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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피란민 아들, 방황 청소년기, 유치장 사시 합격
CIA Bear 허관(許灌) 2017. 5. 21. 16:02
문재인 대통령의 학창 시절 모습 ⓒ뉴시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연탄 배달 리어카를 함께 밀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을 깨달으며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짚어봤다
지독한 가난. 문재인 대통령의 유년 시절을 관통하는 다섯 글자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예닐곱 살 당시 문 대통령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부산의 한 성당에서 긴 줄을 서는 게 일이었다.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 가난한 형편에 자전거 살 돈도 배울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상남도 거제군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였다. 그곳은 한국전쟁 중에 자유를 찾아 남으로 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이후 가족은 북한 출신 피란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영도는 고갈산 아래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비탈진 언덕에 판잣집이 들어선 대표적인 서민 동네였다. 아버지가 호남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나서면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어머니가 끄는 연탄 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일은 장남인 문 대통령의 몫이었다.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언젠가 삐끗 놓친 리어카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당신의 안전보다 깨진 연탄이 안타까워 발을 구르던 어머니의 모습은 문 대통령에게 아직도 서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난한 유년 시절, 자립심과 독립심 키워
그러나 가난에 낙담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1965년, 남항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한 문 대통령은 경남중학교에 입학했고, 1968년 당시 명문고라 불리던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남중에 입학하면서 문 대통령은 처음으로 빈부의 격차를 겪었다.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여 살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경남중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때 태어나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다소 방황도 했다.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그가 집어든 건 책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학교 도서관 사서를 도와 도서실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일과일 정도였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차차 영역을 넓혀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에 이르렀다.
경남고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문학청년들과도 우정을 쌓아갔다.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웠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 처음 이름 때문에 붙은 ‘문제아’라는 별명이 나중에는 실제가 되고 말았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 문 대통령은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학교의 뜻대로 서울대 상대에 응시해야 했다. 결과는 낙방.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2년 당시는 유신 선포와 함께 민주주의의 억압이 노골화되던 해다. 유신에 반대하는 대학마다 탱크가 진주할 정도여서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은 강의실 대신 술집이나 하숙집에 모여 시국을 개탄했다.
1973년 유신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개헌 청원 100만 서명운동이 벌어지자 당시 정부는 긴급조치 1, 4호를 발동했고, 이후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문 대통령은 유신 반대 학내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됐지만, 구류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했고, 문 대통령은 다음 날 사법 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1975년 석방되자마자 징집 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결국 강제징집을 당했다.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문 대통령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다. 복무 당시 문 대통령은 폭파 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장을 받았고,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고급 인명구조 훈련 등을 거뜬히 치러낸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제대 후 복학, 이어진 학생운동과 사시 합격
1978년 2월, 문 대통령은 31개월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현실은 암담 그 자체였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대학 졸업장 없이는 취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은 고졸로 살아도 좋다는 심정이었지만 평생 고생하신 부모님을 볼 면목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은 문 대통령을 사법시험의 길로 이끌었다. 장남으로 집안을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뒤늦게나마 아버지께 한 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 날 문재인은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다음 해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정진하던 중 10·16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곧이어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져 시대는 격랑에 휩싸였다.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복학 논의가 시작되는 한편,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문 대통령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에 섰다.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거침없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도 고시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80년 4월 학내 시위가 한창이던 속에서 2차 시험을 치렀다.
1980년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의 핵심이었던 그는 또다시 구속됐다. 이후 5·18 광주항쟁을 앞두고 수많은 학생, 민주인사들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즉결 회부됐다. 이때 문 대통령은 5월 15일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 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느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미결수로 남아 있었다. 결국 ‘혐의 없음’이 입증됐지만 석방이 차일피일 미뤄져 20여 일 이상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 그때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2차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서점가 ‘문재인 관련 서적’ 품절 대란
지금 서점가는 문재인 대통령과 관련한 서적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문 대통령의 얼굴을 표지로 한 2017년 5월 15일 자 ‘타임 아시아판(Time Asia)’은 이미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표지 제목은 ‘문재인, 김정은을 다룰 협상가’다. 문 대통령과 관련된 주요 서적을 모아봤다.
대한민국이 묻는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21세기북스)
2017년 1월 출간된 대담집이다. 정치인 문재인을 만든 기억과 역사, 그가 만든 인권과 정치, 그가 만들 민주주의와 새로운 대한민국을 그의 생생한 육성으로 기록했다. 인터뷰어로 시인 겸 소설가이자 기자인 문형렬이 함께했다. 기억, 동행, 광장, 약속, 행복, 새로운 대한민국 등 6개 주제로 구성했다.
문재인의 운명(가교)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지낸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를 비롯해 30년 동행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이다. 문 대통령이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함께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서거 이후 30여 년 세월의 인연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했다. 만남, 인생, 동행, 운명 등 총 4장으로 구성했다. 정치적 파트너로서뿐만 아니라 친구이자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운명에서 희망으로: 문재인이 말하고, 심리학자 이나미가 분석하다(다산북스)
가장 최근인 2017년 3월 출간됐다. 문 대통령의 삶과 생각을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묻고 분석했다. ‘대한민국의 정치와 집단 심리, 그리고 문재인’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 새로운 관점에서 ‘인간 문재인’을 이해하고 판단해볼 수 있는 다양한 단초를 담았다는 설명이다. 심리학자인 이나미 서울대학교 외래 겸임교수가 다양한 주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과 말을 분석했다.
문재인 스토리: 그 남자, 문재인에 대해 알고 싶은 56가지 이야기(모악)
문재인이라는 사람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사연을 모은 책이다. 어릴 적 친구, 학교 동창, 군대 동기, 이웃에 살던 사람, 함께 일했던 동료, 사회에서 만난 지인 등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시인 안도현, 함민복, 김민정, 박성우와 소설가 백가흠, 이유, 황현진, 이재은 등이 함께 기획하고 만들었다.
퍼스트레이디 김정숙 여사 비하인드
“최루탄에 쓰러졌을 땐 물수건, 유치장 면회 땐 안개꽃 한 다발… 묵묵한 헌신과 사랑”
▶ 문재인 대통령의 ‘호남특보’로 불리며 선거기간 내내 지원 활동에 나섰던 김정숙 여사. 문대통령과 김 여사는 대통령 부부로는 최초의 캠퍼스 커플이다. 김 여사는 당시 경희대 성악과 재학 중이었다. 문 대통령과 김 여사는 7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981년, 오랜 연인이었던 김정숙 여사와 결혼했다. 김정숙 여사는 서울 숙명여중·고를 거쳐 경희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경희대 법대를 나온 문 대통령과는 캠퍼스 커플인 셈이다.
1974년 당시 음대 1학년이었던 김 여사는 친구 오빠의 소개로 대학 축제에서 72학번의 문 후보를 만났다. 김 여사는 지난 3월 한 여성지 인터뷰에서 “대학교 1학년 때 친구 오빠가 ‘과대표 친구가 하나 있다. 학교 축제나 행사에 안 나오는 사람인데 여자친구 소개시켜주면 나오겠다더라’면서 만나보라고 소개를 해줬다. 알랭 들롱 닮았다고 해서 나갔는데, 아니어서 눈을 내리깔고 그랬다”고 말했다.
캠퍼스 커플로 7년 열애 끝 결혼
지인의 소개로 만난 평범한 인연이었지만, 연애 과정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소개를 받은 이듬해 둘 사이를 탄탄하게 한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다. 유신 반대시위의 선두에 섰다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문 대통령을 발견한 김 여사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며 돌봐줬다. 이후 문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이나 구치소에 수감될 때마다 김정숙 여사는 수시로 면회를 갔다. 문 대통령은 김 여사가 첫 면회 때 안개꽃 한 다발을 가져온 일화를 두고두고 주변에 소개한다.
문 대통령이 군에 입대할 때도 김 여사는 훈련소까지 찾아왔고 제대하는 날에는 부대 앞에서 기다려줬다. 제대 후 사시 준비를 위해 대흥사에 들어간 동안에도 김 여사는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
그렇게 둘은 7년간의 연애 끝에 혼인서약을 했다.
김정숙 여사의 대통령 내조는 대선 기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 2016년 추석부터 매주 거르지 않고 홀로 연고도 없는 광주, 호남을 찾아 지역민들과 끈끈한 스킨십을 이어갔다. 올해 들어서는 호남의 섬까지 일일이 다 찾아다녔다. 때문에 ‘호남특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현장형 내조’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하루에 무려 10곳에 달하는 공식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으로 남편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의 활약이 호남에 퍼져 있던 반문(문재인) 정서를 해소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호남특보’ 활약하며 남편 내조
김 여사는 호남특보로 활약할 당시, 인터뷰를 통해 “지난 대선에서 호남의 90%가 넘는 분들이 문 후보를 지지했다”면서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 컸고, 우리가 부족한 것, 잘못한 것을 직접 듣고 위로해주고 싶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대학 새내기부터 정치인이 될 때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문 대통령을 지켜봐 온 김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의) 깊고 그윽한 눈빛, 그리고 나에 대한 신뢰, 세상을 대하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면서 “변한 건 오직 흰 머리카락, 임플란트를 한 치아, 살짝 나온 뱃살”이라면서 웃었다.
둘 사이에는 아들 준용(35) 씨와 딸 다혜(34) 씨가 있다. 건국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준용 씨는 현재 미디어아티스트로서 전시회도 열고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딸 다혜 씨는 주부다.
박지현 | 위클리 공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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