남북정상회담 추진 성사로 김영삼전대통령 평양 방문 직전 김일성 전주석 사망.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강온파 갈등과 정보부재로 김일성 전주석 사망.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상황이 담긴 1994년에 외교문서가 공개됐습니다. 외교부는 오늘(28일) '30년 경과 외교문서' 2,500여 권 38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에 따른 각국 반응과 정세, 아들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에 쏠린 관심들이 담겨있습니다.
■ 김일성 사망 믿지 않은 북한 대사관 "터무니없는 날조 기사"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하자 평양방송은 다음 날인 9일, 이를 발표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군 비상경계 태세를 지시하고, 대통령 주재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합니다. 미국 CNN은 현지시각으로 8일 밤 10시부터 톱뉴스로 김일성 사망 보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해외 일부 북한 공관에서는 김 주석 사망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7월 9일 새벽 6시쯤, 독일의 한 특파원이 현지 북한대표부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김 주석의 사망 사실을 묻자 "남반부(남한) 기자가 사실무근의 낭설을 이야기한다" 화를 냅니다. 정오에 다시 전화를 걸자 북한 관계자는 "평양으로부터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입니다. 9일 오전에도 조기를 게양하지 않았던 세네갈 주재 북한 대사관은 본국으로부터 '비상 근무' 지시를 받아 근무 중이지만 김일성 주석 사망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말합니다.
7월 9일 베트남 현지 매체가 김일성 사망 소식을 보도하자, 주베트남 북한 대사관 측은 '터무니없는 날조된 기사'라며 항의합니다. 베트남 통신 측이 북한 중앙통신이 작성한 김일성 사망 보도 기사를 보여주고 나서야 소동이 진정됩니다. 주인도네시아 북한 대사관도 CNN의 보도에 대해 "허위 보도를 일삼는다"며 믿지 않다가 북한의 공식 발표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상황 파악에 나섭니다.
김 주석의 구체적인 사망 원인에도 관심이 쏠렸습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대해 조의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김 주석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점 외에 아는 바가 없다"고 답합니다.
중국 관계자는 "그동안 김일성이 심장병을 지병으로 앓아왔으며 1993년 중국의 전문의사가 2~3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고 전합니다. "최근 핵 문제 협의를 위해 82세의 노인으로서는 지나치게 몸을 혹사했다"며 남북 정상회담 등을 앞두고 상당한 스트레스와 과로를 사인으로 추정하거나 "김정일과 의견 충돌로 흥분 상태에서 수면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가능성"을 언급하는 또 다른 전문가의 추측도 보고 문서에 담겼습니다.
■ "대통령 조전 집요하게 부탁"... 조문 사절단 받지 않은 이유는?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7월 17일까지를 애도 기간으로 정합니다. 7월 11일, 평양 주재 외교단 전원을 주석궁으로 불러 조문록에 서명하도록 합니다. 외국 조문 사절은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외교문서에는 "사절단 급이 낮을 것으로 예상해 미리 받지 않는다 한 것"이라며 "북한 고위층에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는 분석이 적혀있습니다.
절박하게 조전을 부탁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당시 멕시코 외무성 태평양 국장은 "북한 대사가 대통령의 친전형식으로 직접 서명한 개인적 조전을 보내줄 것을 집요하게 요청했다"고 전했습니다. 멕시코 국장은 "조전이 발송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대사직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절박한 상황임을 짐작게 하였고, 심리적으로 극한 상태에 달하였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국가의 주재 대사들에게 김일성 장례 기간 동안 조문록 서명해 줄 것을 전화로 수차례 요구한 북한 대사관 측의 행동이 '무례하고, 비상식적'이었다는 비판도 오갔습니다. 현지 북한 대사관의 인력이 부족하고, 복사기 등 비품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정을 설명하며 대사관에 조문록 비치되어 있음을 알리는 공지를 주재국의 외무성에서 협조해달라며 부탁하는 어수선한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 김정일에 쏠린 각국 관심... "멍청하고 어린애 같다. 승계 권력 오래 못 갈 것"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북한의 후계 구도에도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외교문서에는 김 주석이 과거 중국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 주석에게 김정일 문제를 부탁(중국 표현으로 託孤(부탁할 탁, 외로울 고 : 어버이 없는 어린아이의 뒷일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함)'해 두었다고 적혀있습니다.
공식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 김정일의 승계가 확정될지, 북한의 정책 계속성이 유지될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김정일의 건강이나 성격 등에 대해 탐문이 활발해집니다. 외무부는 7월 12일 북한에 공관을 둔 국가에 주재하는 대사관에 주재국의 평양 주재 공관을 통해 입수된 북한 동정을 파악해 보고할 것을 지시합니다.
페루 친북협회 사무총장은 "최근 김정일 체중이 20kg이나 감소하는 등 건강이 매우 악화됐다"며 "주재국에서 생산된 약초와 자연요법 치료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주일 한국대사와 면담한 당시 주일 미국대사는 김정일에 대해 "자신이 보기에는 약간 멍청하고(Goofy) 어린애같아(Childish) 지도자로는 부족한 것 같다"고 평가합니다. 김정일이 심장이 약하고,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설도 퍼집니다.
주미대사가 작성한 보고 문서에는 '김정일의 정책 성향이나 역할에 대해 불분명하다'고 적혀있습니다.
미국 내 예측은 상반됐습니다. 국무부는 김정일이 과거 북미 협상에서 일정 역할을 했기 때문에 김일성 정책의 계속성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중앙정보국(CIA)은 알려진 김정일의 성향(과격성, 불가측성 등)으로 보아 그렇지 않을 거라고 분석합니다. 미국가정보위원회(NIC) 고위 관계자는 "수년 내 김정일 반대파가 김정일을 제거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언급하는 등 권력 승계 이후 북한 내부 체제가 위기에 봉착할 거라는 견해도 나왔습니다.
■ 남북정상회담 무산... 북미 제네바 합의 평가는?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7월 25~27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습니다. 남북은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 이후, 7월 1일과 2일 실무 절차를 합의했습니다. 7월 8일은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오전 10시, 남북 경호 실무자들이 만나기로 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8일 새벽 2시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따라 북한은 7월 11일 남북한 최고위급회담 연기를 통보합니다.
이후 1994년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간 협의는 진전을 이룹니다. 1993년 1단계, 2단계 회담에 이어 1994년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3단계 회담이 열리고, 북미 간 기본합의서에 서명한 '제네바 협의' 당시 상황도 올해 공개된 외교문서에 담겼습니다. 5년 전 외교문서를 공개할 때 일부 비공개 처리됐던 1989년 '무라야마 일본 총리 특별담화' 내용도 검토를 거쳐 올해 공개 문서에 포함됐습니다.
“김일성 사망, 타살 배제 못해”...30년만에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 38만쪽

외교부는 30년이 지나 비밀이 해제된 1994년 외교문서를 28일 공개했다. 분량은 무려 2506권 38만여 쪽에 달한다. 문서에는 1994년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 한국 외교당국이 주요국과 나눈 긴급한 외교 소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세계 각국은 김 주석의 사망으로 북한 체제가 심각하게 흔들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은 당시 김일성 주석이 심장혈관 이상, 동맥경화, 과로 등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타살 가능성도 거론됐다. 주중 러시아대사관 참사관은 김하중 당시 주중 한국 대사관 공사와 만나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남북) 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김일성의 사망을 촉진시켰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후계자 김정일과 그가 이끌 북한에 대해서도 부정적 전망이 다수였다. 스탠리 로스 당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선임보좌관은 반기문 당시 주미대사관 공사와 면담에서 “김정일이 승계에 성공하더라도 김일성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정통성이 결여돼 있는 데다 경제난으로 일정 기간 이후 많은 도전을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김정일이 핵문제와 관련해 강경파이기 때문에 북한이 협상 테이블로 복귀하지 않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개혁·개방 흐름 속에 북한과 거리를 뒀던 러시아 당국자들도 북한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상했다. 안드레이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1994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한승주 당시 외무장관과 만나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언급했다.
반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김정일 체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여기에는 덩사오핑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문제를 담당하는 중국 외교부의 한 인사는 “김일성은 과거 중국 방문 시 덩샤오핑에게 아들 김정일 문제를 부탁(托孤·탁고)해두었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생존해 있는 한 중국 정부는 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미국 에너지부(DOE)는 과거에도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하면서 사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당시 한국 외교당국은 미국이 이유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정을 납득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며 미국 측에 명단 배제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정부는 1993년 12월 ‘제1차 한미 과학기술협력 공동위원회’에서 미국에 민감국가 목록에서 한국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당시 “민감국가로 지정되는 여러 이유(핵비확산, 국내 불안정, 테러리즘 등)가 나열돼 있으나 한국이 어떤 이유로 민감국가로 지정됐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민감국가 지정 배경을 핵 관련 문제로 유추한 정황도 있다. 외교부는 당시 내부 검토를 통해 “핵무기 개발 관련 1970년대 한국의 핵정책에 대한 불신과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민감국가 지정 이유를 추정했다. 박정희 정부 당시 ‘독자 핵무장’ 움직임을 언급한 것이다.
정부는 지난 1월 민감국가 지정 사유에 대해 ‘외교 정책’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함의가 있는 ‘보안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내 정치권에서 제기된 핵무장론이 지정 이유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이번에도 미국은 3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유종하 ”김정일은 96년말 정도까지만 집권하게 될 것“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에 1994년 7월 8일 김일성 북한 주석이 급서하지 않았다면 예정된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고, 그해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까지 더해져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외교부는 28일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1994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2,506권, 약 38만여 쪽을 공개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후계자 김정일 권력승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북측의 연기 통보, 북미 핵협상과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 등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공개시 외교적 마찰 발생이 우려되는 경우 △협상전략 노출 등 국익 저해가 우려되는 경우 △개인정보가 포함된 경우 ‘블랙 마킹’되거나 ‘공란’ 처리됐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관련해 외교부는 주로 해외 대사관들을 통해 북한 내부 정보수집에 주력하는 한편, 해외 북한공관들의 조기 게양이나 조문객 접수 동향 등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김주석 사망이 공표된 7월 9일 외교부는 장관 명의 긴급 ‘발신전보’를 평양주재 대사관이 있는 러시아와 동유럽 등의 국가 대사들에게 보내 “주재국 외무성을 긴급 접촉, 북한 주재 귀 주재국 대사를 통하여 김일성 사망 원인 및 경위, 북한내부 동향, 향후 북한정세 전망 등을 긴급 파악해 줄 것을 요청하고 결과 수시 보고바람”이라고 지시했다.
이후 각국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속속 보고가 접수됐고, 주불가리아 대사는 9일 주재국 외무부 부국장을 만난 결과 “평양시내는 조용하고 특이동향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함”이라고 보고했고, 주독대사관 역시 당일 NBC 주독 특파원의 이야기라며, 북한 이익대표부에 전화할 때에는 “김일성 사망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음. 오히려 “남반부” 기자가 사실 무근의 낭설을 이야기한다고 화를 냈음“이라고 보고했다.
주베트남 대사는 7월 11일 주북한 베트남 대사가 평양주재 외교관 주석궁 초치로 조의를 표하고 김정일을 만났으며 “김정일은 외교단에게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말은 일체하지 않았음”이라고 보고했고, 주우즈베키스탄 대사는 7월 12일자 보고에서 김일성 주석이 7월 7일 집무중 고혈압 증세로 반신불수가 돼 8명의 의사가 치료했지만 8일 새벽 2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주루마니아 대사는 7월 12일자로 “한 조문객이 김유순 당지주재 북한대사에게 사망 원인을 문의한바 동 대사는 심장병으로 그간 고생해 왔었는데 최근의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시 김일성이 매우 긴장을 받은 관계라고 설명하였고 함”이라고 보고했다.
유종하 주유엔 대사는 7월 12일자 보고에 ‘김일성 후계체제 전망’을 담아 “김 체제가 약 6 개월정도 지나게 되면 군부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길어야 김정일은 96 년말 정도까지만 집권하게 될 것임”이라고 전망하고 “김정일 집권후기에는 반사적으로 김성애의 영향력이 커지게 될 것이며, 김영주, 김평일간의 권력 암투 가능성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향후 북한 정부내의 강경파가 득세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서는 안 되며,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나치게 북한을 몰아부쳐서는 안될 것임”, “또한 현 시점에서 대북 주요정책은 북한내의 사태를 확실히 파악한 후 수립 발표하는 것이 좋겠음”이라고 제언했다.
이같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정세보고와 판단은 김영삼 정부가 조문을 막고 대북 강경책으로 선회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어 주목된다. 유종하 대사는 외교부 차관을 거쳐 장관으로 승승장구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7월 9일 긴급안보회의와 긴급국무회의를 소집,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긴급 지시했고,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데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도 “가능한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대비를 하도록 군경계령을 내림”이라고 이해하는 등 초기 대응은 비교적 신중한 기류였음이 확인된다.
북한은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이홍구 부총리에게 11일자로 서한을 보내 “이미 중대보도를 통하여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고위급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하여 통지하는 바입니다”라고 7월 25일로 예정됐던 남북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그러나 이영덕 국무총리는 18일 국무회의에서 “김일성은 민족분단의 고착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라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 있다”며 “최근 일부재야 및 운동권 학생과 사회일각에서 김일성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조전발송, 조문단 파견 논의 등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무분별한 행동으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불법행위’로 규정했고, 외교부는 다음날 “김일성에 대한 정부의 공식 평가” 제목으로 이를 재외 공관들에 전파했다. 남북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이같은 정부의 강경입장 선회는 주로 조문 문제를 둘러싼 이념갈등으로 나타나는 모양새지만 내면의 기류 변화과정은 이번 공개문서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대목에서 ‘공란’으로 남겨진 쪽이 유독 많은 것도 아쉬운 점이다.
북한은 남측 대학가와 일부 야당의 조문단 파견 움직임에 대한 14일 조평통 담화를 시작으로, 남측 국무총리의 발언에 대한 20일 민민전 공개질의서, 범민련 해외본부 성명 등을 통해 대남 비난 수위를 높여나갔다.
20일은 김일성 주석 추도대회가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날이므로, 결과적으로 이영덕 총리의 18일 “김일성에 대한 정부의 공식 평가” 발언은 이를 염두에 둔 선긋기로 읽힐 소지가 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는 서울 서초동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외교문서 공개는 현재까지 총 40,000여 권, 약 57만여 쪽에 달하며, 온라인으로도 ‘공개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을 통해 신청하여 확인할 수 있지만 올해 공개된 문서들은 6월 이후에 이용이 가능하다.
유종하 ”김정일은 96년말 정도까지만 집권하게 될 것“ < 외교 < 정부정당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유종하 ”김정일은 96년말 정도까지만 집권하게 될 것“ - 통일뉴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에 1994년 7월 8일 김일성 북한 주석이 급서하지 않았다면 예정된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고, 그해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까지 더해져 한반도의 운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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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1일, 반미청년회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개편. (남한 친북세력 개편)
반미청년회의 NLPDR노선에서 주체사상 노선으로 변경과 함께 김정일주의 표방.
-1990년 1월 20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등 3당 합당.
-1991년 5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 지도부 김영환 등 잠수정(반잠수정)으로 밀입북과 김일성 전주석 면담.
강철서신(반제동맹, NLPDR)->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 NLPDR노선 김일성주의)->새세대(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주체연호와 주체사상 김정일주의)
-남북기본합의 체결
1990년 9월 4일부터 5차에 걸쳐 개최된 남북 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1991년 12월 13일 체결한 합의서.
1991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결과 체결된 합의서.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1992년 12월 18일 김영삼 민자당 후보 대통령 당선과 문민정부 출범
-남북대화와 남북정상회담 추진
남북정상회담 추진 성사로 김영삼전대통령 평양 방문 직전 김일성 전주석 사망.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강온파 갈등과 정보부재로 김일성 전주석 사망.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90년 이후 남북회담과 북한 군부를 사실상 장악해왔다 남한 친북운동 단체도 주체사상 김정일주의를 표방하고 김정일을 북한 지도자로 추앙했다
남한 내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친북세력 중 인민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세력 민주파보다도 민족해방투쟁론 민족해방(반미, 반미인사나 단체) 세력 자주파계열이 무장혁명 투쟁세력들이다 북한 간첩은 북한정부의 제2공화국 헌법 이후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추진하기 때문에 남한 내부 친북 고정간첩은 주체사상파들이다***

김일성 전 국가주석은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입니다 본래 북한은 소련 위성국으로 아직도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후손들이 북한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
007nis.tistory.com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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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미소 양군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중장 [사진] Ⅰ.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스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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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과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이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과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 미국간첩으로 제거 되었고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은 종파주의자로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 권력층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주도 인물로 소련군 도움므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광서(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한국전쟁 추진 세력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김일성(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방어총사령관), 김책(전선총사령관), 김일(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강건(인민군 총참모장) 모습 북한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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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대한민국)은 민영자본체제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라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남과 북이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1.북한 국정(國政):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좌익 파시즘 군사독재정부]
-북한 국정의 약점은 민주화 정책이다
2.북한 사회구성체:국영자본체제(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체제)
-북한 사회구성체의 약점은 자유화, 개방화 정책(개혁개방정책)과 민영자본체제이다
3.남한 내부 친북 김정은세력은 어떤 인물입니까?
재한조선인총련합회[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 재한총련]이란
한국 내부 북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주의)를 지지하는 동포들이 결성한 단체가 반제민전 중앙위원회(재한총련)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 는 지하조직으로 실질적 친북단체이며 명목상(의례적) 친북 합법조직은 범민련(범청학련)이나 친북조직 내부 NLPDR계열 단체들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주의)를 지지하고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기구[ 통일전선부 산하기관인 제225부(구 대외연락부)]이다. 대표적인 단체는 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도 재중총련 조직처럼 범민련 조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재일총련처럼 남한정부 대표부(북한 통일전선부 대화창구) 성격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북한정부 내부 제1공화국 헌법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인민민주주의 인민회의정부론을 옹호하는 세력이나 김일성 가계 세습제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반김정은세력이다.
북한 김정은 세력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보다는 강한 민족주의 좌익 파시즘 세력으로 극우성향이다
북한 김정은 세력은 모택동, 김일성주의 노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자 중 인민민주주의(PD, 민주파)계열보다는 민족해방(NL, 자주파)계열이다.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Ⅰ.북한 제1공화국 헌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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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8월 뇌졸중 발병설에 휩싸였던 북한 김정일 前국방위원장 모습 사진입니다 김 위원장이 뇌졸중 발병설이 제기된 2008년 8월과 비슷한 시기에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췌장암은 주로 말기에 발견되는 탓에 암 중에서도 생존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병이다.
이 시기부터 김정일 사후 후계자 추대와 대남 강경노선 세습제 좌익군정 주도로 2, 3차 핵실험,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폭격등을 주도해왔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이전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을 장악하고 핵 실험을 추진해왔다
김정일은 90년 1월 남한내부 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새세대-김정일시대 주체사상 시대)로 개편하고 남한정부와 협상, 전쟁 양면정책으로 대남정책을 추진해왔다
김정일은 동유럽 공산정부 붕괴와 소련해체 이후 핵실험으로 미국이 북한지역 군사적 행동을 유도하고 남과 북전쟁을 추진하는 저강도전략 일환으로 남한내부 반미전선 구축 한민전 서울대표부 개편을 서둘러왔다 한민전 서울대표부 주도로 남한 내부 폭동과 약탈을 주도할 수 있도록 조직화해왔다
소련 공산당이나 중국 공산당 강경파도 이런 정책을 동조해왔다
러시아 정부나 중국정부 그리고 북한 내부 세습제 좌익군정 반대세력들이 군사우선 정책 남북 군사적 전쟁보다는 남북협력과 경제우선 정책을 지지해왔다
1998년 9월 국가수반으로 추대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주도로 대외정책을 추진해왔다 김영남은 영국과 국교이후 국가수반으로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여왕과도 환담했다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북한중앙방송을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었다 2008년부터 뇌졸중으로 좌반신 마비 증세를 겪고 있었고, 2010년에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수명이 3년 정도 남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그의 사망이 임박했음을 예측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김정일 논설, 1984) 북한 김일성, 김정일사상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으로 반일 반미사상(반제국주의 운동사상)입니다 북한 현대사는 반일과 반미 투쟁 역사로 남북통일도 반미인민전쟁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미국과 전쟁을 추구해오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반미사상을 체계화하여 좌익군정을 실시해온 인물이며 각국에 반미테러단체 설립을 지원하였고 남한에도 반미청년회나 여성회 활동을 지원하거나 후원하여 남한내부 무장단체 한민전(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건설에 주력해왔습니다(남한에도 1984년경 반미청년회가 설립 NLPDR 김일성주의 사상을 보급했으며 90년 1월 김정일주의 주체사상 보급과 함께 한민전 서울대표부로 개명했습니다)
북한정부 "반미, 반일활동가를 애국자"로 우대[북한 대남정책 실행조, 예:과거 반미청년회와 반미여성회 등]
북한은 반미국가로 초등학교 운동회나 중학교 야유회등 각종 놀이에서도 미군 죽이기 놀이 게임을 실시해오고 있으며 각종 교과서에서도 반미사상 교육이 대부분이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은 국제 반미투쟁가로 묘사하여 선전해오고 있다
중국, 러시아정부에서는 북미수교는 김일성 김정일노선 반미사상과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포기를 의미하며 수평적 권력교체나 수직혁명으로 김정은 제거를 의미하고 있다
북한정부 "NLPDR노선 반미, 반일활동가를 통일운동가 또는 애국자"로 우대하고 있다. 미국정부 인사나 미국 군인 등을 살인하는 것도 애국으로 학습화 하는 나라가 북한이다(반미나라 북한=북한 상류층 이데올로기 반미노선)
남한 사람 중에 NLPDR 노선 반미, 반일활동가 의식수준 사람이라면 북한정부 지적인력 요원(북한 대남정책 실행조, 예:과거 반미청년회와 반미여성회 등)이다
좌파 민족주의 책자 탐독과 모임결성->NLPDR과 김일성 책자 학습(주사파 모임)-->북한정부 대남공작부 의식화 기능기(뇌 세뇌기)로 검증과 간첩교육-->납치,월북-->반미무장단체 결성과 북한정부 대남 간첩활동.
북한정부 대남공작부는 뇌 세뇌기(의식화 기능기)로 남한 사람 납치대상을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로 규정해오고 있다
북한정부 대남공작부가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를 뇌 세뇌기로 검증을 할때 북한 김정은 정부를 찬양하고 김일성을 신격화, 우상화 할 수준이 돼야 납치, 월북 대상자로 선발한다[남한정부 내부 김일성주의 단체-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반미단체)]
-1990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설치(반미청년회 등 반미단체 통합)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김일성주의)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새세대(김정일주의=주체사상)로 지하신문 변경
1986년에는 강철서신 등에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영환등 강철서신(반제동맹)-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새세대(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
-1991년 12월 김정일 노동당 군사부위원장이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김정일 북한 권력 장악)
1984년 5월 18일 김정일 직접 쓴 논설《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발표했다
-김정일 우상화 벽보 사진이 북한 곳곳에 등장
-1992년 11월 미국 민주당 클린턴 후보 대통령 당선과 민주당 정부 등장
-1993년 3월 김영삼정부 출범과 핵무기 보유설, 북폭등장 그리고 남한 한민전 서울대표부 1995년 해방 50주년 남북통일 결정적 시기 공식화 (반미자주정부와 전쟁론)
-1994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분열[김대중-찬성파, 반미단체-반대파]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 사망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반미 전쟁파 민혁당 와해와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선실 사망)
1998년 9월 5일 북한 제3공화국수립-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