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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작전 미군 메러디스 빅토리호[한국전쟁 월남자 가족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문재인] 본문
흥남 철수 작전 미군 메러디스 빅토리호[한국전쟁 월남자 가족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문재인]
CIA Bear 허관(許灌) 2017. 4. 29. 14:24
흥남 철수 작전 미군 메러디스 빅토리호(사진)
문재인 더불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부친 문용형선생이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겨우 피난해 내려왔다[한국전쟁 월남자는 대부분 국군(유엔군)에 가담한 자위대(치안대) 출신들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1945년~1993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무어-맥코맥사(Moore-McCormack Lines)의 화물선이다. 길이 455피트(약 138.7m). 7천600t. 배의 정원은 60명.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작은 대학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짐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으로 만들어졌다.
1.흥남 철수 작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같은 날 알몬드는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2.해체와 포상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있었다.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미국에선 이 배의 철수 작전의 전말을 담은 <Ship of Miracles>(저자 Bill Gilbert, 출판사 Triumph Books)라는 책이 출판됐다. 이 책은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됐다. 라루 선장은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2001년 라루 선장의 장례 미사에 우연히 참석했던 재미동포 기업가 안재철씨는 라루 선장의 삶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이후 흥남철수 관련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펴냈다. 안씨는 철수 작전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씨와 함께 기네스 기록 등재를 신청했고,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3.레너드 P. 라루 선장
라루 선장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작전 참가 업무가 끝났고,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8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당시 항해를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경험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너스 수사가 몸담았던 성 바오로 수도원은 마리너스 수사가 숨지기 이틀전 한국의 왜관수도원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후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바오로 수도원에 파견돼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4.일등항해사 로버트 러니
일등항해사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는 1927년 12월 15일 뉴욕 브롱스에서 출생하여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1950년 6월 뉴욕 알프레드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 진학을 목적으로 학비를 모으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로 취업하여 레너드 라루 선장을 도와 22살의 나이로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연하게 수도자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의 장례미사에서 만난 미국계 한인사업가 안재철씨를 만나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민간 배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신청하여 등제하였다. 이후 1954년 뉴욕 코넬대 로스쿨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계속해서 예비역으로 해군에 복무하여 해군제독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 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참석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미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 미군 실종자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러니는 2004년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말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1.전개
앞서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38선을 넘기 시작하자 북한이 미리 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부가 중공군 국가 안으로 들어가 중공군 도움을 요청하고 중공군 역시 한국전쟁에 개입을 할 때부터 시작했는데 중공군이 드디어 11월 27일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일으켜 국제 연합 사령부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이어 12월 15일 미국 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장진에 머물렀던 미국 1 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평양은 이미 12월 4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12월 6일에 북한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1)장진호 전투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미국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2)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철수 작전
김백일 1군단장과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2.결과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제1군단과 미국 제10군단의 장병 100,000명과 차량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과 350,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3.참고
(1)관련 서적
《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마틴 러스(Martin Russ) 저, 임상균 역, 나남출판, ISBN 978-89-300-8026-2 =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 묘사.
《Ship of Miracles》, 빌 길버트(Bill Gilbert) 저, 트라이엄프 북스(Triumph Books) =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활약을 다룸.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
《생명의 항해》, 안재철 저, 1천117쪽 =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을 다룸.
《온양이》, 선안나 저, 44쪽 = 흥남철수 작전 마지막 피란선 이야기
(2)관련 방송
《스펀지 2.0》스페셜 크리스마스 기적 (2009년 12월 25일)
《정전60년 특집 다큐 기적의 김치 파이브》 (2013년 6월 25일)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이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비밀리에 압록강을 넘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면서 많은 한국, 미국, 영국등 16개국 유엔군이 희생 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에 가담한 많은 북한 주민들이 월남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이 한강 이남을 진격하다가 유엔군 반격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1958년 10월 26일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국군(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완전 철군했다
-미국과 중국 국교 40년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분야에서 군사분야까지 협력하고 있으며 양국 자유 무역협정을 준비해 나아가고 있다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한국도 선진국 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으로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며,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3대 원칙으로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정부이고 오늘날 독재주의(전체주의)는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나 국영기업등) 세력이다[국가사회주의는 군정통합주의 군사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민주공화국보다는 군정분리주의(당군이론) 군사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최고지도자 제도를 두고 있는 국가이다]
"머리소리함 문재인 선배는 1953년 경남 거제에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머리소리함은 대한민국 지위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知積能力團입니다]
경남 중고등학교와 경희대 법대를 졸업하고 특전사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사법시험 합격 후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민운동에 매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산에서 함께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첫 인연을 맺은 뒤, 줄곧 민주주의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동지로 함께 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전 변호인을 맡았고 서거 이후 장례 등 관련한 모든 절차를 도맡았다 그 뒤로도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아름다운 봉하재단 감사등을 맡았고 관련 기념사업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 힘썼다
정권교체를 위해 범야권 통합운동을 이끌며 정치 일선에 뛰어들고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밤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했다 민생과 서민의 행복을 위한 정책을 설계하며 , 투명하고 공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한길을 걸어온 문재인의 정치관은 '사람이 먼저이다'라는 구호로 요약된 바 있다. 그 이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더불어 민주당 당대표로서 야권을 이끌었다
함께 걸어야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새롭게 기회가 열린 시대의 문 앞에 그는 서 있다" [대한민국 묻는다 문재인:民主는 民有,民治,民享政府입니다]
"자유화 개방화정책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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